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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SM소설, 수위소설) 바닐라 클럽

#"Story" 태그로 다른 소설들도 검색이 가능합니다.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바닐라 클럽'


1장

5월 3일. 내 생일이며, 회사에 사표를 내던진 날이었다. 동시에 무료함에 지친 운명이 내 멱살을 와락
거머진 날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날 아침, 동료들보다 일찍 나와 실장의 책상에 사표
를 곱게 올려 놓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동안 내내, 종종 꿈꾸 어 온대로 기세 좋게 실장의
얼굴에 사표를 던지지 못했나 후회하고 있었다.
실장 곽 재은. 곽 실장은 뉴욕에서 나고 자라 대학원까지 마친 후 워너 브러더스 사 광고담당으로 근무
하다 특채 된 케이스로 서른 둘에 기획실장 자리를 꿰어 차고 앉았다. 곽 실장은 미국 물을 먹었다면서
도 회사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곽 실장 앞에서는 사생활이 용납되지
않았다. 곽 실장은 명쾌한 논리와 화려한 화술로 직원들을 꼼짝 못하게도 했을 뿐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슬슬 눈치를 보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곽 실장은 누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모와 탄탄한 아랫배와 쭉 빠진 다리를 가
진데다가 나보다 키가 컸다. 당신이라도 곽 실장 앞에 서면 주눅이 들 게 분명하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가던 걸음을 멈춰 화장실로 꺽어 들어갔다. 그냥 이대로 가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내 발길을 돌려 놓
았다. 나는 티 하나 없이 닦여진 거울 앞에 서서 노트북 가방을 매고 있는 나를 들여다 보았다. 거리에
서 만나는 그렇고 그런 넥타이 부대원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곽 실장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솔직히 나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다. 평균 이상이다. 곽 실장, 아니다. 사표를 던졌으니 곽 재은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페미 니스트들은 곽 재은이 여자기 때문에 내가 자격지심에서 사표를 내던졌다고 생
각할 가능성이 높다. 오해는 마라. 나는 성에 차별을 두지 않는 사람이다. 곽 재은 앞에만 서면 내가 쪼
그라든다는 느낌이 정말로 나를 미치게 하였 다. 곽 재은은 내가 꿈꾸어 온 완벽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도 완벽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간혹
있다. 곽 재은 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사무실로 또각또각 걸어와 턱을 약간 쳐든 채 나를 내리깔 듯
쳐다본 곽 재은의 출근 첫 날 이후로 곽 재은은 내 모든 스트레스 의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곽 재은을 비난할 뜻은 없다. 나만 특별히 못살게 군 적이 없음을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도 있다. 곽 재
원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는 가시밭길을 걷듯 고통스러웠다. 몇 번이나 혼자 술을 마시면
서 곽 재은은 완벽하지 않다를 외쳐도 보았지만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곽 재은은 한 치의 실수
도 없었다.
[곽 재은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에요. 알고보면 모두 거기서 거기라구요.]
아나이스가 그렇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곽 재은을 보면 그렇게 말 못할 걸요?]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잔으로 손을 뻗던 내 눈에 아나이스의 대답이 들어왔다.
[병이로군요.]
절로 콧방귀가 뀌어졌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에 자판을 두드렸다.
[완벽주의자가 되겠다는 게 병이라면 세상에 병 아닌 게 어딨습니까?]
[......]
아나이스는 마침표를 정확하게 여섯 개를 찍었다. 내가 막 자판 위에 얹어 두었던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데 아나이스가 글자를 보 내왔다.
[그래서 결국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에서 나와 버렸단 말이네요. 처량한 최후네요.]
나는 무서운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다.
[무슨 소립니까? 화장실 휴지통에 일회용 컵이 있더란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똥을 싸서 곽 재은의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려 놓고 왔습니다.]
물론 내 말은 뻥이었다. 사실 나는 거울만 쳐다보다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동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 계단을 이용했다.
[후후.]
아나이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후후라뇨?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게 중요한 사건인가요? 어쨌든 당신처럼 재미있는 사람
을 만나게 돼서 반갑네 요. 다음에 봐요.]
아나이스는 순식간에 대화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봄꽃들로 둘러싸인 종각이 보이는 사이버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나는 다시 외 톨이 신세가 되었다. 나는 아나이스에게 아무 것도 물어본 것이 없었다. 아나이
스의 질문에 대답만 했다. 왜 이런 시간에 통신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 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온 길이라
는 말을 꺼냈다가 그만 흥분해서 내 얘기만 하다 말았다. 그래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끊이지 않고 얘
기를 했는데... 인연이 없나보다, 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하루에 똑같은 사람을 그것도 우연히 피씨 통
신 대화방에서 만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나이스를 불러낼 작정으로 궁상을 떨었다. 내
가 있던 곳은 홍대 근처 사이버 카페였고, 날씨는 죽여줬다.
[그럼 친구를 불러요. 시간도 많잖아요?]
그 말에 김이 팍 빠졌다. 그 말을 듣고 시계를 보니 4시 25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구 불러낼 만한 사
람이 있나 잠깐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시간 낭비만 하고 말았다.
[이런 기분으로 만나봤자 술만 퍼마시게 될테고... 차라리 이렇게 얘기나 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안하네요. 전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나는 아나이스가 또 작별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질까봐 재빨리 손가락을 놀렸다. [여긴 자주 오세
요? 대화방 말입니다. 자주 못보던 아이디라서요.]
그 질문에 아마도 아나이스는 피식 웃었을 것이다.
[여기 터줏대감이신가 보네요. 저는요,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인터
넷 할 것 없이 다 돌아 다녀요.]
아나이스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고 더 빨리 자판을 쳤다.
[대단하시네요. 근데 누굴 찾으십니까?]
[이제 호김심이 발동하는 모양이지요? 어떤 때는 호기심은 위험하기도 하죠. 농담이 아니에요. 사실 저
도 제가 찾는 사람을 아 직 몰라요.]
나는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도대체 아나이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죠? 전 어디에서나 아나이스에요.]
[잠깐만요!]
