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는 비공개 처리되었습니다.

비매너, 파렴치 행위 없는 조용한 성향카페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습니다.

새 사이트 바로가기




Smiley

새 사이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습니다.

.

.

SM 성향테스트 | Contact
BREAKING NEWS

목요일

(SM소설, 수위소설) 그의여자 [이바우] 2

진여사가 일부러 권변호사에게서 혼인신고서류를 빼돌린 것이었다.

" 그래...알 것 같군.. 그거야 혼인신고서만 제출하지 않으면 되는거니까... 재밌군.. "

성진의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는 모든 일들은 권변호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사소하게는 사빈

가족들의 여권갱신에서부터 회사의 중대한 법적절차까지 권변호사를 필두로 이루어져 왔었


다. 그러니 분명 진여사의

한마디면 몇천명, 아니 몇만명 앞에서 결혼한 사빈일지라도 미혼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설마 정단과의 혼인절차를 그렇게 묻어

놓았을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당연히 정단과는 부부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한번도 확인해보려 하지 않았다.

" 제 불찰입니다. 사모님께서 입원하셨을 때 잘 알아봤으면 사모님께서 이렇게.. "

" 정단이가.. 입원.. 했을때요? "

" 네.. 그때 퇴원수속을 했던 김기사가 사모님이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며 이상하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일이 이렇게 심각한지 모르고 제가 신경 써 알아보질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강비서는 일을 사소하게만 보았던 그때를 후회하였다.

" 처음부터 어머니 손바닥에서 놀고 있었던 거군요.. "

사빈도 조금만 더 치밀히 의심해보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처음부터 이상한 일이었다. 다 죽

어가는 영빈과 사돈을

맺고자 하던 어머니의 의도도 이상했고 비상식적으로 정단을 대했을 때도 의심해 봤어야 했

다. 그리고 아마 어머니도

알고 있었을 정단의 출생에 관한 일도 더 많이 알아봤어야 했다.

분명 어머니는 정단이 필요한 만큼 이용하고 버리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예 존재조차 없

었던 것처럼 깨끗이

처리할 방법도 찾아냈을 것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것이었을 테고 이

제 영빈을 깨끗이 먹었으니

다음은 정단의 차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어제까지는 닥치는 대로 두들겨 대고 찢고 던져댔

지만 오늘은 종이 한 장

집어 던질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조금 남아 있을지 모르는 힘도 정단을

찾기 위해 소모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금 중요한 것은 사빈 자신의 분노가 아니었다.

" 그래서.. 정단이 그걸 알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단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 아니요..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만약 이 사실을 아셨다면... 집을

나가실 이유가

충분하지요..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문제도 충분히 많으니까요.. "

" 다른 문제요? "

강비서는 사빈에게 건낸 등본외에 다른 여러 가지 서류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 사모님이 갈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알아보다 보니 사모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게 되었습

니다. 실장님이 이것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

강비서가 건내는 것들은 하루사이에 조사한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 류회장님쪽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에서 커진 것 같더

군요. "

사빈은 강비서가 건낸 자료의 첫장을 넘겨 보았다.



류정단

출생년도 : 1981년 1월 21일생

출생지 : 부산

부(父) : 류신협 모(母) : 정윤희

1999년 선화여자대학교 졸업

1999년 2월 15일 모친 정윤희 사망(위암)


2001년 4월 26일 류신협 회장의 호적에 입적

2002년 1월 7일 외조모 김예분 사망(위암)



정단의 출생일이며 출생지, 가족에 관한 자료인 것 같았다.

" 사모님께서 영빈사모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셨습니까? "

어렴풋이..사빈도 정단이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퍼뜨리는

소문이 다른 사람을

음해하는 헛소문일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사실인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빈에게 정

단이 사생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누구의 친딸인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굳이 알아보

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비서가 조사해 온 모친의 이름을 보니 정단은 류회장이 다른 부인에게서 얻은 딸


이 확실했다. 정윤희..

지금 류회장의 부인인 사빈의 장모와는 성이 틀렸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빈의 친구들 중에도

생모가 따로 있는 사람들은 많았으니까.. 다만 그런 출생으로 인해 정단이 겪었을 마음고생

이 안쓰러울 뿐이다.


" 사모님의 16살 이후의 생활입니다. 그건 류회장님쪽에서 가지고 있던 자료라 쉽게 알아냈

습니다만 그 이전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정단의 가족과 출생지에 관한 내용 다음에는 그녀의 대학교 성적이나 서클, 집안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해왔는지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지금과 별 차이는 없지만 조금은 더 어려보이는 정단의 사진도 있었다.

사빈은 그 사진속

소녀의 예쁜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지금과 변함없는 고운 미소였다. 지금의

갈색머리도 마음에 들지만

푸른기가 돌정도로 검게 반짝이는 머리칼이 정단의 하얀 얼굴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검

고 큰 눈동자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인형같은 정단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자신과 같이 사는 동안

정단이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빈은 그 사진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 보았다.

' 너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

" 사모님이 류회장님 댁으로 들어가기 전 외조모님과 살던 곳을 알아냈습니다. 어쩌면 사모


님이 그쪽으로 갔을지

모르니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

사빈도 그렇게 쉽게 정단을 찾을 수 있길 바랬지만 왠지 정단을 그곳에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아니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정단인 거기 안 갔어요.. 찾아주길 바라면서 나간게 아니니

까요.. 절대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엔 없어요. "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긴 싫은 사실이었다.

" 그럼 일단 사모님께서 최근에 만난 사람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윤기사 얘기로는 사모님이

만난 사람이 류회장님쪽의

사람과 디자이너 두명밖에 없다고 하던데 제 생각으로는 류회장님쪽 사람의 얘기를 들어봐

야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류회장님이 계신 곳으로 갔을지도 모르니까요.. "

그러나 사빈은 절대 정단이 류회장쪽으로도 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비

서의 말대로 그 사람이

요근래의 정단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 네.. 그 사람이 뭔가를 알고 있었으면 좋겠군요.. "

강비서는 이제 사빈을 혼자 있게 해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준 서류를 계속 넘

기다보면 사빈이 감당하지

못할 내용들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비서 자신도 조사하면서 경악과 놀람에 표정관리

가 안되던 사실들을 사빈이

적당히 참아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서 그 분을 삭이게 해주어야 함을 아는 강비서는


윤비서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빈을 뒤로 했다.

*******

강비서가 나가고 나자 사빈은 자료의 맨 앞장으로 넘겨 이미 본 내용을 자세히 그러면서도


빨리 읽어내려갔다.

1981년 1월 21일생..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이 정단이 태어난 날이었다. 우습게도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의 생일도 몰랐다. 결혼하고 8개월이 지나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날은 정단

이 청담동집에서 사빈의

어머니에게 구박을 당하고 있던 날 중 하루였을 것이며 자신의 냉대가 극에 달했을 시점이

었을 것이다. 아프다..

사빈은 아픔을 느꼈다. 자신이 던진 칼이 되돌아와 심장에 꽂혀 피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류회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가족이라고는 단 두명,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것도 생모

는 정단이 19살일 때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결혼하기 직전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놓은 것 같

았다. 얼마나 힘든

상태에서 결혼했을까.. 사빈은 그런 정단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중에

무엇보다 사빈의 신경을 거스리는 것은 정단의 생모와 외조모 두 사람 다 위암으로 사망했

다는 것이었다. 질병은

원래 유전되는 것인데 이렇게 2대에 걸쳐 확실히 전해진 것을 보면 정단도 위험한 것이다.

그동안 건강진단을 하지

않았었는데 사빈은 정단을 찾자마자 암진단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단을 찾기도 전에

신경쓰이는 걱정이 또 하나

늘어버린 것이다.

" 젠장... "

사빈의 입에서 한숨과 욕이 멈추질 않았다. 보면 볼수록 정단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사빈

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류신협회장..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

와 결혼을 했다라..

상황을 볼 때 분명 영빈의 후계자 자리가 탐난게 분명했다. 거기다 정단이 어떻게 살고 있

는지 3년동안이나 조사를

해왔으면서 정단을 자신의 딸로 인정한 것은 고작 1년 반전이었다. 이것도 분명 자신과의

정략결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비서가 가져다준 정단에 대한 것들이 사빈을 분노하게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

빈이 몰랐던 정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니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좋아하는 음식, 색깔, 이상

형에 특기과목까지

나와있었다.


" 흐음.. 미술이라.. "

정단은 그림그리는데에 썩 소질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고2때까지 미술부에서 활동했던 것

으로 나와있었다. 왜

예술대학에 진학을 안했는지 의문이 생겼지만 사빈은 곧 그녀의 궁핍한 생활이 그녀가 원하

는 것을 이루어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다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리고 신문배달, 편의점 아르바이트,

식당, 주차장

관리원까지 정단이 안해본 일은 없었다. 어리고 작은 여자아이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정단

은 밤낮으로 해왔던

것이다. 사빈은 한때 재벌이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돈이라는 것에 혐오감을 느꼈던

철없는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자신이 돈이라는 것을 철저히 이용하면서도 교만한 철학속에 빠져 있는 동안 정

단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빈은 좀더 일찍 정단과 만나지 못했

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조금만 더 일찍 정단과 만났더라면 그녀가 그렇게 힘들지 않도록 자신이 다 해줬을 텐데 말

이다.

그런데 또 사빈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정단의 생모가 사망한 날에 대한 기록이었다. 기록엔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었지만 정단의 생모가 죽던 날 시체를 화재속에서 꺼냈다는 것이 이상했

다. 하지만 어머니는 죽고

집마저 잃었었을 정단이 떠올라 더 이상 다른 이상하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걱정이었다. 이여자 돈도 없을텐데..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 것이란 말인가..

이전 생활을 볼 때 수중에 돈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만들어준 카드마저 두

고 나갔으니 그녀가

얼마만큼의 여비를 가지고 있을지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차라리 영빈쪽에 가서 류회장

의 도움이라도 받고 있기를

바랄뿐 이었다. 하지만 정단의 자존심에 그런 아버지를 다시 찾아 갔을리도 없었다. 짐이라

고는 자신의 옷도 챙기지

않은 것 같은데 걱정이었다. 이제 곧 날도 추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정단을 빨

리 찾아야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랄 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결혼반지라도 팔라고.. 남겨둔 짐들

을 찾아보니 다행히

결혼반지는 두고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사빈이 선택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여러

번 세공을 거친 고가의

다이아몬드라 가격만큼은 무겁게 나갈 것이라 더욱 안심이었다.

그리고 사빈은 그렇게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면서 계속해서 읽었다. 정단의 모든 것을... 그것

으로 다 알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정단에 관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

서 정단을 제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정단이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정단아.. 돌아오기만 해라.. 그러면.. 다시는 ... "

강비서가 아침에 전해주고 간뒤 해가 땅아래로 꺼질때가 되어서야 마지막장을 넘긴 사빈이

괴롭게 머리를 묻으며 한

말은.. 그것이었다.


' 다시는.. 울지 않게 해줄게.. '

처음엔 정단이 집을 나갔다는 것만으로 화가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더 중요

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정단이 떠나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도 없이.. 하지만 떠날 이유

가 없지 않은가..

비록 채영 때문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얼마전까지의 일이고 바로 지난주만 해도 정단과

즐겁지 않았는가.. 떠날

이유가 없다.. 갑자기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사빈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

다. 정단이 떠난

이유를 말이다. 정단은 자신의 무심함 때문에 떠난 것이다. 정단이 자신을 떠났다고 화를 냈

지만 정작 정단을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사빈은 깨달았다.

그리고 왜 강비서가 정단을 지키고 싶으면 채영의 일을 묻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그때는

누구로부터 정단을 지켜야 하는지 사빈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강비서가 하고자 한 말

을 알 것 같았다.

채영을 다시 만난 후 정단을 아프게 했으니까.. 사빈은 자신으로부터 정단을 지켜줘야 했다.

그러나 사빈은

진여사의 뜻대로 정단을 지키지 못했고 이제 그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빈에게는 힘들어

할 자격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더 힘들었다.

' 어디있니.. 정단아.. '

정단이 없는 사빈의 밤은 또 그렇게 힘들게 지나고 있었다.



" 성사빈..어떻게 된거야.. 제수씨가 사라졌어? "

강원도 출장에서 돌아온 유원은 뒤늦게 강비서로부터 정단을 찾아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급하게 사빈이 서울로

떠나고 난 다음날 왜 오지 않는거냐며 유원이 사빈에게 전활 걸었을 때는 그저 못가니 알아

서 하라고만 말했을 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을 줄은 유원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유원아.. 정단이랑 나.. 부부가 아니라는구나.. 정단이가 내 아내가 아니래.. "

사빈은 자신보다 더 안달하는 유원에게 실소하며 말했다.

" 그래도 아무리 정단이가 숨어있어도 이혼하지 않은 이상 그 여자 내꺼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진짜로 헤어진게

아니라고 꼭 한번 만날 거라고 안심했었는데.. 그렇게 찾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라는 구나.. 그냥

이렇게 정단이 돌아오지 않으면 끝인거야.. 우린.. 내께 아니었데.. "

" 사빈아.. "

유원도 강비서로부터 진여사가 무슨 일을 벌여 놨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진여사의 행동에

경악했었다.

" 내 잘못이야.. 내가 잘 확인해 보지 않아서 그런거야.. 내가 미리 알았더라도 정단인 떠나

지 않았을텐데..

다 내 잘못이야.. "

사빈의 담담한 얼굴에서는 죄책감이라든지 괴로움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을 조롱하는

투로 가득했다. 그러나 바라보는 유원에겐 술을 마시고 화를 내는 것보다 그런 사빈이 더

측은해 보였다.

" 어느 부부가 그걸 일부러 확인했다냐? 다들 자기들이 가서 신고하는데..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거고.. 너도

권변호사가 제대로 일처리만 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거야.. 단지 상황이 안좋았을 뿐이지..

뭐, 어떻게 등본

떼어볼 일이 있었으면 몰라도 일이 이렇게 된거 네 잘못 아니야.. 그리고 있었다고 해도.. 너

희 어머니,
권변호사 통해서 더 오랫동안 감쪽같이 숨기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 모르냐.."

" 그래도 너무 늦었어.. 결혼 사진도 다 버리고 갔더라. 후회하는거야.. 나랑 결혼한걸..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야... 틀렸어.. 우리 잔인한 어머니한테도, 나한테도 이젠 정이 떨어져버린거야.. "

사빈에게서 정단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정단이 사라진지 닷새밖에 지

나지 않았건만 처음의 그

자신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 제수씨가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찾으러 가면 되잖아. 네가 제수씨 찾으면 되는거야.."

그러나 사빈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단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보

다도 정단이 곁에 없다는

데서 오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 나는 네가 이리도 그리운데 너는 어딨니.. '

하지만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정단의 행방에 대해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 같았던

류회장쪽 사람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되질 않고 있었고 정단이 만났다는 또 한명의 사람 가희도 정단

을 찾을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성진의 작은 사모님이요? 그때 제가 빌려 드렸던 숄을 가져다 주셨는데요..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


오히려 정단의 행방을 쫓으러 갔던 유원이 가희의 질문에 적당한 변명을 하느라 애를 먹었

다.

" 아니요.. 그 이후로 옷을 더 맡기신게 없나 해서요.. 이번에 결혼기념 선물로 저희 실장님

께서 사모님 옷을

해주신다고 했거든요.. 혹시 사모님 취향을 알 수 있지 않을까해서요. "

유원은 뻔뻔스러운 표정에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그런 말을 지어내는 자신이 대단했다.

" 네~ 사모님께서 워낙에 수수한 걸 좋아해서 아마 너무 튀지 않는 파스텔톤이면 다 어울릴

걸요. 한번 직접

오셔서 골라보시라고 하세요. "

결국 가희를 통해서도 정단을 찾기란 틀린 것이었다.

"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옷을 맡기시진 않았어요.. 놀러 오신 적도 없는걸요. 흐음.. 안그래

도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전엔 종종 전화도 하셨었거든요.."

' 종종.. 전화를 했었다? '

유원은 정단이 가희에게 종종 연락을 했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렸다. 정단이 사라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비밀이었기 때문에 가희에게 사실대로 말 해서는 안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정단이

가희에게 연락을

해온다면.. 그것은 정단을 찾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 가희씨.. 사실은요.. "

결국 유원은 어쩌면 가희에게로 올지 모를 정단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정단이 집을 나가고 삼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한 사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단이

생모와 함께 어렸을 적부터 살았다는 집을 찾아갔다. 이미 정단이 넉넉지 못한 생활을 했다

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빈은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사실이 더 가슴 아팠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70

년대를 떠오르게 하는

동네였다. 그러나 유원은 더 이상 감상에 매달리지 못하도록 사빈을 재촉했다.

" 빨리 가자.. 제수씨 친구 몇 명과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


그리고 유원과 사빈이 15분을 더 걸어 도착한 곳은 평상이 있는 어느 집이었다. 이미 그곳

엔 정단의 나이또래로

보이는 2명의 여자와 그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들 유

원과 사빈이 무슨 일로

자신들과 만나기를 원하는지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멋진 남자들이 정단을 찾는 이

유가 무엇인지도 무척이나

궁금한 눈치였다.


" 정단이는 왜 찾으세요? 정단이가 아저씨들한테 무슨 사고라도 친거예요? "

" 아니요.. 저희는 정단씨와 아는 사람드이에요. 단지 요즘 정단씨와 연락이 안되서 혹시 이

곳에 찾아오지 않았나

해서요.. 요 며칠 연락 없었나요? "

사빈이 정단이 살았다는 곳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유원은 이사람 저사람 속에서 정단을 찾

을 수 있을 만한 답을

구하고 있었다.

" 아니요.. 언제였지? 그러니까 작년 봄이었나? 그때 할머님 병원 들어가시고 떠난 후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 그럼.. 그 이후로 한번도 연락한 적이 없단 말인가요? "

" 네.. "

이곳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생각에 유원은 착찹해졌다. 비록 정단이 자신의 아내는
아니었지만 비실대는 사빈이

보기 싫어 유원은 빨리 정단을 찾고 싶었다. 그녀가 빨리 돌아와야 사빈이 정신을 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빈은 지금도 완벽한 사람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유원은 알고

있다. 사빈이 여전히
회사에서는 완벽한 주인이었고 정단의 부재로 인한 괴로움이라곤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냉정한 남편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무서운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사빈이 그렇게 냉정을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정단이 사라진

것을 자신의 어머니가 모르게 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무서운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유원은

더 이상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어서 빨리 정단이 사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기를 바랄 뿐

이다.

" 그럼..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 이후에라도.. 정단씨가.. "

" 죄송합니다만 정단이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그들에게 1년이 지나도록 정단의 연락은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상심한 유원이 사빈을 달래

며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담담한 표정의 사빈은 그들에게 정단에 대해 묻고 있었다.

" 정단이요? "

사빈은 정단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여자는 잠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정단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정단인.. "

그들이 말하는 정단은 사빈이 알고 있던 자신의 아내와 조금은 달랐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사빈이었다.

' 류정단이 당차고 똑부러지는 여자라? '

그점은 사빈으로서는 별로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정단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그런 정단이

떠올라 살며시 맺히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정단이 사라진 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행복

감이었다. 그러나 정단이

얼마나 맑고 착했는지와 함께 또한 얼마나 불쌍한 아이였는지를 말하는 나이든 아주머니의

얘기에 사빈의 미소는

사라지고야 말았다.

" 그러게.. 그렇게 착한 애한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세상도 원.. 불공평해서.. "

" 무슨 일이.. 있었나요? "

그 일을 거론되자 주변의 공기가 내려앉는 듯 사람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 정단이 엄마 돌아가신건 아시나요? "

이번에도 사빈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단의 친구인듯한 여자는 옛날일을 회

상하듯 눈을 반쯤 감으면

말을 이었다.

" 정단이 고2때 그 어머님이 위암말기 판명을 받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워낙에 집이 가난

해서 병원을 가기는

커녕 약도 한번 못 드셨었어요. 그래도 용케 1년인가를 버티셨는데 정단이 그러더라고요. 자

기 어머니 약도 한번

못 해드리고 돌아가시게 하면 자신이 용서될 것 같지 않다구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돈이

없는데..그래도

정단인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이리저리 고생을 한 것 같은데..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정단이 돈을

구했었어요. 그래서 그 돈 가지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맛있는 것도 드시게 하고 약도

지어서 드린다고

했는데.. 그런데 정단이가 그 돈을 받아 오던날.. 정단이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셨어요.. 바로

그날요.. "



사빈은 턱이 아프도록 이가 갈렸다. 강비서를 통해 알았을 때는 그냥 머리에 입력되었던 것

이 직접 가슴으로

파고들어 정단의 슬픔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는 정윤희라는 여자의 죽음이라고 여겨졌

던 것이 이제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에효~ 거기서 끝나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지.. 그게 원.. 끝이였나? 왜 정단이가 집에 돌아

왔을 때 불

났었잖아.. "

" 네.. 정단이 어머니가 혼자 계실 때 숨이 끊어지신 모양인데 아마 그때 불이 났을 거예요..

워낙 집에

외져서 화재도 늦게 발견됐구요.. 더구나 정단이 돈 구했다고 제 엄마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봤을 거예요.. 겨우

도착했을 때 이미 집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요.. "

" 그런데 그 독한 것이 그 무섭게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갔잖아.. 지 엄마 꺼내야 했다고..

뭐 그때야

돌아가신 거 몰랐으니까 그랬겠지만.. 이미 들어갔을때는 죽었다고 했지? "
그들은 그때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저마다 말이 많았다.

" 그리고 소방관들이 와서 정단이랑 그 엄마 구해낼 때 정단이가 뭔가 타는 것을 들고 놓지

않았다고 했잖아..


자기 손에 불이 옮겨 붙는데도.. "

" 맞아요.. 그때 그래서 정단이 화상치료 받느라고 고생했었어요.. 그리고 흉터도 굉장히 크

게 남았었는데.. "



강비서의 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없었던 사실을 사빈은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시체를 불구

덩이에서 찾았다라..

여린 정단이 그 일을 어떻게 극복해 냈을지 사빈은 가슴이 시렸다. 그리고 정단의 손이 예

민한 것도 어쩌면 그때의

화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이후로 생활은 어땠나요.. "
" 뭐.. 화재보상 받고 집도 옮기고 며칠은 죽은 지 엄마 때문에 울고 또 며칠은 화상치료 때

문에 고생하다 그냥

또 그렇게 살았지요.. 뭐.. 별다른게 있을라고.. 하루하루 살기도 힘들고 바빴는데.. 그게 또

지 엄마 죽고

나니 혼자서 할머니 모시느라 고생했잖아.. "

" 그러게요.. 어린게 고생이 많았지요.. "

어느새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우울함에 각자의 표정을 잃고 회색얼굴로 점점 변해


가고 있었다.


" 그럼.. 정단씨가 혹시 연락해오거나 찾아오면 저희한테 연락 좀 주시겠어요? 꼭 좀 부탁드

립니다. "

더 이상 들을 것이 없어진 사빈과 유원은 동네를 벗어나기전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


였다.

" 저희가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말고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

역시 치밀한 유원은 자신들이 찾아왔다는 것을 정단이 알면 그들이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말릴 것 같아 자신들이

왔다는 것을 비밀로 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수상했는지 마을 사람들이 유원과 사빈

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 당신들 누구죠? 누구신데 정단일 그렇게 찾는거죠? "

" 정단이 아는 사람이라면 정단이한테 찾아왔었다고 말해도 되잖아요.. "


유원은 자신이 너무 조심하느라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

이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부순 것은 사빈이었다.

" 남편입니다...제가 정단이 남편입니다.."


사람들은 할말을 잃고 사빈을 주목했고 사빈과 유원이 돌아설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사빈은 뚫어질 듯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말만 남기고는 돌아섰다.


" 제 아내가 지금 가출해서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정단이한테 잘못한게 너무 많았거든

요.. 그래서 정단이


화나서 집을 나가버렸어요. 그러니 혹시 이곳에 오면 저한테 꼭 좀 연락해주세요.. 붙잡고

계셔 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

그런데 할말을 잃은 것은 그 동네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유원도 무섭게 솔직한 사빈의


발언에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 까먹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늘도 아무런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온 사빈은 절망에 상처받은 몸으로 침대에 누

웠다. 그래도 처음엔

침대에 누우면 살짝 남아있는 정단의 채취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침대

시트에 고개를 묻고 아무리

부비적거려도 정단의 향이 느껴지질 않았다.이젠 그 향기도 정단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정단아... "



사빈은 하릴없이 정단의 이름만 중얼거리며 매일밤 정단이 잠들었던 자리를 쓰다듬었다. 처

음엔 사늘한 시트의 촉감에

가슴이 허했지만 계속 매만지다보면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이 마치 정단의 따뜻한 피부같아

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러던 중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의 움직임을 멈춘 사빈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목욕용품이 들어있는 서랍을 꺼내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 사과.. apple .."

정단의 향이 은은한 사과향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사과향으로 이루어진 샴푸나 비누, 샤

워젤을 찾고 있는 것이다.

