목요일
(SM소설, 수위소설) 그의여자 [이바우] 1
Posted by thode on 오후 6:49 in BDSM sm 소설 sm story | Comments : 0
정단은 윤비서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와 옷도 벗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아직 여름이었지만 물에
젖은 옷은 계속 정단에게 한기를 느끼게 했고 윤비서가 아무리 히터를 틀어도 정단의 떨림
은 멈추지 않았었다.
그래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서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단은 쏟아기는 물줄기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고 물줄기가
옷을 젖시며 정단이 입고
있는 원피스도 무거워졌다. 그래서 정단은 욕실벽을 등지고 앉아 멍하지 물줄기만 맞았다.
따뜻했던 물줄기가 이제는
따가움을 전해주고 있었다. 정단을 탓하듯이..
정단은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라고..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이었다. 사빈을 속이고 결혼하여 벌을 받는 것이었다. 그냥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이 정단의 몫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단은 몰랐다. 할머니
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언제나 그랬다. 정단이 잘해보려고 노력한 일은 그렇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의 병을
알았을 때 사빈과
결혼하는 것이 할머니를 위한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정단이 류회장
의 집으로 들어간 6개월
후 세상을 버리셨다. 할머니의 병을 고쳐보겠다는 욕심에 정단은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다.
할머니의 행복은 얼마간 생명을 연장하는 것보다도 짧지만 남은 생을 예쁜 손녀와 함께 보
내는 것이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할머닌 그 차갑고 쓸쓸한 곳에서 혼자 돌아가셨을 것이다. 따뜻이 보살펴주는 사람
없이.. 누구 한명 눈물
흘려주는 사람 없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말라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정단의 눈에서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단은 그
것이 자신의 눈물인지 머리위로 떨어지는 물줄기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도 되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이제 정단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모두
사라졌다. 할머니가 떠난 지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해도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
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단
한명 사라져도 가슴 아파할 사람은 이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핏줄에 흐르고 있는 그 사람의 존재가 정단이 이 세상에 살아있어
도 되는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류석진회장..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아이를 지우도록 강요했던 남자.. 그리
고 그 여자를 버린
남자... 그리고 자신의 딸을 도구로 사용한 남자.. 그리고 또다시 자신의 딸마저 철저하게 버
린 남자.. 그
사람과 같은 피를 가지고 있는 자신이 살 자격이 있는지 정단은 생각했다.... 그런 나쁜 피를
가진 사람의 딸이
이 세상에 살아있어도 되는 것인가?
이젠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는 남자... 정단은 마음 속 깊이 그 사람을 증오했다. 그러나 그
런 류회장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정단은 죽은 엄마와 할머니에게 심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 엄마... 할..머니.. 미안.. 미안해요... ”
마치 엄마와 할머니를 죽인 것이 자신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단은 오래 그러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곧 사빈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윤비
서의 말대로 이제
정단에게는 사빈만이 남아 있었다. 사빈마저 없다면 이제 정말 정단은 이 세상에 혼자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언제나 힘들고 고단한 생활을 해왔던 정단이었지만 한번도 혼자여보았던 적은 없었기에 정
단에게 무엇보다 홀로 된다는
것은 제일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정단은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일어났다. 땅을 구르느라 더러워진
옷을 벗고 거품을 내어
제대로 꼼꼼히 씻었다. 사빈에게 절대 운 흔적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모
습을 보인다면 그래서
그가 할머니의 일까지 알게 된다면 정단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정
단은 여지껏 숨겨 왔던
일을 더 꼭꼭 숨겨야만 했다. 다시 또 혼자가 될 수는 없기에..
하지만 샤워를 하고 난 후 잠시 쉬고 사빈의 저녁식사준비를 하리라 생각했던 정단은 할머
니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픔에 지쳐 그날 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사빈이 돌아올 때까지도..
사빈이 정단을 뒤로 한 채 돌아섰던 집에 다시 돌아온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물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사빈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탓하며 술을 마셨다. 오늘도 취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울고 있을 정단을 보지 않아도 될만큼 시간을 보냈다는 것에 사빈은 만족하며 집으로 들어
왔다. 그런데 오늘은
평상시와 달랐다.
*******
혼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긴 했지만 이렇게 싸늘한 집은 정단과 결혼한 이후 처음이었
다. 사빈이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는 날 조차도 언제나 거실엔 정단이 준비했을 반찬냄새가 남아 있었고 정단
은 사빈이 들어올 때까지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리 늦어도 사빈이 들어오기전에 먼저 잠든 적이 없는
정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집안엔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달랐다. 다른 때의 집과는..하지만 사빈에게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은 불안한 것이다. 사빈은
어둠속에서도 재빨리
움직여 침실문을 열었다. 이윽고 찾아오는 안도감.. 침실 깊숙한 곳에서 숨쉬고 있는 작은
생명체가 사빈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사빈은 침대옆에 있는 작은 스텐드를 켜 은은한 빛이 정단의 얼굴을 비추게 하였다. 비스듬
히 기울어진 정단의
투명한 얼굴위로 긴 속눈썹의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데 왠지 부은 것 같은 입술과
눈매가 사빈의 맘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후로 또 얼마나 운 것일까.. 사빈은 살며시 정단의 이마로부터 뺨으로
그리고 턱으로 이어지는
정단의 얼굴을 쓰다듬고 정단의 옆에 누웠다. 하지만 자면서도 절대 정단의 얼굴은 보지 않
겠다는 듯 정단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러나 사빈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깨어있던 정단은 자신을 외면하는 남편의 뒷모
습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떴다. 너무나 큰 벽과 같은 사빈의 등이 보였다. 쌀쌀맞고 무심해보이는 그 뒷모습을 보는
정단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각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움직임 없이 정단은
흘려내었다. 훌쩍이는
소리에 혹여 사빈이 깰까봐..
‘ 날.. 버리지 말아요.. ’
하지만 사빈은 등 뒤에서 자신의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지 모른채 얕은
술기운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정단은 다른 날과 다름 없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느새 에이프린을 두른 정단은 사빈이 좋아하는 생선을 노릇하게 구워 푸른색 문양이 들어
간 이국적인 접시에 담아
내었고 얼마 전 담궈 이제는 맛이 제대로 나는 오이소박이를 꺼내 예쁘게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갯살로
국물을 낸 시금치 된장국을 준비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빈으로서는 매우 좋아할 식
단이었다.
그리고 밥을 푸면서 정단은 오늘은 사빈의 기분이 나아졌기를 빌었다. 요 얼마간 귀가시간
도 늦었고 아침에 얼굴을
대할 때도 기분이 좋아보이질 않았다. 물론 엊그제는 사빈의 힘에 의한 강압적인 잠자리라
는 문제가 있었지만 오늘
아침엔 사빈이 그 일을 잊고 예전처럼 상냥하게 자신을 대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것은 정단의 바램일뿐이었는지 사빈은 묵묵히 밥만 먹을 뿐 정단과는 눈도 마주치
려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화가 난 것이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엊그제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는지 원인 모를 그의 기분변화에 정단의 두려움은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단은 사빈이 다른 날과 다르지 않다는 듯 동요되지 않은 표정으로 사빈을 대했다.
그리고 입가에 걸친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빈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었다. 마음속에서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끝나지 않고 있었지만얼굴은 웃음짓게 만들기 위해 정단은 가
슴속으로 울었다. 자신의
우는 표정에 사빈이 질리기라도 할까봐 정단은 기운 없는 표정도 짓지 못했다.
“ 나 오늘도 늦으니까.. 먼저 자고 있어.. 어제처럼...”
‘ 그는.. 오늘도.. 늦는다.. ’
서운한 감정이 먼저 가슴속을 점령했지만 정단은 힘주어 입을 늘이며 미소띤 얼굴로 끄덕였
다.
‘ 웃어.. 류정단.. 그가 보고 있잖아.. ’
하지만 사빈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미소짓고 있는 정단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사빈의 이마가 골을
만들며 파였고 그에 정단이 긴장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눈매까지 찡그리며 말했다.
“ 나올 필요 없어.. ”
명백한 거부였다. 정단의 심정은 떨어졌지만 사빈이 열고 나간 문이 닫힐때까지 정단은 입
가에 미소짓고 서있었다.
그가 나오지 말라고 했으니 집밖에서 배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 뭡니까.. 빵도 안 사주시는 겁니까? ”
“ 신유원.. 웬만하면 나 있을 때는 말 좀 놓자... 어색해 죽겠다.. 신팀장님의 높임말에 정채
영이 어색해
죽을 거 같다고.. 정말 웬만하면 참아줘... 성사빈, 너는 매일 저런 애랑 어떻게 지내? 너 혹
시 나 있을
때만 일부러 그러는거 아니야? ”
“ 됐습니다. 제가 오늘은 살테니까 내일부터는 알아서 생각해주십시오.. ”
오늘도 사빈은 채영과 함께 늦은 시간 사무실에서 야근을 해야만 했다. 공사를 맡은 리조트
가 겨울을 앞두고
개장전에 공사가 끝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매일 사빈은 채영과 유원을 데리고
밤을 새워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배가 고프면 성질이 난다는 유원이 오늘도 야근시 필수항목인 야참을
챙겨주지 않는 사빈에게
불만을 터뜨리며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간식거리를 산다며 근처 편의점을 찾아 나가버렸
다.
그래서 조용한 사무실 안에는 또 채영과 사빈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유원과 채영사
이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끄러웠던 사무실에 적막감이 돌았다. 하지만 어색한 침묵속에 채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 집에 있는 사람이 무슨 일 있어? ”
“ 응? ”
언제나 날카롭게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채영이 벌써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 어머님 때문에 힘든거니? ”
“ 아니야.. ”
사빈도 정단이 혼자 운 것이 어쩌면 어머니와 관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정단
에 대한 얘기를 채영과
하고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채영은 사빈이
정단보다도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은 3년전 과거 얘기를 끄집어 내었다.
“ 그래? 흐응.. 그렇겠지.. 너랑 결혼할 정도면 좋은 집안 아가씨였을테니 어머님이 힘들게
할 이유도
없겠지.. ”
채영은 평범한 가정이 문제가 되었던 사빈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
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정단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있었다.
“ 채영아.. ”
사빈은 채영이 하고자 하는 말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채영의 이름을 불렀지
만 채영은 유원이
올때까지는 일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사빈이 휴식을 취할때면 내려다
보는 통큰 유리창 앞에
섰다.
“ 그리고.. 네가 그렇게 달려가서 위로해 줄텐데.. 힘든 일이 있겠어? ”
질투..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어린 감정이 채영의 말투에 뭍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채
영은 지나간 즐거운
추억을 회상하듯 물기어린 눈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 우리.. 그땐 참 많이 힘들었었는데..”
“ 그래..그랬지.. ”
사빈도 채영도 그때를 생각하고 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채영은 사빈의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모욕과 멸시를
사빈은 힘들어하는 채영을 보며 가슴 아파했던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채영이었다.
“ 그런데 내가 지금 네 집에서 너랑 같이 살고 있는 사람처럼 좋은 집에서 태어났으면 너
희 어머니 날..
받아들여 주셨을까? ”
“ ... ”
“ 지금에서 말이지만.. 그때는 너무 힘들었어..”
좀 전까지는 담담했던 채영의 목소리에 물기가 뭍어나고 있었다. 사빈도 그런 채영의 변화
를 느낀 것인지 창가에 서
있는 채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창밖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있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
로 밖만 바라보고 있는
채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 너희 어머니가 또 우리집에 찾아오는게 아닌가 매일매일 마음 졸였고 잠들 때마다 내일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무서워서 잠도 못자고 그랬는데.. ”
그때 채영이 무슨일을 당하고 어떻게 힘들다는 것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채영이 사빈에게
직접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채영이 힘들것이라는 것도 상상만 해왔는데 채영의 입에서 아직도 아픔이
느껴지는 고백을 들으니
채영에
“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너희집에서 전화오는 걸까봐 무서웠고.. 모르는 사람이 날 아는척
해도.. ‘ 아.. 또
사빈이 어머니가 날 보자고 부르는구나... 이번엔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는 두려움에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 꽁꽁 숨어 있고만 싶었는데.. ”
“ 그렇게 많이 힘들었니? ”
“ 그때는 힘든건줄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많이 힘들었더라.. ”
“ 말하지 그랬어.. 나한테.. 힘들다고 말하지 그랬어.. ”
“ 너도.. 힘들었잖아.. 같이 힘든데 나만 힘들다고 떼쓸 수 없잖아.. ”
“ .... ”
채영은 혼자서만 감당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괴로움도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도 사빈에게 부
담주기 싫어 그때는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난 아직도 그래서 핸드폰
같은 거 못 들고
다녀.. 전화벨소리가 아직도 무섭거든.. 아니다.. 벨소리는 다 무서워.. 초인종 소리도 그렇고..
다... ”
“ 채영아.. 너..”
사빈은 채영이 그정도로 어머니에게 시달리고 힘들어하는지 몰랐었다. 아니 채영인 강한사
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
극복했으리라고 믿었다. 사빈은 채영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며 그때는 왜 저 여린 어깨를 많
이 보듬어 주지 못했나
생각했다. 자신이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해주었다면 그랬다면 오늘 이런 사이로 만나는 일
은 없었을 것이라
후회하면서 사빈은 그때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듯 채영을 뒤에서 안아
주었다. 겨우 사빈의 턱에
정수리가 닿는 채영은 사빈이 뒤에서 안아오자 몸의 힘을 풀고 그에게 기댔다. 그리고 자신
의 목덜미 아래를 지나
어깨를 두르고 있는 사빈의 팔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다시 예의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로 말했다.
“ 하지만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성사빈을 사랑할 수 있어.. ”
“ !!!! ”
“ 너희 어머니.. 하루에 수십번 찾아 오신다 그래도 이젠 웃으면서 맞아 드릴 수 있어.. 그
리고 내가 먼저
전화해서 안부 인사도 드릴 수 있어.. 너만 날 사랑해주면 난 다 견딜 수 있어..널.. 사랑하니
까.. 아픈
것도 참을 수 있어.. ”
사빈은 자신도 모르게 채영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히 조여들고
있었다. 채영은 다시한번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사빈을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설레임이나 달콤함이 아닌 부담으로 가슴에 쌓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빈은 모르고 있었다.
“ 사빈아.. 나 너더러 집에 있는 그 여자 대신 나 사랑해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그 여자
생각하는 만큼 날
생각해줬으면 하는거야.. 그냥 네 옆에 내가 있을 자리만 만들어 주면 돼.. 그러면 나 만족할
수 있어..
그때처럼 나만 봐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에 목매는 그런 모습 보여달라는 것도 아니야.
나.. 그정도 자격은
있지 않니? ”
그러나 사빈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격이라면 그 누구보다 충분히 있지만 그런 것
만으로 채영을 자신의
옆에 둘 수는 없었다.
“ 나는 말야, 채영아.. ”
하지만 사빈의 의사가 채영에게 전달되기 전에 뭔가를 잔뜩 가들고 들어온 유원으로 인해
채영과 사빈의 대화는
끊겼다.
“ 야야야!!! 삼각김밥이랑 샌드위치 사왔는데 너희는 뭘로.. ”
그리고 창가에서 안고 안기어 있던 사빈과 채영 두사람을 유원이 보고야 말았다.
“ ... 뭐하시는 겁니까? ”
발랄하게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언급하던 유원의 아이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굳은 표정의
유원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빈과 채영은 서로에게서 떨어졌지만 유원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듯
사온 간식을 책상위에
올려놓으며 예의를 갖춘 말투로 사빈과 채영을 대했다.
“ 두분이 저한테 이런 모습 보이실거면.. 내일부터는 같이 야근하지 않겠습니다. 두분이 단
둘이 시간을
보내시지요. 별로 보기 좋지 않습니다. ”
사빈도 채영도 유원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두사람의
관계는 불륜으로 보일
것이다. 아니 불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사람의 친구인 유원이 보기에도 불쾌할 관계
였다.
“ 됐어.. 일이나 하자..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할게.. ”
사빈이 피곤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으며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했지만 한번 식어버린 사무
실의 분위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사빈은 일에서 오는 압박감보다도 채영과 유원 사이에서 오는 스트
레스를 견딜 수 없어 일찍
일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일찍 들어갈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전히
꽁한 표정을 지워버리지
못한 유원을 데리고 둘이 자주 가는 바로 향했다.
“ 오늘은 실장님과 술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
********
언제나 장난끼 있는 말투에 생각없이 사는 것 같아도 똑부러지는 성격의 유원은 자신의 기
준에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채영과 사빈의 사이를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는 것
이었다.
“ 신유원. 네가 생각하는거 99%가 오해라는 거 내가 확신했다. 그러니까 독 풀지 말아라.
”
하지만 눈에 띄게 파리하게 굳은 얼굴로 피곤해 보이는 사빈을 보면서 유원도 조용히 사빈
의 술을 받았다.
“ 그래도 난 네가 채영이와 같이 일하기로 결정한 거 이해할 수 없다. 채영이가 능력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꼭
채영이가 아니어도 됐잖아. 왜 마음을 바꾼거지? ”
유원은 처음 사빈이 채영과 일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마음이 놓였었다. 사실 디자인
심사장에서 채영을
만나게 되어 놀란 것도 사실이었지만 유원은 사빈이 다시 채영을 만날 일을 만드리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그녀의 디자인을 맨처음 탈락시켰을 때 안심했었는데 다음날 갑자기 생각을 바꾼 사
빈이 이해되질 않았었다.
“ 그건.. 내가 채영에게 빚이 있기 때문이었다. ”
“ 빚이라니? 오히려.. 채영이가 널 배신하거였잖아. ”
유원은 이제야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사람처럼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터뜨리기 시작했
다.
“ 너 채영이 떠나고 어땠는지 잊은거야? 내가 널 봤어.. 네가 어떻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했
는지 내가 봤다.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다시 돌아올 수 있지? 그리고 다시 채영일 받아들인 너도 이상해.. 정
단씨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거니? ”
유원은 독하게 몸으로 퍼지는 액체를 목으로 넘기며 정단생각에 씁쓸한 자신의 감정을 정리
했다. 하지만 사빈은
유원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며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 말했다.
“ 그게.. 우리 어머니가 말이다.. 유원아..우리 어머니께서.. 채영이한테 손을 썼던 모양이야..