그러나 나는 또 아나이스를 놓치고 말았다. 아나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화방을 빠져 나가 버렸다.


2장 정확하게 7시에 텔레비전이 켜졌다. 7시 뉴스 시그널이 내 고막을 찢을 듯 때렸다. [제기랄.]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리모콘을 찾았다. 밤 4시까지 채팅을 하다 잠들어 좀체 눈이 떠지질 않았
다.
[이러다 지각하는 거 아냐.]
리모콘의 서늘한 느낌이 손 끝에 닿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참, 사표를 냈지.]
나는 실없이 실실 웃으며 리모콘을 텔레비전 쪽으로 향했다. 전원 단추를 누르자 텔레비전은 텅하는 소
리를 낮게 내며 꺼졌다. 마치 서부의 총잡이처럼 리모콘 끝을 후 불고는 리모콘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잠? 머리가 뻐근하고 눈이 시렸지만 더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자면 되는데 무슨 잠이 오겠나. 나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아주 천천히 침대를 빠져 나와
컴퓨터로 가 전원 스위치를 꾹 눌렀다. 위잉 소리를 내며 글자들을 뱉 아내는 컴퓨터를 뒤로 하고 씽크
대로 갔다.
나는 서울 변두리 동네 중에서도 지대가 가장 높은 동네에 있는 원룸형 아파트에 살았다. 오르락내리락
하기가 힘들긴 하지만 내 돈으로 마련한 보금자리인데다가 공기도 맑고 창 가에 서면 관악산과 동네 전
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주전자 뚜껑이 호루라기 소리를 내서 얼른 달려갔다. 코 끝으로 풍겨
오는 구수한 커피향은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룬 후 회사 자 판기에서 빼 마시는 커피향과 비길 게 아니
었다. 머그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마우스를 끌어당겨 전자 메일을 확인하려고
통신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천리안부터 하이텔, 나우누리까지 빙 둘러보는 이 일은 회사에 다닐 때도 출
근하자마자 하는 일이었다. 천리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다는 메시지가 나를 반겼
다. 지난 새벽에 대화방에서 만난 누군가에게서 온 편 지겠거니 생각하며 편지 읽기로 들어갔다. 아나이
스가 새벽 2시 경에 보낸 걸로 되어 있었다.
[아나이스?]
내 머리를 의심하지는 마라. 나는 지난 새벽에만도 대화방에서 8명을 만났다. 낮에는 12명 정도를 만났
다. 혹은 더 많을지도 모 르겠다. 특히 천리안에서는 대화방에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아이디와
다른 별명을 쓰기 때문에 아이디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다음에 다시 만나도 별명을 바꾼다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일단 아나이스와의 대화를 갈무리 해 둔 파일을 찾아 보았다. 나는 늘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
보통 대화를 시작할 때 갈무리를 시작하는데 나중에 상대의 아이디를 파일명으로 하여 내 자료실에 잘
정리해서 보관해 두었다. 다행히 anais.cap와 anais1.cap로 된 파일이 있었다. 누군지 희미하게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anais.cap를 화면에 띄워 한 줄을 읽고서야 확실히 누군지 알 수 있
었다. 왠지 모르게 야릇한 느낌을 주는 여자. 아나이스가 스스로 여자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말투나 느낌
으로 미루어 여자 행세하는 남 자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통신에서 갈고 닦은 내 직감과 경험이
틀렸다해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내게 온 편지는 무조건 읽어보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읽는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편지는 간단했다.
[아나이스에요. 누굴 죽도록 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혹 누굴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답
장 주세요.]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했다. 아무리 통신을 통해 만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황당한
편지를 보내도 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통신에서의 만남에도 예의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아나
이스는 처음 만났을 때도 안녕하세요라고 하지 않고, 지금 뭐하고 있어요라고 물어 봤다. 다음 번에는
뭐랬더라. 뭘 그렇게 헤매고 있어요, 뭐 이런 식이었다. 그건 좋다고 쳐도 헤어질 때 한 번도 제대로 인
사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나이스의 편지를 저장해 둔 후에 입맛을 다시며 편지 쓰기로 들어갔다. 온 편
지에는 꼭 답장을 해 준다는 것도 내 원칙 이었다. 나도 간단하게 답장을 썼다.
[그런 적 없음.]
이렇게 써 놓고 나는 혼자 쿡쿡 웃었다. 아나이스가 내 편지를 보면 얼마나 황당할까 싶어서였다.
[다행이군요. 내가 찾던 사람이 가져야할 조건 중 하나는 가진 셈이니까요. 오늘 아침 아홉시에 대화방
에서 기다릴게요.]
인터넷에서 일간지들을 읽고 나와 아침을 달걀 후라이로 떼우고 하이텔과 나우누리를 둘러 천리안으로
돌아갔을 때, 아나이스의 짤막한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때가 8시 근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9시에 아나이스가 나타났다. 나는 대뜸 말했다. 아나이스는 재빨리 되물었다. [왜요? 제가 뭘
어째서요?]
왜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느냐, 당신 그렇게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냐 하고 따끔하
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 무 째째한 것 같아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아무 얘기도 않고 갑자기 사라져서 그래요?]
나는 뜨끔했다. 그러나 내 손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네.]
[음...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이해하세요.]
말하고 싶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양미간을 찡그리
며 자판을 두드렸다.
[사정이 있다니 어쩝니까? 할 수 없는 일지요.]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혹시 사랑은 해 본 적이 있어요?]
또 뜬금 없는 말이 화면 위에 튀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사랑 타령을 하는 걸로 봐서 고
등학생이거나 중학생일 듯도 한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최소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것 같 았다.
성인이 확실하다면 실연을 당했든지 컴퓨터 섹스나 하러 다니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컴퓨터
섹스, 줄여 컴섹을 하 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나이스를 떠 보았다.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겁니까?]
아나이스는 내 반응에 온 신경을 세우고 있었는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어떤 거든 좋아요.]
사랑이라... 너무 광범위한 얘기였다. 내 뇌는 정신없이 사랑과 관련된 기억들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오래지 않아 뇌가 녹슨 기억 하나를 툭 던져 주었다.