분명 샤워후의 잔향이 남아 정단의 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샴푸나 비누들은 전부 꽃향

기와 같은 달콤한 향일뿐

정단의 채취와 같이 상큼한 향은 없었다.

좌절과 실망감에 사빈은 욕실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고작 이런 것들로 위안받을 수 있다

고 생각한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정말 정단에게 철저히 중독 당한 것 같았다. 미칠 정도로..

그런데 바닥에 앉아 한탄하고 있던 사빈에게 구원과도 같은 향이 살짝 전해졌다. 코끝을 치

고 지나가는 그 향기에

사빈은 움찔 놀랐으나 곧 그것이 사라지기라도 할새라 재빨리 그 향을 쫓았다.

' 정단아!! '

그러나 어디에도 정단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향을 대신해줄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

에 사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샴푸와 린스, 비누와 함께 욕조선반에 꺼내져 있는 샤워젤이 눈에 띄었

다. 사빈은 다급한

손길로 그것의 뚜껑을 돌려 향을 맡아 보았다. 이것이었다. 사빈은 정단에게서 느껴지는 채


취가 사과향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향은 라임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빈은 향을 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욕조에 물을 채워 샤워젤을 물에 풀었다.


그러자 작은 거품이 일며

은은한 라임향이 욕실을 가득채웠다. 사빈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정단에게 안겨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점점 몸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단의 목덜미 깊숙

이 얼굴을 묻었을 때의


느낌과 똑같은 것 같았다. 더욱이 벗지 않아 물에 젖은 얇은 옷감이 피부에 달라붙으니 그

감촉이 묘하게도 정단의


손길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사빈은 지금 이순간 간절히 정단이 안고 싶었다. 정단의 향

과 부드러운 피부를

직접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의 곁에 없기에 라임향만으로도 사빈은 만족해

야 했다. 그래서 결국


사빈은 초가을의 약간은 쌀쌀한 날씨에도 물이 식어 한기를 느낄 때까지 욕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사빈은 정비서에 이 라임향이 나는 샤워젤을 엄청나다고 할 정도로 사오게 하였다.


그래서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생각날 때마다 그 향을 맡으며 정단을 떠올렸다.


그런데 사빈이 사무실에서 정단이라 이름붙인 샤워젤을 끌어안고 상처를 달래고 있을 때 강

비서가 윤비서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 연락됐습니다. 실장님.. "

정단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쳐 뛰는 것조차 잊었던 사빈의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어


올랐다.

" 제가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약속 정해 주십시오. "


그러나 윤비서를 만난 이후의 세상은 사빈에게 지옥이 되었다. 사빈은 술을 마시고 죽을 사

람처럼 정신이 나갈

때까지 술을 마셨다. 정단이 겪어야 했던 최악의 경험을 윤비서로부터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빈은 자신의

어머니만큼이나 모질고 이기적인 류회장과 정단을 괴롭히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정단을 보호


하고 아무도 못찾는 곳에

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사빈은 모든 것을 다 알게 된 것이다.


정단이 자신과 살기 위해 왜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고 인내했어야 했는지 언제나 의심했던

그 이유를 사빈은 알게

되었다. 정단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도 류회장이 그 할머니를 담보로


자신과의 결혼을

요구했는지는 몰랐다. 더욱이 사망소식을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니.. 그 생각을 하자 사빈


은 뭔가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었다.



정단이 입원하기 며칠전 정단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걱정했던 날이었다. 그날

정단은 혼자 욕실에서

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날이 할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은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무엇을 했는가.. 그 작고 여린 여자 하나 보듬어주지 못하고...

사빈은 정단을 뒤로 두로 나와버렸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때는 정단이 무엇 때문에 그

리도 슬퍼하는지 몰랐었기에


사빈은 정단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손을 막았었다. 마음 깊은속에서는 만져주고 안아주고 위

로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채영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3년전 채영이 혼자 아파했을 때 돌봐주지 못했던 죄책감이 정

단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슨 미련한 짓이었단 말인가..


그때 그 문을 열고 정단에게로 다가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정단을 그리워하며 미쳐가는 오

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빈은 지난날 자신의 아둔함을 깨달으며 이젠 채영에 대한 감정도 확실히 정리해야 할 때


라는 것을 깨달았다.

채영에 대한 지난 사랑도 죄책감도 이젠 묻어야 했다.

정단을 갖기 위해서는..




28.

** 기다리는 마음 **




" 왜 나와 일을 못하겠다는 거야? 이미 공사는 들어갔어!! 마무리 단계라고!!! "

채영은 뒤늦게 공사를 다른 업체에 맡기겠다는 사빈이 이해되질 않았다.


" 걱정하지마.. 내가 손떼도 디자이너는 너니까.. "

그러나 사빈은 흥분한 채영을 앞에 두고서도 한치의 동요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채영에

게는 정말로 미안했지만

이렇게 해야 정리가 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너.. 왜 그래? 왜 이러는건데? "

" 내 개인적인 사정일뿐이야.. "

하지만 채영도 느끼고 있었다. 사빈이 자신을 밀어내려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 거짓말하지마.. 사라졌다는 그 여자 때문에 그러는거지? "

계속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채영의 목소리가 정단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높이 올라갔


다.

" 그래. "

사빈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채영에게 조금의 미련도 남겨 주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빈의 생각이


채영에게는 너무나 야속하고 냉정하게 느껴졌다.

" 이렇게는 안돼!!! 난 아직 안끝났어!! 난 아직 너 사랑해! "

사빈에게 부담주지 않기 위해서 참아왔던 채영의 마음이 사빈의 냉정한 행동에 폭주하기 시

작했다. 그러나 이제

사빈의 눈에는 채영에 대한 동정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그럼 어떻게 하니.. 이미 난 다른 사람과 시작해버린걸.. 이제 난..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


사랑했다고.. "
너무나 무심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빈의 말을 채영은 믿을 수 없었다. 단지 정단이 집을 나

간 지금의 상황이

사빈을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빈이 그 어린 여자를 사랑할리는 없다고 믿어왔

기 때문이다.

" 그 여자.. 사랑하니? 네 아내를 사랑해? "

채영은 사빈이 아니라고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사빈은 채영에게 나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사빈의

마음을 보여주듯 사빈의 검은 눈동자는 파랗게 채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답

을 기다리고 있는 채영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 첫눈에 반했어..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아내를 사랑.. 했어... 하지만 너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어..
아닌척 했지만 사랑했어. "


충격적인 말이 사빈의 입에서 채영의 귀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채영은 믿지 않는다는 듯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사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빈의 진심을 알아내려는 듯 계속 사빈의 눈에서 시

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끝이었다. 사빈의 눈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채영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그리는 눈이었다.

채영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사빈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하지만 채영과

그 아내를 놓고 저울질할 때 자신이 버림받을 줄은 몰랐다. 사빈이 당연히 자신을 선택하고

그래야만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엔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물러서야 했다. 이미 채영은 충분히 노


력했고 사빈과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물러서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입

에 담아선 안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 네 아내가 술집에 나갔던 것도 그럼 알고 있어? "

해서는 안될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채영은 비겁하다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사빈을 잡

고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채영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알아... "

" 알아? 그래도 괜찮다는거야? 네 아내가 다른 남자들에게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았어도 상

관없다는 거야? "

"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건 나와 만나기 전의 일이야.. "

사빈은 아무리 채영이라 해도 정단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

도 정단에 대해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정단 자신이라해도 말이다.

" 네가 상관없어도 나는 인정못해!! 성사빈의 여자가 그런 여자인거 내가 인정 못했다고!!

나와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류정단.. 그여자는 안돼!!! "

채영도 자신이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번 터진 둑은 물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 내가 납득한 일이야.. 오히려 내 아내가 자기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야 했던게 더


불쌍하고

안쓰러워.. 내가 이미 이해한 일이라고.. 그리고 채영이 네가 우리 어머니한테 무슨 얘기를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내 아내가 누구이건 너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는 없어.. "


"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성사빈..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 내가 너랑 어떻




헤어졌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응? 내가 너 하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

사빈의 얼굴이 예전에 채영을 대할 때만큼 온화하게 퍼진 것은 아니었지만 눈매만큼은 부드

럽게 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알아.. 채영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도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모든게 다



잘못이라는 것도, 나 너무 잘 알아.. 하지만 그건 내가 너한테 보상해야 할 일이야.. 그로 인

해서 내 아내가

힘들어해서는 안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한테 뭐든지 해주겠어.. 하지만 내 아내가 감정

상하고 힘들어 할

일은 못해.. 나.. 이젠.. 못해.. "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채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사빈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정단의 눈물을 보는 것과 같은 그 시린 느낌이 없었다.

" 예전엔 네가 울면 니 눈물 닦아주고 진심으로 뭐든 해주고 싶었어.. 너 울리는 거 뭐든지

내가 막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내 아내가 울면.. 나는 아무 것도 못해줘.. 아무 생각이 안나거든.. 어떻게 해

야하나 조급한

마음만 들고 마음만 급해져서 결국 바보처럼 바라보기밖에 못해...그리고 그 우는 모습조차


너무 예뻐서 내

앞에서만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가 그 눈물보며 너무 아프고 힘들어도 내 앞에서만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니까.. 네가 정리해줘.. "

채영은 더 이상 자신이 사빈의 옆에 있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은 상황에 따

라 쉽게 변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년전 자신이 동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빈을 버린듯이


이제는 사빈이 자신의

아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빈의 말대로 자신이 정

리해야 했다고 채영은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사빈이 그의 아내에게로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리란 것을. 그

래서 사빈의 곁에서

떠나는 것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채영은 성사빈은 그래도 자신을 사랑했었다고 믿을 것이다. 그래야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채영을 그렇게 떨쳐내는 사빈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만들어

줄 정단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흔들려서는 안된다. 조금의 불안이 되는 것은 미리 싹을 잘라버리라는 생각을

하며 사빈은 정단을

위해서라면 어머니인 진여사 또한 버릴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아직 정단을 맞이하기엔 준비할 것이 많이 남은 듯 가을이 다 가도록 정단의 흔적은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빈의 아내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감쪽같이 숨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사빈은 정

단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정단이 떠나기 전과 다름 없는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오늘은 정단만

돌아온다면 정말 예전과


다름 없을 집이 완성될 것이다. 정단의 그림이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 실장님.. 오늘 화랑에서 그림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

" 네.. 제가 직접 가지고 갈 겁니다. "

사빈이 윤비서와의 대면을 끝내고 바로 했던 것은 정단이 팔았다고 하는 그림을 되사는 것

이었다. 윤비서는 정단이

집을 나가기 얼마전 자신을 찾아와 처분해 달라고 부탁했던 집과 류회장이 결혼선물로 주었

던 그림을 처분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빈은 정단이 판 그림을 되사기 위해 각 화랑을 매수하고 원래 가격의 6배


나 되는 돈을 들여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 그림이 오늘 집으로 도착하는 것에 사빈은 기뻤다. 그런데 정단은 알

고 있을까? 사빈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러나 오늘도 정단이 없을 쓸쓸한 집으로 들어가다 멈춰선 사빈은 정원에 매마른 채 앙상

하게 서 있는 토마토줄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한창 흙을 돋운다고 뺨이며 옷에 흙을 묻이고 다니던 정단이 생각났다.

그리고 함께 정원을


가꿀 때면 햇살이 내려앉아 눈이 부셨던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고왔는지 눈물이 날 것 같았

다. 아무래도 내일은

문씨아저씨를 불러 저 정원을 깨끗이 갈아엎으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은 정단이 돌

아와 사라진 꽃밭을 보고

실망할까 그대로 놔두었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보고 견딜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없애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은 봄이라는 녀석이 다시 찾아왔을 때 정단과 함께 예쁘게 만들 것이다. 이번에는 함


께.. 반드시..


하지만 사빈의 간절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첫눈이 왔다.












** 재회 **

" 네. 진화건설 신유원팀장입니다. "
[ 308-XXXX.]
" 네? "
유원은 또 누군가 장난전화를 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 308-XXXX라고요! ]
" 누구시죠? "
그런데 왠지 목소리가 낯이 익은게 아는 사람인 것도 같았지만 이 난데 없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원은
아직도 어리둥절 하였다.
[ 김가희예요. 정단씨로부터 전화가 왔었어요. 다른 건 모르고 발신번호가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알려드리는
거예요.. ]
올해가 가기전에는 나타날 것 같지 않았던 정단의 그림자가 이렇게 전화 한통화로 잡히게
되었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정단이 가희에게 걸었던 전화가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정단은 가희라면 설
명도 필요없이 편안하게
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가회와 사빈사이에 어떠한 선이 연결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것도 정단의 실수였다. 그리고 발신자 번호 추적을 통해 자신의 전화번호가 상대방에게 알
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하여 결국 유원과 강비서는 발신번호의 지역을 추적해 정단을 찾아냈다. 아주 사소한
단서였지만 충분한 인력과
재력을 갖춘 그들로서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 오래간만이야.... "
그리하여 마침내 구십 삼일만에 사빈은 정단을 찾았다.

정단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 익숙한 채취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기억해 낸 정단의
가슴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 안들어가? "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정단의 귀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와 정단의 눈동자안으로 쳐들어 왔을 때 정단은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빈은 정단이 꼼짝도 않고 서있자 자신이 직접 정단의 손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녹슨 철문의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끼리릭 울려왔고 사빈은 아직도 그대로 서있는 정단을 집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손에 잡힐만큼 가늘어진 정단의 팔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리
고 바깥과 달리 조금은
훈훈할 것이라는 사빈의 예상과 달리 집안은 조금전 밖과 별반 차이없이 쌀쌀한 냉기만 가
득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일일이 화낼 시간이 없었다. 그것보다도 사빈은 빨리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어떤지 그녀가 3개월동안 지냈던 곳은 어떤지..
" 불은 어딨지? "
"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
정단이 불을 켜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남편이 집나간 아내 데리러 왔는데 무슨 문제 있나? "
그러나 불을 켜도 어슴프레 사물들만 보일 뿐 집안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사빈은 그
속에서 방으로 연결되는
듯한 문을 열었다.
" 여기가 당신이 자는 방인가? "
사빈은 정단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집인양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집이나 구
조상 똑같이 방문옆에
위치한 전기스위치를 켰다. 그러나 스위치를 켜도 방의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단
이 한참 스외치와
씨름하는 사빈을 지나쳐 전등에 달린 줄을 잡아 당겼다.
" 그건 고장났어요. "
이윽고 전등이 몇 번 깜빡깜빡 몸부림치다 정단과 사빈의 얼굴을 환하기 밝히며 켜졌다.
" 훨씬 낫군.. "
그러나 그것은 정단의 얼굴이 자세히 보인다고 느꼈을 때의 감상이었다. 방안에 불빛이 환
히 들어 정단외에 다른
주변 것들이 보이자 사빈의 눈은 오히려 점점 탁해지기 시작했다. 겨우 두명의 사람이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에 옷장이나 서랍따위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엎어놓은 박스 두개위의 시계와 라디오만
이 방안에 있는 물건의
전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바닥을 쪼갤 듯한 한기를 전해주는 얼음장같은 바닥이 문제였
다. 집의 크기와 모양새로
봐서는 연탄보일러일 것이 분명했다. 사빈은 거칠게 방을 나와 집의 구조상 연탄보일러가
있을 곳을 찾았다. 그러나
주변에 온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아 연탄불도 제대로 살리지 않는 것 같았다.
" 뭐하시는거예요? "
정단은 뒤늦게 사빈이 자신의 집안을 휘젓고 다니자 기분이 나쁜 듯 사빈을따라나와 말렸
다.
" 이런데서 살려고 나간거야? "
사빈은 자신의 팔을 잡는 정단의 팔을 오히려 꺽어 잡으며 좁은 부엌이지만 선반이 있는 곳
으로 정단을 끌고 갔다.

"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뭘 먹고 산거지? 석달동안 뭘 하고 산거야? 쌀도 없고 그릇도
없고.. 먹기는
하면서 산거야? 응? "
사빈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다정했지만 정단을 잡아 끄는 손은 아프도록 정단을 죄어왔
다.
" 놔줘요.. 사빈씨.. 아파요! "
사빈은 자신이 정단을 그렇게 세게 잡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놔줘요.. "
하지만 잡힌 팔에서 오는 통증에 얼굴까지 빨개진 정단을 보고 당황한 듯 사빈은 정단의 팔
을 놓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들어온 정단의 허한 얼굴에 사빈은 가슴이 아팠다.
' 얼굴이.. 왜 그래?'
이제까지 사빈은 집안 살림살이를 살피느라 흥분하여 정단의 얼굴을 잘 살피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상한
것이냐..
사빈은 젖살이 빠진 것처럼 갸름해진 정단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기처럼 통통했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정단을 찾지 못하고 지체하는 석달동안 고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 잘 놀았나, 부인?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
사빈은 이런 곳에 한시라도 정단을 놔둘 수가 없었다.
" 강비서. 올라오세요. 김기사도 함께 오세요. 와서 정단이 짐 좀 챙겨주셔야 겠습니다. "
[ 네.. 지금 올라갑니다. ]
강비서와 전화통화를 마친 사빈이 정단의 팔을 잡고 집밖으로 끌어냈다.
" 뭐예요, 지금? 전 안가요!! "
정단은 무작정 자신을 끌고 나가려는 사빈에게 딸려나가지 않기 위해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단의 발악이 사빈에게 통할리 없었다. 예전보다 더 가벼워진 정단은 사빈이
약간만 더 힘을 쓰면
아이처럼 달랑 들어올려질 수 있을 듯했다.
" 가기 싫어요. 어디로 데려가는거예요? "
" 우리집으로 가는거야.. "
" 여기가 우리집인데 어딜 가요!! 싫어요!! 이거 납치예요!! 놔요!! "
정단은 더 심하게 사빈에게서 벗어날려고 버둥거렸다. 사빈은 그런 정단에 당황스러웠다. 자
신의 계획에 정단의 이런
반항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계속 정단이 이렇게 바둥거린다면
보자기에 넣어 보쌈이라도
할 용의가 있는 사빈이었다. 그러나 일을 그렇게 만들지 않도록 정단을 진정시켜야 했다.
" 얌전히 따라와.. 그럼 가출해서 뭐하고 놀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을테니까.. "
" 어차피 당신은 다 알고 있잖아요. 내가 뭘하면서 지냈는지.. 그래서 이곳도 알아낸 거 아
니예요? "
정단은 어디서 걸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빈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는지
말이다. 분명히 자신이
실수한 것은 없었다. 윤비서에게도 집을 떠날 것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할머니와 살던
동네의 옛친구들도 일부러
만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빈은 또 어떻게 자신을 찾은 거란말인가.. 정단은 그런 무서운
능력에 치가 떨렸다.
멀쩡한 아들의 결혼을 망치는 그의 어머니나 떠난 여자를 찾아온 이 남자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사빈도 이전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반항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정단을 보며 예전처럼 정단이 쉽게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접었다. 한숨만이
나왔다. 왜 여기서 정단과 실랑이로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지..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것은
정단의 완전히 바뀐
태도였다.
" 당신이 뭔데 절 끌고 가는거죠? "
사빈은 지금 자신이 잡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 정단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단 한번도
이런 말투의 이런
소리를 그녀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는 정단의
문제에 지쳐버린 사빈은
정단을 돌려세워 자신을 보게했다.
" 남편이 자기 아내 데리고 가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
사빈은 자신의 어깨정도에 겨우 머리가 닿는 정단의 얼굴로 가까이 몸을 숙여 정단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정단은 너무나 단호히 사빈에게 물었다.
" 누가 누구의 아내라는 거죠? "
사빈의 당황한 눈빛이 정단의 눈과 부딪혔다.
" 당신도.. 알고 있었나? "
정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살짝 사빈의 시선을 피하며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비췄다. 그러나 사빈은
정단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정단이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 어떻게 알았지? 어머니가 말했나? "
"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사빈씨와 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 뿐이
에요. "
정단의 아무사이가 아니라는 말에 사빈의 눈이 탁해지기 시작했다.
" 아무 사이가... 아니야? "
사빈은 짧은 시간동안 정단을 말없이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조그만 여자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 우리가 어떻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지? 8개월동안 서로 몸도 나눠 가졌는데 아무 사
이가 아니라? "
" 그건 이미 끝난 일이에요.. "
" 누구 맘대로 끝내!! "
사빈의 주먹이 난간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손이 걱정될 정도로 난간의 부들부들 떨리는
진동이 쉬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됐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성을 내며 파랗게 빛나는 사빈의 눈이 자신이 얼만큼 분노했
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단은 그런 사빈이 무섭지 않다는 듯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 끝낼 필요도 없잖아요? 무슨 시작도 안했으니까요.. 더구나 당신과 나, 마음을 나눈 것도
아니었잖아요? "
" 너 류정단 맞니? "
사빈은 자신의 아내 몸속에 꼭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정단은 항상 답답할 정
도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던 여자였는데 지금은 무섭게 앙칼진 여자로 변해있었다.
" 왜요? 제가 고분고분하지 않은게 맘에 안드시나보군요.. 그때의 저를 원하시는 거라면 더
욱더 포기하세요. 저도
다신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
그러나 당돌한 목소리와 다르게 정단의 몸을 지탱하며 땅을 딛고 있는 정단의 다리는 사빈
모르게 후둘거이리고
있었다. 사실은 그가 무서웠다. 그렇게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것도 무서웠고
자신의 말 한마디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자신의 마음을 꼬
집었다. 떨고 있다는
것을 사빈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정단은 혀를 꽉 물었다. 하지만 그런 정단의 상태를 모
르는 듯 사빈은 다시
막무가내로 정단을 끌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놔요!! 놔!! "
더 이상 사빈은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난간을 붙잡으며 버티는 정단을 거의 안다시피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아래서 강비서와 김기사가 올라오는 것인지 두명의 사람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 실장님!!! "
그들은 사빈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자신들의 어린 사모님을 보며 놀란 것 같았다.
강비서는 당황스러움에도
예의 그 근엄한 표정을 지키고 있었지만 김기사만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눈과 입을 크게
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자신을 보며 어떻게 생각할지는 사빈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 저 먼저 가겠습니다. 김기사와 강비서는 집에 있는 짐 챙겨서 나중에 갔다 주세요. "
" 네.. 실장님.. "
" 무슨 짐을 챙기라는 거예요? 강비서님!!! 제짐 그냥.. 놔두세요! "
정단은 자신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짐에 손을 대겠다는 그들에게 화가나 소리쳤다. 그러나
정단의 그런 외침은
사빈의 명앞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저 그들은 서로 지나쳐 정단은 사빈에게 끌려
가고 강비서와 김기사는
열심히 계단을 올라갈 뿐이었다. 그리고 차가 세워진 계단길의 입구에 도착해서도 사빈은
타지 않겠다는 정단을
억지로 태워 안전벨트까지 매어 주었다. 물론 정단이 중간에 뛰어내릴 기세였기에 사빈은
차문을 모두 잠궈야 했다.
사빈과 떨어져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그만큼 많이 변해 있었다.
" 내려. "
집에 도착해서도 사빈이 좌석문을 열었지만 정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까지 온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단으로서는 마지막 오기를 부려보는 것이었다. 그것을 안 것인지 사빈은 한숨을
내쉬고는 정단의
안전벨트를 풀어 억지로 정단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집으로 순순히 들어갈
정단이 아니었다. 사빈이
문앞에서도 현관문을 붙들고 늘어지는 정단을 집안으로 들여넣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니 말
이다. 정말 지금이 얼마나
추운지는 사빈도 정단도 다 잊을만큼 땀을 흘리며 쓸데없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
으로 들어가자 사빈은
바로 정단을 욕실로 몰아넣었다.
" 씻고 나와. "
정단은 사빈의 말을 따르고싶진 않았지만 더 버티다가는 사빈이 몸소 씻어 주겠다고 나설
것 같은 분위기에 조용히
그가 안겨주는 수건과 속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석달이
라는 시간은 길었는지 왠지
욕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몸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물줄기도 어색했다. 조금전까지
지내던 집에서는 물이
너무 차가워 고양이 세수만 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편안히 샤워를 할 수 있게 되니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비누거품을 느끼며 정단은 역시 인간이란 욕심쟁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할머니와 살 때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한번도 불편하다
고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그런 생활을 하려니 적응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번 이런 호사를 경험한 몸은 너무
속물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동안 사빈이 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었나보다.
그런데 욕실을 나서자 정단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욕실앞에 앉아 문을 지키고 있는
사빈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단이 나오는 순간부터 뜨거운 김에 붉게 달아오른 정단의 얼굴을 비스듬한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단이 사빈의 찌르는 시선을 회피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사빈은 정단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
게 얼굴까지 잡고서 정단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 살이 빠진건가? "
사빈은 야윈듯한 정단이 계속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단은 별로 자신이 살이 빠졌다
고 느끼진 못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빈은 그동안 못 봤던 만큼 보고 만져야 했다는 듯이 젖은 정단
의 머리를 뒤로 넘기기도
하고 뺨을 문지르기도 하면서 정단을 만졌다.
그런데 그동안 갈색의 염색물이 많이 빠졌는지 이젠 머리칼의 윗부분은 원래 정단의 검은
머리칼이 새로나와 정단의
부드럽고 따뜻한 머리카락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볼살이 빠지며 갸름해진 얼굴 때문에 정
단은 사빈이 알고 있던
정단 같지 않았다. 더욱이 까맣고 큰 눈동자는 그전과 똑같았지만 예전의 아기같은 눈망울
은 사라지고 흑요석같은
고혹적인 눈빛만 남아 있었다.
" 그만 보세요. "
사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정단이 퉁명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그 말에서도 예전
과 같은 귀여움이나
수줍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정말 불쾌하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말투에
서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적극적으로 사빈에게 감정을 표현하던 정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빈의 앞에서는
언제나 귀엽고 따뜻하게
웃어줬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사빈은 그동안 못본 얼
굴이 너무나 반갑고 보고
있어도 그리운 것 같은데 정단은 사빈의 얼굴은 보고싶지 않은 것처럼 계속 다른 곳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런
정단의 태도에 사빈은 지쳤다는 듯이 정단의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 당신과 이런식의 심리전.. 별로 재미없군.. "
몇시간 전 강비서와 함께 정단을 찾으러갈 때 사빈은 정단을 만나면 뭐라고 인사를 할까를
고민하고 오늘 옷은
제대로 갖춰입었는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오래간만에 보는 정단앞에서 멋있어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그런데
정단이 살고 있는 곳을 보자 무작정 화부터 났고 또 정단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 살림살이를 보자
미련한 정단을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전적이 있는지라 정단에게 화도 못내고 따뜻한 집
으로 데려오려고 하는데
반항하는 정단 때문에 사빈은 우울해졌다. 그리고 정단이 샤워하는 것을 기다리며 오늘밤은
밤새도록 정단을 안고
놔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그녀는 나오자마자 사빈에게 털을 곤두세우고 대들고 있었
다. 늘상 정단이 사빈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런식의 말다툼은 사빈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
게 말 안듣는 딸처럼 구는
정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빈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혼란 사이로 정단이 자신의 왼손을 쓰다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빈은 깜빡
잊고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정단을 봤을 때가 그녀가 막 실밥을 풀은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손이괜찮은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을
말이다.
" 손은.. 괜찮아? "
사빈은 정단의 왼손을 펼치며 흉터가 남아있을 곳을 살폈다. 정단이 막 목욕을 하고 나와서
그런지 그것도 핑크빛의
예쁜 빛이 돌며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사빈을 아프게 하는 흉터였다.
그런데 사빈은 정단의
손에서 뭔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흉터에만 정신이 쏠려 뭔지 잘 생각은 안났지만 사빈은
이내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깨닫고 가슴이 쏴하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역시.. 팔은 것인가.. '
정단을 다시 찾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의 것을 알게 되니 안좋았던 기
억이 되살아났다.