나하고
떼어놓으려고.. ”
사빈의 뜻밖에 말에 유원은 놀란 듯 이어질 친구의 말에 집중했다.
“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성공하신거였고.. ”
사빈은 자조적인 웃음을 띄우며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사빈의 말에
유원이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그는 사빈이 결혼한 상태라는 것이 제일 마음
에 걸리는 듯했다.
“ 하지만 이유야 어쨌건 너와 채영인 이미 그때 끝난거였잖아.. 이젠 정단씨도 있고...”
“ 나도 알아.. 내가 지금 누구랑 살고 있는지.. ”
“ 그런데 그렇게 흔들려도 되는거냐? 아까 둘이 뭐하고 있던거야? ”
유원은 아까 사무실에서 채영과 사빈이 연출한 연인과 같은 분위기를 떠올리며 다시 기분이
상하는 것 같았다.
“ 하지만 내가 먼저 채영일 밀어낼 수는 없어.. 그때 너무 채영일 힘들게 해서.. ”
“ 도대체 어머님께서 뭘 어떻게 하셨는데 그러는거야? ”
사빈은 또다시 그 일을 생각해내는 것이 괴롭다는 듯
“ 아마 사람을 사서 망칠려고 했겠지.. ”
“ 망... 쳐? ”
유원은 설마하는 생각을 하며 자신이 지나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빈
의 말은 유원을 놀라게
만들었다.
“ 응.. 사람들을 시켜서 폭행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잘못되서 채은이가 당하게
되었었나봐.. ”
“ 채은이라면.. 채영이 동생? 그 쬐그만 아이? ”
사빈은 다시 떠올리기 괴롭다는 듯 술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 일 때문에 떠났던 거야.. 채영이.. 거의 프랑스가서 감시받으며 생활했던 것 같
아. 한국으로
귀국하려다 3번을 붙잡혔데.. 그러다 지금 간신히 다시 돌아온거고.. ”
유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사람이 무섭고 사악할 수 있
다니... 사빈의
어머니지만 유원은 진여사가 참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진여사가 어느 정
도까지 일을 벌일 수
있는지는 그녀의 아들인 사빈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므로 그것을 유원이 받아들이
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시 채영일 내치니.. ”
유원은 더 이상 사빈에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사빈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채영이
떠났을 때 사빈이 어떻게 변했는지 다 보아왔던 사람이 유원이었기 때문이다. 사빈이 채영
을 얼마나 미워하고
기다렸는지 지켜봐았던 유원으로서는 지금 그가 죄책감이 시달리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
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 힘든 일을 겪은 듯한 채영도 불쌍
했다. 만약 사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떠났던 그녀도 사빈에 대한 남은 사랑에 힘들었을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 사빈은 그런
죄책감따위에 흔들려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것도 유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빈의 혼란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용납할 수는 없었다.
“ 그래서 이번일 채영이한테 맡긴거니? 죄책감 때문에? ”
유원은 평소엔 독해서 조금만 마시던 그 액체를 단숨에 들이키며 심각한 얼굴로 사빈에게
물었다.
“ 그래서.. 어떡할건데... ”
하지만 유원의 진지한 물음에 사빈은 쉽게 답할 수 없다는 듯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 어쨌든 결국엔 둘 중 한명을 버리는 거는 변하지 않는 사실 아닌가? 그게 제수씨든 채영
이든 둘 중에
한명일텐데.. 지금 이런다고 뭐가 해결되나? 너 평생 채영이 옆에 끼고 살거야? 매일 정단씨
있는 집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정단씨 모르게 두집 살림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니면... 정단씨와 이혼할
생각이라도 있는거야?
”
“ 아니.. ”
“ 어차피 다시 상처줘야 할 거라면 쓸데없는 감정 주지 말고 빨리 정리해.. 정단씨든 채영
이든.. 너 그러는 거
맘에 안든다.. 너답지도 않고.. ”
유원은 언제나 빈틈없고 냉정했던 자신의 친구가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상황에 마음에 들
지 않았다.
“ 알아.. 나도 내가 마음에 안든다.. ”
찹착한 기분에 채영과 정단을 떠올리던 사빈은 유독 어제 욕실에서 들려오던 정단의 흐느낌
이 생각나며 기분이
상해버렸다.
“ 맘에 안들어.. 나도, 채영이도.. ”
그런걸 알면서도 사빈은 유원과 시간을 보내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늦췄다. 정단이 잠들
어 있는 사이 들어가기
위해.. 정단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사빈이 차에서 내렸을 때 집에는 불빛이 훤했다. 1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아마
도 정단은 거실에 앉아
사빈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정단을 생각하니 사빈은 또 집으로 들어가기
가 싫어졌다. 한동안
정단에게도 채영에게도 영향받지 않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는 채영을 피할 수 없듯이
지금은 정단을 피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 늦으셨어요. ”
역시나 정단은 사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 늦었는데 왜 안자고 있어..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
사빈은 진심으로 피곤하다는 듯이 정단에게 말했다.
“ 나 피곤하니까.. 먼저 자. 씻고 들어갈테니까.. ”
정단은 한나절동안 푸석해진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뭇소리도 못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정단이 살포시
대하려 해도 그에겐 그런 정단이 다가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 네.. 빨리 쉬세요. ”
정단은 힘없이 침실로 들어가 사빈의 옷을 걸고는 침대로 올랐다. 그저 무서워서 사빈이 오
기전에 잠들고 싶었다.
사빈의 냉기에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심장을 치고 올라와 더 이상 그가 자
신에게 무뚝뚝하게 대하기
전에 잠들어버려야 했다고 정단은 이불을 덮고 기도했다. 그리고 다행인지 사빈은 꽤 오랫
동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 정단은 자신의 바램대로 잠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사빈은 잠들었으나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를 어쩌면
좋니.. 정단아..
사빈은 채영이 나타난 이후로 계속 마음 속에 품어온 생각을 떠올리며 정단에게 미안해 했
다. 하지만 지금은 정단이
미웠다. 정단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단만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일이 이리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하면 사빈은 정단이 미
워졌다. 사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단과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영빈과의 일이 커져 문제가 심각
했을 때도 해본 적 없던
후회였다.
그런데 지금은 정단과 만나게 된 것을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사라져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정단이 사라져 정단을 포기하게 만들
었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무슨 이중적인 감정이란 말인가.. 규칙적인 생활속에서 한가지만 틀어져도 정단
이 걱정되어 달려와보는
내가, 정단이 외출했다는 소리에 혹시 집을 나간 건 아닌가 달려오는 주제에 어떻게 그녀가
스스로 사라져주길
바란다는 말인가..
사빈은 자신의 옹졸하고 이기적인 생각에 진저리를 치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런 생각
들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정단을 마주보고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도 정단은 싸늘한 사빈의 뒷모습
을 보며 잠에서 깨어야
했다.
정단에겐 우울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사빈 앞에서만큼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 열이 타올라
어지렀기는 했지만 정단은 사빈이 출근할 때까지 입술을 부드럽게 당기며 지긋한 눈빛으로
자신의 남편을
바라봐주었다. 그러나 어제 아침과 마찬가지로 사빈은 예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차갑게
또 한마디만을 던진 채 정단을 등졌다.
“ 그렇게 웃지마.. ”
아마 이제 사빈이 다시 웃으라 할때까지 정단이 미소짓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웃지말라
하였으므로.. 이제
그는 자신이 미소짓는 것조차 화가 나는 모양이라고 정단은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
을 깨질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다 갑자기 헌그릇 취급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고 섭섭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전까지의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처음부터 사랑으로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 않았던가..
어쩌면 지금 그의 행동이
자신의 결혼생활엔 어울린다고 정단은 생각했다.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결혼전과 다르게 상냥하고 자상한 남편이 이상하다고 정단
도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한번도 누려본 적 없었던 행복의 단꿈에 빠져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마음을
다지고 그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있는 그대로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정단은
각오했다.
하지만 사빈 앞에서 너무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머리가 너무 울렸다.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다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엊그제 물에 젖었던 것이 화근이었나보다. 어제부터 목소리가 잠기더니
오늘은 몸이 몹시 아플
것 같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사빈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참을만한 아픔이어
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정단은 했다. 그리고 일찍 침대로 들어가 쉬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단은 거실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단이 고열로 인한 두통을 잊어가며 잠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무거운 전화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아픈 정단에게는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인냥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그것은
짜증날만큼 끊기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정단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버릴 때까지..
“ 여보세요.. ”
결국 정단은 아픈 몸에 선잠에서 깨어나 더 깨질 듯 조여오는 머리를 들고 고집스럽게 계속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그 전화는 받지 말았어야 할 전화였다.
[ 류정단씨 되시나요? ]
“ 네.. 그런데.. 무슨 일로.. ”
정단은 사빈과 결혼한 이후 자신을 직접 찾는 전화는 거의 드물었으므로 이 낯선 목소리의
여자가 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순간 머릿속에는 한 여자가 떠올랐다. 이 목소
리의 주인공일 것 같은
여자였다. 화사하게 웃는 여자.. 사빈의 옆에 있었던 여자..
[ 안녕하세요? 저는 정채영이라고 해요. 사빈이 친구죠. 한번 만나서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되세요? ]
사진 속의 그녀가 분명할 여자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러나 정단의 마음속에서는
그녀를 만나서는 안된다는
경고가 계속 울렸다. 그녀를 만나서는 안된다. 안된다... 하지만 정단이 선택할 수 있는 대답
이 아니었다.
채영의 당당한 말투에서 정단은 물러설 수 없는 도전을 느꼈던 것이다.
“ 네... ”
채영이 정단과 만나기 위해 정한 약속장소는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사빈의 사
무실이 위치한 빌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피 전문점이었다.
정단은 남편의 여자중 한명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옷차림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그것을 의식했다는 느낌을 상대방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냥 수수한 옷차림을 선택했
다. 그러나 하얀 스판
남방에 아이보리색 A라인 스커트는 정단의 청순함을 강조하며 정단의 매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정단은 채영이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를 알아 보았다. 사진속의 그녀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의
여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그녀는 그때의 사진속 얼굴과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시간
이 많이 흘렀을 텐데도
나이의 흔적은 커녕 오히려 정단과 별로 차이가 없어보이는 동안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은근히 어필되는 지적인
이미지와 당당함이 정단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 류정단씨.. 맞죠? ”
그런데 채영도 정단을 알아보는 것인지 정단이 그녀를 부르기 전에 채영이 먼저 정단에게로
와서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정채영이에요.. 사빈의 친구였죠.. ”
“ 네.. 안녕하세요.. ”
채영도 매우 큰 키는 아니었지만 정단이 워낙 작은지라 채영과 정단이 마주보고 앉자 정단
은 마치 대학생 같아
보였다. 그러나 채영은 사빈의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보였다. 그리고 사진보다 훨씬
예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 제가 만나자고 전화드려서 당황하셨겠어요. ”
“ 네? 아.. 아니. 괜찮아요.. ”
정단은 당당한 채영과 달리 안 어울리는 자리에 끼어 앉은 이방인처럼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하였다. 그런 정단을
바라보며 채영은 의외로 사빈의 아내가 귀여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단이 만만한
어린아이라고 파악되었다.
이쯤되면 이여자 자신이 왜 만나자고 청했는지 알법도 한데 정단은 순진한 눈동자만 굴려댈
뿐 채영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채영의 짐작대로
순하고 어리게만 보이는
정단은 채영을 놀라게 만들정도로 순진했다.
“ 참.. 아름다우세요.. ”
그런 말을 사빈의 아내로부터 들을 것이라 채영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아름다
움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작은 여자는 채영이 자신의 연적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상치 못한 말을
하고 있었다.
“ 네? 네.. 그렇게 봐주셨다니 감사해요.. 저는 정단씨보다 나이도 10살이나 많은걸요.. 아름
답기로 치면
정단씨를 따를 수가 없겠지요.. ”
그런 채영의 말에 살며시 정단의 얼굴로 떠오르는 미소는 채영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단
아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득 품은 그녀를 자신의 경쟁자로 너무 약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채영의
말처럼 정단은 그녀보다
10살이나 어린 꼬마에 불과했다.
“ 오늘 제가 정단씨를 만나자고 한건..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어서예요.. ”
정단은 한점 의심도 경계도 없는 눈으로 채영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곧 정단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 미안해요, 정단씨.. 나도 사빈일 사랑해요.. ”
정단은 지금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가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
지 않았다.
“ 사빈이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미리 말해두려고 하는 거예요.. ”
사빈씨를 사랑했다..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가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 그렇다고 당신이 사빈과 이혼하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건 아니예요.. 그냥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의 일부분을
나에게 나누어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에요.. ”
어떻게 그런 비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정단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채영의 말
은 설득이나 부탁이 아닌
통보였으니 말이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남자를 몰래 훔친 기분이었다.
“ 지금 제가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건 아시나요? ”
정단은 몰랐다. 그녀가 그와 함께 일하고 일하고 있는 줄은.. 그래서 였었나? 그랬구나..요
며칠사이 이상했던
사빈의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생각만 하기에도 바쁜 정단은 채
영에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 귀국한지 열흘 됐어요. 프랑스에 있었거든요.. 사빈과 헤어지고 2년 반동안 그곳에 있었
죠..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 디자이너로 일하게 됐고요 ”
그녀가 있어서 자신이 귀찮아진 것이라고 정단은 생각했다. 언제나 그에게 여자가 생기는
일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힘드리라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왜 채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그녀와
만나러 나가서는 안된다고 마음이 외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지금.. 저한테 제 남편을 내 놓으라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
떨리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준 목구멍에서 겨우 제대로 된 말이 나왔다. 하지만 긴장한 것
이 분명한 정단의
목소리를 들은 채영은 귀엽다는 듯이 여유롭게 빙긋 웃었다.
“ 아니요.. 정단씨한테서 사빈일 빼앗으려는게 아니에요. 그냥 그의 곁에 내가 있다는 것을
당신한테도 미리
알려주고 싶어서였어요. 숨어서 만나는건 딱 질색이거든요. 그리고 그걸 정단씨가 용납할 수
없다면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요.. 그냥 정단씨한테는 미안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
채영의 당당한 태도에 그녀의 제안조차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채영의 말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정단의 의사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단도 더 이상 채영과 마주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채영이 사빈의 옆에 있겠다
는 말은 정단의 심장을
뒤흔들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것은 정단 혼자서 담아 눌러야 할 감정이었다.
약속.. 사빈이 여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약속이 정단의 심장
을 자물쇠로 채워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를 잃은 심장이 정단의 속에서 피를 뿜어내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므로 정단은 아무런 감정이 비치지 않는 투명한 표정으로 채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질
투도 경악도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동자로 말이다. 동공조차 없는 것처럼 텅빈 정단의 검은 눈동자는 자신의 앞에
앉은 아름다운 여자만을
담은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 네.. 그렇게 하세요.. 채영씨와 사빈씨가 그러기로 했다면요. ”
오히려 채영의 눈에 놀람과 당황이 들어찼다. 어느정도 정단의 반발을 예상했던 채영으로서
는 놀랄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악과 놀람은 사빈의 등장으로 더욱 커졌다.
“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
사빈의 등장은 차분했던 정단도 놀라게 만들었다.
“ 사빈아... 왜...벌써 왔어? 점심시간은 아직 멀었잖아. ”
사빈은 채영과 점심식사를 할 약속을 했던 듯 정단을 바라보며 정단이 왜 채영과 만나고 있
는지 이유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사빈에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함을 느낀 정단이 굳이 채영과 주고
받은 말을 사빈에게는
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빈에게는 충분히 오해할만한 문제가 있는
대답이 되었다.
“ 그냥 서로에게 할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만나서 얘기를.. ”
- 쨕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듣는 사람의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큰 파열음이 들리며 사빈의
손이 순간 허공을 스치고
지나간 듯 했지만 다음 순간 크게 고개가 꺽인 사람은 사빈의 작고 여린 아내였다.
“ 사...사빈아... ”
채영조차 사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
들도 이들 세사람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정단에게 손을 댄 사빈도 자신이 한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그들 중 유일하게 정단만이 평정을 되찾고 맑은 눈으로 사빈과 채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아하게 머리를 묶어
올렸던 머리카락만은 사빈의 손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듯 정단의 한쪽 뺨위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그 흩으러진
머리칼과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왼쪽 뺨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정단이 뺨을 맞은 여자
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단은 단아한 표정으로 처음엔 채영을 그리고 이어서 사빈을 바라봐주곤 시선을 바
닥으로 내렸다.
“ 하지만... 이제 얘기가 끝났으니 가봐야 할 것 같군요. ”
목소리마저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좀전의 채영을 대할 때보다 더 담담하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채영과 사빈에게서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을 울고 있었다.
당신의 신부(新婦)를 이토록 오래 창가에 서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와서 저를 불러 조용한 집안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이 저는 스스로 손을 놓고
어둑한 정원으로 스며들어 가야만 하겠습니다.
날 버리지 말아요..
25. 단화(丹花) : 붉은 피의 꽃
“ 사모님.. 집으로 모실까요? ”
윤기사는 앞거울을 통해 정단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
이는 어린 사모님은
좀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파리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더욱 빨갛게 부어오른 것이 감
기가 더 심해진 것같다고
윤기사는 느꼈다.
“ 병원.. 안가셔도 되겠습니까?
윤기사는 많이 아파보이는데도 단순한 감기일 뿐이라 말하는 정단이 걱정되었다.
“ 괜찮아요. 집에 가서 쉬면 되겠죠.. ”
윤기사는 사빈 다음으로 정단과 접하는 시간이 가장 많기 때문에 정단이 결혼 후 힘들어하
거나 우울해 하는 때를 잘
알아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콧물을 훌쩍이며 방울토마토를 바구니에 담아 정원
을 뛰어다니던 정단이
오늘은 기침까지 심하게 하는 것이 심한 감기에 거렸다는 것을 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다
른 사람이 보았다면
발그레 홍조 띈 얼굴이 활기 넘친다고 하겠지만 정단의 유난히 흰 피부에 열꽃이 피고 있는
것을 보며 윤기사는
다시 정단을 병원에 데려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를 만나고 오는 것인지 기분도 안좋아 보였고 평상시의 사모님 같지 않
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항상 옅은 미소가 가신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한번도 본
적 없는 허한 표정으로
차가 움직이는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집안으로 들아가는 뒷모습도 바람
에 흩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 사모님! 어디 안좋아지시면 언제라도 저 부르세요. 제가 병원에 모실테니.. ”
윤기사는 정단이 지금이라도 병원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말했지만 정단은 윤기사의
차를 타고 내리는 다른 때와
같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들어갔다.