[대학 시절에 같은 과 여자 친구를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후엔 사랑하
는 여자가 없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자를 많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랑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채팅하는 게 부담도 적 고 여러 여자를 만날 수 있는데 굳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 섹스도 해 봤겠네요?]
아나이스가 본색이 슬슬 드러내는구나 싶었다.
[컴섹도 과히 나쁘진 않지.]
내 숨이 천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해 봤습니다. 그쪽은요?]
대답하기 곤란한지 아나이스는 좀 망설였다.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처지이긴 하지요. 결혼했거든요.]
아나이스의 대답에 온 몸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유부녀는 처음이었다. 유부녀와 유부남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가 한동안 유행한 후로 유부녀의 성에 대해 농담삼아 얘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바로 내 앞에
유부녀가 나타날지는 몰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예.]
설마, 하는 생각으로 자판 위에 손을 내버려 두고 있는 나에게 아나이스가 말했다.
[지금 컴퓨터 섹스같은 걸 하자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원했다면 굳이 못할 이유도 없지만요. 하지만 때
가 아닌 거 같아요. 전 에 내가 말했죠. 난 사람을 찾는다구요. 정말이에요. 내게 꼭 맞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당신이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난 지금 무척 조심스럽거든요. 내게 좀 더 진지
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날 아침부터 점심까지 전화가 불이났다. 동료 상규는 열을 내면서 돌아오라고 부탁했으며, 다른 회사
몇곳에서도 전화가 왔었다. 그러나 곽재은이 있는한은 회사를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점심 때쯤 되
어서 곽 재은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곽 재은은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로 간단하게 그러나 위엄있게
말했다.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 본 다음에 내게 전화 해요.]
나는 잔뜩 얼은 채 곽 재은의 말을 들었다. 곽 재은이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
았다. 아주 몹쓸 짓을 저지르다 선생님한테 들킨 학생처럼 바짝 긴장된 온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
다. 나는 결국 곽 재은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마른 침을 어렵게 꿀꺽 삼키고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걸 내 의지라고 해야 할까.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동작이 입
력된 로봇처럼 움직였다. 몇 번이나 얼굴을 씻고 손을 씻었다. 머리도 두 번을 감았다.
[가끔은 있죠, 아주 예쁘게 차려 입고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가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거기엔 정
말 아무 것도 없어야 해 요. 사람도 별장도 요트까지도요. 꼭 뭔가가 있어야 했다면 새하얀 페인트로 칠
해진 나무 벤취가 좋겠어요. 유치하죠?]
나는 네라고 자판을 두드릴 뻔 했다. 아침에 아나이스와 약속한대로 13시에 대화방에서 만났다. 이 만남
이 끝나면 바로 회사로 가려고 옷을 다 차려 입고 있던 터라 아나이스의 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뇨.]
아나이스의 말들이 화면 위에 개미처럼 분주하게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아예 팔짱을 낀 채 그 말들
을 눈에 집어 넣고만 있 었다.
[그 무인도에는 아주 높은 절벽이 있었으면 해요. 절벽에는 바다새들의 둥지가 있어서 바다새들이 아득
하게 내려다 보이는 파도 를 배경으로 힘차게 날아 다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아까 말
한 벤취말인데요, 그게 절벽 끝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거에요. 가만히 벤취에 앉아서 석양이 지기를 기
다리고 있다가 수평선이 빨갛게 물들 때 일어나요.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조금씩 사라지다가 제 몸을 모
두 감출 때, 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지요. 아마도 내 귀에는 바다새의 울음 소리와 파도 소리밖 에
들리지 않을 거에요. 참, 내 몸이 떨어지면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낼지도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쉬지도 않고 하나 싶었다. 아나이스가 잠깐 손을 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가 봐야 합니다. 그 뒷 얘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이스는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타를 쳤다. [잔간만요. 얘기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럼 얼른 해 보십시오.]
나는 시선을 아나이스의 말이 뜰 부분으로 모았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질 때요, 내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기가 막혀 코로 푸푸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어느새 내 손은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깐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했다면서요?]
[그랬죠. 쭉 없다가 나를 밀어줄 때 나타나면 되잖아요.]
[그게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후후. 그러니까 상상이지요. 현실 속에서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뚜르르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쪽이 찾고 있는 사람이 절벽에서 그쪽 등을 밀어줄 사람이란 말입니까? 데이빗 카퍼필드 같
은 마술사도 현실 속에 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을텐데요.]
아나이스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거나 뒤바뀔 수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게 되요. 이해하겠어 요?]
[그러니까 좀 이해를 해 줘. 지금 내 형편이 그렇게 안된단 말이야.]
.................
[회사 일은 다 정리된 모양이죠?]
아나이스를 다시 만난 건 저녁 무렵이었다. 물론 약속도 없었다. 대화방 대기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나이스가 나를 초대 했다. 낮에 만났을 때 아나이스는 사표낸 사람한테 뭐가 그렇게 급한 일이 있냐며
핀잔을 주었었다. 그 바람에 처리하지 않고 나온 회 사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했다고 둘러댔다.
[아닙니다. 회사 가는 길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인연을 자를 땐 칼같이 냉정해야 했다, 뭐 이런 거였습
니다.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둬서야 되겠습니까?]
그날 가는길에 갑자기 칼이 갖구 싶었다. 물론 그 칼은 인연을 자르는데 쓰는 상징적인 칼이 아니라 날
이 시퍼렇게 선 진짜 칼을 말했다. 끝이 아주 날카롭고 길다란 칼. 맞다, 회칼 말이다. 그걸로 곽 재은
의 배를 푹 찔러 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내 심정을 제대로 읽었다면 곽 재은이 싫어서라기 보다 무서워
서 찔러 버리고 싶었다는 뜻인 줄 눈치챘을 것이다. 더 이 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곽 재은을 이 세
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 그러나 내 공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갈 필요 도 없었다. 내 칼에
맞은 곽 재은이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하다 곧 눈을 까뒤집으며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자주 대화방에 나타나시는 거 아닙니까? 결혼한 거 맞습니까?]