머실린...

사빈은 정단과의 재회로 잊고 있었던 문제를 떠올리며 화장대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정단의
무릎위에 내려 놓았다.
" 그건 언제부터 먹었어.. "
정단은 사빈이 던진 분홍빛이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을 집어 그것이 무언가 펴보았다.
" 이건.. "
정단은 사빈이 이것을 발견했다는데 당황했다. 짐을 다 정리하고 갈 수 없어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몇 개만 들고
가느라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진 그것은 속안에 있던 약
은 사빈이 다 빼버린
것인지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 그래.. 언제부터 피임하고 있었지? 오래 됐나? "
사빈은 이번엔 꽤 화가 난 듯 침실에서는 늘 조심하던 담배를 피어 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전까지는
당당했던 정단도 사빈의 눈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아니요.. 별로 오래 먹지 않았어요.. "
' 별로.. 오래 먹지 않았다? 그렇다면 먹긴 먹었단 얘기군..'
사빈은 약이 빈 부분으로 봐서 정단이 피임약을 복용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단
으로부터 직접 먹었다는
얘기를 듣자 다시 화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닫는 것 같았다.
" 언제부터 먹었어.. "
"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샀어요.. "
사빈은 정단이 병원에 입원했던 날을 계산했다. 그렇다면 정말 얼마 먹지 않은 것이었다. 그
때 이후로는 정단의
다친 손이 신경쓰여 별로 관계도 못가졌으니 말이다. 그래도 정단이 피임약 먹을 생각을 한
자체가 사빈을 화나게
했다.
" 앞으론 먹지마.. 알았어? "
" .... "
" 그리고 앞으로 아이 낳고 피임해야 할 때가 되도 먹지마. 피임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먹는거 여자한테
안좋아. "
좀전의 화났던 모습에서 어느덧 사빈은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단의 젖은 머리칼을 쓰
다듬었다. 그리고 정단에게
마지막으로 확실히 해두기 위해 약간은 엄하게 말했다.
" 앞으로 이런거 먹는거 또 한번 나한테 보이면.. 가만 안둘거야.. "
그러나 사빈의 말에 정단이 차가운 눈빛으로 사빈을 주시하며 말했다.
" 가만 안두면.. 또.. 때릴 건가요? "
정단은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사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스친 당황의 빛을
오고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정단의 머리위에서 갈 곳을 잃었던 사빈의 손
은 다시 정단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거둬졌다. 그리고 그 주인은 정단을 남겨놓은채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정단이 너무나 큰
상처를 들춰낸 것이다.
사빈은 주방옆에 위치한 바로 가서 술을 꺼냈다. 평상시 술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빈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바를 이용하는 일이 드물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술을 마시고 싶었다. 여전히 정단의 말이 귓
가를 맴돌고 있었다.
- 또.. 때릴 건가요?
그래.. 내가 널.. 때렸었지..
사빈은 정단의 그 말 한마디를 안주 삼으며 코끝을 찡하게 할 정도로 독한 술을 넘겼다. 그
리고 어느 정도의
취기가 머리로 올라왔을 때 사빈은 자리를 정리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빈의 눈앞
에는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정단이 없었다. 오늘도 정단이 떠났던 그날처럼 푸른 달빛만이 침대를 비
추고 있었다.
*******
" 류정단.. "
사빈은 가슴이 내려앉아 정단의 이름도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설마.. 또.. 되풀이 되는 것
인가? 사빈은
정단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사
빈을 막아서는 정단의
작은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이 있는 걸로 봐서 정단이 집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란 말
이다. 사빈은 목구멍까지
올라와 쿵쾅대고 있는 심장을 도로 깊숙이 박아넣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가 아니면 드
레스룸일 것이다. 그리고
사빈의 예상대로 정단은 드레스룸의 작은 간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정단은 잠결에 뭔가가 자신의 가슴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무슨 강아지 같기도 하고
다람쥐같기도 한 것이
얼굴을 부비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단이 눈을 떴을 때 정단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사빈이라는 사람이었다.
" 왜 여기 있는거야? "
사빈은 정단의 얼굴을 커튼처럼 가리며 퍼져 있는 머리카락을 치우며 물었다. 하지만 정단
은 대답하지 않았다.
" 가자... 우리 방에 가서 자자.. "
사빈이 정단의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정단은 사빈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 그방엔 안들어가요. "
정단은 고집을 부리는 아이처럼 쌜뚱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정단의 고집을 쓸데없는 반
항이라고 생각한 사빈은
아이처럼 가벼운 그녀를 안아 1층 침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려가는 와중에도 정단은 싫다
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저어댔다.
" 류정단.. 석달동안이나 쉬다 왔으니까 이제 아내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
사빈은 그렇게 말하며 정단을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정단은 그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비장한 결심을 한 여인처럼 사빈을 보며 소리쳤다.
"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
사빈은 석달만에 만져보는 정단의 말랑한 몸에 흥분하여 참을 수 없을 지경인데 정단은 사
빈의 손길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 내가 만지는게 싫은가? 안그랬잖아."
사빈은 갑자기 변한 그녀의 성격에도 적응하기 힘든데 이런식으로 또 자신을 안달나게 만드
는 정단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이어진 정단의 말이 더 충격이었다.
" 그때는 우리가 부부였으니까요.. "
하지만 이제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한 침대를 쓸 수 없다고 정단은 말하고 있었다. 정단
이 그 혼인신고라는
절차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사빈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리
고 더욱더 사빈을 미치게
만든 것은 앞으로도 절대 사빈과 한침대를 사용할 마음이 없다는 정단의 말이었다. 그러나
사빈은 정단의 그말을
그다지 신뢰하진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나면 자연스레 또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단은 언제나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정단을 데려온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사빈은
여전히 잠든 정단의
침대로 몰래 기어들어갔다 정단이 깨기전 몰래 돌아나오는 불쌍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
다.

" 강비서님.. 짐은 어디있습니까.. "
[ 제가 실장님 사무실 금고 안에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 물품
들은 내역만
적어놨습니다. 혹여 그 중 확인이 필요하신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나머지는 따로 보관해
두었으니까요. ]
" 알겠습니다. "
사빈은 한동안 정단과의 신경전 때문에 신경쓰지 못했던 정단의 짐이 생각났다. 별로 챙길
짐이라곤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단에게 전해줄 물건은 빼놔야 했기 때문에 사빈은 강비서가 중요한 것만
추려놓았다는 짐을
금고에서 꺼냈다. 그런데 그것들을 꺼내는 사빈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누구 믿겠느냐
말이다. 성사빈이 아내가
쓰던 물건을 금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고.. 언제나 이 금고에는 입찰에 관한 기밀서류 같은
것만 보관을 해왔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정단의 물건이 더 사빈에게는 소중히 숨겨둬야 할 것
들이었다. 정단의 손길과
숨결이 남아 있는 것을 아무나 손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꺼낸 사빈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사빈의 숨을 조여왔던 것이
정단의 아픈 과거와
그녀의 빈자리로 인한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면 이번엔 놀람과 감동으로 인한 숨막힘이었
다. 그래서 사빈은 자신의
눈이 본 것을 믿지 못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자주색 벨벳 장갑과 자그마한 결혼사진, 그리고 파랗게 빛나고 있는 정단의 결혼반지..
장갑은 사빈이 프랑스 출장때 사다준 선물이었고 결혼사진은 정단의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조그마한 사이즈의
액자였다. 그리고 정단이 팔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결혼반지. 사빈은 정단이 이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자신이 사준 선물, 그리고 결혼사진, 반지..
' 이것으로 정단도 조금쯤 나를 좋아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사빈은 석달전부터 자신의 서랍속에 있던 서류를 꺼냈다. 이미 사빈이 작성해야 할 곳은 다
채워져 있고 남은건
정단이 채울 곳뿐이었다. 이번엔 확실히 할 것이다. 아무도 정단이 자신의 여자라는 것을 믿
어 의심치 못하도록..

30.
** 고백 **
" 이게 뭐예요? "
사빈은 자신이 내민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똘망똘망 뜨고 자신에게 묻는 정단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 혼인신고서야.. 당신 도장만 찍으면 돼. "
" 제가 왜 여기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요.. "
휴우~ 사빈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입사이로 꽉 물었다. 하지만 자신을 떠났다 돌아온 후 확
실히 매사에 삐딱해진
정단 때문에 한번씩 숨을 참는데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 신고가 안됐다니까 다시 해야지. "
사빈은 되도록 정단에게 동요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 그러니까 왜 다시 해야 하냐구요.. "
" 정단아... "
사빈은 도대체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 전 당신하고 이런 생활 계속 해 나갈 생각이 없어요. "
이여자 언제부터 이렇게 똑부러지는 여자가 되었단 말인가..
" 그럼 당신이 원하는 생활은 뭔데.. "
" 편안한 삶이요. "
마치 자신이 원하는 생활을 꿈꾸는 것처럼 정단의 표정이 아늑해졌다.
"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땐 울고 화내고 싶을 때는 화내고.. 하기 싫은 건 안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
사빈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하는 편안한 삶이라는 것이 정단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사빈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고 싶다.. 너무나 평범하고 쉬운 일이지만 이제
까지 정단이 해보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행복해도 먼저 가버린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죄송하여 맘껏 행복해
보지도 못하고 울고 싶어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 울음을 참고.. 화내고 싶어도 할머니를 지켜야 했기에 참아야 했고.. 하
기 싫은 결혼도...
할머니를 위해서 해야 했다. 단 한번도 그녀 자신이 원한 것을 이루지 못했음을 사빈은 안
다. 불쌍한 여자..
대신 울어주고 싶을만큼 가슴이 아픈 여자.. 사빈은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정단이 불쌍
해 결딜 수가 없었다.
측은한 마음이 심장을 아프게 죄어와 정단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은 사빈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정단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어도 사빈 자신이 제외된 행복만큼은
가져다 줄 수 없었다.
" 그렇게 해.. 내 앞에서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땐 울어. 화내고 싶으면 나한테 화풀
이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내가 다 해줄게.. 당신 해야 할 일
내가 대신
해줄테니까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 내가 그렇게 살게 해줄게. "
사빈은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정단이 그동안 불행했던 만큼 남들보다 더 행복하
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빈의 그런 진심을 알기에 정단은 너무 멀리 있었다.
" 당신과 저 사이에 그렇게 노력할 만큼 의미가 있나요? "
정단은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빈의 진심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단의 그
런 겉도는 반응속에서도
사빈은 진지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정단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
었다.
" 있어.. "
사빈은 자신의 간절한 눈빛안에 정단을 가뒀고 사빈의 눈매가 촉촉이 젖어오는 순간 정단도
그 눈안에 갇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붉은 열기를 품은 그의 눈동자가 한참을 정단을 품고 침묵에 겨워
정단이 눈을 감으려 할때
사빈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사랑해.. "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사빈은 변함없이 지긋하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정단을 붙잡고 있
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정단의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단에겐 처음으로 들어보는 고백이었다. 그래서 강하게
자신을 보호할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정단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사빈은 정단의 경계를 풀기 위해
계속 읊조렸다.
" 사랑해... "
" 널...사랑..해.. "
" 내가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못 놔주겠어. "
정단의 큰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사빈은 보았다. 정단의 눈을 가리고 있던 끈이 풀
어지는 것을, 그녀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것을 사빈은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그 껍질로
부터 벗어났다고 판단한
순간 사빈은 정단의 볼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 사랑해. "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단을 하얗게 태우는 뜨거운 바람이 몰려와 정단의 가슴으로 스며들
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아버려도 좋을 정도로 행복한 설레임이 정단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받아 보
지 못한 자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 안믿어.. "
정단을 품에 안고 사랑을 바치던 사빈의 몸이 굳어 버렸다.
" 난 안.. 믿어.. 사랑했다는 말따위.. 안믿어.. "
실망감에 풀이 죽은 사빈이 정단의 품에 묻었던 고개를 들자 눈에 들어온 것은 정단의 텅
비어버린 눈동자였다.

" 날.. 이용하지 말아요. 이제와서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운가요? 사업을 위해서 위장결혼했
던게 들통날까봐
이러는거예요? "
사빈의 진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단이 그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분석하고 있
었다. 이사람이 왜 나에게
사랑했다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나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심하여 그
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잡아요. 저처럼 자신을 잃지 말아요. 이제 사빈씨는 정말 사
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
사빈은 정단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정단은 사빈이 채영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채영을 사랑하지만 주변의 상황 때문에 그 사랑을 포기하고 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빈은 어떡해서든 자신의 진심을 정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채영이 아닌
정단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 류정단.. 잘 들어.. "
사빈은 정단의 머리를 두손으로 잡아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정채영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너밖에 없어.. 내가 같이 살
고 싶은 사람도
너고 내 아이를 낳아줄 여자도 너여야 해. 이제... 다른 사람은 안돼. "
사빈은 정단이 다른 곳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뒷목을 고정시켜 자신의 눈만 바라보게 했다.
" 너랑 살고 싶어.. 죽을 때까지.. "
너무 가까이 있는 얼굴 때문에 사빈이 말할때마다 그의 숨결이 정단의 입술에 닿았다. 사빈
의 눈에 들어 있는
정단의 눈이 흐려지며 젖어왔다.
" 네가 내 여자였으면 좋겠어. "
정단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한 상태에서 사빈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그리고 살짝살
짝 둘의 입술이 부딪혔다
떨어졌다. 하지만 사빈의 입술이 백일동안 떨어져 있던 정단과 만나려는 순간 정단의 숨결
이 사빈으로부터 멀어졌다.

" 미안.. 해..요.."
사빈이 손에 힘을 주고 있진 않았기 때문에 정단이 쉽게 사빈에게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사빈은 갑자스러운 정단의
거부에 절망적인 표정으로 정단을 주시했다. 왜냐고 묻는 표정.. 정단은 미안했다.
" 사랑하지 않아요.. "
정단의 눈꼬리에 검은 물기가 어리며 하얗게 반사되었다.
" 나는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
" 무슨 소리야.. "
정단을 놓았던 사빈의 손이 다시 허공을 휘저으며 작고 연약한 존재를 움켜잡았다.
" 날.. 사랑하지 않아? "
힘 없는 사빈의 목소리가 공기중에 사라질 듯 바닥으로 가라 앉았다. 정단과 사빈의 눈동자
만이 부딪힐 뿐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엔 침묵만이 가득했다. 먼저 대답하는 사람도 묻는 사람도 없이 조금은 오
래라고 생각될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정단의 말을 확인하는 사빈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들렸다.
"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
정단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빈을 마주하던 눈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사빈의 손이 아기
다루듯 정단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줄기 물길을 이루며 반사되는 정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곧
사빈의 손은 정단의 몸에서 벗어나 다시 허공으로 떨어졌다. 고뇌를 품은 흐린 눈만이 정단
을 주시하고 있었다.
' 미안해요. 미안해요.. '
정단은 그 눈빛을 더 이상 받고 있을 수 없어 그로부터 돌아섰다. 등뒤로는 계속 그의 무거
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단은 되돌아 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혼란스러웠다. 한때는 사빈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착각하기도 했다. 아마 채
영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정단은 평생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영이 나타나면서 정단은 자신의 남편이 그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어쩌
면 그때 느꼈던 사빈의
사랑이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정단이 채영과 사빈의 사이를 오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 이미 정단은 사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다. 그가 자
신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라해도 변하지 않을 감정이 이미 정단을 지배하고 있다. 사빈이 뭐라 해도 바뀌지 못
할 결정이다. 무엇보다
정단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매일 참고 참는 생활,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숨조차 올바로 쉴 수
없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만약 그의 아내로 남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의 말처럼
하고싶은 대로만 하면서
편하게 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단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
가. 정단은 진정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삶을 원했다. 누구에게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삶말
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빈을 받아들이면 정단은 또 자신의 이름을 잃고 사빈의 여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이제 겨우
찾은 이름인데 정단은 그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언젠가 변할 사빈의 감정에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사랑이란 언제나 극복되고 또 적응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정단은 사빈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을 오래 가질 수 없었다. 밖에서 전해지는 소
음이 정단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뭔가가 깨지는 소리였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이 소음의 주인이 사빈이
라는 것을 깨달은 정단이
침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거실로 나온 정단의 눈에 들어온 상황은 정단을 심각한 공포속에
빠뜨렸다. 이미 거실에
있는 장식장과 양주병, 텔레비전등이 바닥에 해체된체 뒹굴고 있었고 거실을 장식하고 있던
화병이며 액자등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박살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빈이 있었다. 그런데 등뒤로 정단이 나온
기척을 느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사빈이 말했다.
" 나오지 말고 들어가.. "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정단이 다시 침실로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빈이 바닥에
엎어진 나무탁자를 발로
밟으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들어가.. 류정단... "
마치 야수와도 같은 사빈의 목소리에 놀란 정단은 자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이미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등은 멈추지 않았다.
정단은 그 소리가 크게
들리면 들릴수록 이불로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무서웠다. 한번도 본적 없는 사빈의 무서운 모습에 정단은 겁을 먹었다. 그가 무서웠다. 그
리고 그를 막을 수
없음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그런 그가 무서워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그와
동등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항상 자신을 죄인이라 입력해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그래서 사빈이 저렇게 화가 난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머릿속으로 외치면서도 결국엔 그를 저렇게 난폭하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생각
에 그가 때려부순 그것들이
자신인 것 같아 더 무서웠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빈의 난동에 정단이 흐느끼기 시작했을 때
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집안에는 사람의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았
다. 그러나 그런 고요함이
정단을 더욱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이 적응에 탁월한 동물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단은 정적속에 자신의 숨
소리가 들릴까 숨죽여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된 긴장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잠들면서도 온몸을
감싸는 이불만큼은 꼭 쥐고
놓치 않았다.
그런데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정단은 자신을 덮쳐오는 무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
다. 정단이 목숨처럼
움켜쥐고 있던 이불도 이미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이불 대신 뒤에서 한남자가 정단을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빈이라는 것을 깨달은 정단은 조금 전 있었던 그의 무서웠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그런데 사빈도 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정단의 귓불에 얕은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 괜찮아. 아무 짓도 안해.. 걱정하지마.. "
사빈은 어느새 다정한 정단의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사빈은 밤새도록
정단의 등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정단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는 집안에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 있었던 일도
꿈인 것처럼 그에 의해
망가졌을 모든 물건들이 깨끗이 제자리에 있었다. 텔레비전과 장식장도 똑같은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인지 거실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부터 정단은 사빈에 의해 감금되었다. 사빈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못하도록 사
람을 세워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정단의 혼란을 부추긴다는 것을 사빈은 몰랐다. 또한 정단이 나가
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을 동원해 막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빈이 깨닫기까
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날은 정단의 외할머니의 기일인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사빈은 그날 정단과 함께 정단의
외할머니 유골이
뿌려졌다는 호수에 가기 위해 정단에게 차를 보냈다. 그런데 정단과 너무 친한 윤기사는 정
단이 또 도망가려할 때
도움을 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빈은 다른 차를 보냈었다. 하지만 정단은 중간 휴게소에
그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화장실의 출입구가 양옆으로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
고 정단은 그들이 자신을
찾아 헤매는 사이 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간 정단은 가희와 유원사이에서 갈등하기는
했지만 사빈과 늘 가까이
있는 유원을 부르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또한 아무 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희
가 더 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희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
지만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였기에 정단은 가희에게 도움의 요청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어떻게 된거예요? "
2시간만에 정단을 휴게실에서 주워온 가희가 정단의 옷을 갈아입히며 물었다. 하지만 정단
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희에게 하지 못할 말도 아니었지만 오늘 왜 자신이 사빈에게서 도망쳤는지를 설명하려면
너무나도 긴 얘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요즘.. 성실장님과 사이가 별로 안좋아요? "
보기에도 우울한 검은 원피스를 벗겨내면서 가희는 정단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정단의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했다. 마치 온몸을 이루는 수분과 혈액이 모두 빠져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 낮잠 좀 잘래요? "
그제서야 정단은 가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희가 정단의 잠자리를 위해
침대를 정리하자 정단이
가희의 손놀림을 막았다.
" 가세요. 일하다 오셨잖아요. 저 괜찮으니까 갔다 오세요. "
안그래도 가희는 예약손님이 있었던 것에 신경이 쓰였던지라 정단에게 잠자리만 봐주고 다
녀온다며 나갔다. 그런데
가희까지 나가버리고 혼자 남게 되자 정단은 가희의 집이 낯설어서 그런지 두려워지기 시작
했다. 그러나 자신이 오늘
왜 도망쳤는지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했다. 사실 처음부터 또 사빈을 떠나려던 생각은 없었
다. 그냥 오늘 밖엘
나오니 사빈을 피해 어디로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잡아 두
려고만 해서 그 반발심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도망치고 나니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겁났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 도망갔다 다시 그의 앞에 나서기가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영영 도
망가버리기엔 지난번처럼
짐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었고 여분의 돈도 없었다. 그러나 버틸 때까지는 버틸 것이라
정단은 다짐했다. 하지만
가희에게 오랫동안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아마 사빈에게로 바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곧 일
자리라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단은 가희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저녁식탁을 차렸다. 다행히 가희는 바른
생활 사람이었는지 냉장고엔
먹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주방에서 일을 하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석
달동안 사빈의 집을 나가
생활할 때는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빠듯했기 때문에 음식이고 뭐고 만들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정단이
좁은 부엌에서 했던 일이라고는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붓는 것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사빈에게
잡혀와서는 온종일 일해주는 아줌마가 있었기 때문에 정단이 주방에서 할 일이란 없었다.
아마 사빈의 식사를 차려준
것은 다섯달도 전의 일일 것이다. 정단이 손을 다쳤을 때부터 쉬었으니까..
' 나 지금 뭐하는거야.. '
정단은 자기가 왜 또 그런 예전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지 한심스러웠다. 더욱이 사빈의 식사
를 직접 차려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정단은 되도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가희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재료들을 꺼내 요리를 했다. 그러나 역시 자신의 주방이 아니라 그런지 가희가 돌아와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재료를 썼다고 안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냄비가
토닥토닥 맛있는 냄새를
뿜으며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정단의 걱정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 사랑스러운 남비의 뚜껑을 열었을 때 정단의 두눈은 놀람으로 커졌다. 그리고 이
내 검은 눈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정단은 자신의 눈에 뜨거운 김이 들어가 눈물이 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정단에게 서글픔을 느끼게 한 그것은 넓적한 찌개그릇안에서 맛있게 끓고 있는 버섯
전골이었다.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
정단은 자신이 끓인 것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왜 내가 이것을 만들었을까하고...
버섯전골은 사빈이 좋아하는 음식였기 때문에 자주 끓였던 것이었다.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빈이 유일하게
먹는 고기라고는 야채가 많이 섞인 탕이나 전골류였는데 그중에서도 사빈은 버섯이 많이 들
어간 버섯 전골을 제일
좋아하였다. 그런데 정단은 오늘 자신도 모르게 또 버섯전골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정단은 생각했다. 그러나 정단이 버섯전골과 사빈을 연결시
키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
가희가 돌아왔다.
" 어머나! 저녁밥 해 놓은 거예요!! "
" 저기.. 허락도 안받고 맘대로 썼어요.. 죄송해요.. "
"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다 먹으려고 사놓은건데 저야 정단씨가 다 이렇게 해주면 고맙죠.
빨리 먹어요..
전 먹고 나중에 씻을래요. "
언제나 사람의 우울한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가희의 목소리에 정단도 조금전 버섯전
골로 인한 안좋은 기분이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가희와 마주앉아 저녁식사를 즐겼다.
그런데 자신이 왜 집을 나왔는지 가희가 뭐라 한번은 물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희는
일상적인 얘기를 하며
즐거워할 뿐 정단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버섯전골이 맛있다며 사빈이 참 부럽
다는 말과 결혼기념일이
다가오지 않냐고 물은 것이 사빈과 관련된 말의 전부였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묻지
않으면 얘기가 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 저기요.. 언니.. "
정단은 가희를 가희씨라 부르는 것은 너무 무례한 것 같았고 마땅히 떠오르는 호칭이 없어
그냥 언니라고 불렀다.
더구나 가희는 정단의 배다른 언니인 진영과 친구였으니 언니라 부르는게 제일 좋을 것 같
았다. 하지만 가희는
정단으로부터 처음 듣는 언니소리에 밥덩어리가 목에 걸린 것처럼 깜짝 놀랬다.
" 에.. 예? "
" 저기.. 언니라고 부르면 안..돼요? "
" 아아아아...안되긴요.. 안되긴요.. 좋아요.. 좋아.. 저도 정단씨가 저를 친근하게 언니라고 부
르니까
좋은걸요.. 그렇게 불러요.. "
그러나 정단은 가희를 언니라 부르는데 가희는 정단을 정단씨라 칭하며 존대하니 조금 어색
한 감은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정단은 한번 방긋 웃고 가희를 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희에게 자신이 지
금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해 조심스럽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 사실은.. 저 가출했어요. "
오늘 가출한 정단을 도와 빼돌린 것이 자신이므로 가희에게는 그말이 별로 놀랄 것도 없었
다. 하지만 숨김없이
말하는 정단의 말에 가희는 수저를 내려 놓아야만 했다. 유원에게 들었던 것보다 상황이 무
섭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정단씨는 왜 성실장님과 같이 살고 싶지 않은데요? "
" 저는 자격이 없어요. "
정단은 애꿎은 버섯만 수저로 폭폭 찌르며 웅얼거렸다.
" 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
" 처음부터 불순한 생각으로 결혼했으니까요. 사빈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부가 된게 아
니니까요. "
정단은 자신이 사빈을 찾아가 결혼해달라고 매달렸던 때를 떠올렸다. 비록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빈을 농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 그건 성실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였나요? 어차피 두 집안의 정략결혼이었고 정단씨나 성실
장님이나 순수한 마음으로
결혼하지 못한 건 똑같은거 같은데요. "
그렇긴 했다. 사빈도 정단을 처음부터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 하지만 지금은.. "
" 지금은? "
" 사빈씨의 사랑이... 너무나 커요.."
정단의 머릿속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사빈의 큰손과 그가 선물로 사줬던 장갑과 같은 그
가 자신에게 해줬던 많은
것들이 지나쳐 갔다.
" 처음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하지만 뒤돌아보니 모든게 그가 주는 사랑
이었어요. "
얼마전까지는 정단도 모르고 있던 것이다. 바로 며칠전 사빈이 결혼신고서를 가져와 사랑한
다고 외쳐댈 때도 정단은
그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고백과 그와 함께 보냈던 예전을 떠올리니 정말 그
것이 사랑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자신이 받았던 그의 사랑이
참으로 크고 넓었다는
깨달음이 생기면서 더더욱 그에게 죄지은 느낌이었다. 그가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
는 동안 자신은
할머니일에만 급급하여 그를 진심으로 대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희
는 이런 정단의 고민에 정말
확실하면서도 간단한 답을 제시해주었다.
" 그럼 정단씨도 그만큼 성실장님한테 사랑을 주면 되잖아요.. 간단하네요! "
하지만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사빈을 사랑해주는 일이었다.
" 하지만 전.. "
" ... "
" 전.. 사빈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정단이 말했다. 하지만 가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정단을 만
난 것이 몇 번 되지는
않았지만 매번 볼때마다 정단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
" 제가 그를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
가희는 사빈을 이용하라고 쥐어줘도 너무나 착해서 이용할 방법도 모를 것 같은 정단이 그
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순수해 보였다. 아무래도 정단의 경우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너무 커서 불필요한 생각
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 저는 사빈씨가 저한테 잘해줄 때마다 사랑이 샘솟는 것 같아요.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아빠를 보는 것
같고 아플 때 간호해주면 나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느낌에 행복해지거든요. 하지만 만약 나
에게 아버지가 있고 나를
걱정해주는 가족이 있다면 내가 사빈씨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래서 왠지 사빈씨를 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대타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
역시나 류정단다운 고민이었다. 가희는 귀여운 정단의 생각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심각한 정
단의 앞에서 웃는 것은
미안했지만 가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후 정단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 정단씨. 가족에 대한 사랑과 성실장님에 대한 사랑을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실장
님이 아빠같이 가족같이
대해줘서 그가 좋은거라면.. 정단씨는 그를 아빠처럼 가족처럼 사랑하는거잖아요. 그게 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찌보면 성실장님은 다른 남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거네요. 다른 여자들
은 자기 아빠한테 줄
사랑, 엄마한테 줄 사랑, 오빠한테 줄 사랑, 언니한테 줄 사랑 이렇게 여기저기 뚝뚝 떼어주
고 남은 걸 자기
남자한테 주는데 성실장님은 정단씨의 모든 사랑을 한몸에 받는거잖아요.. 오히려 성실장님
사랑 더 달라고 정단씨가
졸라야 겠어요. "
정단은 가희의 말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한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거예요. 정단씨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
이 필요한 것
같아요.. "
가희는 정단의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막힘 없이 얘기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렇게 숨
김없이 말하는 정단이
고맙기도 하고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 그런데 정단씨는 날 믿어요? "
정단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고 가희를 쳐다보았다.
" 나한테 이런 얘기를 다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내가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소문
이 가장 빠르게
도는 곳이 샵이라는 거 몰라요? "
가희는 정단이 누구에게나 이렇게 쉽게 사실을 말하고 다녔을 때의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 아니요. 저는 언니를 믿어요. 그리고 말이 돌아도 할 수 없는 거지요. 어쨌든 지금은 대화
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동안 묻고 싶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주변에 없었거든요.
답답해도 혼자서만
생각하느라 더 힘들었는 걸요.. "
가희는 이제 갓 23살이 된 어린 나이에 그런 힘든 일을 치루면서도 누구 한명 마음 털어놓
을 때가 없었다 말하는
정단이 애처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모성애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 네.. 믿고 말해요..내가 다 들어줄게요. "
가희는 정단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동안 힘들었을 정단을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내일 가희는 정단을 배신할
것이다. 이미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그리고 정단은 유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가희가 유
원과 약속했기
때문이다. 정단이 전화를 했던 것처럼 또다시 연락을 해온다면 유원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
기로 말이다. 그러나 그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단을 유원에게 데려가는 것이 절대 정단을 위한 일이라 결정 내
렸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정단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유원은 사빈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정단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정단을 맡고 있는 것을 남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단의 소재지를 확
보해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유원은 정단을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하지만 유원도 정단과의 약속 때문
에 사빈에게 정단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말할 수 없었다.
" 사빈씨한테 얘기한면 안돼요!! 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다 정리하고 나면 제가
사빈한테
돌아갈거예요.. 그러니까 유원씨가 말해서는 안돼요.. "