하지만 윤기사의 말처럼 정단은 병원이라도 가야할 것 같은 상태였다. 열과 두통으로 인해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온몸은 후들거렸다. 집에 들어와마자 바로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몸이 침대바닥으로
푹 꺼지는 것처럼 심한
중압감을 느꼈다. 아침부터 심해졌던 몸살기운이 채영을 만나고 난뒤로 죽을 것만큼 정단의
몸을 아프게했다.
아니.. 사빈에게 뺨을 맞고 난 다음부터 더 아파졌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픈 건 몸보다 가슴인 것을... 심장이 더 아프다는 것을 정단 본인은 알고 있을까?
사빈에게 맞은 곳은 정단의 뺨이 아니었다. 그리고 맞아서 빨갛게 부풀어 오른 곳도 뺨이
아니었다. 지금 사빈에게
맞아 멍든 곳은 정단의 가슴이었고 피를 흘리고 있는 곳은 마음이었다.
정단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아름다운 채영의 얼굴이 떠올랐고 자신을 무심하
게 바라보는 사빈이
생각났다.
그가 자신을 때린 이유가 무엇인지 정단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 자리에서 맞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정단은 사빈이 자신을 때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믿을 것이다. 정단은 그가 때린다면
맞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춥다.. 너무나 춥다.. 왜 이리 추운 것일까.. 피는 점점 차가워져 얼어붙고 심장마저 깨질 듯
조여온다.
하지만 이내 그 조여드는 고통도 사라져버리고 마치 그것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허함을 느
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피부위로 심장의 박동도 느낄 수 없는 시체같은 몸은 무엇이 그리도 애달픈 것인지 쇠소리
가 되어 목구멍에서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계속 흘려대고 있었다.
잠이 든 것도 아닌데 몽롱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리는 사람처럼 눈
은 뜨고 있으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여지질 않았다. 발끝에서 어둠이라는 녀석이 정단의 발끝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정단은 뱀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리를 타고 오르고
가슴을 올라 점점
정단의 얼굴로까지 점령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눈밑을 치고 올라올 무렵 정단은 눈
을 감아버렸다. 스스로
먼저 어둠속으로 빠진 것이다.
하지만 쉽게 정단을 놔줄 것 같지 않던 어둠은 아침을 지낸 강한 햇살에 기운을 잃은 것인
지 사라락 정단을 깨우며
물러나갔다. 눈을 쪼는 듯한 볕에 정단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스레 떴다. 잠결에 느꼈던
냉기는 어디로 갔는지
타는 듯한 열기에 눈시울조차 뜨거웠고 머리엔 추가 달린 듯 무거워 고개를 들어올리기 조
차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도적인 고통은 머리를 쪼갤 것 같은 두통과 살들이 에이는 아픔이었다. 숨을 쉬
는 것도 힘들만큼 몸이
아팠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았다. 병원에 가는 수 밖에는..
그런데 이런 몸으로 혼자서 병원엘 가는 것이 무리라 생각한 정단은 누군가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사빈에게는 전화 할 수 없었다.
‘ 그래.. 윤기사님.. ’
정단은 지금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윤기사를 부르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정단
이 외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윤기사가 집에서 대기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빈의 집에서 10
분거리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침대에서 내려서자마자 정단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을 잇는 모든
뼈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부딪겨 고통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 으..응.. ”
작은 신음이 정단의 입을 타고 흘렀다. 정단은 오른쪽 다리에 힘을 싣고 다시 일어서려 했
지만 온몸에 관절이 빠진
것처럼 삐끗하며 다시 주저 앉아 버렸다.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자까지 움직이기도 힘든 것
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아있는 기운을 모아짜서 정단은 바닥을 짚고 기어서 가까스로 전화기를 집었다. 어제 윤
기사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 ..윤기사님.. ”
목안 깊숙이 잠긴 소리가 쇳소리가 되어 나왔다.
[ 사모...님? ]
윤기사도 처음엔 정단의 잠긴 목소리를 못알아 들은 듯 했다. 하긴 정단도 자신의 것 같지
않은 그 목소리에
윤기사를 불러놓고도 자신이 놀랬다. 하지만 정단이 망가진 목으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
이 윤기사는 정단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 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10분 후에 나오세요.. ]
정단은 어제 옷을 그대로 입고 자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화장대를 짚고 일어섰다. 아직도
다리는 휘청였지만
윤기사가 차를 대는 바깥까지는 어떻게든 나가야할 터였다. 정단은 이를 악물고 벽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문까지 나갈때는 또다시 바닥을 기어야 했다. 정원의 계단을 어떻게 내려온 것인
지도 모르게 정단이 차고
앞에 섰을 때 정단의 모든 기력은 바닥나가고 있었다. 감기기운으로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요근래 잘
먹지 못했던 것과 어제의 충격이 겹쳐 몸의 상태를 더 악화시킨 것 같았다.
그런데 정단이 너무 빨리 나온 것인지 윤기사가 말한 10분은 아직 지나지 않은 것인지 아직
윤기사의 차는
없었다. 정단은 그만 문가에 기대어 앉아 버렸다. 열로 인해 몸이 끓고 있는 것인지 나른한
느낌에 토할것과도
같은 울렁거림이 점차 심해지고 여름의 햇볕이 너무 뜨거워 현기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더 어지러웠기 때문에 정단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없이 들고 있었다. 워낙
사람의 발걸음이 뜸한
오전의 주택가인지라 다른 곳에 비해 지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정단은 가만의 눈을 뜨고
지나가는 자동차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인라이딩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질어질한 기분
에 그들이 이지러져보였지만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표정만은 뚜렷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상한 여자... 수상한 여
자같다는 표정들..
옷은 잔뜩 구겨지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문가에 앉아 있는 것이 집의 주인같지는 않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문득 정단의 눈에 들어온 것이 주차장 진입로에 세워져 있는 주차금지라 쓰여진 철
구조물이었다. 정단이
예전에 보아왔던 일반 주택가에서는 대강 구부린 쇠붙이에 하얀 페인트로 주.차.금.지라 쓰
고 세워놓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는 사빈의 주차공간에 세워진 구조물처럼 손이라도 스
치면 베일 듯 판판하고
무섭게 각이 진 멋진 주차금지 표지판에 익숙해져 있었다.
정단은 사빈의 차가 주차되어야 할 공간에 다른 사람이 주차라도 할새라 비칠거리는 걸음으
로 일어나 어젯밤 사빈의
주차를 위해 비껴뒀던 구조물을 다시 주차장 진입로의 정가운데로 옮겼다. 움직이기도 힘든
몸에 무거운 구조물을
끌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제 사빈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들어오기 전이면 주차하는데
불편함을 없게 해주기
위해 정단이 주차금지 구조물을 옆으로 치워놓으면 사빈의 운전사는 차를빼고 다시 그것을
제 위치에 세워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이 정단이 어제 치워놓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어젯밤 그의
차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쇠판으로 된 구조물은 요즘의 사빈처럼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언제든 정단을 상처
입힐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
검은색의 날씬한 차가 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열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운
전석에 앉은 사람은
윤기사일 것이다. 정단은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반가움에 움크렸던 몸을 폈지만
햇볕에 반사되는 번쩍임이
정단의 눈으로 들어온 순간 정단은 아찔함을 느끼며 돌아가는 세상속으로 쓰러졌다. 땅은
블랙홀처럼 정단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검은 세상이 꾸물꾸물 몰려오고 있음을 느끼며 정단은 시간이 정지된 것
처럼 소리를 듣지도 감각을
느낄 수도 없었다.
“ 사모님--!!!!! ”
멀리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윤기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것 또한 세상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속으로 흡수되어
정단의 뇌속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그 속에서 꺼내달라고 정
단이 들리지 않는 소리로
외치고 있을 때 시원한 손이 정단의 이마에 와 닿았다. 정단은 그 시원함에 자신의 몸을 감
싸던 열기와
아지랑이처럼 퍼지던 이지러짐이 점점 가시는 것을 느끼며 안도했다.
하지만 윤기사는 그저 이마에 손을 얹은 것 뿐인데도 여름의 더운 날씨와 다른 후끈한 열기
에 다급해졌다.
“ 이런.. 이게.. 빨리 병원에 가셔야 겠습니다. ”
그러나 정단을 일으켜 세우며 서두르던 윤기사는 또 다른 사태에 사고가 정지하는 듯 하였
다.
“ 사..사모님.. ”
정단은 윤기사의 등장으로 진정되는 듯한 어지러움 속에서 그가 왜 그러는지 주변을 살폈
다. 하지만 정단은 윤기사의
눈이 무엇을 보고 경악 속에 커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오른손을 감아도는 축축
한 기운에 정단은 힘없이
쳐지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붉은 색 물결..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를 가르며 떨어지는 붉은 줄
기...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붉음이었다. 붉은 색...
그리고 그 붉은 물질을 보는 순간 정단의 눈은 고통 속에 이그러졌다. 그것은 살이 벌어져
피가 흐르는 고통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정단이 숨겨웠던 아픔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사모님!!! 사모님---!!! ”
정단은 자신을 삼켜버리는 불길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 너무 뜨거워.. 누가..날 좀.. ’
정단의 손에서 쏟아진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새는 것을 보며 놀랐던 윤기
사가 정신을 잃은 정단을
안아 일으켰지만 정단의 목은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리고 정단의 손에서 흘러내린 피는 병
원에 도착할 때까지
감싸인 윤기사의 상의와 시트를 붉게 물들이며 번졌다.
“ 실장님!! ”
[ 무슨 일입니까.. 윤기사님.. ]
윤기사는 바로 사빈에게 알려야 했지만 무서울 정도로 열이 나고 온몸의 피는 다 빠진 듯
하얗게 변해버린 정단과
의사를 쫒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정단이 입원실에서 맞는 영양제가 반정도 떨어졌을
때야 사빈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빈과의 연락이 바로 이어지지 않아 사빈이 정단의 입원 사실을 안 것은
정단이 병원에 입원한지
6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사빈은 정단이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실장님.. 실장님? ]
윤기사의 목소리가 책상 위로 던져진 수화기에서 들렸지만 사빈은 사무실을 뒤로 하고 침착
히 걸어나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폭발할 것처럼 단단하게 당겨져 굳어 있었다.
“ 정비서! 차 빼놓으라고 해!! ”
그리고 목소리도 다급함과 알 수 없는 분노가 응집되어 있었다. 또한 침착했던 그의 발걸음
도 갈수록 다급해져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쯤 사빈은 뛰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차에 오르니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윤
기사의 전화를 받고
마음만 다급해 어느 병원에 정단이 입원했는지 듣지도 않고 뛴 것이다.
사빈은 운전대를 후려쳤다.
“ 젠장!! ”
그리고 막 윤기사에게 전화 거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015-869-2545.. 윤기사였다.
“ 어느 병원입니까? ”
[ 실장님? ]
사빈은 윤기사의 전화를 받자마자 병원부터 물었지만 한번에 답해주지 않는 윤기사에 답답
했다.
“ 지금 정단이 어디 있습니까? ”
[ 아.. 강남 의료 센터입니다. 지난번 큰집 사모님께서 입원하셨던.. ]
마음이 급했던 사빈은 강남 의료 센터라는 병원이름을 듣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 알았습니다. ”
그러나 전화를 끊기 직전 사빈은 중요한 것을 깜빡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윤기사를 불렀
다.
“ 잠깐만요!! 윤기사? ”
[ 네..네! 실장님..]
정단을 데리고 멀리 있는 큰 병원까지 간 걸로 봐서는 가벼운 증상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 어디가.. 안좋은 겁니까... 많이 아픈가요? ”
사빈은 급하게 전화를 받느라 핸즈프리로 연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느라 핸드폰을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고
통화를 했다. 그리고 앞거울을 통해 보이는 사빈의 얼굴은 심각하게 이그러져 있었다.
[ 열이 심하십니다. 이틀전부터 감기기운이 있으셨는데 잘 돌보질 않으셔서 그런지 오늘 아
침에 심해지신 것
같습니다. ]
열이라.. 이틀전부터 감기기운이 있었다고? 사빈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기침을
한적도 지난번처럼
코를 훌쩍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긴 정단이 아파도 그걸 알아볼 정도로 정단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사빈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감기는 지난주에 다 나은 줄 알았는데..
“ 알았습니다. ”
윤기사와의 통화를 끝내고 사빈의 핸드폰은 차안으로 던져졌다.
‘ 젠장.. 젠장.. 젠장!!! ’
성질이 날때마다 읊조리는 말이 계속 목을 타고 끌어 올랐다. 그리고 수월하게 빠져주지 않
는 길에 애꿎은 운전대만
계속 때려댔다.
채영과 만났던 카페에서 혼자 뒤돌아 나가던 정단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부서질 듯 가녀린
몸이 곧 쓰러질 듯
휘청이고 있다는 것을 왜 그때는 보지 못했는가..왜 손을 스친 뺨이 뜨겁다는 것을 몰랐었단
말인가..
그때는 안보였던 것이 지금은 사빈의 눈앞을 생생히 지나쳐갔다. 그날 사혁의 사무실로 출
근했던 사빈은 채영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약속하였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같이 강원도 출장 계획을 짜던 채
영이 갑자기 자신과 자주
가는 카페에 나갔다는 말을 유원으로부터 전해들은 사빈은 자신이 약속시간을 잘못 기억한
것인줄 알고 급히 따라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사빈이 그곳에 가서 본 것은 정단과 채영이 마주보고 앉아 있는 모
습이었다. 그 순간
사빈은 3년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하였다. 자신 모르게 채영을 불러내 다그치던 자신의
어머니.. 매일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채영.. 그 옛날에도 그랬었다. 우연히 채영을 찾았었던 사빈
은 채영의 회사까지
찾아온 자신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던 채영을 봤다. 그날도 사빈은
자신의 어머니앞에서
채영을 데리고 나왔었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에 아픔이 가득하였었다. 3년전 그때의 채영이
사빈은 안쓰럽고
안타깝고 애처러웠다.
하지만 어제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던 것은 채영이 아니라 정단이었다. 그러나 어제는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사빈은 여유롭지 못했다. 채영의 앞에 앉아 있는 정단에게 3년전 채영을 함부로 대
하던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보이면서 사빈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에 전해
져 오는 그 열기를 세게
부딪힌 살과의 마찰쯤으로 생각했고 곧 정단을 때렸다는 자괴감에 빠졌으니 다른 것은 보이
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빈이 때린 것은 정단이 아닌 사빈 자신이었다. 사빈은 단지 정단에게 화풀이를 했
을 뿐이다. 정단을 세게
때린 만큼 사빈은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정단에게 채영을 만나고 있는 자신을 보인 것
이 싫었고 채영의 앞에서
정단과 다정한 부부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사빈은 자신
에게 처벌을 가한 것이다.
결국 정단을 때림으로 그 배이상의 상처를 받은 것은 사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정단의 눈빛은 너무나도 침착했었다. 물기어린 검고 맑은 눈동자가 가만히 채
영과 사빈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차분히 주위사람들의 시선엔 아랑곳 하지 않은채 뒤돌아 나갔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사빈은 어제 정단이 그렇게 나가고 난 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
쩌자고 손을 댄
것인가.. 무슨짓을 한 것이란 말인가.. 그 많은 사람이 있는데서..
정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과를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몹쓸 짓을 해버린 것이다. 그
래서 결국 어제도
외박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제 집에만 들어 갔어도 자신이 정단을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또 가슴이 무거워졌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앓았을 정단을 생각하며 사빈은 속이 쓰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막상 병실로 들어서 정단의 모습을 봤을 때 사빈은 심장 한켠이 떼어져 나간 것과
같은 싸늘함을 느껴야
했다.
“ 오셨습니까, 실장님.. ”
정단의 옆에 앉아 정단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윤기사가 사빈이 들어온 것을 보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 네.. 지금 상태는요? ”
“ 다행히 크게 나쁘신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영양제 조금 맞으면
되겠고 감기는 열이
높아서 그렇지 안정만 하시면 괜찮아지실 거라고 합니다. ”
윤기사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빈의 눈에 비치는 정단은 이미 중병에 걸린
환자였다. 하얀 정단의
얼굴과 섬세한 목덜미엔 거미줄처럼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고 작은 정단은 하얀
침대속에 폭 파묻혀 더
작고 안쓰러워 보였다. 그리고 하얀 병원시트보다 더 창백한 얼굴엔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듯 두뺨은 피부 속의
모세혈관까지 다 들고 일어난 듯 붉은 실들이 촘촘히 수를 놓고 있었다. 또한 갈라져 피가
맺힌 입술은 비정상적인
검붉은 빛을 띄고 있었으며 흡사 흡혈귀에서 피를 빨린 가련한 처녀처럼 눈주위는 푸르게
그늘져 있었다. 무엇보다
끊어질 듯 미약하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지금 그녀가 얼마나 안좋은 상태인가를 말해주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관으로부터 영양을 전달해 받기 위해 내밀어진 가는 팔이 그녀가 얼마나 여위고
허약해졌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빈은 정단의 투명한 피부아래로 뚫고 들어간 바늘이 파랗게 비치는 것만 같은 정
단의 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한번 더 이런 정단의 모습을 본다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사빈을 아찔하게 만든 것은 하얀 시트속에 하얀 붕대
로 감겨 있는 정단의
오른손이었다. 그것은 시트속에 반쯤 가려져 있어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빈은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하늘이 노래졌다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 이건 뭡니까.. ”
사빈은 정단의 오른손을 반쯤 가리고 있는 시트를 치워내고 붕대감은 손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 그.. 그건.. 죄송합니다. 실장님.. 사고가 있었습니다. 병원에 모시고 오려는데 사모님이 그
만
쓰러지셔서... ”
“ 쓰러져요? 왜요!! 다른 곳은요!! 다른 곳도 다쳤나요? ”
사빈은 잠들어 있는 정단에게로 몸을 숙여 더욱 자세히 정단의 오른쪽 손을 이쪽 저쪽으로
살폈다. 그리고 혹여
다른 곳에도 상처가 나진 않았는지 다급했지만 조심스런 손길로 쓸어보며 확인하였다.