나는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실례였으나 아나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가정부가 있거든요. 집에서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지요.]
가정부? 내심 놀랐지만 태연하게 되물었다.
[가정부까지 두신 분 취미 치고는 좀 어울리지 않는 거 아닙니까?]
[뭐가요?]
[채팅 말입니다.]
[후후. 그렇지요? 내가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사람을 찾으려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또 그 사람 찾는다는 소리.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나도 모른다고 했을텐데요?]
[그렇담 아직까지는 못 찾았다는 말이군요.]
[예.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 머지 않아 찾게 되겠죠.]
나 역시 많은 여자를 통신에서 만나고 있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나이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음, 내 말에 속이 상한 모양이네... 그러지 마요.]
나는 흠찔했다.
[무슨 오해를.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그랬습니다. 저도 통신에서 만나는 여자가 많은데요 뭘. 채팅이 이
래서 좋은 거 아닙니까? ]
아나이스는 빨리 움직였다.
[별로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다른 여자들 만나지 마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고쳐 말하겠어요. 아주 기분 나쁘니 절대 다른 여자들 만나지 말아요. 알았죠?]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궁리하였다. 다른 여자들과 계속 접촉하겠다면 아나이스는
미련없이 떠나버릴 분위 기였다. 최근에는 아나이스처럼 지속적으로 연결된 여자가 없었다. 버리자니 아
깝고 그렇다고 붙잡기에는 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 [대신 그쪽도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을 만나면 안
됩니다.]
정당한 거래니 아나이스가 받아들일 걸로 봤는데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건 곤란하네요. 내가 여러 남자를 만나는 건 내가 찾는 남자가 꼭 이 남자다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
요.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남자도 아니잖아요.]
나는 아나이스의 말 사이에 내 감정을 끼워 넣었다.
[음...]
아나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당신만 만나고 있겠어요. 난 시간이 별로 없어요.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특수한 상황
이니까 이해하세요.]


[우리는 지금 특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거 잘 알면서 왜 이래?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냐구? 지
금이라도 어서 나와요.]
곽 재은의 말투는 항상 이랬다. 앞에 하는 말은 모두 반말인데 끝에 가서는 존댓말을 했다. 곽 재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내 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곽 재은의 전화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그러고보
니 곽 재은과 전화로 얘기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전화 목소리로만 따지자면 곽 재은은 몰상식하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 되먹은 여자였을 뿐이다.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수화기를 입에 바짝 대고
말했다.
[이보세요. 곽 재은씨. 누구한테 반말을 찍찍거리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가 당신 부하라고 생각하나 본
데, 냉수 마시고 속 차리 슈.]
수화기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곽 재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어... 정말!]
내친 걸음이었다.
[정중하게 나와주십사 해도 나갈까말까 하는 판국에 어디다 소릴 질러댑니까? 당신 집에서 그렇게밖에
못 배웠습니까?]
[아니... 점점. 야!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 버렸다. 나는 흥분해 흐트러진 곽 재은을 떠올리며 마치 컴섹을 할
때 같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꼭 곽 재은이 강간당해 찢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채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가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해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보물이나 되는 양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전화가 아니었다면 절대 곽 재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게다 . 기분이 째졌다.
[좋아요. 결심했어요.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지도 다른 누군가를 찾아다니지도 않겠어요. 대신
당신이 내가 찾는 그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해요. 분명히 당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될 거에요. 그래도
좋아요? 오늘 안으로 대답해 주세요. 기다리겠 어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대화방을 빠져 나갔던 아나이스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아나이스가 어떤 사람을
찾는 건지 감을 잡을 길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감당하기 힘들다고 스스로 단정을 지었을까?
정부가 되어 달라는 건가? 아님, 남편 뒷조사를 해 달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남편의 재산을 가로채는
걸 도와 달라는 걸까? 영화에 나올 법한 얘기는 다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도 많은데 뭘...]
나는 아나이스의 편지를 저장해 둔 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얘기는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말해 보십시오. 오늘 안으로 말입니다.]


[오늘 안에 결정을 내려. 내일이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아. 내 말 알겠어요?]
나는 멍청하게도 집에 꼼짝 말고 있으란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곽 재은의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을 보고
야 알아 차렸다. 곽 재 원은 현관 문을 열어주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나는 또 주눅이 들고 말았다.


곽 재은은 검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맥 라이언 스타일의 커트 머리. 작고 흰 얼굴. 연한 자주빛으로
칠한 도톰한 입술. 그린 듯 가는 눈썹. 잘룩한 허리를 강조하는 자켓에는 금박 단추 둘이 달려 있었고,
브이 자로 가슴이 깊게 패인 흰색 브라우스를 그 안에 입고 있었다. 무릎에서 한 10센티미터는 올라갔음
직한 짧은 치마는 엉덩이에 딱 붙어 있었다. 그리고 초록빛이 감도는 스 토킹과 검은 하이힐. 나는 잘
훈련된 웨이터처럼 공손하게 곽 재은을 간이 식탁으로 안내했다. 곽 재은은 고개를 쳐 든 채 방 안을 휘
둘러보며 걸었 다. 식탁에 달린 의자가 곽 재은의 엉덩이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여 걱정이 앞섰다. 곽
재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엉덩이 를 쓸어내리며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커피를 끓이려
고 가스렌지 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곽 재은이 불러 세웠다. [커피 마시러 온 게 아니야. 여기 앉아요.]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내가 당신 마음 모를 줄 알고 그래?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당신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다 나 때 문이란 거 알아. 그동안 괴로왔겠지. 하지만 우린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어. 당신이 지금 그런 내 경력에 먹칠을 하려고
하고 있어. 회사로 봐서도 그렇 고 내 개인적으로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인지 몰랐어. 어떻게 할 거야? 말 좀 해 봐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열쇠를 쥐고 있다는 뜻이네.]
곽 재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위행위를 하면서 나는 곽 재은을 떠
올렸다. 아니 곽 재은밖 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사이였으므로 얼마나
애증이 교차되었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좋아. 대신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거야. 알겠지요?]