그러나 사빈은 며칠 지나지 않아 유원이 정단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며칠 째 자신보다 더
안달을 떨며 정단을 찾아야 했다던 유원이 이상할 정도로 얌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
단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번에 정단이 연락을 취할 사람은 유원과 윤기사, 류
회장쪽의 윤비서로
좁아진다. 그렇기에 유원의 달라진 행동은 충분히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처음엔 정단이 납치된 것이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정단을 직접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정단을 맡긴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나 정단이 사라진 사흘 뒤부터 유원이 이상해지면서 사
빈은 어쩌면 유원이 정단을
데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차분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사빈은 퇴근하는 유원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러나 집앞에서 유원이 문을 열
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빈은 한동안 밖에서 기다렸다. 아직 유원이 정단을 데리고 있다는 확증이 없기
때문이다. 사빈은 조용히
유원의 집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얼마나 그곳에서 기다렸는지 모르게 사빈이 유원의 집을
주시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차가 유원의 집앞을 환히 비추며 정단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차가 비
춘 것이 정단의 단아한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는 재활용 쓰레기 봉투였기 때문이다. 정단은 집에서도 재활용 쓰레
기를 내 놓을때면 언제나
캔, 플라스틱, 종이라고 직접 글씨를 써서 붙였었다.
' 그래.. 여기 있었단 말이지.. '
그런데 그 순간 사빈을 더 화나게 했던 것은 집을 나간 정단과 그것을 자신에게 숨겼던 유
원보다도 마치 유원과
부부놀이를 하는 것 같은 정단 때문이었다. 감히 우리집이 아닌 곳에서 저렇게 쓰레기를 내
놓고 있다는 말이지..
더 이상 상황을 살필 필요가 없었다. 사빈은 유원이 주었던 스페어키를 꺼내 문을 열고 유
원의 집에서 정단이 숨을
만한 곳이 어디인지 머릿속으로 유원의 집 구조를 떠올렸다. 그러나 정단을 찾아 헤맬 필요
도 없이 유원의 집에
정단이 있을 것이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사빈은 확인했다. 유원의 집안으로 들어서자
들려오는 정단의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빈은 정단과 유원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방
으로 곧장 뛰어들 수
없었다. 왠지 정단이 자신에겐 하지 못하는 얘기를 유원에게는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꿩은 사냥꾼이 쫓아오면 얼굴만 나뭇잎속에 가리고 숨는다죠? 자신의 눈에서 사냥꾼을 사
라지게 하면 자신도
사냥꾼에게 보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자신만 속이
고 모르는 척 하면 모든
자신의 추악함과 이기심을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죠.. "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기에 정단이 지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
는 것인지 사빈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정단은 사빈에게로 돌아가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유원에게 자신이 왜 사빈을 떠날 수밖에 없
는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빈에게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 한때는.. 정말.. 제가 그를 사랑했다고 믿었어요. 나의 남편.. 사빈씨.. 사실은 그의 돈과 환
경에
안주하고 싶었던거면서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너무나 사랑해서 떨어져 있을 수
없기에 함께 있어야만
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니까.. 라고.. 나에게 합리화시킨거죠. 내가 속물이 아니
라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 안심시키기 위해서요. "
사빈은 방문뒤에서 정단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정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또 살짝
웃고 있겠지.. 눈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 하지만 할머니께서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에게 집착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저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에게 남
겨진 마지막 보루로
보고 있다는 것을요. 이 사람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 사람에게 버려져서는 안된다. 이 사람
만큼은 안된다...
이제.. 나에겐... 아무도.. 없으니까...그래서 그를 잡고 놔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가 날 사랑
하지
않아도.. 날 미워하게 되어도 절대 내가 놓지 않겠다고.. "
사빈의 상상처럼 정단은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 하지만 그래선 안되는거잖아요...그와 난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
그리고 마치 정단은 비맞은 병아리처럼 풀이 죽어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유원도 그런 정단
을 보며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 그런데 이상한건.. 그와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채영씨가 그것을
알려주었을 때..
알았어요. 그는 나에게 아무 것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는 내가 기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
' 그래서 날 떠나려고 했다, 류정단? '
"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건요..엄마도.. 할머니도 사빈씨마저 다 떠나고 나니까 내 안에서 뭔
가가 태어나려고
했어요.. 그 동안에는 아프고 불쌍한 우리 엄마, 할머니..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만 생각했는데
그분들 모두 떠나고 저만 남게 되니까 태어난거예요..엄마와 할머니에게 매여 있던 제가 해
방되는 것이었나봐요..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방치해뒀던 것이 조용히 태어났어요..내 안에 소중한 알이 생겨났어요..
소중하게 품어야 할
나만의 알이요.. 그렇게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이 품게 할 순 없잖아요."
정단은 괴로움 심정에 두 손을 틀어쥐면서도 고개를 들며 살짝 미소지었다. 유원은 그렇게
살짝 미소짓는 정단이
이순간 그렇게도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 생각을 정리한건가요? "
유원은 얼마 전까지 정단을 사빈과 다른 존재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이 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정단을 이대로 계속
도망만 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별에 있어 정단은 모든 것이 준비된 듯하지만 아직 사빈은 아무런 준비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유원이 그 일에 대해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정단의 뒤
에서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 그럼 내 둥지에서 품으면 되겠군... "
정단과 유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빈이 천천히 장갑을 벗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정단은
갑작스러운 사빈의 등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빈은 놀라서 커진 정단의 눈이 꽤 마음에 드는 듯 사빈
을 피해 뒷걸음질 치는
정단에게 다가와 턱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래.. 내가 아빠새가 되줄테니까 당신은 내 둥지안에서 알을 품으라고... "
" 사빈..씨.."
" 하지만.. "
정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정단을 바라보던 사빈의 눈빛이 순식간 살벌하게 변했
다고 느낀 순간 사빈이
정단의 시야를 막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단이 알아차릴
새도 없이 유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빈의 주먹이 유원의 얼굴로 힘껏 내질러진 것이었다.
" 만약 당신이 그것 때문에 다시 한번 내 품안에서 날아가버린다면... 난.. 그 알들을 부셔
버릴거야...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 "
아직 정단에게서 등을 보이고 서있는 사빈이 말했다. 그리고 정단은 자신의 눈앞에서 오르
락내리락 크게 숨을 쉬는
사빈의 등이 열기를 내뿜는 것을 느꼈다. 사빈이 화를 참고 있었다.
"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게 당신에게 소중한 것일지라도.. 난 망가뜨려
버릴거야..."
앙다문 입사이로 힘주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그가 지금 얼마나 많이 화를 참고 있는
지 정단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사빈이 자신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서 정단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 당신이 함께 망가진다해도..."
지독한 소유욕.. 그는 진심이었다. 정단이 그의 곁에서 미치고 죽어가는 한이 있어도 정단을
자신의 곁에 두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눈에 불을 놓은 것처럼 뜨거운 사빈의 눈과 사빈의 등장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정단의 눈이
마주하며 한동안 둘 사이엔 어떠한 말도 없었다. 또한 사빈의 주먹에 맞아 뻗어 있던 유원
도 서로를 길게 바라보고
있는 둘의 분위기를 깰 수 없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누워 있었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정단과 사빈에게 지친 유원이 결국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야야야... 부부싸움은 그대들 집에 가서 해.. 우리집에서 이러지 말고 제수씨 데리고 집으
로 가.. 괜히
새우등만 터졌다. "
유원은 정단을 자신의 집으로 들일 때부터 사빈에게 한두대 쯤은 맞게 될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게 자신을 칠 줄은, 아니 정말 사빈이 자신을 칠줄은 몰랐다. 그래도 유원은 앓던 이가 빠
진 것처럼 사빈이
정단을 찾아줘서 정말 시원했다. 가희의 부탁을 저버리고 사빈에게 사실을 말할 수도, 그렇
다고 정단이 떠 날때까지
사빈에게 영영 비밀로 할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속을 태웠던 유원이었기 때문이다.
사빈도 너무 세게 때렸던 것이 맘에 걸렸던지 곁눈으로 유원의 얼굴을 살폈다.
" 병주고 약주는 건가, 친구? 아프긴 해도 헐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마. "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는 듯 유원에게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 다음에 또 정단이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땐.. 친구란 생각 안하고 다리를 따버릴거야.. "
사빈의 무서운 협박을 듣은 순간 유원은 진짜 악마가 사빈인지 정단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
을 했다. 정단에게
그렇게 독한 집착을 갖은 사빈이 더 무서운지 사빈의 눈을 그렇게 멀게 만든 정단이 더 무
서운지 말이다.
그런데 유원이 정단과 사빈을 저울질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정단의 옷을 다 챙겨입힌 사빈
이 유원은 두 번
쳐다보지도 않고 정단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그러나 정단은 집을 나서면서도 유원에게 미
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단은 그때 사빈이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
었다.
사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정단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차가 집앞에 도착하자 정
단의 손을 붙잡고 거의
끌다시피하여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정단이 구두도 벗기 전에 정단을 돌려세워
키스부터 하기 시작했다.
큰 손으로 정단의 뒷목을 감싸며 정단이 움질일 수 없을 정도로 몰아 붙였다. 정단이 아무
리 도망가도 사빈은
정단을 잡아냈다.
" 싫어.. 사빈씨.. 하지.. 말아.요.. "
정단이 입술이 떨어지는 사이 말했지만 사빈은 마치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정단의 옷을
잡아 벗기기 시작했다.
정단도 자신의 목티를 벗기려 하는 사빈의 손을 붙잡으며 사빈에게서 벗어나려고 심하게 저
항하였지만 남자의 완력에는
정단도 당할 수가 없었다.
" 자꾸 움직이면 묶어 놓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
사빈의 화가 난 말투였다. 아마 그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벌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정
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단은 그와 이런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단의 생각일뿐 사빈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다.
사빈의 형인 사혁은 사빈에게 빨리 정단에게서 아이를 낳도록 해야 했다고 말했었다.
- 아이를 낳아. 제수씨와 너의 아이를. 그러면 어머니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실거다.
'아이!! 정단이 나의 아이를 낳는다? '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빈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 문제였었다.
아이의 아빠가 되기에
이미 적절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나이였지만 사빈은 아이란 때가 되면 당연히 생기는 것이
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정단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문제를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막연히 언젠가 정단이 임신
하는 날이 올테고 그러면
그때 아빠가 될 준비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달라졌다. 사빈에게는 아이가, 그것도 정단이 낳은 아이가 필요했다. 진
여사로부터 정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단이 영원히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할 끈이 필요한 것이다. 사빈
은 만약 자신과 정단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다면 정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영원히 자신의 아내로 남아줄 것
이라 확신했다. 정단은
사빈의 생각에서 한치의 어김도 없는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빈에게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치 않았다.
' 정단이 나의 아이를 낳게 하는거야..'
그날로부터 사빈의 사무실은 그대로 집안으로 옮겨졌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기기들이 거실
로 들여놔졌고 그도
사무실을 나가는 대신 집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단을 지키는 사람
들도 8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단지 정단이 정원에 나가는 것뿐인데도 사빈의 허락 없이는 보내줄 수 없다고 하였
다. 집안에서는 사빈이
그리고 집밖에는 그가 고용한 사람들이 정단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빈은 정단이 집
안의 어디서 뭘하고 있던
주기적으로 그녀가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가 자신이 있는 근처에 뭔
가를 가지러 왔다거나
볼일이 있어 지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매일 반복되는 그의 행동을 보며 그것이 자신을 감
시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정단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잠자리에서도 무섭도록 철저하였다. 예전엔 그렇게 정단의 의사를 무시한 행동
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매일 밤 정단을 품에 안았다. 정단이 아프다고 힘들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는
정단과 하나가 되는 것이 그밤의 모든 것인냥 멈추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였다. 그러
나 그것은 정단뿐만
아니라 사빈도 지치게 하는 일이었다.
어느날도 사빈은 싫다는 정단을 거의 묶어놓다시피하여 안았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도 피곤
했는지 정단을 품에 안은채
일찍 잠이 들었다. 그래서 정단은 그가 잠든 사이 잠시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언제나
그가 허락하는 외출은
자신과 함께해야 했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정단이 혼자서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
다. 그렇기 때문에 정단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절실하였다. 그러나 정단의 손이 살며시 문을 열려고 했
을 때 문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 어디 가는거야? "
잠결에 정단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사빈이 정단을 쫓아나와 문을 열지 못하게 닫은 것이다.
사빈의 피곤에 지친 검은
얼굴이 눈을 파랗게 빛내며 정단을 바라보았다.
" 잠시 바깥에서 바람좀 쐬려구요.. "
" 내일 나랑 같이 나가... 나가게 해줄게.. "
그리고 다시 정단은 사빈에게 끌려 침대로 돌아가야 했다. 사빈은 그렇게 잠이 들어도 정단
의 작은 움직임에
무섭도록 예민하게 굴었다. 화장실을 가기위해 침대에서 일어만나도 사빈은 언제 잠들었냐
는 듯이 눈을 빛내며
어딜가냐고 정단을 붙잡았다. 심지어 화장실 앞에서 정단이 나올 때까지 지키고 서 있을 때
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빈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정단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사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사무실에서 일하세요. 집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요. "
그러나 사빈은 한숨만 한번 내쉴 뿐 정단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 그리고 우리.. 주말에만 같은 방 쓰기로 해요.. "
정단은 매일 그가 자신에게 남은 정력을 쏟아 붓느라 더욱 기가 허해지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리고 정단이 보기에
사빈은 이상스럽게 섹스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다음에 나갈 때는 당신한테 말하고 나갈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무실 나가세요..
어차피 집에 지키는
사람들도 있으니 당신까지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
하지만 사빈은 정단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으니 말이
다. 그러나 그대신
사빈은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 생선을 꺼내는 정단에게로 다가가 정단의 허리를 꼭 끌어안
았다. 그러자 정단이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러워했다. 사빈의 상태를 알려주는 몸의 일부분이 정단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 지금도 많이 참고 있는 거라고.. "
주말에만 밤을 같이 보내자는 정단의 제의에 대한 확실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사빈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짐승처럼
매일 정단에게 섹스만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빈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사혁의 말처럼 아이를 갖기 위해 정단을 품었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과는 상관없
이 정단을 안아야 했다.
그것은 아마도 사빈의 가슴속에서 점차 커져가고 있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정단과 연결
되어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불안감이 그렇게해서라도 정단을 자신의 것이라 믿게 하려는 것이다.
" 그리고.. 그거 알아? "
사빈은 정단의 귓불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
" 한번도 돈이 많다는 것을 감사해본적이 없었어. 그것 때문에 편안하게는 살았지만.. 없어
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 돈에 감사하게 되는 군.. 그 돈이 없었다면 널 이렇게
잡아둘 수 없었을
테니까.. "
평생동안이라도 정단을 가둔채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빈이 평생을 정단의 옆에서 지키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 안녕하셨어요, 사모님? "
유원이 정단을 사모님이라고 부를때는 회사일로 사빈을 찾아왔을 때이다. 그래서 정단은 오
늘 사빈이 처리해야 할
일이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오늘은 사빈이 유원과 함께 만찬에 참석하기 위
해 집을 비워야 했다고
했다.
사빈이 성진의 많은 계열사 후계자 중 한명이었지만 아직 성진과 독립된 사업체로 있는 사
빈의 기업은 다른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상위 기업의 눈에 들어야 일을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기업들의
모임인 오늘 만찬엔 다른
사람보다도 사장인 사빈이 가야 했다고 했다.
사빈도 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정단을 두고 간다는 것이 불안했기에 대전에 있
다는 강비서를
불러들이고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떠나는 길의 끝에 걸려있
는 불안한 기운이
무엇인지 사빈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강비서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 실장님.. 사모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사빈을 그 즉시 집으로 달려오게 할 말이었다.