“ 아닙니다. 손만 다치셨는데.. 그게.. ”
사빈은 가만히 붕대로 감겨진 정단의 손을 심각한 표정으로 만져보다 뭐냐는 듯 한쪽 눈썹
을 올리며 윤기사를
바라보았다.
“ 동맥을 건드리면서 지나가 출혈이 심하셨습니다. 꿰맨 자리도 흉터가 남을 듯 하고요..
”
“ 동맥...이요? ”
어떻게 쓰러졌길래 동맥까지 건들였단 말인가.. 사빈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며 터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부풀어
올랐던 떨어졌다. 설마...설마!!
“ 꿰맸다고요? 얼마나 다쳤길래요? 어떻게 쓰러졌길래 동맥까지 건드렸나요? ”
사빈은 혹여 정단이 집에서 혼자 나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윤기사를 다그
쳤다.
“ 사모님께서 주차장 앞에서 쓰러지시면서 주차금지 구조물 모서리에 부딪히셨는데요. 그
게 철판으로 된거라 각진
곳을 스치며 주저 앉으셔서 심하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 ”
사빈의 서슬퍼런 노기를 본 윤기사는 정단이 다친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더
욱 면목없어 하였다.
“ 그럼 치료는 잘 끝난 겁니까? ”
“ 네.. 아홉바늘을 꿰매기는 했지만 되도록 흉터는 남지 않도록 잘 말씀 드렸습니다. ”
‘ 아홉바늘..씩이나.. ’
정단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을 그 바늘들을 생각하자 사빈은 절로 주먹에 힘이 쥐어졌다. 정
단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자신의 생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단의 몸에 흉터가
남게 될 것이란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말이다.
“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합니까..”
사빈은 땀이 송글송글 배어난 정단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정단의 이마며 턱이며
뺨을 살짝살짝
쓰다듬었다.
“ 열만 내리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
“ 그래요... 그럼.. 윤기사님은 집으로 가보세요. 제가 있으니까요..”
윤기사는 사빈이 온 이상 자신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쉽게 병실을 나
올 수는 없었다.
“ 그래도.. 실장님 내일 출근하시려면.. 밤에도 사모님과 같이 있어줄 간병인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
“ 하루정도 병원에서 지내고 나가도 지장 없습니다. ”
“ 하지만.. ”
*******
“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
윤기사가 나가고 나자 사빈은 침대옆 작은 의자에 앉아 수건으로 정단의 땀을 닦아 주며 정
단의 얼굴 가까이로 몸을
숙여 정단의 앞머리카락들을 손가락으로 살살 넘겨주었다. 좀전까지는 그래도 윤기사를 의
식해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지만 윤기사가 나간 뒤 정단과 단둘이 병실에 남은 사빈은 유리를 만지듯 정단을 조심
조심히 쓰다듬었다. 아플
정도로 매말라 갈라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다가 앙증맞게 돌출 된 앞 이마며 귀엽게 빠진
콧대를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열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정단의 이마를 눌러도 보고
두 뺨을 살포시
감싸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단의 얼굴 위를 옮겨다니던 사빈의 손이 한 곳이 머물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단의 붉은
뺨.. 아직도 얕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발그래한 뺨위에서 사빈의 손은 꼼짝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그
뺨위에 손을 얹거나 만지지도 못했다. 만지며 부서질 것처럼, 재가 되어 날아갈 것처럼 사빈
의 손은 정단의 뺨위를
떨리는 움직임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움찔움찔, 멈칫멈칫 살며시 정
단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비단의 미끄러짐과 같은 감촉에 얇은 조직이 곱게 성겨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간
곧 찢어질 것 같은
피부였다.
어떻게 이런 여린 것을 때릴 생각을 했을까.. 사빈은 자신의 손보다도 작은 정단의 얼굴을
보며 자책감에 정단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자신의 손만 봐도 그녀의 귀여운 뺨만 봐도 어제의 영상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사빈은 그런 정단의 열을 빨아들이겠다는 듯 살며시 벌어진 정단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정
단의 입술은 몸에서 나는
열보다도 더 뜨거웠다. 분명 그 입술안에 웅크리고 있을 부드러운 것은 아마 그보다 더 뜨
거우리라. 하지만 사빈은
갈라진 정단의 입술이 아플새라 깃털처럼 부드럽게 입만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
른 입술에 단비를 뿌려주듯
혀로 촉촉하게 감싸주었다. 그러나 충분히 조심스러웠던 그 입맞춤에도 정단의 예민해진 붉
은 피부가 빨간 열을 내며
벌어지자 사빈은 그것마저도 자신의 혀로 빨아들이며 진한 혈향을 음미했다.
“ 언제 일어날거니? ”
마지막으로 살짝 정단의 숨을 빨아들인 사빈이 정단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일어났다. 그리
고 이제는 정단의 다친
손으로 관심을 돌려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엄지와 검지사이를 가르며 감싼 하얀붕대위
로 아기손과 같이 앙증맞은
정단의 네 손가락이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빈은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안마하듯
훑고서는 귀엽다는 듯
고개를 숙여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잠든 정단이 작게 꼬물락 거리는 손놀림이 느껴졌지
만 사빈은 그 손을 놔주지
않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마치 정단이 자신의 뺨을 만져
주는 것처럼 정단의 손을
움직였다. 그저 힘없이 자신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정단이었지만 사빈은 정단의 손끝을 느
끼며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정단에게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사빈은 지울 수가 없었
다. 무엇인가.. 정단이
이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사빈은 자신이 왜 그런 이질감을 느끼는지 정단을 샅
샅이 관찰하였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예쁜 미소로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것을 빼면 정단이 달라진 것
은 없었다. 그래서 사빈은
아내의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그녀의 검고 큰 눈이 감겨져 있어서 그런 걸 것이라 생각하며
정단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정단의 얼굴만 들여다보며 언제 그 예쁜 눈을 보여줄까 기다리던
사빈은 정단의 손가락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혼반지..항상 눈처럼 새하얀 정단의 손가락들과 어
울린다고 생각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물방울이 사라졌다. 사빈은 정단의 오른쪽 손가락에 그 반지가 잘못
끼워져 있나 살펴보고 침대
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정단이 집에서 반지를 빼
고 나온 것일까.. 아니면
잊어버린 것일까.. 사빈은 초조해졌다. 수천만원의 고가를 자랑하는 반지라서가 아니다. 그런
거야 정단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더 크고 비싼 것으로 선물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반지이다. 정
단과 사빈을 이어주는
것이자 그들이 영혼의 한쌍임을 증명해주는 반지이다. 사빈이 그런 상징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왠지 정단의 손에 결혼반지가 없다는 것은 사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단의 손가락에 반
지가 없다는 것이 왠지
그녀가 그들의 결혼을 포기했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빈은 정단이 자신이 없는 사이 깨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병실을 나섰다. 정단이
잠들어 있는 병실을
나서기까지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발걸음이 병실문을 닫자마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사빈은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할 정도로 다급히 간호센터를 찾았다.
“ 711호 환자말입니다. 혹시.. 병원에 올 때 반지 끼고 있지 않았습니까? ”
센터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들은 모두들 사빈의 수려한 외모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중 귀여운 동그란 안경을
낀 간호사 한명이 나서며 말했다.
“ 711호 특실 여자 환자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네.. 오전에 입원했는데요. ”
“ 그분.. 손바닥과 손목 부분 절개를 봉합해서 반지는 뺐어요.. 아마 아까 처음에 병원에 같
이 오신 분께
드렸던 것 같은데요. ”
간호사는 정단의 치료를 위해 반지를 뺐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다친 손이 왼손이었다. 왜
그 생각은 못했던
것일까.. 조급함에 성급히 행동한 자신을 돌아보니 사빈은 웃음이 나왔다.
“ 별 것도 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쳤구나.. 성사빈.. ”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냉큼 반지를 전해주지 않은 윤기사가 아무래도 경황이 없어 잊은 것이
라 이해가 되면서도
괘씸하였다. 내일 당장이라도 가져오라고 하여 정단의 성한 오른손에라도 끼게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빈은 또
정단이 깰새라 조용히 병실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정단은 아무리 기다려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빈이 오기 전 언제 잠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빈이 온지 2시간이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않는 정단을 보며 사빈은 걱정이 되어 회진을 돌
던 의사를 붙잡고 왜
사람이 깨어나질 않는거냐고 따지듯 물었다. 의사는 안정제를 투여하여 아마 깊이 잠들었을
거라 말하며 아내 사랑이
지극해 보이는 이 수려한 남자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단이 워낙 몸 상태가
안좋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늦게 깨어날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저녁식사가 나왔는데도 깨어나지 않는 정단을 사빈은 억지로 깨워야 했다. 주사바늘
을 통해 영양제라고 하는
것이 몸속으로 들어가고는 있었지만 몸이 워낙 축난대다 윤기사의 말에 따르면 정단이 언제
부터 끼니를 거른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사빈은 죽은 듯 잠자고 있는 정단을 깨울 수 밖에 없었다.
“ 정단아.. 단아.. ”
사빈이 정단을 부르며 깨우려 했지만 정단이 너무 깊은 잠속에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
단을 깨우는 사빈의
손길이 너무 미약했던 것인지 정단에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단아.. 일어나.. 일어나야지.. 정단아.. ”
그래도 사빈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볍게 정단의 뺨을 토닥이며 정단을 깨우려 노력
했다. 그러나 잠든
상태에서 사빈의 손길을 느낀 정단은 또 다른 혼란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정단의 귀에도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사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콤하고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순간
사빈은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밀쳤다.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의 길고 섬세한 손이 정단의 뺨을 치고 지나갔
다. 사빈과 떨어진 곳에
정단이 서있던 지면이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사빈은 잡아주지
않았고 정단은 멀어져가는
사빈을 바라보며 외쳤다... 떠나지 말라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하지만 까무룩한 어둠속에
갇힌 정단의 눈엔
더 이상 사빈이 비치지 않았다. 버려진 것이다.
그런데 순간 어둠 속에 갇혀진 세상이 환해지며 따뜻한 빛이 정단을 감싸올랐다. 하지만 그
따뜻함에 안도하기도
잠시 따뜻하다고 느꼈던 빛은 어느새 불길이 되어 정단을 휩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염의
가운데 정단의 생모인
윤희가 있었다. 정단은 윤희을 발견하고 그녀에게로 가려했지만 둘 사이엔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저단은 소리를 질렀다.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불길 속에서 벗어나라
고.. 하지만 윤희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 불구덩이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단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불길들마저
서경을 집어삼킬 듯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무정한 어미같은 윤희는 무엇에 그리
기쁜지 크게 웃음 짓고
있었다. 정단은 목청이 찢어져라 부르짖고 있었지만 윤희는 자신의 몸이 불길과 함께 사라
질 때까지 미소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타오를 것이 없다는 듯 꺼져가는 불꽃과 함께 희미해지는 윤희의 얼굴은 웃
고 있지 않았다.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물이 아롱진 가슴아픈 얼굴이었다. 그런 윤희의 얼굴
이 정단을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치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인 후 마지막 남은 불씨가
윤희를 집어 삼키려
할때 정단은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엄마를 잡기 위해서.. 하지만 정단이 막 불길속의 윤희
의 옷자락을 잡았다고
느꼈을 때 이미 윤희와 그 뜨겁던 불덩어리들은 사라진 후였다. 다만 엄마의 옷자락을 잡았
던 정단의 손에는 윤희가
쓴 편지인 듯 한 것이 남겨져 있었다.
정단아.. 엄마도 너와 오래도록 같이 살고 싶었단다.
하지만.. 네가 날 위해.. 그런 짓을 해서는..
하지만 어느 순간 불길이 솟아 오르며 편지를 삼키며 타올랐다. 주변에서 누군가 손을 놓으
라 하는 말이 들렸지만
정단은 자신의 손마저 그 불덩어리가 먹어 삼킬 때까지 편지를 놓지 않았다. 정단은 그것이
자신의 엄마인냥
뜨거움이 온몸을 잠식시킬 때까지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 정단아!! 그만 둬!! 빨리 나와 !!! 정단아!!!
그리고 또 다시 어둠이 정단의 세상을 뒤덮었다.
사빈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정단의 눈썹이 갑자기 파르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이제야 정단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떨리는 눈꺼풀과 함께 은빛의 물결처럼 잔잔히 부서지는
눈물방울들이 정단의 뺨을
타고 흩어졌다.
“ 정단아!!! 류정단!!! ”
사빈은 정단이 소리 없이 눈물로만 흐느끼자 깨우려 했지만 정단의 꼭 감아진 두눈에서는
눈물만이 흐를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나쁜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눈꺼풀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뜨거워.. 뜨거워!!! 누가.. 날 좀.. ’
정단은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지만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그것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심하게 흔들리는 충격에 정단은 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정단이 눈을 떴을
때 정단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걱정이 가득한 사빈의 얼굴이었다.
“ 정단아... 괜..찮아? 어디가 아픈건가? ”
사빈은 여전히 검은 두 눈동자에는 눈물을 매달고 있는 정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 괜찮아? ”
사빈은 걱정과 근심을 담은 눈동자로 정단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검게 물기를 먹은 정단
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정단은 배속의 태아처럼 몸을 말고 가슴을 움켜잡으며 구슬피
울었다.
“ 정단아.. 왜 그래? 어디야.. 어디가 아파? 정단아!!!! ”
사빈이 움크린 정단을 껴안으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정단은 미친 듯이 가슴만 쥐어 뜯으며
흐느끼는 소리조차 없이
울었다.
“ 간호사!!! 간호사--!!!!! ”
제정신이 아닌듯한 정단의 모습에 놀란 사빈이 간호사를 부르며 정단을 붙들었다. 그리고
몸이 부서져라 울던 정단은
또 다시 안정제의 힘을 빌어 잠이 들었다. 하지만 두 눈이 감길 때까지 정단의 눈에서는 푸
른 눈물 방울들이
끊임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반으로 갈라지며 서서히 정단의 눈이 감기는 동
안에도 그것들은 사빈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잠이 든 정단은 다음날 아침에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이든 정단
을 바라보고 있던 사빈은
무엇이 자신의 아내를 그토록 서럽게 한 것인지, 다시는 그것이 정단에게 다가오지 못하도
록 밤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정단이 눈을 떴을 때 사빈은 보이지 않았다. 정단은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딘가 두리번거려
보았다. 어제 윤기사를 기다리기 위해 집앞에 서있던 것 이후로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는 끔
찍한 악몽과 자신을
내려다보던 걱정이 가득한 사빈의 얼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의 이
곳저곳을 기웃거려 본 결과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정단은 깨달았다. 처음엔 어디 다른 사람의 집에 와서
누워있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지난 번 인영의 병실을 떠올려 볼 때 자신이 있는 이곳도 어느 병원의 특실일
거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더욱이 자신의 몸속을 뚫고 들어와 이상한 액체를 흘려보내고 있는 바늘의 느낌을 보아 자
신이 병원에 입원했음이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정단이 자신이 왜 입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큰 병도 아니고 고작 감
기일 뿐인데 이렇게
좋은 병실에 입원을 시킨 것을 보니 부자들은 감기에만 걸려도 이런 초호화 병실에서 요양
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정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불쾌하게 만드는 이 바늘관을 뽑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른쪽
팔뚝에 꽂혀 있는 주사바늘을 왼손으로 뽑아내려 하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왠지 따끔하고 둔탁한 것이 왼손이 자기 손같지가 않았다. 정단은 이
제서야 왼손의 둔함을
눈치채고 그것을 들어 붕대에 감겨 있는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아’하는 신음소리와 함
께 정단은 어제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났다. 집앞에서 윤기사를 기다리다 어지러워 주차금지 철구조물
을 짚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제대로 짚기전에 쓰러진 것인지 뜨겁게 불에 대인듯한 느낌이 들면서 살이 벌어지는 서늘함
을 느낀 것 같은데 그
후로의 기억이 없었다.
왜 어제 그런 악몽을 꾸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다친 손이 그때를 생각나게 했나
보다고 정단은
생각했다. 한번도 다시 떠올린 적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정단은 어머니가 뜨거운 불
속안에서 차가운 시체로
자신에게 안긴 이후 그날의 어머니 모습을 일부러 머릿속에서 지우고 지냈었다. 그런데 어
제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였고 불과 함께 타들어 가는 자신의 손까지도 꿈이 아닌 현실 같았다. 정단은
다시 그 장면이
떠오르자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을 확인하기 위해 붕대를 풀고 있었다. 그리고 붕대가 다 풀
어 떨어지자 정단의
손바닥을 기울어진 Z자 모양으로 금을 그어놓은 듯한 파열자국이 들어났다. 막상 그 상처자
국을 보자 정단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아픔이 욱신 느껴졌다. 그런데 정단이 자신의 손바닥을 꿰맨 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렸다.
“ 뭐하고 있는거야? ”
뭔가 봉투를 들고 서있는 사빈이 엄한 표정으로 붕대를 풀어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정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회사일을 처리하기 위해 유원에게 전화를 걸고 의사를 찾아가 정단의 상태를 살핀다음 정단
이 먹을 만한 죽을 사오는
동안 이 조그마한 아내는 붕대를 풀어 자신의 상처를 일일이 확인하는 잔악한 짓을 하고 있
었음에 사빈은 사온 죽을
탁자에 집어 던지던 올려놓고 정단에게 다가왔다.
“ 무슨 짓이야? ”
사빈은 꿰맨 부위에 혹여 나쁜 거라도 닿을까 정단의 다친 손바닥을 위로 들어올리며 간호
센터와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 드레싱 좀 다시 부탁드립니다. ”
확실히 특실 환자인지라 간호사들은 사빈이 부른지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신속히 정단
의 붕대를 다시 처매주고
나갔다. 그리고 정단이 붕대를 풀어버린 일에 대해 왜그랬냐고 이유를 물을 듯 하던 사빈이
그것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정단의 앞에 식탁을 설치하고 사온 죽을 꺼내 늘어놓았다.