그 말에 온 몸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길이 잘
든 노예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곽 재은을 올려 보았다. 곽 재은은 아주 천천히 길고 흰 손가락으로 자켓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새하얀 브라우스가 눈부셨다. 높고 뾰족한 가슴이 내 눈을 푹 찌르는 느낌이
었다. 곽 재은은 자켓 주머니에서 남보라빛 벨벳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꺼내 목에 둘렀다. 그 목걸이는
개나 고양이 목에 거는 것처 럼 곽 재은의 긴 목을 꽉 조으는 것이었다. 목걸이의 중앙에는 초록색 보석
이 박혀 있었는데, 에메랄드 같았다. 곽 재은은 자개처럼 여러 빛깔로 반짝이는 자그마한 브라우스 단추
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브라우스 안에 숨어 있는 브래지어 차
례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바로 곽 재은의 풍만한 젖가슴과 하늘을 향해 치솟은 분홍빛 젖꼭
지가 내 시야에 가득찼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허리띠만큼이나 얇은 보라색 브래지어가 곽 재은의
터질듯한 가슴 밑부분을 받쳐 올리고 있었다. 포르노에서 많이 보던 브래지 어였다. 곽 재은이 그런 걸
하고 있다는 건 완전히 충격이었다. 이미 내 성기는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곽 재은은 치마 속에서
브라우스 자락를 빼냈다. 나는 길고 움푹 패인 배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배꼽에서 치마의 아랫배는 대리
석 조각처럼 단단하고 미끈했다. 나는 허리에 대고 있는 곽 재은의 손과 아랫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성기는 터질 듯 딱딱해졌다. 그러나 곽 재은의 손은 치 마로 가지 않았다. 조급해진 내가 조심스럽게
곽 재은의 얼굴을 올려보는 순간, 곽 재은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얼굴에 침을 뱉았다.

바로 그때 나 는 소리를 지르며 사정을 했다. 나는 티슈를 꺼내 성기를 쓱쓱 닦아내며 컴퓨터 화면을 쳐
다 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투피스와 흰 브라우스를 젖힌 채 젖가슴을 드러낸 크리스티 톰이 생긋 웃고
있었다. 나는 크리스티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윙크를 해 주었다.
[크리스티, 네가 곽 재은보다 백 배는 나아.]
그러나 크리스티도 내 말이 입에 발린 소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는 내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누드 모델 중의 하나인데, 동양계였다. 같은 플레이보이지 출신인 누드 모델 이 성희가 좀 낫지
만 이 성희 홈 페이지가 없어지는 바람에 아쉬운 대로 크리스티를 내 연인으로 삼고 있었다. 크리스티의
누드 사진만 50장 가까이 모았다. 나는 데미 무어, 산드라 블록, 마돈나, 샤론 스톤에서부터 전 세계의
싸구려 포르노 배우의 누드까지 사진을 5,000장도 넘게 모 았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
는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거나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패션, 보석, 카페, 드라이브 코 스 등과 같은
정보를 모으는 따위의 일을 그만 두었다.
아무리 예쁜 여자라고 해도, 이를테면 미스 코리아니 슈퍼엘리트 모델이니 유명 배우니 하는 여자들을
트럭으로 실어준대도 나 는 관심이 없었다. 컴퓨터만 켜면 그보다 훨씬 예쁘고 죽이는 몸매를 가진 글래
머들이 그것도 올 누드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나 예외가 있었다. 꼭 한 번만이라도 곽 재은의 옷을
완전히 벗겨 놓고 침대에 꽁꽁 묶은 다음에 혁대로 마구 패 주거나 그 얼굴에 똥을 가득 싸 주고 싶었
다. 태어난 걸 저주하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왜? 곽 재은이 나보다 잘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브라우스까지밖에 벗기지 못했다. 그래도 엄청나게 진전된 것이었다.
그 전까지 곽 재은은 상상 속에서도 곽 재은은 젖꼭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슴을 졸이며
성기를 달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다행이네요. 당신이 모험을 하기로 결정을 내려서 반가와요. 계약이 성립된 걸
로 하죠. 당신은 이제부 터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야 해요. 그런 후에야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 되
는 거에요.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죠. 난 이런 말 잘하지 않지만,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싶어 말하
는 거에요.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아요. 그리고 기억해 두세요. 난 이제 아나이스가 아니라 카마에
요. 당신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 메시지를 전달할지 몰라요. 당신은 아주 낯선 사람에게서 혹은 뜻 하지
않은 장소에서 카마와 부딪히게 될 거에요. 내일 모레 정오에 당신에게 어떤 물건이 배달될 거에요. 나
중에 꼭 필요한 물 건 들이니 하나도 잃어 버리지 마세요. 그리고 혹시라도 지금까지 나와 한 얘기를 저
장해 놓았다면 다 지워 버리세요. 앞으로도 마 찬가지에요. 내가 보내는 선물을 빼놓고는 나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유는 나중에 얘기해 주겠어요. 꼭 이 에요.]
아나이스, 아니 카마의 편지는 밤 11시 42분에 발송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3장

다음날 새벽, 나는 주무대인 천리안을 떠나 카마 몰래 하이텔로 잠입했다. 내 천리안과 하이텔의 아이디
는 틀리니 카마가 알아 차릴 턱이 없을텐데도 조심해서 움직였다. 나는 하이텔 성인 클럽에 있는 대화방
으로 무대를 옮겨 놓고 거미처럼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하이텔에서 내 아이디는 멜 라니였다. 내
가 유일하게 남겨둔 여자 아이디였다. 시덥지 않은 남자들의 추파가 곧 줄을 이었다.
[아이, 튕기지 말고... 화끈하게 해 줄게.]
[다 알아. 너 굶주렸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갈테니까 어딘지만 말해.]
[잉, 누나. 나 좀 어떻게 해 줘요. 미치겠어요.]
[지금 쌀 거 같으니까 어서 와. 응?]
아무리 굶주렸기로서니 해도 너무 했다 싶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어떤 여자가 컴섹을
하러 다니는 여잔지 알 길이 막막했다.