31.
** 파란(波瀾) **
" 언제부터 없었습니까... "
사빈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 인호는요.. 왜 아무도 없는거죠? "
" 그게.. 모두 다 사모님을 따라 나간 것인지 제가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
이미 두 번씩이나 겪었던 일이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정단의 빈자리였다. 아니 오히려
정단이 한번, 두 번
사라질 때마다 심정이 조금씩 잘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사라져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연락도 안됩니까? "
" 네.. 그게 연락도 안되고 있습니다. "
"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연락이 안된다는 겁니까? "
사빈이 들고 있던 술잔이 사빈의 손 안에서 크게 갈라지며 깨졌다. 사빈이 잔을 잡은 손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 찾아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찾으십시오.. "
사빈은 정단이 사라진 것보다 정단을 지키던 8명의 경호원들이 한꺼번에 없어졌다는 것이
더 불길했다. 무슨 사고가
난 것도 아니면 정단의 그들과 사라질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기에도 집안은 너무
깨끗했다.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사빈은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
황에서는 강비서도 그들을
찾을 방법은 없었다.
사빈은 정단이 이번엔 어디로 사라졌을지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 사빈아.. "
사빈이 강비서의 연락을 받고 달려오고 나서 뒤따라온 유원이 잔이 깨지면서 다친 사빈의
손을 수건으로 감쌌다.
희미하게 수건으로 사빈의 빨간 피가 스몄다. 그런데 유원은 자신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사
빈의 시선을 느꼈다.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아니다. 유원은 사빈의 눈을 보면서 조용히 고
개를 저었다.
" 젠장---!!!! "
사빈은 유원도 모른다는 것에 화가나 유원이 애써 수건으로 감아놓은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
다.
" 그런데 사빈아.. 오늘 일은 어떻게 할거야? 네가 가봐야 하잖아. "
하지만 사빈에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 성사빈.. 가봐야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잖아. 어차피 기다릴 거면 가서 일
마무리하면서
기다려. 내가 강비서 기다리고 있을게.. "
유원은 사빈이 가야만 해결 할 수 있는 낙찰문제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빈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빈은
그 자리에서 절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안돼.. 여기서 기다려야 해.. "
" 성사빈.. 너 지금 포기했다는거야? "
" ... "
" 성사빈!!! 대답해!! "
유원이 사빈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유원은 이미 사빈이 뭐라고 답할지 알고 있었
다.
" 그거 안했다. 이번엔 포기할거야.. 그러니까 돌아가.. "
" 사빈아!!! 나도 제수씨 걱정돼.. 하지만 이번엔.."
유원이 사빈을 설득하기 위해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집안을 급박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
리 때문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사빈이 전화기에 목숨 건 사람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정단의 전화가 아닐까
정신이 나갔던 것이다.
" 여보세요! "
하지만 사빈이 기다렸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오빠.. 나 사비야.. ]
" 사비야.. 오빠가 나중에 전화할게.. 지금 바빠서 네 전화 못 받아.. "
[ 나도알아. 오빠 바쁜거.. 하지만 집에 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
" 무슨 말이야.. "
[ 오빠가 와서 좀 말려봐.. 못 봐주겠다. ]
" 뭐를? "
[ 작은 올케.. 집에 와있어.. ]
사빈의 심장이 벌컥대며 성을 내고 있었다.
" 뭐..야.. 무슨 짓이야? 어머니가 정단이한테 또 무슨 짓 했니? "
[ 별로.. 무슨 짓은 안했어.. 하지만.. ]
더 이상 사빈이 사비의 얘기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 오빠!! 오빠? ]
끊기진 않은 수화기에서 사빈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사빈은 이미 밖으로 나서고 있었
다.
" 사빈아!!! "
유원은 차를 타고 떠나는 사빈의 뒤를 보며 정단이란 여자가 사빈의 삶에 얼마만큼 크게 자
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채영이 떠났을 때도 칼같이 자기 할 일은 할 정도의 이성이 남아있던 사빈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 결국 제일 무서운 사람은 제수씨였나.. "
그러나 유원의 생각은 틀렸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사빈의 어머니 진여사였다.
청담동 집에 도착한 사빈이 제일 먼저 본 것은 화단의 한구석에 무리지어 서있는 인호와 그
수하들이었다.
" 어떻게 된거냐.. "
사빈은 급하게 뛰어와 숨이 찼지만 그들이 움찔할 정도로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 죄송합니다. 실장님.. 작은 회장님께서 명하신 일이라 알려드릴 수 없었습니다. "
또 어머니였다.
" 너희는 누구의 사람이냐.. 내 사람이냐, 어머니의 사람이냐.. 누구의 밑에 있는 거냐.. "
생각같아서는 자신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그들을 손봐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다급했다.
" 집으로 가있어라.. 여기 있지 말고.. "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빈에게 인사를 올렸지만 사빈은 그것을 볼 새도 없이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눈에 펼쳐진 광경에 미쳐 날뛸 것 같은 자신의 이성을 다잡기 위
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정도로 주먹을 쥐어야 했다.
" 뭐하고 있는거지? "
사빈이 등장하자 거실로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듯 자리를 비켰다.
" 혀..형!! "
" 서방님.. "
사혁부부와 사영부부, 사비까지 모두 성회장 부부의 방문앞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있는 가운데 작은
여자가 굳은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사빈의 여자가 누군가에게 죄를 빌 듯이 무
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 류.정.단.. "
사빈이 정단의 이름을 부르자 정단이 자신을 부르는 사람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르릉.. 사빈의 심장이 검은 피를 흘리며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 희미하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얼은 것처럼 파래진 입술이 까만 머릿결
과 어울리며 너무
아파보였다. 춥고 외롭고 아프고.. 그녀의 까만 눈동자안에 이 세상의 모든 절망과 고통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작고 가냘퍼 건드리면 한줌 재로 날아갈 것 같은 정단의 모습에 사빈의 심장이 울고
있었다.
"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내가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
사빈은 팔을 잡아 정단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꿇어앉은 자세로 있었던 정
단은 사빈이 일으키는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치 짐짝처럼 팔만이 그에게 대롱대롱 매달린채 정단의 의지대로 움
직일 수 없는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잇었다.
"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거야.. "
사빈은 이미 다리가 마비된 듯한 정단을 돌려 안으며 사영과 사혁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멀리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바라보고 있는 사비가 했다.
" 세시간.. 아..아니아니 한 네시간? 맞아.. 그정도 됐을거야. "
사빈의 목구멍에서 쓰린 신음이 걸려나왔다.
" 이런.. "
갑자기 저린 다리를 움직여서 그런지 정단의 창백한 얼굴은 회색으로 변해있었고 눈에는 시
린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또한 신음을 참으려 꽉깨물어 붉어진 입술은 갈라져 피가 날 듯 건조해 보였다.
" 가자.. 정단아.. "
사빈은 더 이상 이집에 정단이 있게 하고 싶지 않아 정단이 다리를 끌 수 있을 정도로 부축
하여 정단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단은 사빈을 붙잡으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사빈씨.. 사빈씨.. 어머님이.. 어머님께서.. "
그래..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어머니가 또 무슨 짓을 하셨구나.. 사빈은 알 수 있었다. 자신
의 어머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정단이 스스로 나가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안되자 자신만이
알고 있던 것을 아버지에게도 알렸을 것이리라..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테니까... 하
지만 이제 정단을
자신의 여자로 함에 있어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었다. 이젠 어머니도 아버지도 정단과 자신
의 사이에 관여하게 할
수는 없었다.
" 됐어.. 정단아.. 됐어.. 집으로 가자.. "
그러나 정단의 필사적인 눈이 사빈을 붙들고야 말았다.
" 싫어요.. "
' 너.. 어쩌려고.. '
정단의 눈이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사빈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머님께 인정받고 싶다
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단아.. "
사빈은 정단이 되도록 힘들지 않게 일으켰다. 사실 사빈은 정단이 자신의 가족에게 인정을
받건 안받건 상관이
없었다. 만약 자신의 가족들이 계속 정단을 힘들게 했다면 자신도 그들을 평생 안보며 지낼
수 있다는 다짐까지도
했으니까. 하지만 정단이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사빈은 정단을 인정받게 해
주어야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사빈은 신중한 손놀림으로 진여사와 성회장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전통식으로 디자인된 방
문이 스르륵 소리내며
열렸고 그 안에 마치 이 세상과 단절된 사람인 것처럼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여사와
성회장이 앉아 있었다.
"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인게야.. "
자식인 자신조차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근엄한 성회장앞에 사빈은 몸을 제
대로 가누지 못하는 정단을
앉혔다. 사빈은 평상시 가까이 가지조차 못할 정도로 어려워하는 아버지 앞에서 정단을 앉
히고 저린 다리가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손수 정단의 다리를 비스듬히 펴게 자리 잡아 주었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
니의 시선따위는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만은 예의 갖춰 바르고 곧은 자세로 그들 앞에 앉았다.
" 무슨 짓인게냐.. 네 아버지 계신 곳까지 기척 없이 들어오고.. "
성회장의 눈빛으로 봐서는 진여사가 정단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말했다는 것을 사빈은 알 수
있었다. 회사의 큰
일외에는 별로 집안에서도 크게 나서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였지만 그 침묵으로 봐서는 성회
장도 진여사와 같은 태도를
보일 것이 분명했다.
" 저런 아이까지 들이고.. 어서 데리고 나가지 못하겠니!! "
"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어머니 손으로 직접 고르신 며느립니다. 제 아내란 말입니
다. "
사빈은 정단의 마음을 다치게 하려고 작정한 진여사의 가시같은 말에 자신이 찔린 것처럼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이 작은 여자에게 얼마나 동화되었는지 모르는 진여사는 자신의 말에 더 크
게 상처받는 사람이
사빈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정단이 스스로 폭주할 말들만 골라서 던졌다.
" 그래서.. 성씨 집안 며느리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집을 나갔다더냐? 네가 추석때 안 올
때 이미 사람을
풀어 알아보았다. 그때 우리 집안 둘째 며느리라는 아이를 찾느라 성실장이 미쳐 날뛰고 있
다고 그러더구나.. 그건
어찌 된 일이라더냐. "
성회장은 진여사와 사비의 오고가는 말들만 듣고 있을 뿐 어떠한 말도 표정의 변화도 없었
지만 정단으로부터 뭔가
해명을 바라는 것처럼 정단을 바라보았다.
" 그건 어머니께서 의도하신게 아니던가요? 어머니께서 채영일 일부러 불러내신거 다 알고
있습니다. "
" .... "
" 그리고 어머니께서 채영이한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했는지도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
채영의 얘기가 나오자 진여사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잠자코 사빈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없는 사람인 듯
듣고만 있던 성회장도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 이 사람도 채영이처럼 만드는 거 이번엔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사
람 힘들게 하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
" 너는 그 아이가 어떤 아인지 다 알고선 하는 말이더냐? 그 아이에 대해 다 알고 있어? "
진여사는 되도록 정단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털어놓았다.
" 에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밖에서 데려온 아이에 입에 담기도 민망하게 요정같은델 나갔
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그
아이가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
진여사의 말에 정단이 몸을 움츠리며 더 이상 숙일 수도 없는 고개를 떨궜다. 사빈은 정단
을 이런 상황속에 있게
한 것이 자신의 죄인 것 같아 무릎위에 올리고 있는 정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적개심
이 가득한 눈으로
진여사를 직시했다.
" 어머니께서 처음부터 다 알고 고르신거 아닙니까.. 그땐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못 하셨나보지요? "
" 무슨 얘기냐.. "
드디어 근엄한 신처럼 듣고만 있던 성회장이 자초지정을 알아야 겠다는 듯 나섰다. 진여사
도 정단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얘기까지를 하자니 자신의 모성애를 의심받을 것 같아 성회장에게 모든 것을 다 얘기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자식을 그런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 어머니께 직접 들어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
손을 빼려고 바르작 대는 정단의 손을 사빈의 손이 더욱 꽉 움켜 잡았다.
" 이 사람 제 여잡니다. 제 사람입니다. "
사빈의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성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 아니, 제가 이 사람 겁니다. "
사빈의 손에 잡힌 정단의 손이 움찔 떨림을 전해왔다.
" 그래서 이 사람이 조금만 다쳐도 저는 아주 많이 아파서 견딜 수 없어요. "
그러나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부모를 대하고 있는 사빈도 떨고 있었다. 정단의 손을
마주잡은 그의 손이
그렇게 떨림을 정단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함 때
문이 아니었다. 사빈은
정단의 눈물과 정단의 빈자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평상심을 갉아 먹고 있는 정단에
대한 집착을 떠올리고
있었다.
" 이 사람이 아프면 제가 죽을 것 같다구요. 그러니까 제발 그냥 내버려 둬 주세요. 제발 이
사람이 떠나지
않게 가만히 내버려 두시라고요. "
자신의 어머니가 가족이 정단을 힘들게 하면 정단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사빈은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사빈의 말에 그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정단의 뺨을 타고 내렸다.
" 그리고 저 이제.. "
사빈의 손이 정단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 이 사람 없이 못 삽니다. "
사빈은 다른 사람 앞에서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입에
담지도 않았을 얘기를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숨김 없이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고백이었다. 자
신의 마음에 정단을 담고
있는 사랑고백. 그런 사빈의 사랑을 느낀 정단의 눈에서는 떨어지는 방울들이 그치질 않았
다.
" 죄송합니다. "
사빈은 정중히 부모님을 향해 절을 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정단이 최소한의 고통만을
느끼도록 잡아주었다.
" 아.. "
그러나 정단은 저릿한 고통을 느끼는지 나오는 신음을 입으로 삼켰다. 생각같아서는 발이
쓸리지 않도록 안아올리고
싶었지만 차마 부모님 앞에서 그러지 못하는 사빈의 마음은 아프기만 했다. 그런데 절뚝이
는 정단을 부축해 사빈이
방을 나서려 할때 백발의 중후한 성회장이 정단을 불러 세웠다.
" 새아가.. "
정단은 자신의 시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되도록 똑바로 서려 노력하며 성회장을 바라보았
다.
" 네 물건 간수 잘 하거라.. "
사빈을 정단의 것으로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 또한 정단을 자신의 며느리로 인정하는 뜻이
었다.
" .. 네.. "
성회장의 말에 더 많은 눈물을 떨궈내는 정단의 입에서 겨우 소리가 되어 나온 말이 작게
방안을 울려 퍼졌다.
그런 정단을 안으며 사빈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존경과 애정이 담긴 인사를 올렸다.
" 감사합니다.. 아버지.. "
성회장은 애절한 사빈의 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자신의 앞에서 한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
지 않았던 아들이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것에 감동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고 여린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
던 아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을 가득 담고 바라보는 그 눈을 보니 자신의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라면 행복해
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성회장은 자신의 아들을 행복하게 해줄 정단을 받아들인 것이다.
*******
성회장과 진여사의 앞에서 물러나온 사빈은 다른 가족들의 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정단을
안아 올렸다.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정단이 아픈 듯 인상을 썼지만 사빈은 자신에게 안긴 정단이 조금이나마 편
해지도록 자세를 고쳐줬을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마치 종이인형처럼 자신에게 가볍게 안겨지는 정단 때
문에 마음이 미어졌다.
왜 이렇게 가볍단 말인가. 마치 정단이 점점 희미해져 정단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
져버릴 것 같아 사빈은
불안했다.
" 괜찮아요? "
창백한 얼굴에 눈물로 엉망이 되어 사빈에게 안겨있는 정단을 보며 인영이 물었다. 하지만
정단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눈을 마주치고 입을 열만한 기운이 남아있질 않았다. 눈을 감을 힘조차 없어 정
단은 사빈에게 안긴
그대로 죽은 듯이 있었다.
" 사비야.. 고맙다. "
사빈은 자신을 불러준 사비가 고마웠다. 만약 사비가 일찍 전화해주지 않았다면 정단은 아
마 더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빈은 더 이상 다른 가족들과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형수님. "
" 네.. 빨리 가서 동서좀 쉬게 해주세요. "
사빈은 사혁과 인영을 향해 짧게 인사한 뒤 날을 것처럼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밖에는
언제 와있던 것인지
강비서가 차를 대기놓고 있었다.
" 다행입니다. 사모님을 찾으셔서.. "
" 빨리 집으로 가주세요. "
사빈은 정단을 뒷좌석에 앉히며 어떻게 하면 그녀의 다리가 편하게 자리할 수 있을지 고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었다. 그녀가 아픈데 그고 통을 줄여 줄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빈은
집을 잃고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았다.
결국 사빈은 빨리 그녀의 다리에 피가 돌게 하기 위해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무릎에 쭉펴게
한 후 집으로 가는
내내 정단의 다리를 주물렀다. 정단이 부끄러워하며 다리를 내리려 했지만 이미 사빈에게
저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정단은 그대로 사빈의 손에 자신의 다리를 맡겼다. 하지만 사빈의 손끝이 다리에
닿을 때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저릿한 느낌이 전해져 정단은 꿈틀거렸다. 사빈은 그런 정단이 안쓰러워 정
단의 기울어진 몸을 꼭
끌어안으며 쓰다듬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 사빈은 다시 정단을 안아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정단의 다리엔
아직 감각이 되돌아 오지
않았다. 사빈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정단을 침대에 뉘여놓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를 거품
물로 가득채웠다. 그리고
정단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욕조에 앉히고 옷을 벗겼다. 파란 니트와 하얀 모직 스커트를
벗겨서 욕실밖으로
내놓고 부끄러워서 버둥대는 정단을 잡아 속옷마저 벗긴 후 정단을 욕조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따뜻한 물이 마비된 다리를 자극해서 그런지 정단이 미간을 좁히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
자 바로 수심이 가득한
사빈의 얼굴이 정단의 눈으로 들어왔다.
" 왜그래? 아파? "
이 남자.. 나를 볼 때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구나.. 정단은 처음으로 알았다. 사빈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정말 아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정단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참을 바라보며 정단의 상태를 살피던 사빈이 정단의 젖은 머리칼을 이마에서 뒤로
넘겨주고는 거품이 가득한
욕조안에 손을 담갔다. 그리고 정단의 다리를 잡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마사지하기 시작
했다.
" 사빈씨!!! "
" 가만있어.. 이렇게라도 해서 빨리 풀려야 할텐데.. "
사빈은 무척이나 다리가 저릴 정단을 위해서 부드럽게 다리를 만져주고 있었다. 그래서 자
신의 손을 스치는 뜨끔한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빈이 그러길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단은 처음에 그가 만질때마다 알싸하게 아팠던
느낌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는 정단에 비해 욕조옆에 꿇어앉아 몸을 숙이고 정단의 다리
를 만지고 있는 사빈은
그다지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물에 젖은 옷은 온몸의 달라붙어 있었고 항상 정갈했던
머리도 욕실안 습기에
젖어 이마를 덮으며 흩으러져 있었다.
" 이제 괜찮아? "
사빈은 조금은 편안히 숨을 쉬는 정단을 보며 정단의 다리가 조금은 감각을 되찾았음을 느
꼈다. 그런 사빈에게
정단은 웃어주었지만 사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긴 웃음은 밝지만은 못했다.
"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사빈은 울 듯 말 듯 미소짓는 정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달픈 표정을 지었다.
" 웃고 싶을 때만 웃어..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버리고.. "
' 아.. '
" 그렇게 억지로 웃지마.. "
정단은 예전에 사빈이 자신에게 웃지말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는 사빈이 자신을 보
기 싫어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그때도..
사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단을 보며 살며시 물 속에 잠겨 있는 정단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단이 뭐하냐고 물을 새도 없이 정단의 발을 입으로 지긋이 물었다.
" 사.. 사빈씨!!! 뭐하는 거예요? "
정단이 청범 소리를 내며 사빈의 입에서 자신의 발을 떼어내려고 바둥거렸지만 사빈은 정단
의 발을 꼭 안은채
발가락마저 입안에 집어 넣었다.
" 사빈씨.. "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정단의 눈동자가 눈물을 매달고 있었지만 사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
단의 발을 이빨로 자근자근
물어주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정단의 발만 물고 있던 사빈이 고개를 들며 살짝 웃으며
말했다.
" 우리 정단이 발.. 쓰다.. "
비눗물을 함께 먹어서 그런지 사빈이 처음으로 맛본 정단의 발은 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정단의 손이 아이처럼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빈의 앞머리로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물에 젖어 제멋대로 겹
쳐있는 사빈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머리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정단을 바라보던 사빈의 눈동자가 물결치며 크게
떠졌다.
" 정단아... "
사빈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정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정단을 사이
에 두고 욕조위로 팔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정단은 사빈이 짚은 욕조위에 붉은색의 물이 번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 사빈씨.. "
정단이 사빈의 손을 들자 사빈의 손바닥에서 많지는 않지만 실이 늘어지는 것처럼 피가 흐
르고 있었다. 아까 사빈이
술잔을 깨면서 찢어진 상처였다. 사빈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다시 스미는 피를 물로 닦았지
만 정단은 사빈의 상처가
걱정되는 듯 분홍빛으로 피가 번져나오는 사빈의 손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 우린 똑같은 상처가 있네요.. "
정단이 사빈의 손바닥에 자신의 왼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단의 손과 마주한 사빈의
손은 상처로 인한
거슬림이 아닌 다른 의미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욕실안의 수증기로 인한 열기와 다른 뜨
거움이 사빈과 정단사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사이엔 더 이상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었다. 사빈의 말캉한
살이 정단의 안으로
들어가 원하던 것을 갖기 위해 사냥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작게 펄떡이는 그것을 탐
색하듯이 톡톡 치고
지나가던 사빈의 혀가 크게 요동치며 정단의 혀를 끌어들이며 정단의 숨결마저 앗아갔다.
자신의 기세에 눌려 자꾸
물속으로 빠지려는 정단의 고개를 들어 사빈은 마치 정단의 얼굴과 하나가 되려는 듯 더욱
깊게 깊게 정단에게로
들어갔다. 그러다 잠시 정단의 혀가 사빈의 민감한 살의 옆을 쓸자 사빈은 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듯 진저리치며
정단에게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다지 멀리 가진 못하고 정단의 바로 코앞에서 숨을 몰아쉬
며 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랑해. "
하지만 정단은 아직 숨이 되돌아 오지 못한 상태인지라 눈만 크게 뜨고 사빈의 말에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단앞에서는 언제나 조급해지는 사빈이 뭔가를 내놓으라 조르듯이 다시 말했다.
" 사랑해. "
사빈이 정단의 얼굴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단은 사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정단은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 제가 잘하려고 하는 것은 다 잘 안되요.. "
정단의 말이 자신이 바라는 답은 아니었지만 사빈은 정단의 뺨이며 귓불이며 입술을 쓰다듬
으며 정단에게 계속
말하라는 듯 눈으로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단의 예상밖의 말에 사빈은 살짝 표
정을 굳혔다.
" 처음엔 엄마약값을 벌겠다고 술집에 나갔었어요. "
그러나 이내 다시 표정을 풀며 정단의 젖은 머리칼을 말며 장난을 쳤다.
" 그런데 엄마가 알아버렸어요. 제가 엄마 때문에 그런 곳엘 나간다는 걸요. 그래서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
정단의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던 사빈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정
단의 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사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다른 사람들은 엄마가 앓고 있던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믿었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봤거든요. 엄마의
유서를.. 불이 번지는 집에서 타들어 가고 있는 유서의 조각을 제가 봤어요.. 엄마 때문에 제
인생에 흠이
생기는 것이 싫다며 먼저 가겠다고 쓰여있는 유서를요.. 그런데 그게 나중엔 다 타서 없어졌
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몰라요. 엄마가 왜 죽었는지.. 그런데요.. 그런데요.. 저는 그걸 말하지 못했어요..
엄마가 자살로
집에 불을 지른게 탄로나면 보상 받지 못했을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할머니와 살아야 했기
때문에 엄마가
자살하셨다는 사실을 숨겼어요.. "
사빈은 정단이 불이 나는 집으로 뛰어들어 타들어가는 무언가를 놓지 않아 화상을 입었다던
정단의 친구가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그것이 어쩌면 유서였을 것이다.
" 그리고 할머니가 아프실 때도 사빈씨와 결혼만 하면 할머니를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제가 할머니를 쓸쓸이 혼자 죽어가게 만들었어요. 욕심 부리지 말고 할
머니가 가실 때까지 함께
했어야 하는건데...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화상흉터도 없애고 당신과 결혼하고... 그러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
얘기를 하던 정단의 눈에선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사빈도 그런 힘든 일을 혼
자서 겪고 이겨내야 됐을
정단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제 말 아시겠어요? "
그러나 사빈은 정단이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엔 당신을 위했다고 옆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제가 당신을
망칠 수도 있어요..
후회할지도 몰라요.. 저를 잡은 지금의 당신을 미워할지도 몰라요. "
정단은 언젠가 사랑이 사라지고 자신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할 때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
는 것이다. 하지만 사빈은
정단의 그런 두려움까지도 안아주고 싶었다.
" 아니야.. 당신이 나에게 뭔가를 하기 위해 곁에 있는건 아니니까...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당신은 내곁에 있어야 하는거야..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때까지 내 옆에 있어주면 돼..
그리고.. "
사빈의 손이 흘려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정단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 당신으로 인한 불행이라면.. 그것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행복이야.. "
욕조안의 물은 식고 있었지만 사빈도 정단도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살자..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떨어지지 말자.."
정단의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사빈의 목을 타고 올랐고 욕조를 사이에 두고 사빈은 정단의
심장뛰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정단의 세계가 사빈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32.
** 그의 여자.. 정단 **

" 이곳에 당신을 나한테 보내주신 분들이 계시는 건가? "
사빈과 정단은 정단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유골이 뿌려진 호수앞에 서있다. 한번도 이곳에
와본 적 없는 사빈이
자신도 장모님을 만나야 했다며 우겨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호수는 정단이 봤던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이 부실정도로 하얗게 부서지던 물결도 얼어버린 호수속에 잠겨 있었고 호수를
포근히 감싸던 파란
나뭇잎들도 사라져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호수를 가리우고 있었다.
" 춥겠죠? 저 안... 많이 춥겠죠? "
사빈은 아무래도 자신이 정단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정단의 목소리가 많이
우울했기 때문이다.
" 그때는 들어오진 못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올 수가 없었는데.. "
정단은 얼어있는 호수위로 걸어올라가자 정단이 넘어질까 걱정이 된 사빈이 정단을 따라 들
어갔다.
" 이 안에.. 우리 엄마랑 할머니가 계세요.. "
정단이 바닥에 주저 앉아 손으로 얼은 수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사빈이 눈 깜짝하는 사이
얼은 호수위로 작은
물점이 번지기 시작했다.
" 정단아.. "
정단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었다. 사빈은 정단의 옆에 앉아 정단을 안았다.
" 얼마나 추울까... 여긴 이렇게 얼었는데 얼마나 추울까.. 우리 엄마.. 할머니.. "
사빈이 정단을 안으며 다독여 주었지만 윤비서와 함께 이곳을 찾은 그날 이후 다시 찾은 것
이 처음인 정단은 아직
서러운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왜.. 왜.... 나만 두고 갔어요? "
정단의 작은 주먹이 꽁꽁 얼어 딱딱한 수면위를 두들기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하얀손
이 빨갛게 얼어가고
있었다.
" 정단아... 단아.. "
사빈은 정단이 더 이상 얼음위를 배회하지 못하도록 정단의 손을 붙들어 안았다. 하지만 정
단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정단의 긴 목이 꺽여질 듯 푸드득거리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얀 목에 파랗게
비치는 핏줄이
보인다. 사빈에게느 아내의 흰 목이 학의 그것처럼 처연하고 슬퍼보였다. 곧 부서져 버릴 것
만 같았다.
" 정단아... "
사빈은 정단의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아주려 하였다. 그러나 사빈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단의 슬픔이란 것이
훨씬 깊고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벌어져 추운 듯 가슴의 옷깃을 꼭 부여잡은 작은
손이 떨고 있었고
가슴속에 묻어둔 울음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쏟아놓기 어려운 듯 크게 울지도 못하고 있었
다. 그리고 곧 죽을 것
같은 표정... 한번도 이렇게 서럽게 우는 정단은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늘 웃기만 했던 정
단이기에 사빈은
정단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처음 본 것이다.
사빈은 이세상에 자신만큼 정단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왔었다. 하
지만 사빈은 자신이 정단에
대해 아직 절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단은 사빈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
고 괴로운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사빈은 섯불리 정단의 괴로움과 고통을 다 잊게 해준다고 말
했던 것이다.
' 너는 이렇게 아팠니? 너는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거니? '
사빈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혼자 그 모든 고통들을 감당했을 어린 정단이 떠올랐다. 더
빨리 정단을 만나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조금만 더 빨리 만났다면 이렇게 울지 않게 해줬을 텐
데.. 사빈은 애처로운
자신의 작은 사랑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제 사빈이 정단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
을 것이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 있어줄 것이다.
' 이젠 혼자만 힘들게 하지 않을게.. '
사빈이 작은 정단의 몸을 감으며 정단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정단도 자신을 감싸는 따
뜻한 팔을 느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어색한 느낌에 정단의 몸이 굳었다.
" 이젠.. "
" 사..빈씨? "
" 같이.. 울자... "
사빈도 울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 사빈과 정단의 머리 위로는 따뜻하고 하얀 깃털같은 눈이 날리고 있
었다.