“ 당신이 평소에 뭘 좋아하는 지 몰라서 대강 다 사왔어.. 야채죽도 있고 해물죽하고 깨죽
이나 잣죽 이런 것도
있으니까 입맛 닿는 걸로 먹어봐.. ”
하지만 정단은 별로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배가 고픈 것도 같았지만 그것은 배가 고픈 것
일뿐 무엇을 먹고싶지는
않았다. 사빈은 많은 죽을 들이대도 정단이 먹을 생각을 하지 않자 정단이 평상시 좋아했던
해산물로 만들어진
해물죽을 한숟가락 떠서 정단의 입에 대주었다.
“ 열은 내렸지만 몸이 너무 약해서 바로 퇴원 못한데.. 그러니까 잘 먹고 쉬어야지.. 어제도
아무 것도 못
먹었잖아.. ”
예전의 정단이었다면 손수 죽을 떠먹여 주는 사빈에게 감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단
은 그런 것에 일일이
행복해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다정하다가 또 언제 차갑게 대할지 모를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
정단은 사빈이 떠준 죽을 물리며 야채죽을 꺼냈다. 정단이 자신이 떠주는 죽을 얌전히 받아
먹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사빈은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단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사빈이
떠주는 죽을 거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소한 일에 서운함으로 알싸한 기분이 드는 사
빈이었다. 그러나 사빈은
정단이 왠지 모르게 냉정해 보이는 것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단은 그후에도 웃지도 잘 말하려 하지도 않았다. 사빈과의 대화에서 언제나 화두
를 꺼내는 것은 정단이었고
항상 미소띤 얼굴로 따뜻한게 자신을 바라봐 주었던 정단이기에 지금의 정단이 사빈은 어색
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정단을 그렇게 상처입힌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사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그렇게 정단
을 때린 것은 평생을
사죄해도 씻을 수 없는 잘못이었다. 지금은 그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래도 사
빈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단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정단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병원에 있는
내내 정단은 잠만 자려고
작정을 한 듯했다. 하루에 절반 이상은 눈을 감고 지냈고 잠시 사빈이 병실을 비울 때마다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빈이 들어와도 정단은 돌아보지 않았다.
“ 정단아.. ”
사빈은 다리를 모으고 창가에 붙어 앉아 있는 정단 가까이로 다가가 침대위에 앉았다. 그러
자 정단도 더 이상
사빈을 무시하지 못하고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병원에 있는 며칠사이 헬쓱해진 정단의
얼굴을 가만히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맨처음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마를 맴돌던 사빈의 긴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지나
홀쪽해진 뺨을 타고
내려갔다.
“ 얼굴이... 많이 상했다. ”
그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간 사빈의 손가락이 정단의 옆머리를 귀뒤로 넘겨지며 귓불을 쓰다
듬었다. 이번엔 정단도
사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매말라 있었다. 자신을
담고 있는 그
눈동자에 생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빈은 정단이 미소짓지 않는 만큼 자기가 대
신하려는 듯 무표정한
정단을 미소띤 얼굴로 바라봤다.
“ 내일.. 퇴원해도 된데.. 손도.. 나중에 실밥 풀을 때만 병원에 오면 되고.. ”
정단은 사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곤 자상한 그의 얼굴이 부담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사빈은 상관없다는 듯 정단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 그리고 당신 손 다 나을 때까지 집안 일 도와줄 아줌마 알아보고 있어.. 당신 다 나아도
계속 두고 싶지만
일단 당신 다 나을 때까지는 도와줄 사람 부를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그말에도 정단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날 정단은 사빈과 함께 나흘만에 집으로 돌
아갔다.
그날 아침 윤기사는 아침 일찍부터 병원으로 와 얼마 되지 않았던 정단의 짐을 챙겼고 사빈
의 운전기사인 김기사는
퇴원수속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성진과 관련된 사람들 중 유일하게 정단이 입
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강비서는 정단에게 분홍물이 살짝 번진 백장미를 퇴원선물이라고 안겨주었다. 그런데 모두
들 일사분란하면서도 정신없는
그 때 김기사가 퇴원수속을 하고 난 뒤 강비서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 강비서님... 조금 이상한게 있습니다. ”
“ 뭔가? ”
하지만 무슨 일인지 김기사가 강비서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정단을 부축하고 있는 사빈이
강비서를 불렀다.
“ 강비서님.. 가시죠..”
“ 네! 실장님. ”
강비서는 아직도 파리한 얼굴로 사빈에게 안겨있는 정단을 오래 세워둘 수 없어 김기사와는
나중에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건 나중에 권변호사한테 말해보도록 하지.. 그리고 김기사는 실장님 차 끌고 와.. 나도
실장님과 함께
가니까..”
불씨가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퇴원한 후로도 한동안 정단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외출은커녕 방안에서도 나가려 하질 않
았다. 그렇게 예뻐했던
정원조차 정단은 한번 나가보질 않았다. 더욱이 사빈의 말대로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줌마가
들어왔기에 정단은 아무
생각도 않고 멍하니 있을 수 있었다. 정단은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행복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할머니에 대한
생각도 사빈과 채영에 대한 생각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
서조차도 말이다. 그러나
어둠이 환한 창가를 두들기고 정단이 지키고 있던 마지막 촛불을 꺼뜨리면 또 다시 악몽이
찾아왔다. 정단이 잊고
싶은 모든 기억과 고통을 헤집어대면서.. 그리고 그것은 급기야 정단의 피를 요하기 시작했
다.
“ 강비서님.. 제 아내에 대한 조사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
사빈은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하자마자 강비서를 불렀다.
“ 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강비서는 사빈의 심각한 표정을 통해 사빈과 정단 사이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
다.
“ 제 아내가 저와 결혼하기 전 혹시 무슨 사고를 당한 적이 없었는지 좀.. 자세히 알아봐주
세요.. 특별히 병을
앓았던 적이라던지 하는 거말입니다. ”
“ 실장님.. 왜.. 그런 걸.. ”
“ 그냥.. 알아봐 주십시오. 다른 건 필요없습니다. 크게 아팠다거나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
한 적이 있었나만
알아봐주세요. 병원기록같은 거 말입니다. ”
사빈이 강비서에게 정단에 대한 조사를 지시한 것은 정단의 이상한 행동때문이었다. 얼마전
까지는 몰랐는데 요즘
정단은 부쩍 이상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며칠전 자신이 채영이 보는 앞에서 정단을 때린 것
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 며칠간의 정단을 보고있노라면 정단에게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밤마다 잠도 잘 자지 못했고 항상 가위에 눌리는 듯 잠자면서도 힘들어 했다. 단순
히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새벽.. 사빈은 다시 정단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야만했다.
사빈은 다시 오늘 새벽의 일이 떠오르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잠결에 유난히 정단
이 뒤척인다고 느낀
사빈은 다른 때처럼 가위에 눌린 정단을 깨워주기 위해 눈을 떴다. 그런데 잠에서 깬 사빈
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비규환이었다.
“ 정단아.. 류정단!!! ”
뭔가에 쫒기는 듯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정단이 미친 듯이 붕대를 잡아 뜯고 있었다. 그
리고 정단이 붕대를
찢기시작한지 오랜 시간이 지난 듯 뜯겨져 있는 것은 붕대만이 아니었다. 하얀 붕대와 함께
찢긴 것은 정단의
피부였다. 놀란 사빈이 침대옆 스텐드를 켰을 땐 갈기갈기 찢겨져 있는 붕대는 이미 흰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정단의 피로 물들어 붉디붉은 비단조각 같았다. 그리고 정단의 피는 그 붕대를 적시는 것만
으로는 부족했는지
침대위에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이미 정단의 왼손을 감고 있는 붕대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음에도 정단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손을 잡아 뜯었다. 이제 꿰맨 곳의 실밥도 다 떨
어져 정단이 헤집고 있는
것은 자신의 벌어진 살 속이었다.
“ 그만해.. 정단아!! 그만해!!! ”
그런 정단을 사빈이 붙잡고 말리려 했지만 정단은 심하게 몸을 뒤틀며 자해하는 것을 멈추
지 않았다. 정단의 피가
그녀의 손과 팔에 그리고 이제는 사빈의 손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위는 누군가 난
도질을 당한 것처럼
점점이 피자국이 흩뿌려져 있었다.
“ 류정단!!! ”
결국 사빈은 자신의 잠옷을 벗어 정단의 오른손을 침대 기둥에 묶고 침대시트로 벌어진 틈
사이로 울컥울컥 피를 쏟는
정단의 손목을 동여맺다. 그리고 정단의 얼굴을 두손으로 붙잡고 정단의 귀에 조용히 속삭
였다.
“ 정단아.. 일어나.. 괜찮아.. 괜찮아.. 일어나도 돼.. 쉬.. 착하지? 일어나.. 정단아.. ”
지난 이틀동안 가위에 눌리는 정단을 깨운 방법이었다. 사빈은 퇴원후 밤마다 두세번씩 악
몽에 시달리는 정단을
깨우면서 거칠게 흔들어 일어나도록 하는 것보다 살살 달래듯이 부드럽게 그녀를 잠에서 깨
우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 정단아.. 일어나봐.. 제발.. ”
사빈은 여러번 감은 시트조차 피가 발갛게 배어나기 시작하자 시트위로 정단의 손목을 힘주
어 잡고 한손으론 정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정단아.. 정단아... ”
그리고 정단에게 부드럽게 온기를 나누어 주듯이 얼굴의 고운 윤곽을 따라 점점히 입을 맞
추었다. 그러기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단이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희미해진 눈동자로 사빈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지만 기운이 없는 것인지 그것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
만 사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의 입술모양만으로도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 무..슨. 일이.. 에요..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곧 자신과 사빈에게 묻어
있는 피와 침대위에 검게
말라있는 자국을 보고서 자신이 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눈치챈 정단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
다 두려움으로 파들거렸다.
사빈은 놀란 정단을 안심시켜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자꾸 축축히 시트를 적셔가
는 정단의 피에 마음이
급해져 일어나 서둘러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김기사보다 집이 가까운 윤기사에게 전화
를 걸었다.
“ 지금 빨리 와주세요.. 급합니다. ”
아마 윤기사는 사빈의 목소리만으로도 사태가 얼마나 다급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빈에
게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초조함과 다급함이 가득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윤기사에게 전화를 넣은 사빈은 피의 바다속에서 잔뜩 몸을 움크리고 겁먹은 표정으로 있는
정단에게로 가 자신의
파란 남방을 꺼내 정단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또다른 남방을 꺼내 너무 길어
끌고 갈 수 없는
침대시트 대신 정단의 손목에 감아 묶었다.
“ 나가면 윤기사가 기다릴거야.. 가자.. ”
사빈은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놀래서 그러는 것인지 오돌오돌 떨고
있는 정단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높이 안긴 정단이 무서워할까 뛰지도 못하고 잰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 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
역시나 놀래서 달려온 윤기사가 막 차에서 내려 정단을 안고 온 사빈에게 뒷문을 열어주었
다.
“ 병원으로 갑시다. 멀리까지 못 갑니다. 그냥 가까운데 아무데나 응급실 있는 곳으로 가
요.. 빨리!! ”
사빈은 뒷자석에 정단을 편안히 앉히고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안았다. 그리고 다시한번
손목을 감싼 천이 잘
묶여 있는지 출혈이 더 심해지진 않았는지를 유심히 살피고는 새하얗게 변해버린 정단의 얼
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 괜찮아.. 정단아... 괜찮아...”
불안해하는 정단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속삭이며 사빈의 자신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기대어 있는 싸늘한 정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여 정단의 손을 의사에게 보였을 때 사빈은 자신의 아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의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자세한 얘기를 듣고 나면 그들이 정단
을 이상한 여자처럼
취급할까 저어되어 사빈은 있었던 그대로 말하진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부인을 폭행하는
파렴치범으로 몰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빈을 바라보는 어느 누구도 그를 그러한 사람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응급실에서
정단의 피부를 한땀함땀 꿰고 들어가는 바늘을 볼때마다 사빈의 표정이 무섭게 이그러졌으
니 말이다. 또한 사빈은
진땀을 바작바작 흘리며 신음을 삼키는 어린 아내가 애처러워 미치겠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빈과 정단이 새벽의 악몽에서 벗어나 병원을 나설때는 파랗게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수혈을 해야할 만큼 피를 많이 흘렸던 것 같은데 걱정한 것보다는 출혈이 심하지
않았던지 의사는 봉합 후
바로 퇴원을 허락하였다.
사빈은 이른 새벽부터 윤기사와 자신을 고되게 했다고 미안해하는 정단을 달래주고 그길로
회사를 나와 강비서를 부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빈은 강비서가 사무실을 나선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이 알아보도록 지시했던 것을
취소하여 버렸다. 마치
바람난 부인의 뒤를 밟기 위해 돈을 지불해 사람을 사는 것처럼 자신의 아내에 대해 뒷조사
를 다른 사람이 하도록
시킨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강비서가 알아보기만 했다면 사빈이 궁금해 할 필요도
없이 즉시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알 수 있겠지만 그 자료를 가지고 정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다. 천천히
자신이 정단의 마음의 문을 열어 그녀 스스로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겠다는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만은 않으리란 것을 사빈은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사빈은 정단이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뜬 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언제
또 그녀가 악몽에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단의 상처가 다 아물어 실밥을 뽑을 때까지는 자신이
그녀의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사빈은 밤마다 정단쪽으로 돌아누어 그녀의 동그란 얼
굴이며 긴 속눈썹, 봉긋한
입술선을 유심히 살펴보며 길고 긴 밤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몸이 힘들긴 했지만
죽어도 밤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사빈의 몸이 정단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으리라.
그렇게 정단이 모르는 사빈의 보살핌 속에 정단의 손도 어느덧 손가락을 움직이는데는 문제
가 없을 정도로
아물어갔다. 이전에는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상처 때문에 심하게 피부가 당기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움직임에
있어 조심을 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상처에 물이 들어가거나 무거운 것을 집
어 올리기에는 무리였기에
사빈은 정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일하는 아주머니를 못나가게 하고 있었다. 그러
나 정단의 심한 반대로
사빈은 일하는 아주머니를 오전나절에만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도 저녁만큼은 실밥
을 푸를 때까지 사빈이
식사를 사가지고 들어온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래서 사빈은 요근래 정단을 먹일 식단을 생각하느라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면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생선초밥이 나을까 아니면 도시락을 사갈까.. 아니면 정단이 좋아하는 야채죽을 사갈까.. 사
빈은 실실 웃으며
이것저것을 떠올렸다. 그러다 사빈은 뭔가 좋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퇴근시간보다 이른 시
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 성실장님.. 벌써 퇴근이십니까? ”
사빈의 사무실 밖에서 채영과 함께 리조트 관련 출장에 대한 계획을 짜고 있던 유원이 요즘
외출과 이른 퇴근 잦은
사빈을 놀리듯 물었다.
“ 이런.. 우리는 이렇게 매일 야근하는데 일은 저희한테만 미뤄두시고 그럴 수 있으십니까?
맛있는 거라도
사주셔야죠.. ”
정단이 입원한 이후 사빈은 사흘만에 회사에 나와서는 강원도 리조트에 대한 리모델링 일을
유원에게로 일임하고
자신은 그 일에서 손을 떼겠노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오늘도 채영과 유원 단둘이서 출장에
대한 여러 가지 일정을
잡고 있던 것이다.
“ 출장 계획이나 잘 짜둬 보라고.. 내가 강원도 가서 근사하게 간식 사줄테니까.. 수고해
라... ”
일의 진행은 유원과 채영 둘이 해도 리조트사와의 계약은 사빈의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
로 이번 출장에는 사빈도
가야만했다. 정단을 두고 가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나마 정단의 손에 실밥을 뽑는
것을 보고 가기는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에서 빠지겠다는 사빈이 채영은 너무나 야속하였다. 마치 그날 정단과 만
난 이후 자신과의 사이에
금을 그어놓은 느낌이었다. 채영도 알고 있었다. 그 다음날 정단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아내의
간병을 위해 사빈이 회사를 사흘씩이나 쉬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채영은 아직도 사빈
이 그 작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단지 아내에 대한 도리와 의무같은 것들이 사빈을 옭아
매고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자신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믿으며 채영은 기다리고자 마
음 먹었다. 더 좋은
기회가 생길때까지 사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채영의 다짐을 알리 없
는 사빈은 향긋한
카레향이 풍기는 인도음식을 사들고 정단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빴다.
그리고 사빈이 그렇게 고대하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단은 오래간만에 샤워중이었다. 정단
이 다친 후로는 웬만하면
정단이 손을 쓰는 일이 없도록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자신이 다 알아서 하고 있는 사빈이
집에 들어올 때조차 벨을
누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기 때문에 욕실에 있는 정단은 사빈이
돌아온 사실도 모르고
한손만으로 머리를 감기위해 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사빈은 정단이 있는 욕실에 들어갈까하다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그녀를 잘 아는지라
정단이 나오기 전에
식탁이라도 차려야 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 음식을 꺼내려고 하는 순
간 물에 다으면 안된다고
의사가 신신당부했던 정단의 왼손이 떠올랐다. 그래서 사빈은 앞뒤 생각없이 욕실로 달려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 류정단!! ”
사빈이 걱정했던대로 정단은 왼손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면서 오른손만으로 머리를 감기 위
해 참 힘든 포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사빈의 모습을 발견하고서는 눈에 띌
정도로 빨갛게 몸을
붉혔다.
“ 나..나나..나가요!!! ”
정단이 아직도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포즈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빈에게 소릴
질렀다. 그러자 사빈은
두 손을 들어보이며 의외로 순순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나 정단이 숨을 돌리는 것도 잠
시 순순히 나갔던 만큼
당연스럽게 사빈이 다시 욕실로 들어왔다. 한손에는 위생봉투를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하얀
끈을 들고서 말이다.
사빈은 그것들을 들고 묵묵히 다가와 위생봉투를 정단의 왼손에 씌우고 들고 온 끈으로 총
총 묶었다. 그러나 손에
물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정단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상하게 끈을 묶었다. 그
리고 아직도 샴푸거품이
하얗게 묻어 있는 정단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 머리만 감은거야? ”
홀딱 벗은 몸으로 사빈의 앞에 있으면서 그나마 긴 머리카락이 어느정도 몸을 가려주는데
위안을 얻었던 정단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사빈은 정단을 욕조의 한구석에 앉혀놓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직접 손으로 온도를 재면서
사빈이 욕조에 물을 틀자 욕실안에 하얀 김이 가득 차올랐다. 이윽고 적절한 정도로 물이
차자 사빈은 입욕제를
풀어 거품이 나도록 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꼼지락 거리고 있는 정단을 반짝 들어올려 조
심스럽게 욕조안에
앉혔다.