내게 첫 번째 전환이 찾아온 것은 아이디를 여자가 쓸만한 아이디로 바꾸면서였다. 그때 아이디가 외국
여자 이름같은 프랑스 시인 이름 발레리였다. 내가 발레리로 아이디를 바꾼 건 도무지 여자들은 물론 남
자들에게서조차 메모가 오지 않아서였다. 가끔 내가 여자들에게 얘기 좀 하지 않겠다며 메모를 보내면
여자들이 메모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는 식의 얘기들을 했다. 대화방 대기실에 들어오는 여 자보다
남자 숫자가 몇 배나 많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나중에 남자란 사실이 밝혀진다해도 일단 말의 통로를 터
는 게 중요했다. 발레리로 바꾼 그날부터 메모와 편지가 봇물처럼 쏟아 져 들어왔다. 그렇게 내게 날아
든 메모나 편지들이 내 선생이었다. 저, 시간 있으면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부터 거 참 너무 빼지 마,
죽여줄 테니까 어서 내 방으로 와까지 별별 메모와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게중에는 여자 맞아요하며 조
심스럽게 말을 거는 여자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여자 행세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참 얘기를 재밌게 하다가도 갑자기 브래지어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 거들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 아스트리젠트가 뭐냐? 지금 바르고 있는 파운데이션 이름이 뭐
냐? 등 여자가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불쑥 던지는 거였다. 그럴 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
낌이었다. 이렇게 몇 번 당하면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여자 노릇
에도 이력이 붙어 왠만한 질문에는 거침없이 대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쪽에서 도리어 선수를 쳤
다. 그새 나는 아이디를 발레리에서 애너벨리로 바꾸고 새롭게 변신했다.
나는 눈이 벌게 가지고 여자를 사냥하러 다니는 남자들보다 여자들과 얘기하는 게 취미가 맞았다. 비록
여자 행세를 하기는 했 지만 그걸 핑계로 여자들의 섹스 경험같은 걸 얘기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제
감정을 못 이겨 늘어놓는 사랑 타령 같은 거야 들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컴섹이란 걸 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내가 만난 여자들 중 하나, 블루리본이 만난 지 한달 쯤 지났을 때쯤 조심스럽게 레즈 비언이
란 걸 밝히면서부터였다. 나는 놀란 빛을 숨기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이해해 주니 고마워요. 언니.]
블루리본은 22살의 대학생으로 정보학과에 다닌다고 했다. 그외에는 별로 자기 얘기를 한 게 없는, 그러
니까 내 기억 속에서도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여자애였다.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내가 대화방에 들어갈
때마다 대화방 대기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저, 언니...]
나는 블루리본이 보내온 글자 속에서 많은 감정의 굴곡이 느껴져 긴장했다.
[왜?]
[언니만 괜찮다면요, 만나고 싶어서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인터넷에서 레즈비언들이 섹스하고 있는 사진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금발이나 흑 인들 혹은 일본 여자들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늘 사진 속의 여자들이
진짜 레즈비언일까 아니면 연출에 의해 찍은 걸 까 궁금했다. 그런 사진들에서 레즈비언의 섹스를 적나
라하게 보아와서 블루리본의 성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 보다는 어쩌다 레즈비 언이 되었나가
궁금했다.
[언제? 혹시... 지금은 아니지?]
블루리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뇨. 지금이요.]
나는 얼른 시계를 봤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니니? 나 내일 일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거든. 나가기 좀 그런데...]
[아직 열두 시도 안됐는 걸요. 제가 언니 집 근처로 갈게요. 잠깐이면 되요.]
[꼭 얼굴을 봐야 되니?]
블루리본은 삐쳤는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걱정이 됫다. 블루리본이 이방저방 돌아다니면서 애너벨리가
남자라고 소문을 낼경우에는 애너벨리로 쌓아온 인연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처지였다.
[우리 집이 어딘지나 아니? 서울대학 근처야. 넌 어딘데?]
[휴---. 여긴 수유리에요.]
작전 성공이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렇기야 하지만요, 섭섭해요.]
나는 블루리본을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 됐지?]
[내가 뭐 앤 줄 알아요!]
블루리본의 퉁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렇다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미안. 그러면 어른으로 대할게. 이런 말 들어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마. 너, 있지? 어쩌다가 레즈비언
이 되었니? 사실은 나도 레즈거든.]
잠시 아무 말이 없던 블루리본이 입을 열었다.
[언니, 레즈 아니죠? 그런 질문이 어딨어요?]
블루리본은 팔랑팔랑 휘날리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게 블루리본과의 마지막이었고, 애너벨리도 끝
장났다. 그날로 블루리본 이 애너벨리는 레즈비언을 가장한 남자라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버렸다. 그 일
이후에 내가 알아본 바로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계기로 인해 되어
가는 거라고 했다 . 그러므로 어쩌다 레즈비언이 되었니 어쩌고하는 질문은 틀리지 않았다. 블루리본이
야 말로 레즈비언 흉내나 내고 다니는 여자 아니면 남자였다. 블루리본 때문에 동성연애자들, 특히 레즈
비언에 대해 정보를 꽤 습득한 나는 아이디를 페미니로 바꿔 본격적으로 레즈비언 노 릇을 하기 시작했
다. 레즈비언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나보다 엉성한 레즈비언 아류
들이 그 렇게 많은지는 몰랐다. 오빠 아이디를 빌려 쓴다는 녀석부터 아예 나처럼 여자 아이디를 쓰고
다니는 녀석까지 레즈비언에 관심이 있다며 접근하지를 않나 여자하고 하는 게 뭐가 좋아? 진정한 남자
맛을 보여줄테니까 만나자는 노골적인 녀석들까지 떼거지로 몰려 들었다.
녀석들은 내가 조금만 반응을 보이기만 해도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혼자 화장실 벽에 적혀 있음직
한 얘기를 하면서 아아 아아아, 음음음음음... 구역질 나는 신음 소리까지 곁들였다. 정말이지 진짜 레
즈비언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였다.
[진짜 레즈라면 지금 전화로 얘기해요.]