"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있군요.. "
멀리서 사빈부부를 바라보고 있던 강비서가 말했다. 하지만 도무지 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비서가 한 말을 들은
김기사는 놀란 눈으로 강비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
Ever After : 그후로도 오랫동안...

멀리서 달콤한 꽃내음을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부드러운 미풍은 정단의 고운 머리칼을 흔
들며 지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하얀 봄이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의
끝을 잡고 있던 쌀쌀한
공기도 어느새 민들레가 꽃망울을 머금을 만큼 포근해졌다.

그리고 정단과 사빈의 꽃밭에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햇살이 잘 드는 정원의 한쪽에는 정단
이 뿌려놓은 갖가지
씨앗들이 연두빛 눈을 틔며 방긋이 인사하고 있었고 매일 정단이 손을 보고 있는 기름진 흙
들은 어서 자신들이 키울
자식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봄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은 정단이었다. 날아드는 바람과 밝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있는 정단은 한송이 금난화같았다. 그리고 예쁜 발걸음으로 사뿐히 정원을 거닐고 있는 것
을 보노라면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꽃밭을 수놓는 것 같았다.

특히 호두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를 타며 비단같은 머리를 흩날리는 정단은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정단을 바라보며 주말을 보내는 사빈은 언제나 자신이 정단과 함께 있
는 시간이 짧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오늘도 사빈은 정단과 함께 소풍을 나온 것처럼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전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무슨 생각해? "

자신이 만들어 준 그네에 앉아 가벼운 흔들림을 즐기고 있는 정단에게 사빈이 물었다. 하지
만 사빈의 작은 아내는
멀리 꽃밭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남편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
는다. 그러나 사빈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쳐오자 정단은 자신의 남편이 좋아하는 보조개를 만들며 반달같은
입술을 열었다.

" 당신 생각.. "

예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참으로 고왔다. 그리고 정단의 답에 만족한 사빈은 자신이 하던
일에 다시 열중했다.
그러자 라벤더향물에 정단의 발을 씻겨주고 있는 사빈의 사랑스러운 정수리가 정단의 눈에
들어왔다. 사랑이란 참
이상한 것이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이 다 예쁘고 사랑스럽게만 보이니 말이다. 머리칼 한올
도 손톱도 속눈썹도 모든
것이 경외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금 찰팍찰팍 소리내며 정단의 발을 정성껏 보듬어주
고 있는 사빈의 큰 손도
참으로 듬직해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사빈의 일과처럼 되어 버린 이 일은 사빈의 정단에 대한 봉사라기보다도 사빈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기분이 좋지 않다며 정단에게 발 한번만 씻게 해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며 매달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사빈을 위에서 내려다 볼 기회가 별로 없는 정단도 사빈이 자신의 아래에서
머리를 보이고 앉아
있는 그 순간이 좋았다.

" 우리 정단인 발도 예쁘다.. "

사빈은 아기처럼 뽀들하고 투명한 정단의 발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나 발 뿐이겠는가. 사
빈에게는 정단의 것이라면
눈에 낀 눈꼽까지도 사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너무 많아 넘치는지 사빈은 종종
정단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곤 했다.

" 우리 정단이 발처럼 예쁘고 착한 딸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

" 내 발 닮은 딸을 낳으면 어떡해요! 딸은 예쁘게 낳아줘야죠!!! "

도대체 자신의 발을 닮으려면 어떻게 생긴 아이가 태어나야 하는지도 정단은 상상이 안됐
다. 하지만 이미 정단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린 사빈은 정단의 발마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다
녔다. 정단의 발은 주인을
닮아서 착하고 예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예쁘고 착한 발이라는 것
이 어떻게 생겨야하는
것이냐며 다른 사람들은 사빈의 억지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단은 그것이 자신
을 사랑하는 사빈의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정단에게도 사빈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우니 말이다.

정단은 손을 내려 얕은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고 있는 사빈의 앞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런데 정단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사빈의 표정이 더욱 평화스러워졌다.

" 사빈씨. "

정단은 사빈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들뜨지 못하게 잡고 있는 것처럼 사빈의 머리를 쓰다듬다
그를 불렀다. 그러자
사빈은 정단의 발을 만지던 손을 잠시 놓고 고개를 들어 해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단에게 눈을
맞췄다. 그러나 정단은 사빈의 머리만 쓸어올릴며 눈을 맞출 뿐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바람이 쉬어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정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빈은 정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알고 있어, 당신이 무슨 말 하고 싶은지... "

그러나 약간은 쓸쓸함이 배어나오는 사빈의 미소였다. 그는 벌써 오랫동안 정단이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때는 집요하게 조르기도 했지만 또 어느 때는 정단의 입이 열리길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정단은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언제나 마음은 앞서지만 정작 중요한 말은
못하니 말이다. 정단은
아직도 덜 자란 자신이 사빈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사빈이 언제까지 자신을 기다려
줄 것임을 정단은 알고
있었다.

" 들어가자.. 점심 먹어야지.. "

사빈은 정단이 발을 담궜던 물을 한쪽에 버리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볕이 잘드는 한쪽
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하얀 단화를 정단의 발에 신겨 주었다. 그러자 기분 좋은 따뜻함이 정단의 발을 감쌌다.

" 가자.. "

정단은 사빈에게 손을 잡힌채 사빈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사빈과 조금은 떨어져 따라가던
정단이 사빈에게 잡히지
않은 왼손을 입가로 가져가 확성기모양을 만들고 입모양만으로 사빈에게 말했다.

- 사. 랑. 해. 요.

정단은 언젠가 꼭 그렇게 소리내어 말해주리라 다짐하면서 사빈에게 진심을 담아 전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정단의 두
눈이 놀람으로 커지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사빈의 뒷모습이 정단의
말에 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 왜? "

사빈이 갑자기 멈춰선 정단을 돌아보며 이유를 물었지만 정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미
소만 지었다.

" 아니요.. 빨리 들어가서 밥먹어요, 우리.. "

그리고 오늘도 그들의 뒤로는 아름다운 빛이 한줄기 무지개가 되어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봄이 끝나고 더운 여름이 찾아왔을 때 사빈이 목숨보다도 아끼는 정단에게 이상
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선생님.. "

" ... "

" 어디가 안좋은 겁니까? "

사빈의 머릿속에 위암으로 사망한 정단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떠오르며 불길한 기운이 그의
심장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러나 사빈의 어두운 얼굴과 달리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빈을 바라보고 있던 의사는 흐뭇한
얼굴으로 말했다.

" 내년이면 아빠가 되시겠군요. "

사빈이 침울한 표정에서 갑작스레 웃는 표정으로 바꾸지도 못한 이상한 얼굴을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사를
쳐다보았다.

" 축하드립니다. "

사빈의 하늘에서 찬란한 종이 울리고 있었다.

' 아이라, 정단이가 나의 아이를 가졌다!!! '

그러나 사빈은 기쁨 마음과 함께 정단이 매일 아침 변기를 붙들고 울음을 토해냈던 것도 밥
냄새만 맡아도 도망쳤던
것도 다 자신의 아이가 들어앉았기 떄문이라는 생각에 미안했다.

하지만 정단에게 미안하면서도 하늘을 날아갈 듯 기쁜 마음에 사빈은 한걸음에 내달려 정단
에게로 갔다. 그런데
내년이면 정단과 자신의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에 어쩔 줄 몰라하는 사빈과 달리
정단은 자신의 몸안에
사빈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우울해보였다. 사빈은 자신처럼 아이의
탄생을 기뻐해주지 않는
정단에게 섭섭하기는 했지만 아이 때문에 몸이 지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임신 6주
만에 그렇게 심한
입덧증상을 보이는 정단이 예민한 산모같다며 걱정하던 의사의 말이 생각나 기분까지 안좋
아 보이는 정단이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점점 나아지라 생각했던 정단의 우울증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 많이 피곤해? "

사빈은 자신과 이야기를 하지도 그렇다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닌 정단을 지켜보다 그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
정단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정단은 그냥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우리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마를 힘들게 하는구나.. "

사빈은 아직 임신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평평한 정단의 배를 쓰다듬으며 정단을 힘들게 하
는 아이를 나무라듯
말했다. 하지만 정단은 아이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정단이 힘들었던 것은 자신
의 살과 피를 나눠가질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과 함께 자신의 출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죽은 우리 엄마도 저 가졌을 때 이런 기분이셨을까요? "

병실의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정단이 입을 열었다.

" 저는 내 아이가 생겼다는게 너무 기쁜데.. 우리 엄마도 저 가진 것 아셨을 때 저처럼 기쁘
셨을까요? "

" ... "

" 이렇게 기쁘진 않았겠죠? 아마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고민하셨겠죠? "

정단은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났을 자신 때문에 우울했던 것이다. 사빈은 많이 시무룩해있는
정단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 정단아.. "

정단이 천장에서 눈을 떼고 사빈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젖어있진 않았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매말라 있는
정단의 눈이 더욱 시려 보았다.

" 그래도 당신이 태어났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당신이 어머님께 사랑받았다는 증거야.. 우리
는 우리의 아이를 행복
속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머님이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러니
까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어머님은 당신을 낳은거라고.. 어머님이 겪어야 할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당신을 낳으신거니까..
내 말.. 알겠어? "

" 으응... "

사빈의 따뜻한 말에 정단이 한동안 잊었던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 당신은 그만큼 사랑받고 태어난 사람이야.. "

" 응.. "

" 그리고 나한테는 당신이 어떻게 태어났던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잊으면 안돼.. "

" ..응.. "

정단은 사빈의 말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사빈은 착하게 자신의 말을 받아
들이는 정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 때문에 더 말라버린 정단의 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사빈은 알 수 있었다. 정단이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사빈의 형수인 인영도
세 번의 출산을
거치면서 역시 여자가 임신했을 때는 친정어머니가 가장 보고싶은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정단이라고
어머니가 그립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이 순간 어머니
라는 존재가 정단에게는
새삼 크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단에게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빈은 자신이
정단에게 엄마가 되어줄 수 없음에 한탄하며 미안한 마음에 고개 숙여 정단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우리.. 우리 아기는 원없이 사랑해주자.. 애가 질릴정도로.. "


그 후 정단이 병원을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은 가을로 접어든 9월의 어느날이었다. 다른 산
모에 비해 정단의
건강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의사에 말에 겁먹은 사빈이 정단의 퇴원을 미루고 미루었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그만
퇴원하라고 말할 때까지..

그리고 10월이 되어서야 정단의 배가 부풀며 사빈의 아이를 품고 있음이 눈으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강한 햇빛이 들지 않도록 사빈이 쳐둔 커픈이 나부끼며 정단의 침실로 바람을 들여 놓았다.
높은 하늘만큼이나 맑은
바람이 정단의 머리를 스치며 곱게 틀어올린 머리 한가닥을 정단의 뺨위로 풀어 놓았다. 그
리고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다른 바람이 정단을 만질 때마다 정단의 검은 머리카락이 정단의 얼굴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선선한
바람의 내음도 자신의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정단은 얕은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사빈은 그런 정단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침대 앞에 서 있는 중이다. 이 여자가 지금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만족감에 빠져서 말이다. 그러나 사빈의 손에 들려 있는 샌드위치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린 듯 화장대 위에
놓여졌다. 그리고 사빈의 움직임 소리마저 없는 침실엔 투명한 분위기인 S.E.N.S

Heaven's
song만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단은 사빈과 함께 동화책을 읽으며 태교를 하고 있었다. 물론 어색함
을 무릅쓰고
동화구연이라도 하듯 동화책을 읽어준 것은 침대에 앉아 정단을 무릎에 누이고 있던 사빈이
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단은 아이가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 했다며 사빈이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단은 사빈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사빈은 조용히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닫았다. 아까는 정단이 바람을 쐬고 싶다 하여 문을
열어두었지만 아무래도
차가운 기운이 산모에게 좋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오디오의 볼륨을 줄인 다음 사빈은 자신
의 아내에게 조용히
다가가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앉았다.

임신 초기에는 너무나도 허해져서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잘 먹고 잘 자서 그런지 정단의 얼
굴에도 살이 붙어 예전의
귀여운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잘못 들으면 살이 쪘다고 들리겠지만 오히려 조금은
통통해진 것이 사빈은 더
맘에 들었다.

사빈은 얼굴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꺽고 잠든 정단의 고개를 살짝 돌려 바로 잡아 주었다.
그리고 몸의 반대편으로
떨어져 있는 정단의 손에 쥐어진 사진을 조심히 빼내어 침대맡에 올려두었다. 다른 사진들
과 같이.. 그것들은 모두
사빈의 어렸을 적 사진으로 사빈을 닮은 아들을 낳고 싶다며 정단이 사빈으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사빈은 자신의
사진들을 매일 가까이 두고 시간날 때마다 보는 정단 때문에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속으론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 아가야.. 너는 언제 오는거니... "

사빈은 정단의 동그란 배 위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자신의 아이가 주고 있을 온기를 느꼈
다. 그리고 잠든 정단의
옆에서 사빈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사빈도 정단과 함께 얕은 숨소릴 뱉으며 잠속으
로 빠지고 나자 작은
아이가 나타나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아마도 자신의 부모님을 위한 자장가였으리
라..



" 당신, 또 맨손으로 나온거야? 내가 장갑 꼭 끼고 나오라고 했잖아!! 몸이 차면 안돼. "

하얀 얼굴에 검은 외투를 입은 정단이 지독하게 섹시해 보인다. 아마 아무도 그녀가 임신 8
개월의 임산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사빈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밤거리를 거닐고 싶다고 조르는 정단을 데리고 나서기는 했지만
출산일이 가까운 정단이
위태롭기만 했다. 더욱이 또 맨손으로 나와 빨갛게 얼은 손을 하고 돌아다니는 정단이 마땅
치 않았다. 하지만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정단의 손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입김을 불어주는 사빈의 손길
을 부드럽기만 하였다.

자신이 집에서부터 데리고 나왔다면 무엇보다 장갑을 챙겼을텐데 몰래 정단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느라 먼저 집을
나섰던 사빈이 미리 챙겨두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 어떡할거야.. 이러고 돌아다닐거야? "

사빈은 정단에게 끼워 줄 생각으로 자신의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그러나 사빈이 장갑을 벗
어주기도 전 정단이
사빈의 외투속 양팔 밑으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 이렇게 하면 되지.."

마치 한 마리 토끼가 품으로 뛰어든 듯한 느낌에 사빈의 팔로 찌르르한 전기가 타고 오랐
다. 사랑스러웠다. 사빈은
이렇게 귀엽고 앙증맞게 자신에게 안겨오는 정단이 미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사빈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정단을 자신의 코트로 감싸며 끌어안았다. 그러자
정단의 부푼 배가
느껴지며 자신의 여자와 아이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볼을 가르는 매서운 추위도 느낄 수 없
었다. 그저 행복하고 또
행복하기만 하였다.

" 그래서.. 이렇게 나오니까 좋아? "

아마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사빈이 어린아이를 품고 있다고 할 정도로 작은 정단이 사빈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좋다는 표현을 해왔다. 요즘들어 부쩍 어리광이 심해진 정단의 그런 행동에 사빈은 정단의
머리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자신도 기분이 매우 좋음을 나타냈다. 그리고 큰 고백을 하듯 심장을 가다듬으며 정
단에게 물었다.

" 내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뭔지 알아? "

정단은 계속 사빈에게 고개를 묻은채를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빈이 정단을 살짝 밀어내
어 정단의 눈을 내려다
보고 말했다.

" 당신.. "

" !!! "

" 작년 12월 23일이 내가 당신 찾은 날이야.. 그래서 그때 생각했지.. 당신을 다시 찾게 해준
게 나에겐
가장 큰 축복이자 최대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그랬는데 지금 당신은 나한테 아이까지
줬잖아...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나? "

사빈은 얼어서 빨갛게 상기된 정단의 두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 나는 평생치 선물을 한꺼번에 받은 기분이야.. "

어느새 떨어지는 눈이 정단의 시야를 막으며 정단의 눈에 비치는 사빈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 당신을 나한테 준 세상이 너무 감사해.. 하늘한테도 감사하고 이 눈한테도 감사하고 크리
스마스에 태어나신
예수님께도 감사하고.. 장인 어른께도 감사해.. "

정단의 눈에 스미는 눈물을 보면서도 사빈은 계속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정단이 흘
리는 눈물이 고통이나
슬픔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빈은 떨어질 듯 말 듯 고민하며 파르르
떨리고 있는 정단의
눈물방울을 손으로 닦아주며 속삭였다.

" 하지만 무엇보다 고마운건... 지금 내 곁에 있어주는 류정단이란 여자야.. "

사빈이 눈물을 훔쳐준 보람도 없이 정단의 눈에서 아까운 정단의 영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단은 이상하게 울고
있을 자신이 부끄러워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얼른 사빈의 옷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정단은
자신의 머리위로 사빈이
웃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사빈의 여유있는 웃음은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작게 옹알거리
는 정단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나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지만 사빈의 가슴에 새기듯 심장 가까이에서 속삭인 정
단의 말은 사빈의 심장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 사랑해요. "

사빈이 그토록 원했지만 지난 2년동안 들을 수 없던 말이었다. 하지만 사빈은 아무런 동요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이 나 사랑하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

그러나 사빈이 자신의 고백에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정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볼 아래
로 마주한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으니까...

"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아주..많이.."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할 무수히 많은 날 중의 하루였다. 또한 그들이.. 사랑할 시간의 한 순
간이었다.


부디..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에필로그
그녀 29살.
그 39살.
그 녀석 8살.

" 유신아.. 아버지가 오신 것 같은데.. 엄마대신 나가줄래? "

인자한 미소와 함께 던져진 그녀의 부탁에 눈망울이 귀여운 남자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쪼로록 주방을 빠져나갔다.

주방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여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곤 아동용의자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미소야.. "

엄마, 빠빠, 맘마외의 다른 말은 배우지 못한 아이가 엄마의 목소리에 밝은 웃음으로 답했
다. 그러자 여자는 예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뺨에 손가락을 부드럽게 가져다 대며
말했다.

" 아빠 오셨나보다. "

정단은 귀여운 자신의 딸을 보며 행복하게 미소지었지만...
오늘은...
사빈에겐 힘겨운 어느 봄날의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행복한 날이다.
** 성사빈 망가뜨리기 프로젝트 1 : 다시 찾아온 어느 봄의 이야기. **

[ 누구세요? ]

누구 아들인지 아이는 똘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사빈은 그 목소리가 별로 반갑지 않
은 듯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 아들.. 문 열어라. "

[ ........ ]

역시나...
오늘도...


또다.


사빈을 밖에 세워둔 안에서는 문을 열 기색도 그렇다고 다른 소리도 없었다.



" 사빈아.. 뭐야? "

"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유신이 이녀석이 또 장난치는 거지.. "


사빈의 뒤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유원은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유원도 알고 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를..

드디어 포기했다는 듯 참았던 한숨이 터지며 현관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위해 사빈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야무진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인터폰을 타고 흘렀다.



[ 암호는? ]

" ..... "


매우 종종 겪는 일이지만 언제나처럼 사빈은 오늘도 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제멋대
로 바꾸고 결정한 암호를 어떻게 알아맞히라는 것인지..

그러나 사빈이 곤란스럽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이젠 더 이상 봐줄 시간이 없다는
듯 아이의 외마디가 들리곤 인터폰이 날카롭게 끊기는 소리가 이어져왔다.


[ 도둑이구나! ]

- 뚜둑

" ...... "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만 사빈의 손가락이 그 모양 그대로 굳어져 바르르 떨고 있었다. 유원
은 한심스럽다는 듯 사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이.. 녀석.. "

" 그냥 처음부터 네가 열고 들어가지 그랬냐.. 입력해라. "


하지만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가락의 주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그리고 지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아이가 잘 알아듣도록 말했다.


" 성유신.. 엄마 나오라고 해.. "

[ 암호는? ]


그러나 아이에게 사빈의 지엄함은 통할리가 없었다. 아이가 다섯 살을 맞이하던 그해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쭈~~~욱..

정단을 닮아 착할 것이라 예상되었던 유신은 모두의 기대를 깨고 다섯해 동안 고이 숨겨 온
악마의 본성을 3년 전부터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악한 기질이 유독 사
빈에겐 더 심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아들의 나쁜 심보도 귀엽게 받아주던 사빈도 어느날부턴가는 애처럼 같이 맞서기 시
작했다. 유신이 자신을 적대시하는 축의 중심에 정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사빈과 유신은 정단이라는 한 여인을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 엄.마.. "



사빈이 정단을 지칭하는 엄마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문이 열리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봐줬
다는 듯 아이는 거만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 암호가 틀렸잖아. 오늘은 손님이 오셔서 봐주는 거야. ]


사빈의 머리 위로 피어올라 하늘 위로 두둥실 떠가는 몇가닥 실지렁이를 유원은 보았다. 하
지만 완전히 열받기엔 한마디가 빠졌다.


[ 아빠, 바.보. ]

- 덜커덩..


그렇지.. 그 한마디가 빠지면 어디 사빈과 그 아들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냐..
유원은 현관문을 부여잡고 열받아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사빈을 측은하게 바라보다 사빈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위로하듯 사빈의 얼굴을 바라봤다.

불쌍하다는 동정의 의미가 가득담긴 표정을 짓고서...