“ 왼손 물에 안닿게 조심하고 있어.. 머리 헹궈줄게. ”
사빈은 정단의 손에 물이 닿지 않도록 자세를 조심하면서 정단의 고개를 욕조밖으로 숙이게
하여 샤워기로 머리를
헹궈줬다. 마치 고양이를 씻기는 것과 같은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정단은 사빈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자극하자 몸이 나른하게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자
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정단의 머리를 다 헹군 것인지 사빈이 부드러운 수건으로 정단
의 몸을 이곳저곳 닦고
있었다. 비록 거품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정단의 그의 손이 몸을 스치고 지
나가자 긴장이 되었다.
“ 나머진 알아서 하고 나와. ”
사빈은 여러 번 정단의 몸을 닦아준 뒤 먼저 욕실을 나왔다. 생각같아서는 머리끝부터 발끝
까지 씻겨주고 싶었지만
정단이 너무 부끄러워하여 욕조밖으로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빈이 나간 후 혼자 비누거품을 씻어내면서 정단은 다시 그에게 마음이 열려가고 있는 자
신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머리를 감겨주던 그의 손길이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손길을 정단은 놓치고 싶지
않다고 머리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했다.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빈에게 조심스러운 정단의 태도는 여전하였다.
- 그렇게 웃지마.
그때 사빈이 정단에게 그렇게 말한 이후로 정단은 살짝 입술이 늘어나는 것만 느껴도 긴장
하여 미소를 감추곤 했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것을 묻지 않았고 채영의 일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틈만 나
면 정단을 안고 있는
사빈의 품안에서 정단은 그가 자신을 버리지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정단의 소원을 이루어준 적이 없었다.
[ 정단씨? 저 정채영이에요.. 할말이 있는데 나오지 않겠어요? 정단씨가 들어둬야 할 말이
있어요. ]
또 다시 정단을 불안하게 하는 채영의 전화가 온 것이다. 이번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정말
사빈과 헤어져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속에서도 정단은 애써 그런 느낌을 부정하며 채영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
도 세상은 정단을 버렸다.
“ 정단씨와 사빈이 무슨 사이라고 생각해요? ”
채영이 하는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정단을 보면서 채영은 여유
롭게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은근한 미소를 한쪽 입술에만 걸고 입을 열었다.
“ 나와 정단씨.. 별로 다를게 없더라고요. ”
“ ..... ”
“ 당신... 사빈이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알고 있었어요? 혼인신고 안돼 있는거? ”
무픞위에 살포시 얹어져 있던 정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역시 성사빈이 어머니답다는 생각밖에 안들어요. 혼인신고를 안하다니.. ”
정단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자신이 직접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것을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면 채영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랐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사빈인 유부남이 아닌 거군요. 당신은 그의 부인이 아니구요. ”
채영은 이제 자신이 떳떳하게 사빈을 사랑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단은 사고
가 정지한 것처럼 머리가
텅비고 눈앞이 새하얀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채영이 계속 뭐라고 하고 있었지만 그것
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처럼 아득하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사빈과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던 고리가 끊어진 느낌이었다. 사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이 그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빈은 자신을 아껴주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보살핌도 아낌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사빈의 아내가 아니니까...
세상이 떨어지는 느낌. 그러나 아직 절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 그리고.. 이건.. 정단씨가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주는 말이에요. 진심으로.. 정단
씨 상처주려고
하는 말 아니에요.. ”
정단은 흐려진 눈을 들어 더 이상 무엇이 남았냐는 듯 채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채영의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정단의 눈동자는 비어 있었다.
“ 어머님이.. 사빈씨 어머니께서 알고 있어요. 뮤즈엔.. 그곳에서 정단씨가 남자들에게 웃음
을 팔았다는 것을
어머님은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 뮤즈..엔? ’
그곳은 어느덧 정단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릴 만큼 정단의 인생에서 의미없는 곳이었다. 그
러나 다시 정단의 뇌속을
비집고 들어온 그 단어는 몸속의 피를 다 말려버렸다. 뮤즈엔은 정단이 살던 상암동 근처에
있던 화려한 바였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만 바였지 실상 영업은 요정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3년전에 정
단은 어머니인 윤희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그곳에서 선불을 받고 일을 하기로 계약을 한 적이 있었다. 뒤늦게 위
암말기라는 것이 밝혀진
어머니를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죽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단은 뮤즈엔의 사장으로부터
2천만을 받았었다.
피붙이라고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단 둘밖에 없었던 정단으로선 주변에 치료비를 빌릴만한
친구도 그런 돈을 벌만한
일자리도 없었다. 정단이 19살이었던 그때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윤희는 정단의 곁을 떠났다. 어머니가 죽어가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 한번 가지 못했
다는 한을 딸의 가슴에
남기고서 말이다. 그리고 정단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필요가 없어진 돈을 뮤즈엔에 돌려주고
그 진흙탕에서 나왔다.
하지만 아직 털어지지 않은 먼지를 진여사가 알아본 모양이었다.
“ 사빈이 모르죠? 어머님이 사빈이한테 말하기 전에 정단씨가 알고 있었으면 했어요. 저..
억지로 정단씨와
사빈이 떼어놓으려는 거 아니니까요. ”
채영도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작은 여자가 쉽게 남한테 웃음을 팔고 몸을 팔 여자가 아니라
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이 정단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런식으로 이 여자가 자신처럼 진여사에게 쫓겨나
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정단은 채영의 연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채영은 정단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만은 피
하고 싶었다. 어린나이라
그런지 왠지 자신의 동생같고 하는 있는 것이 마치 3년전 자신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자
신이 아팠던 것처럼
정단이 아프길 원치 않는다. 채영은 자신이 정단을 그리 여기고 있다는 것을 지난번 사빈이
정단을 때릴 때
느꼈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정단을 내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 아
직은...
“ 아시죠? 어머님이 사빈이한테 다 말할 수 있다는거요. 사빈이와 정단씨의 혼인신고서를
왜 제출하지 않았을지
생각해봐요. ”
정단은 자신이 허상속에 살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인형이었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정당
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다 이젠 쓸모가 없어져 버려질 고장난 인형이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선 정신을 차려
야 했다.
‘ 정신차려라..그리고 생각해라.. 류정단...’
정단은 자꾸 정신을 놓으려는 자신을 다그치며 생각을 했다.
“ 당신은... 어떻게 알았죠? ”
정단은 자신에 대한 옛이야기를 어떻게 채영까지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 사빈씨도 모르는 사실들을 채영씬.. 어떻게 알고 있지요? ”
“ .... ”
“ 어머님께서 말씀해주셨나요? 저에 대해서? 그래서.. 어머님 대신에 저를 설득시키러 오신
건가요? ”
채영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자신이 마
치 진여사의 도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기분은 나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지금 제 남편 앞에 나타나신건가요? 어머님 부탁받아서? ”
채영은 여전히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서도 이성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정단이 신기하였다.
사실 처음 사빈의
결혼상대자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꼬마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채영은 그녀를 굉
장히 순진하거나 철이
없는 여자아이일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영이 보고 있는 이 꼬마 아가씨는 침
착하고 똑똑했다. 자신의
얘기를 듣자마자 울거나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 아가씨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
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른 것이 진여사라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채영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정단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채영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사빈씨.. 곁에 있고 싶어서 오신거 아니었나요?
“ !!! ”
당연히 채영은 사빈의 옆에 있으려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
가...
“ 전 채영씨가 사빈씨 못 잊어서 찾아온 줄 알았어요.. 저라는 사람이 그 사람 옆에 있어도
상관없다는 말
들었을 때 채영씨가 사빈씨를 참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죠? ”
“ 뭐가..아니라는 거죠? ”
“ 당신은 어머님이 저를 떼어내라고 부르시지 않았으면 안 나타났을테니까요.. 사빈씨의 아
내한테 약점이 없었다면
다시 사빈씨를 되찾을 시도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
‘ 이여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지금? ’
채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업을 텐데 정단은 사
비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마음까지도 헤아리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 당신이 원하고.. 사빈씨가 원했다면.. 당신이 옆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고작 어머님한테 부탁받아서 온거였어요? ”
이제야 정단의 눈이 투명하게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 이..여자.. ’
채영에게 정단은 이상한 생물로 보였다. 자신이 사빈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채영이
사빈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더 충격을 받다니.. 그러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 이 여자
가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순수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가증스럽게 사빈을 사랑하는척 걱정하는척..
자신의 마음은
순수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정단이 싫었다.
“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지 않나요? 이제 제가 사빈의 옆에 있어도 되는지 안되는
지엔 정단씨의
생각따위는 필요 없어졌는데... 아! 걱정은 하지 말아요. 어머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저
도 사빈에게 어떤
얘기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
그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채영은 잔인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 사빈과 당신 사이엔 아무 것도 없다구요.. 이제 당신이 사빈을 떠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요? 어머님이
다 알고 계시니까요.. 그걸.. 사빈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 그렇군요.. 일부러 시간 내셔서 저한테 이런 얘기 해주셔서 감사해야 겠군요. 그럼 전 이
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들어야 할 것은 다 끝났지요? ”
채영은 대답없이 힘없이 일어나는 정단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하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가 꺽여 휘청이는
정단을 일으켜 주어야 했다.
“ 괜찮아요? ”
정단은 자신의 팔을 부축해주는 채영을 살짝 바라보고는 힘겹게 미소짓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채영에게 인사를 하고서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비치는 거리로 나왔다. 채영은 정단이 조금
만 더 늦게 돌아섰다면
어쩜 자신은 오늘 그녀의 눈물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
는 정단의 뒷모습을 맑은
햇살이 보듬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집으로 모실까요? ”
정단의 오래간만의 외출에 기뻤던 것은 윤기사였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정단
의 지친 모습에 좀 전의
기쁨은 찾을 수가 없었다.
“ 아니요. 동사무소로 가주세요. ”
윤기사는 피곤한 정단을 빨리 집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정단은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인지 동
사무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정단을 보는 순간 윤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 사모님!!! ”
정단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안하고 초조한 기운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윤기사의 걱정과는 달리 정단은 ‘왜요?’라는 표정으로 웃음지으며 윤기사를 바라
보았다. 거의 2주일만에
보는 정단의 미소였다. 그리고 윤기사의 불안했던 마음은 오래간만에 보는 정단의 예쁜 미
소에 잊혀졌다. 하지만
정단이 피가 날 듯 세게 손으로 쥐고 있던 종이를 그는 보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채영이 한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정단이 동사무소에서 확인한 등본에는 류정단
자신의 이름만이 올려져
있었다. 사빈의 가족으로 올려지지 못한 것이었다.
******
생각해보니 대단한 일이었다. 정단은 자신의 시어머니인 진여사가 참으로 대단하다 생각되
었다. 모든 것은 그러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진여사는 정단의 문제를 다 알고 있었다. 사생아라는 것에서부터 뒤늦게
사빈과의 정략결혼을 위해
류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 까지.. 그리고 류회장이 인질과 같이 정단의 외할머니를 잡
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모든 것들도 다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는 여자로서 흠
밖에 없다는 그런
사실들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여사가 아무말 없이 자신과 사빈의 결혼을 두고봤던
것은 아마도 영빈을
문제없이 흡수하기 위한 것이였으리라. 하지만 영빈이 성진계열로 들어간 지금 정단은 더
이상 쓸모도 없고 성진의
며느리로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여자를 계속 며느리로 보느니
차라리 아들과 이혼시키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진여사는 찾았을
것이다. 결혼무효...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소리소문 없이 자신을 내치려 계획했을 터이다.
그런 진여사의 무서운 계획 한가운데 서있는 것이 정단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단은
이대로 내쳐질 수는
없었다. 이제 정단이 돌아갈 곳은 아무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빈을 잃고 싶
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 나눠갖을 지언정 버리고 싶지 않았던 남자인 자신의 남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러나 사빈도 자신에 대해
다 알고 나면 떠날 것이다. 류회장의 사생아이며 한때 요정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사빈이
알면 다 끝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여사가 마음 먹은 날 끝이 날 것이다. 정단으로서는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단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빈의 작은 미소에 가슴이 아려 눈물이 날 것 같
은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가 옆에 있어도 그리움에 허덕이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정단은 그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곧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릴테고 요정의 마법이 풀려 신데렐라는 다시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집착이 정단의 마음속에 독처럼 퍼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
어도 사빈과 함께 있고
싶다는 독점욕이 정단을 병들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빈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죽을 때까지 사빈과 함께 산다해도 결국 이 세상에서
정단은 사빈의 아내로
남지는 못할 것이다. 정단과 사빈이 법적인 부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빈이 알게 되는 날
정단의 과거도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단은 절대 사빈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부부가
아니라는 말을..
“ 무슨 생각해? ”
사빈은 병원갔다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는 정단이 이상해 보였다. 정
단이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이든 사람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의 정단은 말 없이 가만
히 정면만 주시하고
있다거나 어쩔 때는 한숨을 한번씩 푹 쉬어주는 것이 영낙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 아..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예요.. ”
정단은 멍하니 있다 사빈이 물어오는 질문에 답했다.
“ 어때? 손은? ”
사빈은 조금 전 병원에서 실밥을 풀은 정단의 손이 어떤지 궁금하였다.
“ 손이요? 괜찮아요..”
정단의 사빈의 눈앞에 손을 들어올리며 펼쳐보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하고 손가락을 폈다 굽혔다
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정단의 손바닥을 가로지르며 손목에까지 이어
져 있는 흉터가 사빈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핑크빛을 머금은 투명한 흉터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하였다.
사빈은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정단의 손을 잡아 그 흉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자 정단이 몸
을 움찔거렸다.
“ 아파? ”
사빈이 걱정스러운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단이 움츠러들자 아직도 상처가 아픈 것인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 아..아니요. 그냥.. 간지러워서요. ”
정단은 정말로 간지러운지 살짝 웃음을 흘렸다. 참으려는 듯 찡그린 웃음이었지만 요근래
정단의 그런 얼굴을 보지
못했던 사빈을 홀리기에는 충분했다. 사빈은 살짝 혀를 내밀어 정단의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핥았다.
- 움찔..
정단은 더 간지러운지 사빈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하였다. 하지만 사빈은 그런 정단의 손을
더 꼭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 사빈씨!!! ”
정단이 곤란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점점 상처가 이어진 손목으로 팔등으로 사빈의 입술이
옮겨갔다. 그리고 사빈의
입술이 정단의 목덜미를 거쳐 입술에 도착했을 때 정단은 눈을 감아버렸다. 가만히 눈을 감
고 안겨오는 정단에게
만족한 사빈이 소파로 정단을 누이며 더욱 깊게 키스해왔다. 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입술에 성적인
욕심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강아지처럼 정단의 목덜미만 핥던 사빈이 어미의 젖을 찾듯 정
단의 가슴으로 파고 들며
꼼지락꼼지락 정단의 단추를 풀기 위해 침착하면서도 서두르며 사빈의 손가락은 움직였다.
“ 회사.. 다시 안가보세요? ”
사빈의 얌전한 애무에 속았다고 생각한 정단은 자신의 옷을 벗기려는 사빈의 손을 붙들고
뉘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나 사빈은 정단이 일어난대로 다시 키스를 하며 정단을 끌어안았다. 정단만의
수줍은 키스.. 도망치는
듯 살짝살짝 마주 감아오는 혀가 사빈을 미치게 만들었다.
“ 내가 주인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돼.. ”
사빈은 정단의 귓불에 살짝 키스하며 속삭이고 정단을 아기처럼 앞으로 안아 올려 하나도
무겁지 않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옮겨가 정단을 눕혔다. 그리고 풀어지다 만 정단의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너무 오래간만이었지만
그때까지 사빈은 침착했다. 그러나 반쯤 벗겨진 바지위로 뽀얀 정단의 복부가 들어나자 사
빈의 입속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검정색과 대비되어 더욱 하얗게 빛나는 정단의 피부가 사빈의 눈을 어지럽혔다.
“ .. 단아.. ”
은은한 살내음과 현기증이 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리고 숨결.. 자신의 후각과 시각, 청각을
모두 마비시키는
여자를 눈앞에 두고 사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빈의 촉각마저 사로잡는
정단의 부드러운 살결이
사빈의 남아있던 정신을 앗아가면서 침실안에는 정단과 사빈이 침대위를 움직이는 사락거리
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그런데 사빈은 너무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좀처럼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했다. 이미 몸은 한
계상황에 달했을 만큼
피곤했지만 정신적인 충족감 때문인지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다른 때는
사빈과의 관계에서 쉽게
지쳤던 정단도 오늘은 사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정신을 놓치 않고 있었다.
사빈은 자신의 귀와 머리를 오가며 부드럽게 자신을 애무하고 있는 정단의 손을 잡아 자신
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손이 원하던대로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심장이 멈춘 것처럼 숨을 쉬기
가 힘들었다. 사빈은
자신의 심장을 잡고 있는 그 손을 떼어내어 침대에 올려 마주잡았다. 그런데 흥분을 해서
그런지 정단의 흉터가
붉게 변해 있었다. 사빈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흐려진 정단의 눈동자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채 미소지으며 정단의
손을 가져다 흉터부분을 살짝 깨물었다.
“ 사..빈씨.. ”
정단이 아픔때문인지 자극때문인지 모를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그러자 사빈이 고개
를 숙여 빨갛게 피가 돌고
있는 정단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 그래.. 나 여깄어..”
그 뒤로 정단은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한가지만을 새기며 사빈을 느꼈
다. 이남자를..
잃고싶지 않다고..