밀키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여자였다. 나는 그때 동성여(구)라는 별명을 쓰고 있었다. 올 게 왔구나 싶
어 숨이 턱 막혔다. 그 때까지 밀키웨이처럼 당당하게 전화로 얘기하자는 여자는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탈출구를 마련했다.
[전화하기가 좀 그러네요. 어머니가 잠 귀가 밝아서요. 옆에서 주무시거든요.]
밀키웨이는 서두르지 않았다.
[제 삐삐 번호를 알려드릴게요. 음성 메모를 남겨두세요. 그럼 믿을게요.]
그렇게까지 나오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럴게요.]
[내가 여기 적어놓은대로만 녹음해 줘.]
책상을 나란히 하고 있는 4년 후배 박 정연은 내가 내민 메모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뭔데요?]
[친구를 골탕먹이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이미 밀키웨이의 삐삐를 확인해 둔 상태였다. 밀키웨이는 삐삐에 자기 목소리 대신 보헤미안 랩소
디의 첫 부분을 녹음해 두고 있었다. 누굴 골탕 먹인다니까 마냥 좋은지 박 정연은 손을 바삐 움직였다.
[저, 페미니거든요. 메모 남기라고 해서 이렇게 연락드려요. 오늘 아홉시에 어제 만났던 거기서 기다릴
게요. 혹 못 오게 되면 제 삐삐로 연락주세요.]
박 정연이 내 삐삐 번호를 또박또박 읽는 걸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하기 전에 벌써 내
삐삐의 음성 메시지를 지우고 솔베이지의 노래 를 녹음해 두었다. 밀키웨이는 정확하게 밤 9시에 대화방
에 나타났다. 내가 믿음을 줘서인지 생각보다 말이 많아졌다.
[제가 페미니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요, 요즘 레즈 흉내를 내는 남자들이 많아서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걸랑요. 이해해 주 세요.]
[예.]
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페미니님은 파트너 있어요?]
나는 파트너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침묵으로 대답했다.
[없나 봐요. 전 언니가 있어요. 가끔 언니 친구들이랑 같이 모이거든요.]
그제야 파트너가 섹스 파트너 혹은 애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전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대학 후배였어요.]
[저런... 제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그게 부담스러우면 저랑 언니들 만나러 갈 때 같이 가든지요.]
[만나서 뭐하는데요? 전 여럿이 어울려 본 적이 없거든요.]
[남들 시선도 있고 하니까 대개들 그렇지요. 우린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만나요. 보통 대여섯 명이 모이
는데요. 거기서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아요. 다음엔 각자 알아서 하구요.]
[밀키웨이님은 파트너가 있다면서요? 처음 만나서 아무나 하고...]
밀키웨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는지 내 말이 중간에서 잘려 버렸다. [오해마세요. 짝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니까요. 어때요? 다음 모임 때 나올래요?]
[호출하세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상상만 해도 역겨운 짓을 하라고 나오라니...,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그날로 나
는 레즈비언 노릇을 끝내 버렸다.
며칠 후, 밀키웨이라며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내 삐삐를 울렸다. 그날 저녁 7시에 신촌 홍익문고 앞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그 곳으로 나가는 대신 삐삐 번호를 바꿔 버렸다. 나는 다시 남자 아이디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여자 사냥에 나섰다. 발레리와 애너벨리에게 접근하던 남자들의 수법을 그동안 충 분히 익혀
놓았기 때문에 컴섹할 여자를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여자를 구슬러 첫 경험이나 섹스에 대한 환
상 같은 걸 듣는 거나 흥분을 시켜주기 위해 인터넷에서 포르노 소설을 읽고 마치 내 가 겪은 것처럼 얘
기해주는 일도 석 달이 넘자 지겨워졌다. 그 석달 동안 내가 얼마나 포르노 스토리텔러로서 명성을 날렸
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다.
나는 컴섹계를 나와 진정으로 마음에 맞는 여자를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끈기와 절제가
필요했으며 덧붙여 매 너와 순발력과 유머가 겸비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사귄 여자가 수 십명은 족히
되었다. 그 중 몇몇을 호기심으로 현실 공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
도 만나는 족족 기대 이하였거나 거짓말장이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깨달은 건 가상 세계에서의 만
남은 가상 세계 속에서 끝내야 했다는 거였다. 가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현실 로 걸어나올 때는 정말
로 초라하고 볼품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게중에는 근사한 여자도 있겠지만 그런 여자를 찾으려면
엄청난 투자가 뒤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야...
하지만 운 이란 게 어디 믿을만 한 것인가? 그렇지만 얘기나 하는 건 괜찮았다. 하이텔 아이디를 멜라니
라고 해 놓은 것도 단지 그 이유였 다.


4장

[이번만 용서하겠어요, 멜라니. 내가 당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난 이미 당신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또 다시 약속을 어기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타격을 주겠어요. 내
말 명심해요. 카마.]
내가 벨 소리에 잠을 깬 시간이 12시 경이었다. 진한 노란색 조끼를 입은 청년이 현관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조그 만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풀자마자 메모지가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는데,
거기에 카마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 적혀 있었다.
[이런 처 죽일...]
점심을 동네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울면으로 떼우면서까지 하이텔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광이어서
가 아니었다. 내 생체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 몸과 정신에 세뇌된 시간 개념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계들은 다 쓸어 침대 아래에 던져 버리고 멍하게 컴퓨터 화면에
나온 낚시터 풍경과 낚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가끔씩 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관악산을 바라보
면서 눈의 피로를 푸는 게 고작이었다. 정작 내가 선택한 자리는 잔챙이들밖에 잡히지 않는다는 갈대 숲
사이였고, 한 시간이 넘게 한 마리도 낚아올리지 못한 상태였 다. 내가 원했다면야 벌써 수십 마리를 낚
았을 것이다. 미끼도 끼우지 않은 채 낚시대를 던져 두었으니 물고기가 낚일 리가 없었 다. 강 태공 흉
내를 내는 동안에도 내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뭔가가 내 머리를 꾹 누르고 있는 듯 불편하고 답답했
고 누가 내 뒤 통수에 딱 붙어 있는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사 일 때문도 아니었다. 곽 재은도
문제가 아니었다. 카마? 부인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 여자가 문제였다.