" 넌 딸만 낳아라.. 절대 아들은 낳지마! "

" 난.. 아들이 좋은데.. "

" 저 녀석을 왜 낳았는지.. "

" 난.. 아들이 좋다구, 사빈아. "

" 정단이한테 끓여 준 미역국이 아까워.. "

" ... 난.. 아들이.. 좋.. "

" 왜 저렇게 말을 안듣는 건지.. "


중얼중얼.. 중얼중얼..
오늘도 유신과의 대전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건만 사빈은 이미 아들
의 기선제압에 동요하여 혼자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유원은 반쯤은 진심이 담긴 듯한 사빈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석은 정단이 낳아 준 아이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유신은 사빈의 금쪽같은 물건임을 유
원은 알고 있다. 비록 그 서열이 정단과 미소에 이어 3위로 좀 쳐질지라도..

하지만 아들에 대한 사빈의 푸념은 멈추질 않았다.

" 생긴건 정단이를 똑 닮아선 성격은 누굴 닮았는지.. 도대체... "

유신의 성격은 사빈의 어렸을 적과 똑 닮아 있는 것을 사빈은 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유원은 웃음이 났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하랬다고 유신의 어디가 정단을 똑 닮은 얼굴이던
가.. 오히려 사빈 자신과 붕어빵이면서.. 하는 짓까지..

그런데 어느 순간 사빈의 염불이 그쳤다. 유원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
었다.


" 오셨어요? "


당연히 그녀, 사빈의 그녀가 나왔기 때문일테니까...

역시나 품에서 작게 꼬물거리는 미소를 안은 정단이 언제 나온 것인지 계단 정상에 있었다.


" 미소야.. 아빠 오셨다~ 인사드려야지!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해봐.. "


정단은 아이가 사빈의 품으로 옮겨가기 쉽게 가까이로 안아주며 말했다. 미소보다도 오히려
정단이 더 아기같이 웃고 있었다.

사빈도 이제야 풀어진 표정을 보이며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미소의 입에서 결정적 단어 한마디가 뱉어지자 드디어 팔불출 같은 표정을 드러냈다.


" 빠빠! 빠빠빠!! "

" 그래.. 미소야.. 아빠! 아빠!! "


사빈은 좀전에 유신에게서 당한 설움을 해소하려는 것처럼 미소의 웅얼거림에 기뻐했다. 그
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원의 머릿속에는....

' 너.. 바보 맞잖냐.. '


그리고 정단이외의 사람은 모두 빠빠라고 규정지어버리는 딸의 버릇을 모른 사빈의 기쁨도
거기까지였다.



" 미소야~ 유원아저씨한테도 인사해야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저.씨.. 해봐~~ "


이제는 미소에게도 익숙한 유원에게 미소를 넘겨주자 미소는 바로 사빈을 배신했다.


" 빠빠? "


유원도 미소에게는 빠빠였다.

** 성사빈 자빠뜨리기 프로젝트 2 : 욕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

화창한 어느날.. 그는 또 화가 나 있었다.

" 뭐야.. "

사빈은 모락모락 김을 내며 서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 같이 목욕했어? "

그가 화를 내는게 이상하다는 듯 정단은 유신의 머리를 말려주며 사빈을 바라보았다.

" 유신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당신이랑 같이 목욕을 하는 거야? "

그랬다, 그는 정단과 유신이 다정하게 욕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던 것이다.

" 애 혼자 어떻게 목욕을 해요. 아직 어린애라구요, 유신인.. "

유신은 자신의 아빠가 왜 이렇게 열을 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천진스런 표정을 지으
며 정단을 바라보았다.

" 그럼, 나랑 같이 하면 되잖아. 꼭 당신이 애랑 같이 목욕해야 돼? "

" 당신이 매일 늦으니까 그렇죠. 당신 들어올 시간이면 새나라의 어린이는 자야 했다구요. "

" 그러니까.. 당신은 유신이만 씻기면 되잖아! 꼭 같이 목욕을 해야 하냐구!!! "

그렇다, 실제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정단이 유신이라는 자신외의 남.자.와 목욕을 했다는 사
실이었다. 그런데 천진한 유신군은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사같은 표정으로 정단
에게 물었다.

" 그런데 엄마 가슴에 얼룩이 있던데.. 그건 뭐야? 요기.. 요기.. "

유신은 걱정스러운 표정까지 덧붙이며 정단의 왼쪽 가슴근처를 더듬었다.

" 으응.. 엄마 어렸을 때 불에 덴 상처야. 엄마 집에 불이 났었거든. 그러니까 유신이도 불장
난하면 안돼~ "

10여년전 있었던 화재사고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화상자국을 본 것인지 유신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정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코 기분좋을 수 없는 한남자가 음산한 오라를 달고 서
있었다.
" 가..가가..가슴? "

' 가슴이라고했나... 가슴.. 정단이 가슴... '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는 패닉상태의 사빈을 바라보며 정단의 품에 안긴 유신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빈과 달리 유신은 정단의
키스를 받으며 잠이 들었다.

사빈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러나 사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재기의 그때를...

" 나도 목욕할 거야. "

다늦은 밤에 목욕을 했다고 하는 사빈은 마치 떼쓰는 아이와도 같았다. 항상 그렇듯 오늘도
사빈이 유신 때문에 투정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단은 말없이 목욕물을 받았다.

" 나도 등밀어 줘. "

그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유신에게 했던 그대로 자신에게도 해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 들어가요. 등 밀어 드릴게요. "

하지만 정단의 생각은 사빈의 은밀한 의도에 미치지 못했다.
단순히 그의 목욕을 돕는 것 만으로는 유신에게 해준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 정단아.. 눈에 비눗물 들어간 거 같아.. 따가워.. "

사빈은 조심스럽게 등을 밀고 있는 정단에게 봐달라는 듯 눈을 비비며 말했고 그러자 정단
은 그의 뜻대로 몸을 숙이며 사빈에게로 다가왔다. 비누라곤 만지지도 않은 사빈의 능청맞
은 연기라는 것도 모른채..

사빈은 정단이 가까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 정단을 욕조안으로 끌어들였다. 욕조안의 물
이 크게 요동치며 첨벙 소리를 냈다.

그리고 정단의 물먹은 목소리가 욕실안에 울렸다.

" 당신---!!!!! "

갑작스레 욕조 안에 떨어지는 꼴이 되버린 정단은 예상치못한 잠수에 물을 먹고야 말았다.
코가 매워하는 정단에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인지 사빈은 정단의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단은 사빈의 손을 밀쳐내며 욕조 밖으로 나가려했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

" 나도 당신하고 목욕하고 싶어서... 같이 하자, 응? "

" 전 좀 전에 다 씻었다구요. "

사빈은 일어나려는 정단을 곰인형처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의 유치한 발상에 웃음이 나오
기는 했지만 정단은 그의 간절한 바램에 부응해주고자 그가 안는대로 묵묵히 안겨있었다.

그러나 슬금슬금 블라우스 앞섬으로 파고드는 그의 손길에 정단은 물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 아니.. 당신 옷이 젖어서.. 벗는 게 날 거 같아서.. "

사빈이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빈이 욕실바닥을 뒹군다해도
나간다는 의지를 담은 정단의 얼굴이 사빈을 엄하게 내려다 보았다.

" 잘 씻고 나와요. 꼼. 꼼. 하. 게.. "

결국 사빈은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정단의 뒷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사빈이 뻘쭘히 앉아있을 때 욕실문이 벌컥 열리며 정단이 나타났다.

젖은 옷을 벗어버린 듯 정단은 물에 젖어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실크 슬립만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사빈의 눈엔 이미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사빈은 뒤늦게 베시시 웃으며 두손을 활짝 벌리고 정단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 그거 알고 있어요? 당신이 바보란 거!!! "

" .... "

" 새로 갈아입은 옷이 다 젖었잖아요! "

정단은 마치 유신이 야단치듯 사빈을 꾸짖곤 다시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욕실안은 조용해졌다.

식어가는 물 속에서 어색하게 팔을 올리고 내릴 줄 모르는 사빈만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
을 뿐이었다.

충격이었다.
바보라니..

그 후로 사빈의 귓속엔 꾀꼬리처럼 예쁘게 울리는 정단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 그거 알고 있어요? 당신이 바보란 거!!
- 그거 알고 있어요? 당신이 바보란 거!!

- 당신이 바보란 거!!
- 당신이 바보란 거!!

- 바보란 거!!
- 바보란 거!!
- 바보란 거!!

하지만 그런 정단마저 귀여워 웃음짓는 사빈이었다.

그리고 그런 충격적인 날로부터 며칠 후인 토요일..
꼬마유신이 사빈과 신랑이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목욕을 하려던 정단, 유신 모자가 이른 귀가에 성공한 사빈에게 딱 걸린 것이다. 사
빈은 행여나 또 정단이 유신과 목욕을 할까 자신이 유신을 씻기겠다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
만 그런 자상한 사빈을 유신이 받아들일리 없었다.

" 싫어! 난 엄마랑 같이 할 거야. "

" 성유신. 엄마는 미소도 목욕시켜야 돼! 그러니까 얌전히 말들어. "

오늘만큼은 정단과 오붓한 목욕시간을 보내리라고 다짐한 사빈이 부담스럽게 미소지으며 유
신을 떠밀었다.

유신이를 씻기고 정단과 2층욕실로 올라갈 것을 상상하면서..

하지만 갸륵한 사빈의 생각을 모르고 있는 정단이 문제였다.

" 어머, 그래요? 그럼 당신이 유신이랑 같이 씻어요. 저는 2층에서 미소 목욕시키면서 같이
할테니까. "

사빈의 계획대로라면 정단이 씻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가 미소도 씻길 테니까 당신은 쉬고 있어! "

" ??? "

" 아아.. 모처럼 일찍 들어왔잖아.. 뭐든 당신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유신이 목욕시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

참으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남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 괜찮아요. 미소 목욕시키는 것 정도야.. 이젠 힘들지도 않은 걸요. 그러지 말고 우리 네식
구 빨리 목욕하고 나와서 저녁 먹어요. 당신이 유신이 목욕시키고 미소 씻기려면 시간도 오
래 걸리잖아요. "

" 어어? "

작전실패였다.

" 미소야~ 엄마랑 목욕하자! "

뾰루뚱한 두 남자가 서있었지만 그들을 뒤로한채 정단은 미소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들은 미소의 얼굴에서 승자의 미소를 보았다.

" 아들, 이리와!! "

정단과의 오붓한 목욕시간을 포기한 사빈이 허탈한 목소리로 유신을 불렀다. 유신도 엄마를
포기한 것인지 잠자코 사빈이 이끄는 대로 욕실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둘다 머릿속으론
다음기회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연적임에 앞서 부자였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 않을리 없었다. 정단
의 퇴짜에 우울하던 두 부자가 들어간 욕실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시끄러운 소란이 일고 있
었다.

하지만 분명 정단을 사이에 둔 투닥거리는 아니었다.

- 앗! 아앗!! 아프잖아! 아빠 일부러 세게 닦는 거지!!!

- 사내녀석이 이정도도 못참고...

- 아얏! 나는 어린애야. 피부가 약하다고!

- 엄살부리지말고 가만있어.

- 엄마는 살살 닦는단 말... 우꺄!!!

- 이렇게?

- 우우악! 간지럽잖아! 아빠 바보!!!!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던 소리가 어느새 거실을 울리고 있었다.

" 엄마!!! 아빠가 나 괴롭혀!!!! "

" 가만 못있어!! 정단아, 여보!! 아무 것도 아냐~~~~ "

오늘도

패배자들의 목소리는...

울려온다.

**성사빈 망가뜨리기 프로젝트 03 - 충견1**

「나는 당신이 가지 않았으면 해.」
「제가 가지 말아야 할 이유 다섯가지만 대봐요.」

이것은 어느 여름날 펼쳐지는 어느 부부의 어설픈 부부싸움 이야기..

" 내가 싫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

아이보리색 양장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땋아올린 정단이 오렌지빛 립스틱을 바르며 사빈
을 쳐다보았다.

" 당신도 내가 창피한 거죠. "

입술을 내밀고 립스틱을 바르며 말하는 모습이 토라진 아이와도 같았다.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버럭...
간만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정단의 베개와 뒹굴던 사빈이 정단을 향해 휘릭 돌아누웠다.
정단이 아무 뜻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사빈을 화나게 만들고 만 것이다.

머리위에 뿔따구 다섯 개쯤을 달고 있는 사빈은 길게 팔을 뻗어 무섭게 티슈를 뽑아댔다.

" 이리 와. "

쳇!이란 말이 절로 나왔지만 오늘은 특별히 남편이 화가난 것 같기에 정단은 얌전히 침대로
다가섰다.

몇 주간 바빴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약간은 야윈 상체를 드러나며 사빈이 일어나 앉

다.

" 어머나! 예쁜 쇄골. "

정단이 분위기 쇄신을 위해 앙증맞은 검지손가락으로 사빈의 쇄골을 쓰윽 훑으며 칭찬해줬
지만 사빈이 뽑아낸 티슈가 정단의 입술로 거칠게 문질러졌다.

" 당신--!! 무은지이에요!! "

정단의 뒷목을 붙들고 가차없이 손을 놀리던 사빈이 만족했다는 듯 티슈를 뒤로 던지며 나
른하게 웃음지었다.

닭장 주인 몰래 닭을 잡아먹은 고양이 위로 닭털이 날리는 것처럼 사빈의 뒤로 오렌지색이
뭉게진 티슈가 훨훨 날아다녔다.

" 예쁜걸~~ "

사빈이 베개를 품에 안고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정단은 조금도 재밌지 않았다.

" 그래도 난 갈 거예요. 유신아빠. "

정단이 뭉개져 색이 번진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는 웃는 낯이었던 사빈의 표정이 알싸하게 바뀌며 다시 화장대로 앉는
정단을 붙잡아 세웠다.

" 가겠다고? "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라 가슴이 떨리긴 했지만 고집이라면 이등이라면 서러울 자가 정단
이었다.
" 갈 거야. "

정단이 고개를 조악이며 대답하자 더욱 싸늘해진 표정의 사빈이 팔에 힘을 줬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며 하늘색에 야광별이 붙여진 천장이 정단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단이
아침에 보는 야광별은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 긴 머리가 목으로 흘러내
린 사빈의 음산한 얼굴이 별들을 가렸다.

" 진짜 갈 거야? "

" ... "

" 진짜로... 갈 거야? 응? "

대답이 없는 정단이 항복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빈이 옅은 웃음을 흘리며 아내의 뺨을 만졌
다.

" 가지 않는 거다. "

만족한 사빈이 정단의 입술에 뽀뽀를 날리며 오렌지색이 번진 정단의 입가를 손으로 닦아냈
다.

하지만..

" 아니, 갈거야. "

" 당신!! "

이젠 나이 많은 남편의 엄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정단이 딱 잘라 자신의 고집을 말하자
사빈은 뭔가 다른 힘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정단에겐 통하지 않았다.

" 윽---!! "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빈의 얼굴을 멀찍이 밀어 찍으면서 정단이 악을 썼다.

" 난 갈거야, 갈 거라구!! 당신이 말려도 갈 거야. 이번엔 아무리 무섭게 굴어도 소용없다구
요. "

사빈의 얼굴을 이쪽저쪽으로 흔들어대던 정단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사빈은 킹 사이즈의
침대저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사빈이 침대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보며 옷을 정리하던 정단은 치마에 구김이 간 것을
발견하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 옷이.. 구겼어.. "

그런데 정단보다 더 험상궂게 인상을 찡그린 사빈이 한쪽팔로 뒷목을 주무르며 부스스 침대
에서 일어났다.

" 당신.. 나보다 옷이 더 중요해 진건가? "

" 당신이 억지를 부리니까 그렇죠. 그냥 보내주면 좋잖아. 매번 이렇게 시끄러워야겠어요? "

" 그건.. 당신이 억지를 부려서 그런거잖아. 가지 말라고, 가지 마!!! "

" 이번엔 당신이 양보좀 해요. 당신이 저보다 어른이잖아요. "

" 여기서 어른이고 아닌게 무슨 상관이야. 가지마. "

밀고 당기는 싸움. 종종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정단이 고집을 부리는 관계
로 둘의 싸움은 쉽게 종결되지 않았다.

" 나는 당신이 그 집에 가서 무시당하는게 싫어. 아니, 당신이 그 집에 가는 자체가 싫어.
그 사람들이 당신 쳐다보는 것도 싫다구. "

" .... "

" 내 맘 알겠어? "

그랬다. 정단과 사빈이 싸울 일은, 그리고 사빈이 쉽게 정단의 편에 서지 않는 일은 자신의
집과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매년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댁에 가겠다는 정단을 보내지 않기 위해 사빈
은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간혹 정단의 고집대로 집에 갔다가는 진여사의 독설에 정단의 간이 오그라들 것 같았기 때
문이다.

더욱이 유신을 낳은 후 정단에 대한 태도가 좀 더 나아질 거라는 사빈의 기대는 예상밖의
난관에 봉착하여 더 이상의 화해의 시도는 할 수조차 없었다.

유신을 낳은 정단도 그리고 자신의 손자인 유신조차 진여사에겐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으
니까.

그런데 정단은 때만 되면 집을 나서겠다 고집이었다.
그런 정단의 고집을 잠재우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빈에게는 매번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 당신이 같이 가잖아요. 내편이 세명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

" 그래도 난 싫어. 이러다간 제명에 못 살 것 같다고.. 내가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있는 줄
알아? "

" .... "

" 그렇다고.. "

" .... "

" 아... "

" .... "

" 씨.. "

" ... "

" 젠장..."

기어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맺히는 정단의 눈물이 사빈의 입을 난감하게 막아버렸다.
정단의 가장 큰 무기.. 눈물..

그것이 빈번히 사용되지 않기에 정단의 눈물은 핵폭탄과도 같은 강도로 사빈의 가슴과 뇌를
휘어잡았다.

" 울지 마라... 제발.. "

사빈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힘없이 걸터앉아 자신의 머리를 헝크러뜨리고 있는 그 모습에 정단이 눈물을 훌쩍이
며 그이 머릿결을 차분히 정리해주며 말했다.

" 저는 당신하고 유신이하고.. 미소랑 더 많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이.. 많이..
하지만 그런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머니도 당신이랑 아주버님이랑 서방님이랑..
더 많이, 더 많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실 거예요. "

' 설마.. 어머니가 그런 보통의 평범한 여인네라고 생각하는 거냐? '


사빈은 아직도 꿈꾸는 소녀같은 아내의 생각에 조용히 딴지를 걸어보았다. 마음속으로만..

" 그리고 유신이하고 미소한테도 사촌형제와의 우애를 쌓게 해줘야지요. "

' 지금이 무슨 60년대냐, 류정단? 지금은 핵가족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우애는 무슨.. 지
금 우리 유신이가 미소랑 놀아주는지 안 놀아주는지 부터 챙기라고.. 이 다음에 그 애들이
한달에 한번만 서로 연락해도 성공하는 거다. 사촌은 무슨.. '

할머니와 단둘만 생활했던 정단이 가지고 있는 가족의 꿈을 깰까 두려워 사빈은 자신의 생
각을 마음속으로만 삭혔다.

하지만 정단의 생각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 눈물보다 더 강력하고 달콤한 폭탄이 대
량으로 투하되었다.

쪽.. ...
쪽..
쪽.

생각보다 귀여울 때가 많은 남편에게 정단이 귀여운 참새키스를 한 것이다.

매번 사빈이 정단에게 삐질 것 같은 때마다 무마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무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당하고싶어 근질근질했던 사빈은 이 순간도 항복의 하얀 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사빈이 앉았던 자리에 돌려앉혀진 정단...
그리고 급격히 틀어막았던 입을 떼는 사빈..


" 30분내로 준비해. 갈거니까. "


승리의 기쁨에 취한 정단이 웃는 반달같은 미소.
이어지는 사빈의 풀어진.. 눈매.

' 그래.. 그 웃음에 봐줬다. '

여전히 정단은 사빈의 가장 강력한 폭탄이었다.

**성사빈 망가뜨리기 프로젝트 3-충견2**

매미가 울고 있다.
시끄럽게..

맴맴..
맴맴..

맴..

그리고 날은 더웠다.
등을 타고 내린 땀방울이 오싹할 정도로..


하지만 사빈이 정단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서늘했다.

열명이 넘는 사람이 있는 공간도 워낙에 넓은 대지여서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한창 사고를 칠 나이인 꼬맹이들조차 이미 집안의 분위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다른 어른들
과 마찬가지로 엄숙한 자세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런 가운데 몇몇사람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옷자락소리만이 그들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알
려주고 있었다.

이런 집에서 나고 자란 사빈이었지만 사빈은 가끔 이곳에 방문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 그래.. 오늘은 자고 갈거니? "

" 아니오. "

아들에게만은 인자한 진여사의 물음에 사빈은 예의도 갖추지 않고 즉시 답했다. 그 말에도
싸늘한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 그래도 집밥은 먹이고 간다니 다행이구나. "

마치 사빈이 정단에게 끌려다닌다는 듯이 진여사는 못마땅한, 아니 매서운 눈빛으로 정단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런 진여사를 사빈이 오래두고 볼리는 없었다.

" 제 집에서 먹는 밥도 집밥입니다. 어차피 이곳에서도 어머니께서 해주신 밥은 아니었잖습
니까.. 제 안사람 밥이 더 맛있습니다. "

매번 혹독하게 구는 시어머니였지만 몇 년동안 면역이 된 것인지 진여사의 엄한 눈초리에도
익숙해진 정단은 몇가지 찬이 담긴 쟁반을 들다가 "푸!"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엄마를 두둔하는 것처럼 자신의 편을 들고 나서는 사빈이 익살맞게 느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빈이 귀엽게 보이는 것은 정단뿐이었다.
사혁, 사영형제는 밥알을 모래알처럼 씹으며 자신의 팔불출 동생을, 그리고 형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한심한 표정을 날렸다.

그 중 유일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로 털어놓는 사비가 사빈의 말투까지 흉내내며 놀렸다.

" 제 안사람 밥이 더 맛있습니다. 푸하하하하.. 둘째오빠가 올케언니한테서 나오는 것 중에
안 맛있는게 어딨어. 바보같잖아. "

사빈의 놀림을 끝으로 인영이 참았던 웃음을 가볍게 터뜨렸지만 언제나처럼 조용한 성회장
의 무표정으로 간만에 인간다움이 느껴졌던 식탁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런데 한참동안 국그릇에 수저를 젖던 성회장이 입을 열었다.

" 막내아기는 어찌된 거냐. "

성회장이 찾는 막내아기가 누군지 알길이 없는 모두는 먹는 동작을 멈추고 성회장의 말에
경청했다.

" 사빈이, 네녀석 딸말이다. "

성회장의 갑작스런 손녀에 대한 관심에 사색이 된 정단이 머리를 조아리며 급히 대답했다.

" 미소는 김씨 아주머니가 봐주고 있습니다. "

성회장은 뭔가가 못마땅하다는 듯 먹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노한 얼굴로 정단을 바라보았다.

" 아기 밥은 먹인 게냐? "

여전히 성회장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정단은 큰 죄라도 진 것처럼 에이플린만 만지작거리
며 머뭇거렸다.

유신을 낳은 후, 아니 그날 이후 몇 년동안 단 한번도 정단에게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던
성회장이 언성을 높이자 사빈은 허를 찔린 아찔한 기분이었다.

매번 진여사만 경계했을 뿐이었는데 오늘은 왜인지 성회장도 정단을 곱게 보는 것 같지 않
아 사빈은 당황하며 정단대신 말을 이었다.

" 아버지. 미소가 아직 어려서 다른 식구들과 겸상하기엔 이릅니다. 그래서 나중에.. "
" 식구들과 같이 먹는 것도 아니면 너라도 가서 애기 밥을 챙겨야지, 거기서 그러고 있어?"

그러나 성회장은 사빈의 대답따윈 듣지도 않고 여전히 정단을 향해 호통을 쳤다. 지금껏 진
여사의 냉대에 익숙해지기도 힘들었던 정단은 낯설은 시아버지의 걱정소리에 몸둘바를 몰랐
다.

" 네, 네.. 아버님. 제가 지금 가서.. "
" 됐다. 이리 데리고 오거라. "

정단이 에이플런을 벗으며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 순간 성회장은 무언가 결심
을 했다는 듯 말짱을 끼며 명령했다.

정단은 잠시 멈칫했지만 성회장의 재촉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미소가 있는 방으로 전진했다.

뜬금없는 성회장의 행동에 놀란 것은 사빈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자신의 어여쁜 작은 공주를 왜 찾는 것인지 걱정에 휩싸인 사빈도 미소를 제물로 바
치는 심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침을 삼켜야했다.

그러나 미소를 대하는 성회장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이제 막 부드러움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된 미소는 성회장이 주는 계란죽을 받아먹고 있었
다.

성회장에게 미소를 넘겨준 정단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엄하고 무서운 성회장이 작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몸소 음식을 떠먹여주고 있다
니..