사빈은 역시나 죽은 듯 잠들어버린 정단을 보면서 정단의 얼굴을 반쯤 가리며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손가락에 휘감기는 비단실 같은 정단의 머릿결이 사빈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정단을
이루는 모든 것은 다
부드러운 것 같았다. 하얀 피부도 머릿결도 입술이며 손가락까지.. 사빈은 자신의 옆에 살포
시 놓여있는 정단의
손을 들어 만지작거리다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엔 사빈 역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몸에 관절이 빠진 것처럼 흐느적거리
고 있었다. 무섭게 뛰던
심장도 진정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가슴이 벅찬 것 같았다. 하지만 사빈은 곧바로 일어
나 뭔가를 들고 와
정단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윤기사에게 돌려 받은 뒤 정단의 손이 완전히
낫질 않아 사빈이 들고
다니던 결혼 반지였다. 사빈은 정단의 손위에서 약간은 무겁게 반짝이는 반지를 보고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에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빈도 곧 정단의 반지낀 손에 살며시 키스하며
잠이 들어 버렸다.
하지만 다시 평온을 찾은 사빈과 달리 정단의 하루하루는 점점 병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정단은 사빈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긴장하며 깨질 것같은 얼음위를 걷고 있는 불안감에
살았다. 사빈이 늦는
날에는 그가 어디에 있을지 혹시 채영과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시달렸고 그가 무심
한 표정을 보이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것을 아닐까하는 초조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 점점 정단은
미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사빈은 그런 정단이 아직도 그때의 일로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어찌
되었던 제대로 사과를
해야할 것이다. 여자를 때리는 남자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했다. 사빈은 자신도 자꾸 떠
오르는 그때의 일을
정단이 잊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과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더
욱이 타이밍을 놓쳐버린
사과는 다시 하기 더 힘든 법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사빈은 배를 한조각 입에 문채 과일을
깍고 있는 정단만
뚫어져라 바라보다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냔 말이다.. 그 타이밍이..
그리고 사과할 기회를 노리며 사빈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원과 채영과의 강원도 출장이
삼주일 뒤로 다가왔다.
세부적인 일에서는 빠졌지만 공사가 들어가기 전 사빈도 같이 가야만 했다. 3박 4일의 비교
적 잛은 일정이기는
했지만 정단을 혼자 두고 간다는 것이 사빈은 마음에 걸렸다. 프랑스 출장때는 일주일이나
떠나있기는 했었지만
얼마전 정단이 아팠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안놓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단
을 강원도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채영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출장일정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사빈은 무
리를 해서라도 하루라도
더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빈이 그런 근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정단도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죽어가는 느낌이었
다. 차라리 사빈이 다른
사람으로 듣기 전 자신이 고백할까도 생각해볼 정도였다. 사실대로 말하고 나면 초조함과
불안감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지쳐 자신도 모르게 말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혐오스
럽게 바라볼 그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한번도 다른 남자에게 웃음을 판적이 없었지만 그래
도 뮤즈엔에 관계되었던
이상 사빈이 자신을 용서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림받을 때의 아픔보다는 지
금의 불안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에 정단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정단은 불안한 마음과 함
께 날이 감에 따라
점점 사빈에 대한 집착만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정단과 사빈이 서로의 온기를 찾을 정
도로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제 하늘을 떠도는 바람엔 촉촉한 물기가 차고 있었다. 아직
땀이 날 정도의
날씨였지만 곧 다가올 높은 하늘의 파란바람을 기대할 정도로 날은 고와지고 있었다. 그리
고 정단에게는 잔인하기만
했던 그 길고 긴 여름이 끝나가고 있을 때 정단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
제는 아픔만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 아가씨께서 다쳤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
윤비서는 화사한 붉은 장미를 한아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멋쩍은 듯 어색하게 정단에게 그
것을 안겨주었다. 그러자
장미꽃보다도 더 화사한 미소가 윤비서의 눈으로 들어왔다.
“ 네.. 아저씨.. 이제 다 나았아요. 그리고 별로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
물을 머금은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윤비서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정단이 답했다.
“ 걱정했었습니다. ”
짧은 한마디였지만 정단은 류회장의 집에 있는 동안 때로는 오빠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자
신을 보살펴 주었던
윤비서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단은 윤비서가 즐겨마시던 밀크티를 준비하며
오래간만에 느끼는 평온한
시간을 즐겼다. 얼그레이의 기분좋은 차향이 집안을 가득 채우며 정단은 윤비서가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밀크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웃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물론 그때 윤비서는
전무후무하게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정단과 함께 웃었었다. 하지만 정단과 윤비서는 그렇게 유쾌한 추억보다
아픈 추억이 더 많은
관계였다.
“ 오늘 온 것은 전해 드릴게 있어서입니다. 원래 지난번에 드릴려고 했었는데 다른 서류들
과 섞여 있어서 제가
찾지 못했습니다. 너무 늦게 전해드려서 죄송합니다. ”
달콤한 밀크티를 즐기고 난 후 윤비서는 가방안에서 두 개의 봉투를 꺼내 정단에게 건냈다.
“ 이건... ”
“ 제가 아가씨 외할머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아가씨게 남기신 말쓰을 대신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가씨와 할머님이 이전에 사시던 집의 전세 계약서고요. ”
작은 봉투를 펼치는 정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
그러나 정단은 꺼내다 만 편지를 다시 봉투로 집어넣었다. 손이 떨리고 있어 편지가 구겨지
고 있었지만 정단은 그
일에만 필사적인 듯 약간은 접혀진 편지가 봉투안에 다 들어가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 네?.. 네.. 이건.. 나중에 읽어보도록 할게요.. ”
윤비서는 정단에게 힘든 일만 전해주는 자신의 역할에 착찹함을 느꼈다. 그러나 정단의 곁
에 사빈이 있다는 것에
그는 안도했다. 자신이 해줄 수 없는 위안을 그가 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비서는
정단의 집을 나서면서
정단의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 저는 아가씨가..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나 윤비서가 전해준 편지는 정단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었다. 처음엔 그 편지가 쓰
여졌을 무렵의 할머니가
떠올라 편지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가면서 정단은 할머니가 바
로 자신의 곁에 있는 것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다 읽고 났을 때 정단은 진심으로 행복한 기분에
미소지을 수 있었다.
“ 할..머니.. ”
정단의 외할머니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글을 남겼다. 조금의 슬
픔이나 아쉬움도 느낄 수
없는 편지였다. 아마도 앞으로 더 많은 인생을 살아갈 정단이 행복한 생각만 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할머니와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잊지 말라고 하셨다. 과거를
잊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빈과 결혼한 이후 언제나 불행했던 과거를 잊으려고만 했던 정단에게 새
로운 세상을 보게 해주는
말이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에게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잊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기억했다면 세상에 슬퍼할 일이란 없을 것이란다.
이젠 너를 찾을 수 있을거야..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너만을 위해 살아라.. 정단아..
이제 그럴 수 있다는 것에 할머니는 기쁘단다...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나만의 위한 삶...
정단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6. 이별
“ 아마 일이 잘 끝나면 내일 모레 돌아올 수 있을거야.. ”
드디어 사빈이 강원도로 출장가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 그쪽은 벌써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을텐데 감기 조심하세요. ”
정단은 사빈의 타이를 바로 매주며 살며시 남방의 앞부분의 주름을 펴주었다. 그런데 정단
의 손끝이 사빈의 심장바로
위 피부에 닿자 그는 자신의 피가 심장으로 몰려들며 급격히 뛰는 것을 느꼈다. 사빈은 이
틀전부터 예전의 맑은
모습으로 돌아간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자신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모든 것을 다 정리
하고자 마음 먹었다.
“ 다녀올게.. ”
“ 네.. 건강.. 하셔야해요.. ”
사빈은 정단의 왼손을 살짝 만져주고 돌아섰다. 하지만 차에 오르기 전 뒤에 서있는 정단에
게로 되돌아와 속삭였다.
사빈의 낮은 목소리가 바람처럼 정단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들려왔다.
“ 삼일 후에 돌아와서 당신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할거야. 그러니까.. 우리.. 삼일 후엔 화해
하자..”
그 말을 남긴 사빈이 탄 차는 이미 저 멀리 점처럼 사라졌지만 정단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
하고 서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사라졌을 때 아침의 밝은 햇살을 받으며 이슬처럼 반짝이는 눈물 한방울이 정
단의 눈에 맺혔다. 그리고
그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정단은 입을 열었다.
“ 이미.. 전... ”
그러나 이미 정단을 멀리 떠나온 사빈은 그런 정단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 이미.. 전... 알고 있는걸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
하지만 정단을 뒤로 한 채 돌아서던 사빈의 마음속에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 네... 건강... 하셔야 해요..
무엇보다도 사빈은 정단이 한 마지막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건강..하셔야 해요? 그것은
꼭 다시는 못 볼
사람이 하는 작별인사 같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요 며칠간의 행동이 이상했다. 그러나 사빈
은 자신의 괜한
걱정이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안좋은 상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대신 사빈은 정단과 함께 보냈던 지난 일요일을 떠올렸다. 오래간만에 쉴 수 있었던 일요
일, 아침 늦게까지함께
늦잠을 잔 사빈과 정단은 일하는 아줌마가 해놓고 간 아침밥을 먹고 잠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오후시간을 뒹굴었다. 그리고 소파보다는 바닥에 내려앉는 것을 좋아하는 정단은 그날
도 사빈의 다리밑에 앉아
고구마케익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었는지 사빈은 바닥에 앉아 있던 정단
을 달랑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처음엔 바둥거리며 일어나려던 정단도 사빈의 턱이 머리를 내리누르며 움직
이지 못하도록 제압하자
내려 앉는 것은 포기하고 또다시 얌전히 케익만 먹었다. 하지만 정단은 곧 이어지는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케익을
먹던 포크를 내려놔야만 했다. 그리고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멈추지 않는 그 시선에 정단
은 슬며시 곁눈으로
사빈을 올려다 보았다. 역시나 사빈은 무표정하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 흔들림 없는
눈빛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정단의 입술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빈의 눈빛을 감지한 정단이
아깝다는 듯이 케익을
떠서 사빈에게 내밀었다. 사빈이 케익을 먹고싶어 했다고 본 정단의 생각과 다르게 그가 탐
냈던 것은 케익이
아니었지만 사빈은 정단이 내밀은 케익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입안에서 크림을 녹이면서도
사빈의 시선은 정단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케익을 줘도 사빈이 불만스런 표정을 거두지 않자 도대체 뭘 원하냐는 식으로 사빈
을 바라보며 접시를
내려놓고 일어날 것 같았던 정단은 사빈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키다 말고 사빈에게 다가가
사빈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사빈의 오른쪽 볼에 입을 맞췄다. 처음 정단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2순간 사빈도 긴장하는 듯
몸에 힘을 주었지만 정단이 입을 맞추자 이내 등을 소파에 기대며 편안한 자세로 정단을 기
다렸다.
그러자 정단은 사빈의 눈을 손으로 가린 상태에서 사빈의 왼쪽 볼에도 턱에도 입을 맞추며
맴돌았다. 하지만 정단의
입술은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정단의 느린 움직임 때문에 갈증을 느꼈을 사
빈의 입술이 더 이상
정단의 입술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다가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원하던
것을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드럽게 살짝 와닿던 그것은 바로 뒤로 빠지며 사빈에게서 벗어났고 사빈은 감질맛
이 난다는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정단은 장난을 치듯 자신의 키스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사빈의 입술에 자
신의 입술대신 크림을
가져다 대었다.
사빈은 자꾸 정단이 약을 올리자 드디어 인내심이 바닥 났는지 정단을 안은 손에 힘을 주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이 사빈의 입술과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상태에 놓인 정단이 살짝 혀
를 내밀어 사빈의 입술에
묻혀진 크림을 핥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잡으려는 듯 살며시 마중나온 사빈의 혀를
피해 도망가며 사빈의
귀에 속삭였다.
“ 케익 맛있었죠? ”
사빈은 귀여운 자신의 아내가 옆에 있는 듯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웃
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개구쟁이처럼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던 정단을 생각하니 사빈은 어느새 강원도에
도착해 있었다.
“ 늦었잖아.. 성사빈.. ”
먼저 도착한 유원이 여유롭게 담배를 피며 사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 혼자서 심심해 죽는줄 알았어.. ”
“ 채영인? ”
새벽에 출발한 것인지 사빈보다 2시간이나 먼저 도착했다는 유원은 귀엽게 툴툴거리고 있었
으나 유원과 같이 왔을
것이라 생각했던 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응.. 내일 온다고 그랬어. 채영인 우리와 하는 일이 다르니까..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겠
지? ”
“ 응.. ”
사빈은 오히려 채영과 대면하지 않는게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만나면 측은한 생
각에 감정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채영에 대한 걱정도 못하게 유원이 사빈을 채근했다.
“ 빨리 견적이나 뽑아보자.. 너 하루 먼저 가고 싶으면 움직이라고 움직여!!! ”
그렇게 유원과 함께 사빈은 리조트에 포함된 레스토랑과 콘도 등 여러 건물들을 다니며 설
계에 필요한 건물사진을
찍고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고 유원이 배가 고프다며 성질을 부릴 때서야 숙소로 돌아와 점
심을 먹었다.
“ 우리 저 위에 있는 오두막에는 언제 갈거야? 이따 가볼까? ”
“ 응.. 잠시 쉬었다 3시쯤 올라가 보자.. ”
“ 3시? 그럼 그동안은 자유시간인 겁니까, 실장님? ”
여지껏 말을 짧게 끊어먹던 유원이 갑자기 직위를 거론하며 눈에 빛을 냈다. 분명 아까 레
스토랑에서 찍어둔
커리스파게티를 먹고 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도 또 음식이 들어갈 공간이 있다
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원이 혼자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동안 사빈은 전화기만 붙들고 앉아 있었다. 서울
에 있는 정단에게 거는
전화였다. 그런데 불안하게도 계속 신호음만 들릴뿐 사빈이 원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외출을 한건가
싶어 윤기사에게 전화를 했지만 윤기사도 전화를 받지 않아 사빈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
다. 하지만 이렇게 안달하는
자신이 비정상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빈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그
래.. 잠시 외출하면 전화야
못받을 수도 있는거지.. 사빈은 이번에 돌아가면 정단에게 핸드폰을 매달아줘야겠다고 생각
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렇게 정단의 부재로 인한 사빈의 걱정도 정단에게 어떤 디자인의 핸드폰이 어
울릴까를 생각하며
잊혀졌다. 그리고 오두막을 오르며 사빈이 다시 전화했을 때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가 사빈
의 걱정을 아예 잠재워
버렸다.
“ 어디 갔었던 거야? ”
[ 네? 네.. 아.. 네!! 잠시 나갔다 왔어요.. 왜요? ]
정단은 전화를 받자마자 물어오는 사빈의 목소리에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그 목
소리에 사빈은 자신이
이상한 생각을 했던 거라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안도했지만 아직 마음까지 안심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날밤을 지나며 다
음날 아침해가 뜰 때까지
사빈의 가슴은 이유없이 떨렸으니..그리고 다음날 도착한 채영의 얼굴을 대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떨림이 정단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빈은 깨달았다.
“ 왔어? ”
“ 응.. ”
하지만 강원도에 도착해 사빈의 얼굴을 마주한 채영도 가뿐한 기분은 아니었다. 망설여지는
마음을 가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만나고 온 정단이 이상했다. 갑자기 먼저 전화를 해온 것도 그렇고 그 표정
과 행동 모든 것이 다
이상했다.
“ 채영씨는 사빈씨랑 함께 있는 지금이 행복한가요? ”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 네..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니까요..”
채영의 대답에 정단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다.
“ 그럼.. 정단씨는 사빈과 지낸 시간이 행복했나요? ”
이번엔 채영이 정단과 똑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 그럼요.. 사빈씨는 자상한 남편이었으니까요. ”
이었으니까요? 이상한 대답이었다.
“ 앞으로도... 행복하세요.. ”
“ ..... ”
다시 한번 방긋.. 정단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어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영은 자신
도 모르게 그런 정단의
팔을 붙잡았다.
“ 정단씨는요? ”
정단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 저도 .. 행복해 질거예요.. ”
그렇게 말한 정단은 다시 한번 채영을 향해 온화하게 웃었다. 그리고 공기중에 부서져 흩어
질 것처럼 희미하게
사라졌다.
‘ 어떻게 당신은 나를 보면서 그렇게 미소지을 수 있지? 자신의 남자를 빼앗으려는 나에
게...
*******
충분히 이상한 행동이었다. 꼭 어딘가로 떠나기전 뭔가를 확인하는 사람같았다. 떠나..려는
것인가? 하지만 어제
이상했던 정단에 대해 사빈에게 말하진 않을 것이다. 비겁하다해도 채영은 정단이 조용히
떠나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빈의 마음이 어디에 멈춰 있는지를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나.. 말하지 않는다.. 당신 여자가 당신 떠나려고 하고 있다는 거.. 나 말하지 않을거야..
’
그러나 채영이 말해주지 않아도 사빈은 하루종일 아내에 대한 불안감에 온몸에 바늘이 선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불안감이 온몸을 차오르는 것 같았다. 작게 배속 깊숙한 곳에서 두근거리던
그것은 점차 피를 타고
오르고 올라 심장을 점령해버렸고 이제는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한기마저 느끼며 사빈은 옥죄어 오는 심장 때문에 가슴을 움켜 잡았다.
“ 사빈아? 왜 그래? ”
수익이 없어 정리할 쓸모없는 매장을 둘러보던 유원은 자꾸 겉도는 사빈이 이상하였다. 매
장의 새로운 인테리어를
위해 이곳저곳 사진을 찍던 채영도 안절부절 하는 사빈을 쳐다보았다.
“ 미안한데.. 나 잠시 쉬다 따라갈게..”
결국 사빈은 정단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두근..두근.. 신호음과 함께 심장이 머리에서 울렸다. 그러나 단절되는 신호음에 이어지는 고
운 목소리가 사빈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 여보세요.. ]
“ 정단...아.. ”
정단을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
[ 무슨 일 있으세요? ]
“ 아..아니.. 그냥.. ”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단은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집에 있을 것이다. 잠
시 떨어져 있는 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 것이라고 사빈은 생각했다.
[ 일은 잘 되고 계세요? ]
“ 잘 되고 있어.. ”
이렇게 잠시 떨어져있는 것으로도 불안하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사빈은 막막했다.
출장이 있을 때마다
정단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것이었고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의처증에 걸려 미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 그래.. 당신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어. ”
[ 네.. ]
“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일하면서도 전화는 받을 수 있으니까, 응? ”
사빈은 지난번 정단이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자신이 6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데
화가 났었다. 부인에게
무슨일이 있으면 남편인 자신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하지 않는가.
[ 네.. 그렇게 할게요. ]
“ 그래.. ”
언제나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정단이 다른 말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하자
사빈은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통화가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려온 정단의 목소리는 안
녕..이었다. 사빈에게
한번도 반말을 한적 없는 정단이라 그 뒤의 말이 끊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정말 안녕이
라고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였다. 어제는 정단의 목소리를 듣고나서 불안감이 사라졌는데 오늘
은 정단의 목소리를 들어도
불안한 것이 말이다. 자꾸자꾸 심장이 뛰었다.
“ 미쳤구나.. 너.. ”
하지만 사빈은 자신의 주책없는 심장을 나무라며 유원과 채영이 있을 곳으로 이동했다. 그
러나 정단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자신의 과대망상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그 외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이 이상한 기분은
뭐라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빈은 어쩔 수 없이 의처증에 걸린 남자가 되기로 했
다. 그런 결심을
하자마자 사빈은 숙소에 있을 김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 김기사.. 집으로 전화 넣어서 사모님 전화 받는지 확인해봐.. ”
[ 전화.. 요? ]
갑자기 정단에게 전화를 걸라는 사빈의 말에 김기사가 놀란 듯하였지만 상관없다는 듯 사빈
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 그래.. ”
[ 알겠습니다. ]
사빈은 제발 정단이 집에서 김기사의 전화를 받기를 바라며 김기사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
러나 김기사의 보고는
사빈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뿐이었다.
[ 지금 안받으십니다.. 집에 안계시는 것 같은데요.. ]
“ 계속 걸어... 받을 때까지.. 그리고 연결 되면 나한테 보고해.. ”
그래.. 외출했을 수도 있다. 어제도 늦게 받았으니까.. 사빈은 그렇게 속을 다지며 유원과 테
마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몸만이 기계적으로 유원을 따르고 있을뿐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어느듯 하루가 다 지나 해가 떨어져 주변이 까마득한 벌판으로 변해버렸을 때까지
김기사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 집사람은요? ”
사빈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김기사를 찾았다.
“ 삼십분마다 전화를 들였지만 아직 전화연락이 안됐습니다.”
사빈의 이 미련한 기사는 말대로 정확히 30분마다 전화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
론은 정단이 집에
없다는 것이된다.
“ 알았어.. 이젠 됐어.. ”
사빈은 김기사를 물리고 자신이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제도 이쯤에 받았으며 분명
지금도 전화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심호음은 끊기지 않았다.
어디를 간 것일까.. 어디가 아픈건가? 사빈은 가능한한 모든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녀가 지금
전화를 안받는 것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런데 순간 사빈의 동공을 벨 듯 아찔한 영상이 사
빈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 건강.. 하셔야 해요..
- 안녕..
그 표정.. 행동.. 목소리.. 모든 것이 다 이상했다.
그래도 사빈은 다시 한번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에 받으면.. 이번에만 받으면 된다. 하지만
사빈의 간절한 기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제기랄---!!! "
전화기가 코드째 뽑혀 방안을 뒹굴었다. 그러나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이미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 야!!! 성사빈!! 어디가? "
엘리케이터를 타고 올라오던 유원과 채영은 무작정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뛰어 들어간 사빈
을 발견하였다. 약간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를 가진 사빈에게서 한번도 본 적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 나.. 집에 다녀올거야..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올테니까.. 걱정말고 있어! ”
“ 야!! 집엔 왜!! ”
갑자기 집에 간다는 사빈에 당황하여 유원이 물었지만 유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 하얗게 질
린 사빈의 얼굴이 문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 저녀석 왜 저러는거야.. ”
유원이 사빈이 얼마나 다급한지 애가 탄 가슴은 얼마나 새까맣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
만 채영만이 싸늘히 굳어
사빈의 얼굴 대신 유원과 자신의 모습만 비추고 있는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빈은 밤이라 텅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이기를 빌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정단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반겨줄거라 믿었다. 그래서 윤기사나 강비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단을 찾으라 했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 쓸데없는 망상이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집에 있다는 것을..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불
안은 사빈을 편히
놔두질 않았다.
‘ 그런데 지금 너는 뭐가 두려워서 이렇게 조급히 달려가고 있는거지? 불안한거야.. 그렇
지? ’
‘ 그래.. 집에 가면 그녀가 있을텐데 나는 왜 이리 서두르는거지? 곧 만날텐데... ’
그래도 이렇게 급히 달려가는 것은 빨리 확인하고 싶u 사빈은 생각했다. 그리
고 정단과 두시간 동안만
잠을 잔 뒤 다시 돌아오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차안에 연결된 핸드폰에서조차 정
단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 젠장.. 젠장... 젠장.. 왜 안받는거야!! 받아!! 받아---!!!! ”
몸은 정단이 있는 곳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아마 사빈이 운
전을 위해 움직인
손놀림보다 핸드폰의 재다이얼을 누르는 움직임이 더 많았을 것이다.
“ 정단아... 제발.. 받아라.. 제발.. ”
이제 사빈은 조용히 정단에게 빌고 있었다. 그러나 다급함에 손이 떨려 버튼을 누를 수 없
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빈은 핸드폰을 내리쳐버렸다. 금속성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차체마저 흔들리는 것 같
았지만 사빈은 핸드폰이
박살랄정도로 내리친 다음 차의 속도를 올렸다. 어쩌면 면허정지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하지만 사빈은 정단이
안전히 있는 것만 확인하면 죽어도 된다는 심정으로 차를 몰았다.
‘ 정단아... 제발... ’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 조금 만 더 가면 정단이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집
과 가까워질수록
사빈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현실과 직면할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만약 정단이 집
에 없다면 어쩌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말인가...
- 끼이이이이익!!!
고요한 새벽의 주택가사이로 사빈의 차가 요란한 주차를 했다. 드디어 온 것이다. 그런데 차
에서 내리는 순간
사빈의 눈에 들어오는 불빛하나 없는 집이 사빈의 심장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오싹한 소름
이 허리를 타고 머리를
때리며 아찔한 현기증을 일게했지만 정단이 자고 있는 것이다, 자고 있기 때문에 불을 끊
것이리라 자신을
안심시키며 사빈은 문을 열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문도 잘 잠겨 있었고 정원도 그대로였
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선 순간 사빈은 직감했다. 그녀가 없다는 것을...
집안에 사람의 온기라고는 남아있질 않았다. 그래도 사빈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작은
아내는 저 안에
침실에서 침대위에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
라고 외치고 있지만 가슴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뇌가 말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단을 부르는
사빈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왔다.
“ 저..정단아!!! 류정단!!! ”
**********
사빈은 신도 벗지 않고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두근... 세상이 산산히 부서져 떨어지고 있었
다. 하얀 침대 위에는 달빛만이 내려앉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어야 할 사빈의 아내는 없었다.
사빈은 거실로 뛰어나와 집안의 모든 전등을 작동시키는 중앙버튼을 눌렀다. 어둠속에만 있
었던 사빈의 눈이 부실정도로 환하게 집안이 밝혀졌다. 그러나 사빈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
르고 있었다. 집안 어디서 정단을 찾아야 할지..
“ 저..정단아.. ”
이미 까맣게 타버린지 오래인 가슴을 거슬러 목구멍까지 타들어 오는지 소리도 제대로 나오
지 않았다. 쇠소리 같이 갈리는 소리만이 간신히 나왔다. 하지만 사빈은 미친사람과 같이 정
단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래.. 서재.. 사빈은 넘어질 것 같은 걸음으로 서재로 뛰어들어갔다. 서재는 정단이 이집에
서 제일 좋아하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종종 그곳에서 낮잠도 잤으니 어쩌면 자신이 없는
오늘밤은 그곳에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재에도 책들만이 주인을 반길 뿐 정단은 없었다. 혹시나 책장의 책들을 다 끄집어
내며 살펴봐도 정단은 없었다. 그리고 정단의 옷방과 손님방.. 집안에 있는 방이란 방은 다
찾아봐도 정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단의 옷 방을 살펴보아도 침실을 살펴보아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옷방에 있는 옷
도 처음에 정단이 들어올 때와 비교해 줄어든 것을 느끼지 못했고 침실에 있는 정단이 쓰던
화장품, 어떤 물건 하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단순한 외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류정단.. 내일 아침에 들어오기만.. 해.. 그럼.. 그럼 되니까.. ’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은 사빈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이 정단이 없는 집안에 환한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는 사빈의 힘없는 목소리에 집안은 밝은 아침을 빼앗겼다.
“ 강비서님? 지금 집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
아마 강비서는 달려올 것이다. 사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그가 올 때쯤이
면 사빈도 정신을 차릴
것이다. 정단을 찾아야 했으니까.. 그녀를 찾기 위해서는 감정을 소모할 여유란 있을 수 없
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빈은 일단 정단과 함께 사라진 것부터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단이 사라지기 전
에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기 때문에 무엇이 사라진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빈 공간만 있어도 그
곳에 있던 것은 다
정단이 가지고 나간 것 같았고 흩으러진 부분만 있어도 정단이 남긴 흔적 같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흔적조차도..
사빈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그녀가 갈만한 곳은 어디이며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빈은 침실로 들어가 정단의 화장대서랍을 뒤졌다. 혹시나 발견될 정단의 필체가 담긴 종
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화번호책이나 일기장과 같은 것이라도 찾는다면 정단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러나 그런 것들을 영영
떠나는 사람이 버젓이 두고 갈리는 없었다. 화장대안에는 알 수 없는 화장품들과 빗, 솔등과
같은 미용용품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들..
사빈은 그것들 중 몇몇가지를 꺼내보았다. 진통제와 같은 약과 비타민C로 보이는 노란알약,
그리고
mercilon이라 쓰여있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작고 흰 알들이 직사각형의 대영을 이루며 촘촘
히 포장되어 있는
약을 발견하였다.
“ 머..실린? ”
사빈은 자신이 한번도 본 적 없는 그 약을 꺼내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
아도 그것을 무슨 용도로
복용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빈은 서랍안에 있을지도 모를 그것의 종이 포장
지를 찾았다. 그리고
사빈은 똑같은 약이 들어있는 핑크색 포장곽을 찾아냈고 그것의 용법과 효능이 있는 부분을
찾았다.
「 Mercilon 에스트로젠 함량 20 ㎍, 먹는 피임약」
‘ 먹는... 피..임..약. ’
그것은 사빈의 손안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것을 움켜잡은 사빈
의 손이 파란 핏줄을
보이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피임약!!! 언제부터 먹고 있었던 거지!!! ’
사빈은 정단이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몰랐다. 아직 정단과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아직 어린 정단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조금 더
천천히 아이를 낳아도
된다고 생각했었기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단이 피임을 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부러 자신의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았
다?
그렇다면 정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 언제부터
란 말인가? 사빈은 또다른
피임약은 없는지 서랍을 아예 뒤집어 엎고 찾아보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이미 다 복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때그때
약을 샀던 것인지 피임약으로 보이는 것은 사빈이 발견한 그 한 곽이 다였다.
그런데 사빈이 피임약을 발견하고 정단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거실안에 발
을 들여놓는 소리가
들렸다. 사빈은 혹시 정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실쪽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사빈의
눈은 실망과 절망에서
아직 벗어날 수 없었다.
“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
빨리 도착했는데도 서두른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비서가 거실에 서있었다.
“ 사람을 찾아 주셔야겠습니다. ”
이른 아침에 사빈과 함께 있어야 할 한 사람이 안 보인다는 것과 엉망으로 흐트러진 사빈,
그리고 뭔가를 찾기
위해 애쓴 흔적이 분명한 침실을 보았을 때 사빈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강비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강비서조차 못믿겠다는 심정으로 그 사람을 확인해야 했다.
“ 어느분이십니까.. 제가 찾아야 할 분이..”
이윽고 절망과도 같은 이름이 사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정단이.. 내 아내요.. ”
그 순간 강비서의 눈에 비친 것은 사빈이 아니라 버림받은 슬픔에 울고 있는 한 남자였다.
그러나 강비서는 사빈을
진정시킬 위로의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금 사빈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말
을 해 주었다.
“ 실장님께서 원하신다면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
단 한번도 사빈이 원했다 부탁한 것을 거절한 적이 없었던 강비서가 한 말이었기에 사빈의
가슴에는 작은 희망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사빈도 정단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찾게 될 것이
다. 반드시.. 하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정단을 찾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그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 있었다.
“ 집에는.. 비밀로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가 사라진걸 어머니가 아셔선 안됩
니다. ”
“ 네. 실장님. ”
만약 정단이 사라졌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된다면 사빈이 다시 정단을 찾을 필요조차 없
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이상 시간만 자신의 편이 되어주면 해결될 문제라 사빈은 생각
했다.
‘ 그래..내가 찾아낼 때까지 잘.. 숨어 있으라고.. 류정단...’
27.
** 흔적 **
사빈은 정단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뒤졌다. 하다 못해 화장실 쓰레기통에
서 재활용품으로 내놓은
쓰레기까지 정단과 관련된 것이 있게다 싶은 것은 다 모아 들였고 윤기사를 불러 정단이 지
난 8개월동안 갔던 곳,
만났던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문서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강비서는 사빈이 모르는 곳
에서 정단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강비서가 가지고 올 정보가 사빈과 윤기사가 알아낼 사
실보다 더 확실하고
정단을 찾는데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나
라도 더 많이 정단을
찾을 수 있는 흔적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사빈이 그 많은 것들 중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은 자신이 정단에게 주었던 카드였다.
황금색의 그것은 꼭
자신이 발견되어야 했다는 듯 서재의 책상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처음엔 그냥 지나칠
만큼 사소한 하나의
물건이었지만 사빈은 그녀가 자주 가던 서재에 혹시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재의
여기저기를 뒤적거렸고
자꾸 눈에 거슬리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 류정단.. '
계산이 깔끔한 건지 아니면 머리가 좋은 건지 내심 정단이 카드를 사용하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빈의 예상을 보기좋게 뒤엎고 있었다. 또한 정단은 자기가 준 것 모두를 거부하고 나간
것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것처럼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사용하지
않아 손떼가 묻지 않은
그것을 부러뜨려서는 안되기에 꽉 쥐었던 주먹에 힘을 조용히 풀었다. 정단이 제자리로 돌
아왔을 때 이것도 원래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빈이 감당해야 할 분노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앞으로 그가 하나씩 받아들여야
할 사실들은 그의 심장이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칠 정도로 아픈 상처가 될 것이다.
" 실장님.. 바깥에 있는 쓰레기 짐들입니다. 대부분 종이같은데.. 이것좀 보시겠습니까? "
윤기사가 사빈 앞에 곤란하다는 듯 내민 것은 너무나도 크기가 커서 한손으로는 옮길 수조
차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신문지로 겉면이 꼼꼼히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빈은 정단이 버리고 간
그 물건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약간의 찢어진 종이틈으로 보이는 그것이 사빈의 눈을 베어
버렸다. 두 눈이 불에
데어버린 것처럼 후끈거리며 아파왔고 머리위로 피가 차올라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꼭지가
돈다고들 하는 말이 이런기분이리라 사빈은 생각했다.
촤아아악---
사빈은 그 물건을 싸고 있는 신문지를 거친동작으로 한꺼번에 찢어버렸다. 그러자 들어나는
사빈과 정단의 얼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었다. 그랬다. 정단은 결혼사진마저 버리고 간
것이었다. 사빈은
이렇게 큰 액자가 빈 자리를 자신이 왜 못 알아봤는지 액자가 걸려있던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정단이 치운
결혼사진은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그 외에 신혼집의 구색에 맞춰 걸어두었던 결혼사진들이
하얀 빈자리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아마 그 큰 액자와 같이 버려졌을 것이다.
' 이건 뭐하는 짓이지, 류정단? '
사빈은 이번만은 정단의 행동이 귀엽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의 결혼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액자를 들고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는 사빈의 입가에는 비툴린 웃음이 지어졌다. 정단이 잘
못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런 것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정단은 너무나 큰
착각을 한 것이다.
아무리 결혼한 흔적을 없앤다 해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는 이상 정단은 영원히 사빈
의 아내고 사빈은 정단의
남편인 것이다.
' 소용없어.. 류정단... '
그런 생각을 하며 사빈은 사진을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 두었다. 이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것은 정단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일을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큰 실수라는 것을 사빈은 그 다음날 알게
될 것이다. 더불어
그날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허상속에 정단을 올바로 보지 못했는지 죽을만큼 후회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강비서에 의해 시작되었다.
" 실장님..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
밤새도록 정단의 옷장을 뒤지느라 새로운 날이 밝은 것도 모르고 있었던 사빈에게 들려온
그 목소리는 지쳐있던
사빈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었다.
" 찾으셨습니까? "
사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에 가슴은 심하게 들썩였다.
" 죄송합니다.. 사모님이 닿아있는 사람이 없어서 찾는게 쉬울 것 같진 않습니다. "
그렇지.. 이렇게 쉽게 찾을리는 없다. 정단의 성격으로 봐서 누군가가 쉽게 찾을 수 있게 만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강비서는 왜 자신을 찾은 것인가..
" 그런데 지금 알고 계셔야 할게 있습니다. "
사빈은 정단이 있는 곳 외에 자신이 지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는 표정으로 강비서를 쳐
다보았다. 하룻사이에
많이도 상한 얼굴이었다.
" 이게.. 뭡니까? "
사빈은 강비서가 건내 준 서류를 살펴보며 물었다. 그러나 강비서는 설명하기 난처한 표정
으로 사빈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 이걸.. 사모님이 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
주민등록등본이었다.
" 이게.. 왜요.."
사빈은 강비서가 이것을 왜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이해가 안됐다.
" 등본입니다..."
" 그런데요? "
사빈은 이제야 강비서가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있어야 할 곳에 정단의
이름이 없다. 등본에는
2년반 전 분가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사빈 자신의 이름 석자만이 올려져 있었다. 사빈의 처
(妻)로 올려져 있어야
할 정단이 없는 것이다.
" 큰댁의 권변호사한테 확인한 겁니다. "
" 어떻게 된 겁니까? "
큰 돌덩이가 사빈의 머리를 때리고 누군가 귀옆에서 종을 울리는 것 같았다.
" 작은회장님과 권변호사 사이에 얘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 어머니께서 왜..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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