하지만 놀라는 모두의 사이로 사비만이 태연하게 볼이 터지도록 음식을 입안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왜 그렇게들 놀라세요? 우리 아버진 원래 딸을 좋아하셨어. 우리 집이 딸이 귀하잖아. 아
들도 삼형제, 거기다 큰 오빠도 아들만 주루륵 낳았지. 그런 와중에 작은 오빠도 유신이만
덥썩 안겨줬지.. 어디 예쁜이가 있어야지. "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던 사비가 마지막으로 샐러드 한조각을 입에 넣으며 나른하게 미소를
바라보았다.

" 저 녀석 안태어났으면 나 시집도 못 갈뻔 했잖아. 막내언니는 분발해서 딸만 낳으라고. 그
럼 아버지가 유산 많이 주실 거예요. "
" 사비야! "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성회장과의 독대를 청할 정도로 간이 큰 사비가 성회장의 위엄을
해하는 말을 하자 진여사가 매섭게 말을 잘랐지만 조용히 주방일을 보면 정씨가 웃음을 참
지 못하며 말했다.

" 그러게요. 회장님이 아가씨 어렸을 때 얼마나 귀이 여기셨는데요. 가끔 귀저기도 갈으셨는
걸요. "
" 정씨.. "

30여년동안 성씨 집안에 있으면서 일을 해오면서 집안의 분위기를 알만큼 알고 있는 정씨가
가족의 대화에 끼어들자 진여사가 언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정씨가 무안해할 틈도 없이 식구
들의 관심은 미소에게로 쏠렸다.

" 아.. 우아.. 우우... "

미소가 알아 듣지 못할 말을 흘리며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단은 시아버지가 어려웠던 나머지 무서운 인상의 할아버지 품안에 떨어지게 된 미소까지
는 챙기지 못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무서운 성회장의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미소는 계
속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어도 될까, 안될까를..

그러다 왠지 안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것인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눈물은 매달고
있었으나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성회장이 주는 여러 가지 음
식을 덥썩덥썩 받아먹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가관이었다.
음식을 씹고 있는 두볼은 움찔움찔 거리고 있었고 젓가락을 손에 쥔 성회장의 손이 다가올
때마다 두려움의 눈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미소의 얼굴을 보고도 무표정하게 음식을 들이대는 성회장의 눈을 마주할 때마
다 미소는 쩌억하고 입을 벌렸다.
그런 미소를 보며 만족한 것인지 성회장은 미소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주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는 이광경에 놀라는 것은 사빈도 마찬가지였다.

성회장이 사비를 어떻게 예뻐했었는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빈은 자신의 하나뿐이 딸이
저러다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낯을 가리면서부터 다른 남자의 품에만 안기면 울어재끼는 미소를 보며 만족스러웠었는데
오늘은 성회장의 품에서 지구가 떠나가라 울어댈까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파들파들 몸을 떠며 경직된 딸이 안스러웠다.
미소가 파들거릴 때마다 의자에 붙어있던 엉덩이도 들썩거렸다.

내딸을 건드리지 말라고 아버지에게서 미소를 빼앗아 올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시간이 갈수
록 미소와 놀란 정단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사빈은 수저만 꼭 쥐어야했다.

하지만 그런 사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영과 사비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성회장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사빈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촌형과 같이 성회장에게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유신이 두볼을 씰룩거리며 울먹
이는 미소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경계의 눈빛이었다.
돌돌돌 떨고 있는 여동생을 따라 눈물까지 글썽이는 유신의 그 모습은 똑같은 지점을 한치
의 오차도 없이 주시하고 있는 사빈의 모습과 겹쳐지며 장관을 연출했다.

사영은 그 둘의 모습에서 소머즈를 떠올렸다.
효과음으로 '뚜두두두두--'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처럼 리얼했다.
나이 든 성회장의 약간은 인간스러운 모습을 알기도 했지만 약간은 괴기스러운 저녁식탁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어떤 사람은 움찔움찍, 울먹울먹..
몇몇 사람은 쿡쿡쿡쿡..
묘한 화음을 내면서 그렇게..

하지만 오늘도 무난한 시댁의 방문은 아니었다.
세뇌라도 시키듯 정단을 몰아대는 진여사의 한마디가 오늘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 회장님이 널 받아줬다고 해서 나도 널 인정하는 건 아니다. "

말처럼 자신과 성회장을 시어머니, 시아버지란 단어와 연관시키지 않는 진여사가 정단을 싸
늘히 내려다 보며 말했다.

미소의 놀이감으로 몇몇가지 싸온 짐을 챙기던 정단은 잠시 손을 멈추긴 했지만 어딘가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눈을 의식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 어머님이 저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 "

진여사에게는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정단의 미소에 진여사는 화가 치솟았다. 자신의 말
에 웃는 여유까지 보이는 작은 여자가 여전히 못마땅했다.

" 하지만 먼 나중에 지금을 후회하실 건 어머니세요. "
" 이젠 말대꾸도 또박또박 잘 하는구나. "

자신의 역정에 몸을 숨기던 정단의 태도에서 작은 만족을 얻었던 진여사는 자신의 앞에 있
는 정단이 더 이상 예전의 정단이 아님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가는 정단에게 진여사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지키고 있었다는 듯 정단에게 손을 내미는 사빈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여사는 이미 사빈을 정단에게 빼앗겼으니까...

하루쯤 자고 가도 되지 않냐는 사비의 말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서는 사빈의 발걸음은 그 어
느때보다 가벼웠다. 그러나 자신이 도마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 야.. 꼭 맹수가 먹이감 바라보고 있는 거 같지 않았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안되는
데.."
" 오빠도.. 그게 무슨 맹수야.. 무슨 충견같더라. 왜.. 진돗개 보면 그러잖아. 주인이 묶어놓고
가면 다른 사람이 데려가려고 해도 절대 안 끌려가고.. 주인 움직이는 거 따라 고개 움직이
고.. 딱이더라. 더구나 오빠는 작은 올케한테 질질질 끌려다니?아. 오늘도 아마 끌려왔을
걸.."
" 니들 눈엔 그 충견이 한 마리만 보였냐? 내가 보기엔 두 마리던데.. "
" 두 마리? "
" 유신인 어쩜 그렇게 지 아빨 닮았는지.. 두 놈이 똑같이 저희 집 공주님들만 보고 있더
라."
" 아하하하.. 맞아. 유신이 그녀석.. 아까 아버지가 미소 안고 있을 때.. 아하하하.. 누가 잡아
먹기라도 했다고.. "

물론 사빈과 유신이 보기에 정단과 미소는 잡아먹힐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두 여자를 지키던 두 남자중 한남자는 소화제와 위장약을 오도독오도독 씹어먹어야
했고 한남자는 마저 채우지 못한 배에 허기를 느껴야했다.

꼬르륵 거리는 배를 가르키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유신에게 샌드위치를 챙겨준 정단은 가
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사빈에게 다가갔다.

어쩌다 집에 다녀올 때면 자신보다 남편이 더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에 다녀오는 날이면 사빈은 어김없이 체증 증세에 토악질을 해야했고 며칠동알 홀쭉한 얼
굴로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돌봄에 털을 곤두세우는 사빈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 잘 참았어요. "

정단이 사빈의 머리를 안으며 남편이 해주는 것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예뻐해주는 건가? "

사빈이 한쪽팔을 감싸 안으며 정단에게 안겼다.
하지만 사빈의 어리광은 오래갈 수 없었다.

정단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울리는 정단의 웃음에 정단의 시선을 쫓던 사빈은 멀리서 자신의 미소를 끌어안고
있는 유신을 봐야했다.

정단을 보살피고 있는 사빈처럼 유신은 유신대로 자신의 동생을 보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미소가 큰 일이라도 당했다는 듯 유신은 미소의 등을 쓸며 토닥이고 있었다.

알수 없은 외계어를 구사하는 미소의 말에 똑같은 "우어.. 우어"라는 일련의 단어로 답하면
서..

그러나 순간 반짝하고 눈을 뜨더니 유신은 정단과 사빈이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
렸다.
그리고 아직은 잘 들 수 없는 미소를 힘겹게 안고 두두두두 달려왔다.

" 엄마. 아빠 예뻐해주는 거예요? "

정단과 사빈의 러브러브를 눈 뜨고 봐주지 못하는 유신이 또다시 훼방꾼으로 등장한 것이
다.

" 나도, 나도.. 나도!! "

대롱대롱 매달리 미소를 버겁게 고쳐 안으면서 유신은 정단에게로 머리를 디밀었다.
하지만 매번 정단과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유신을 증오하던 사빈이 감정이 듬뿍 담긴
손을 들어 예쁜 머리통을 쳤다.

꽤나 아픈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것이 사빈의 손길인지 알아채지 못한 유신이 한번
머리를 쓱쓱 문지르곤 남겨둔 샌드위치를 마저 먹기 위해서 또다시 두두두두 달려나갔다.

그런 유신을 바라보는 정단의 눈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 저 아이가 당신을 닮아서 기뻐요. "

이젠 심장박동만 들어도 정단의 기분을 알 수 있는 사빈이 정단의 가슴이 고개를 묻으며 물
었다.

" 행복해? "

그렇다고 대답할 만큼 정단은 행복했지만 정단은 더 많은 바램을 담아 사빈에게 답했다.

" 아니오. "

미리 답을 예상하고 만족할 준비를 하고 있던 사빈은 절대 상상할 수 없었는 대답을 놀라
정단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정단의 눈빛엔 장난끼가 가득했다.

" 그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행복에 가까워졌어요. "
' 앞으로는 더 행복해질테니까요. '
우리 집에는 말을 아주 잘 듣는 강아지가 두 마리나 있답니다.
간혹 둘이 싸워서 힘들게 하기는 하지만..
저는 모두를 사랑합니다.

2010. 7. 30. 류 정 단

**사라진 이야기 No.1 딸국질편**
<'You are not alone' 넌 혼자가 아니야... >

유난히 일찍 사무실을 나선 사빈은 뿌듯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있었다. 지금 이 벨을 누르
면 어여쁜 정단이 나올 거라 상상하면서..

하지만 가끔 정단을 놀래켜주는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현관비밀번호를 직접 입력하
고 행여나 발소리가 들릴까 깨끔발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침실에서 나오던 정단이 방문 바로 앞에 서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숨이 넘어갈 듯 놀란
것이다.

" 정단아!! 당신... 왜 그래!! "

자꾸만 움찔움찔 떠는 정단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사빈이 정단을 거의 안다시피
하여 침대에 눕혔다. 정단은 사빈이 자신의 옆에 앉아 살피려고 하자 바로 눕지 않고 엎드
려서 배게에 고개를 묻었다. 하지만 사빈은 정단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느끼고 정단을
바로 눕히려고 애썼다.

" 당신.. 왜 그래? 왜 그러는거야? 어디 안 좋은 건가? 나좀 봐! 정단아!!"

정단은 침대 시트에 고개를 묻고서 사빈을 보지 않으려고 악을 썼고 사빈은 정단이 간헐적
으로 헐떡이자 조금은 거칠 정도로 정단의 몸을 뒤집으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사빈이 정단
을 옆으로 돌려 뉘였을 때 정단은 고집스레 보이지 않으려 했던 얼굴을 들며 이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흐윽... 사... 흑! .... 사빈.. 씨... 흑 "

" 호흡이 힘든 거야? 왜!! 말하기 힘드니? 정단아!!!! "

" ... "

" 당신!!!왜 그래!!!! "

" 흑... 따.. 흑!! 딸꾹질이..."

사빈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말도 잘 못하는 정단을 보고 온몸이 철렁 땅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계속 이어진 정단의 말로 사빈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느낌
이었다.

' 딸.. 꾹... 질... 이라고!!! '

아무래도 너무 놀란 것이 딸꾹질이 되었나보다.

' 휴우.. 이 골칫덩어리.. '
사빈은 정단이 아픈 것이 아니라 단순히 딸꾹질을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긴 했
지만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느꼈던 급박함으로 인한 심장의 아픔이 지금에
서야 실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끅끅거리기까지 하고 있는 정단을 보니 온몸을 휘감아 오는
그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화보다는 눈꼬리까지 늘어지며 나오는 미소를 막을 수 없었다.


" 딸꾹질이 심한 거야? "


사빈은 정단의 옆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정단의 머리를 자신의 다리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
고 딸꾹질이 멈추도록 정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정단도 갑자기 사빈이 자신을 다리 위에
눕히자 깜짝 놀라며 잠시 긴장하기는 했지만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딸꾹질에 호흡을 크게
하면서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지 정단은 계속 낑낑거렸다. 그런 정단의 모습이 사빈의 눈에
는 강아지가 앞발을 앞으로 모으고 안겨 칭얼대는 것 같아 꼭 안아주고 싶어 근질근질 하였
다. 더구나 정단이 얼굴 옆에 모으고 있는 작은 손이 자신의 허벅지위에서 자꾸 꼼지락거리
는 것이 느껴지자 사빈은 자신의 몸을 자기가 통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단의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사빈은 정단의 등을 두드리지 않은 왼손으로
정단의 손을 잡아 만지작거리는 것 외엔 자신을 만족시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정단의 입장
에서는 사빈이 변태 아저씨처럼 자신의 손을 주무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빈은
정단의 보드라운 손을 쓰다듬으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정단의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정단도 가슴이 아픈 듯 잡혀
있던 사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내어 가슴을 부여잡았고 사빈은 또 그것이 못마땅하였
다. 정단이 힘들어하는 것이 애처롭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손에서 어느새 스스륵 빠져나가
버린 정단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빈은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방법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몇
가지 고전적인 방법이 떠올랐다.

1. 물을 마신다.
2. 놀란다.
3. 숨을 참는다.

사빈은 진작 정단에게 물을 갖다 줄 걸 그랬다는 생각에 지금이라도 주방에 가야겠다고 마
음먹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정단을 보자 그녀에게 물을 먹여 딸꾹질을 멈추게 하
는 것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물을 가지러 가려면 정단을 일으켜 세워야 하기 때문
이다. 비록 정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자꾸 다리를 휘감아서 흥분을 불러오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가운 아래 다리로 느껴지는 정단의 풍성한 머리카락의 느낌이 사빈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사빈은 다른 방법을 사용해 딸꾹질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하고 정단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다 갑자기 정단의 양팔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정단의 가까이로 고개를
숙여 아무 표정 없이 정단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단은 갑자기 몸이 일으켜지고 입술이 마주 닿을 정도로 사빈의 얼굴이 다가오자 너무 놀
라 '헉'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가운 사빈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 왜.. 왜요? "

" .... "

정단은 입술이 곧 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 사빈때문에 긴장하고 있었고 사빈은 무슨 생각인
것인지 계속 차가우리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정단을 마주봤다. 그렇게 한동안 그 상태로 둘
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몇 초가 흘렀을까... 정단에게는 꽤 길다고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 사빈이 한쪽 입
술을 올려 미소지으며 말했다.

" 멈췄지, 딸꾹질..."

사빈은 자신이 정단의 딸꾹질을 멎게 해줬다는 사소한 것에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는 듯 하였다. 그러나....

" 멈춘 거지? 이제!!! 안하.."

- 딸꾹!!!!

정단은 사빈의 웃고 있는 얼굴을 바로 코 앞에 대고 다시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 류정단!!!! "

사빈은 또 다시 그 큰 눈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딸꾹질을 연발하는 정단이 딸꾹질로 인
해 가슴이 퉁기는 충격을 덜 받도록 정단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 왜 안 멈추는 거야... 도대체... "

그렇게 딸꾹질을 한 것이 한 5분 정도 지나서일까... 사빈이 안고 있는 정단의 몸이 축 쳐지
면서 이제 딸꾹질도 하기가 힘든지 끅끅대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디서 들은 소리
인지 힘없는 목소리로 칭얼대었다.

" 히잉.. 딸.. 꾹질.. 딸꾹 -!! ... 딸꾹질.. 배..액번.. 하..면.. 죽느.. 흑!! 다고 했..는데..흑.."

' 뭐? 배액번??? '

사빈은 온몸에 힘이 빠져서 칭얼대는 정단을 끌어안으며 정단이 자신보다 얼마나 어린아이
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어디서 듣고 온 것인지...

" 류정단... 당신 벌써 백번도 넘게 했어... 그게 사실이면 이미 죽었을걸... "

사빈은 어느 순간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어린 아이 같은 정단을 끌어안으며 한숨 섞인 목소
리로 말했다.

" 저..ㅇ..말요...? "

사빈은 너무나 귀여운 아내를 쓰다듬으며 이번엔 은근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 정단아... "

" 흑.. 네?.. ㄲ.. "

" 딸꾹질.. 멈추게 해줄까? "

정단은 사빈의 딸꾹질을 멈추게 해준다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들어 사빈을 바라
보며 정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까와는 반대로 사빈이 정단을 뒤로 눕
히고 그 위로 올라가 정단의 가슴 정가운데를 손바닥으로 지긋이 눌렀다.

" 이번엔 확실히 멈출 거야.."

그리고 사빈의 말 뒤에 이어져 나오던 정단의 딸꾹질은 사빈의 입술에 막혀 이어질 수 없었
다. 사빈의 혀는 정단의 입술로 파고들어 정단의 입안을 훑었다. 그 짜릿한 느낌에 정단이
살짝 혀를 들어올리자 사빈의 혀가 바로 정단의 혀를 감아 올렸고 정단은 사빈이 평상시에
는 잘 하지 않는 깊은 키스에 호흡을 맞출 수가 없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점잖은 키스에만 익숙한 정단으로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
만 사빈은 그런 정단과는 상관없다는 듯 도망다니는 정단의 혀를 잡아 자신의 입안으로 빨
아들이고 계속 진한 키스를 하였다. 그런 사빈의 키스가 계속되자 정단은 자신이 딸꾹질을
계속 하고 있는지 멈췄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하다가는 정말 숨이 끊어질 것이라 정단이 느낀 순간 사빈이 물러났다.
정단의 나른한 눈에 자신의 입술 사이에서 빠져 나온 것이 분명한 사빈의 촉촉한 혀가 보였
다.

" 이번엔...멈췄지? "

정말이지 딸꾹질 대신 키스로 인해 막혔던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이번엔 정
말로 칭찬받고 싶다는 듯 자랑스러워하는 사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역시 숨을 참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군! "

**사라진 이야기 No.2**

" 다 씻었어? "

사빈은 정단이 욕실에서 나오자 이불을 들추며 이불속으로 정단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었다.
정단은 사빈의 빨리 들어와서 누우라는 듯한 행동에 스킨, 로션 바르는 것도 생략한 채 냉
큼 사빈이 들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왜 아직 안 주무세요? 피곤하시잖아요... "

사빈은 갓 샤워를 마쳐서 발그레해진 정단의 뺨을 쓰다듬으며 정단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 음... 별로 피곤하진 않아. "

사빈은 정단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얼굴을 마주보고 누워 계속 정단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하지만 정단은 그런 사빈의 시선에 어찌해야 할바를 몰랐다.

그가 바라본다고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의 눈을 마주보고 있을 수도 없
었다. 그래서 시선을 그의 가슴께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빈은 정단의 젖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정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의 눈빛으로 사빈을 쳐다보았다.


" 왜... 왜 그렇게 봐요..? "


그런데 그런 정단의 행동이 사빈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토끼같기
도 하고 고양이같기도 한 정단을 마치 애완동물 다루듯 쓰다듬던 사빈은 살며시 고개를 숙
여 '쪽'소리가 나게 정단의 입술에 뽀뽀하였다.

갑작스런 뽀뽀에 정단이 놀라며 고개를 뒤로 튕기자 사빈은 한번 장난스럽게 웃고 정단의
입술을 혀로 가볍게 핥았다.

사빈이 입술을 핥자 간지러웠던지 정단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긁었다. 그러자 사빈은
정단의 작은 손을 잡아 손가락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 사..사빈씨!! "


정단은 얼굴이 빨개지며서 사빈을 불렀다.


" 왜..."


그러나 사빈은 정단의 손가락을 물고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사빈씨!!! "


하지만 정단이 조금 소리를 높여 부르자 정단의 손등에 진하게 키스하고 나서 정단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 왜.... "


" 부...불 꺼야지요... "


정단은 사빈이 손을 잠시 놓자 불을 끄기 위해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빈은 일
어나려는 정단을 붙잡아 다시 눕히곤 자신이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 다시 정단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정단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사빈이 정단의 몸을 쓰
다듬으면서 키스하려고 하자 정단을 그를 밀어냈다.


" 안돼요... "

사빈은 키스를 하려고 해도 고개를 이리저리로 돌리며 입술을 피하는 정단이 계속 자신의
손길마저 피하려고 하자 정단의 몸을 누르고 위로 올라타버렸다.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

좀처럼 잠자리에서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정단이기에 처음으로 정단에게 거부당
한 사빈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 지금 12시가 넘었어요.. "

" 그런데? "

사빈은 12시가 넘은게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 당신 아침에 또 일찍 나가실텐데.. 빨리 주무셔야죠.. "

" 으응? "

정단은 사빈이 새 프로젝트 때문에 피곤해 보이자 일분 일초라도 그가 휴식을 더 취하길 바
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단의 불안한 마음이 사빈과의 거리감을 갖도록 했다.

오후부터 내내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정단은 왠지 사라지지 않는 불길한 예
감을 가지고 사빈에게 안기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사빈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정단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턱선과 목덜미에 자잘한
키스를 했다.

그러나 정단도 이번에는 사빈의 뜻을 따를 의양이 없다는 듯 자신의 얼굴에 타액을 묻히고
돌아다니는 사빈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 다...당신... 정말... "

의외로 힘이 들어간 정단의 공격에 고개가 꺽여버린 사빈이 정단을 내려다보며 힘겨운듯 말
했다.


" 정말이지.. 오늘은 그냥 자고 싶어요! "


사빈은 웬만하면 순종하는 정단이 처음으로 싫다고 하는 말에 한번쯤 양보해 줘야겠다고 생
각했다.


" 알았어.... 하지만.... "


사빈은 자신의 포기한 듯한 말투에 경계심을 늦춘 정단의 몸을 우왁스럽게 끌어안고는 기습
적인 키스를 하였다.

하루종일 초조함과 싸워서 그런지 정단의 몸을 안고 달래고 싶었지만 정단이 싫다고 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은 없었다. 단지 키스로 정단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자신의 초조함을 무력하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정단은 기습적이고 공격적인 키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른 때와 다르게 비협조
적으로 사빈을 대하고 있었다. 사빈이 아무리 혀를 찾아도 요리저리 피하기만 할뿐 사빈이
원하는데로 해주질 않고 있었다.

급기야 정단이 약간 세게 사빈의 혀를 물었지만 사빈은 약간 찌릿한 아픔은 있었지만 고집
스럽게 정단의 혀를 찾아 휘감아 자신의 입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정단이 또다시 거세게 도리질치며 사빈을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 정단아... 키스만 할거야.. 키스만... 이것도 안된다고 못해...키스는 내 맘대로 할거야... "


사빈은 정단이 힘을 주어 어깨를 밀어내는 바람에 입술이 떨어진 사이 정단에게 자신의 뜻
을 확실히 말하였다.


" 그러니까.. 제발 당신 남편한테 키스는 하도록 허락해달라고..."


키스만 했다는 말에 정단도 안심을 했는지 좀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사빈의 입술에 살며시
입술을 벌려주었다. 사빈도 좀전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키스를 하며 정단의 입술을 쓸어 주
었다. 그러다 살며시 혀를 말아 넣으며 깊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약간씩 사빈이 각도를 바꾸면서 조금 더 깊게 키스를 하자 정단이 사빈의 목덜미로 손을 들
어올려 사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 정단의 작은 터치에 사빈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분을 느끼면서 달콤한 키스도 여기서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끌었다
가는 정단이 싫다고 해도 자신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아아.. 하지만 아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빈이었다.

사빈이 정단의 입술에 베이비키스로 진한 키스를 마무리했을 때 사빈도 정단도 얼굴이 발갛
게 달아오른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빈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사빈의 한 손은 정단의 가
슴 위를 돌아다니고 있던 것 같다. 아직도 움직임을 멈추지 못하고 정단의 한쪽 가슴을 만
지작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데 왜 안 멈춰지냔 말이다...

그 멈추지 않는 손에 대해 정단이 뭐라고 항의의 말을 하려고 하자 사빈이 얼른 손을 떼고
정단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말했다.


" 알아.. 그만.. 이제 안 만질게... "


그래도 정단이 뿌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자 사빈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정단을 가
슴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사빈이 또 손을 대자 정단은 몸을 틀며 사빈에게 안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 알았어..알았어..자자구.. 자!!"


" .... "


" 아.. 하지만 만지고 싶은 걸 어떡하냐고!!!!! 젠장.. 당신도 똑같이 나 만지면 되잖아!!! "


사빈은 심술이 나서 그런지 정단의 몸을 거칠게 끌어당겨 조금은 세게 정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됐지! 됐지!! 잔다고.. 자!!! "

사빈은 자신의 아내에게 맘대로 손도 못대는 오늘밤을 한탄하며 내일은 확실히 정단을 괴롭
혀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단을 재웠다.
************END****************



<끝>





댓글 쓰기

 
Copyright © 2014 SM 소설 Share on Blogger Template Free Downl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