감시 당하고 있다는 느낌, 바로 그게 내 두통의 원인이었다. 카마의 하수인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미 두려움으로 변해버린 터였다. 감 시를 피하는 한 방
법으로 내가 택한 것이 낚시터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
까 말 했듯 회사의 구성원이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변신하기 위해 사회적 시간 감각을 흐트리고 재정돈
했다는 뜻도 들어 있었으니까.
곧장 가입/탈퇴 신청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멜라니의 탈퇴신청서를 냈다. 멜라니가 그동안 만들
어 놓은 여자 관계도 모두 반납하였다. 적장 앞에 꿇어앉아 항복하는 왕의 심정과 다를바 없이 참담했
다. 최단 시간에 탈퇴를 원했다는 주를 달아 탈퇴신청서를 쓰는 동안, 나는 한가지 유혹에 빠져 들었다.
카마를 통했다면 나 역시 카마처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누군가의
신상 정보를 쉽게 빼내고 그걸 이용해서 위협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불법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다는 건 불법이 아닐 것이다. 불법이라고 해도 좋았다. 카마가 나를 조사했듯 카마의 능력을 역이용해서
카마를 조사하게 된다면 피장파장이 될 테니까.
나는 천리안으로 들어가서 카마, 아니 아나이스에게 멜라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 카마의 화를 풀어주 려고 했다. 막상 편지 쓰기로 들어가 수신자를 쓰는 란에 아나이스라고 적었는
데 그런 아이디를 가진 회원이 없다는 메시지만 반 복되었다. 다른 통신회사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
터넷 메일 주소라는 게 피씨통신회사에 가입해야만 생기는 것이니 인터넷으로도 메일을 보낼 수가 없었
다.
[이런...]
카마와의 모든 끈이 두절되어 버렸다. 나는 한밤중에 사막 한가운데 버려졌다. 흙으로 된 관 속에 갇힌
꼴이었다.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그 공상에서 빠져 나왔다. 무슨 수든 써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을 시험해 보려고 해요. 당신에게는 힘든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게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해요. 당신이 벌써 약 속을 어긴 거 잊지 않았겠죠?]
팽개쳐 두었던 상자의 포장을 뜯으니 녹음 테이프가 들어 있어 틀었다. 카마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차
분해서 원숙한 느낌을 주 었다. 누구의 곡인지 모르겠지만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장중한 클래식 곡이 카
마의 목소리 아래 깔려 있었다. 짐작가는대로 말해보라면 바하나 그 시대의 작곡가들이 만든 바로크 음
악이 아닌가 싶다.
[오 진택이란 사람에 대해 알려고 들지 마세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위해 만
든 거에요. 당신이 시험 해 보면 알겠지만 그 카드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뒷 일은 내가 처리할테니 당
신 쓰고 싶은대로 쓰세요. 카드 뒷면에 사인 쓰는 란이 있죠? 오 진택의 사인은 당신 마음대로 만들어
요. 비밀번호는 육이삼사, 다시 말할게요. 육이삼사, 알겠죠?]
나는 카마의 말을 들으면서 테이프와 함께 들어있던 신용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모콘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 후 신용 카드를 눈 앞에 대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유효 기간이 2002년까지로 되어 있는 골
드 카드였다. 카드 모서리에서 까칠까칠한 느낌이 느껴질 정도로 사용한 흔적이 없는 새 카드였다. 도대
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대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신용 카드는 다 내버리세요. 그게 싫다면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날 때까지만 쓰
지 마세요. 난 당신이 뭘 좋아하고 어딜 잘 가는지 알아야겠거든요. 카드는 내 손에 없지만 카드 번호와
비밀 번호를 알고 있으니까 조회를 해 보면 당 신이 카드를 쓸 때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고, 뭘 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에요. 좀 기분이야 나쁘겠 지만, 어때요? 내 제안에 동의하
세요? 동의했다면 내게로 편지를 보내요. 새 주소 kama@sutra.com이에요.]
[점점... 경찰에 고소해 버려...]
그러나 내 손가락은 리모콘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다시 재생을 시켜놓은 후 카마의 새 인터넷
메일 주소를 메모했다. 정보는 어차피 누출된 것, 따져도 카마를 만나서 따지는 게 순서일 듯도 싶기도
했고 카마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었다. 나는 서둘러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카마의 제의에 대해 구체
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일단은 만나야했다는 생각 뿐 이었다. 내가 쓰는 인터넷 프로그램
은 네스케이프사의 네비게이터였다. 네비게이터에서 카마에게 편지를 썼다.
[황당하네요.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길래 신용 카드를 막 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남편 몰래 남편
이름으로 만든 거 아닙 니까? 저는 감시당하는 게 싫습니다. 카드도 필요없습니다. 사람 잘못 봤어요.]
여기까지 써 놓고서야 나는 카마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느날 불쑥 나타나서 나를 자기
손 안에 쥐고 뒤흔들려 는 여자.
[나에게 명령하고, 하지만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하지, 나를 농락하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얘기할 건 없
을 거 같은데, 나를 얕 잡아 보고, 얕잡아 본다고 하기는 좀 곤란한데, 나를 시험하고, 아직 시험한 건
아니지.]
내 속에 다른 내가 있어서 자꾸 카마 쪽으로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려고 머리
를 싸매면 편두통이 나 를 가로 막았다.
[어차리 이렇게 된 거 한 번 부딪쳐 보는 거야.]
나는 편지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편지 잘 받았어요.]
인터넷 메일을 보내고 채 30분도 안 되어 카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카마가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
는 사실에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건 카마가 이미 알아낸 내 신상 정보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테이프에서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카마의 목소리도 낯설지 않았다.
[너무 일방적이란 생각 안 드십니까?]
내 퉁명스런 말투에도 카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요. 좀 더 딱딱하고
건방지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렇잖아도 그렇게 얘기할 참이었다. 그러나 처음 통화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누구 놀리는 겁니까? 사람 가지고 장난...]
[그게 아니죠. 아예 반말을 하세요.]
카마의 목소리는 나를 놀리는 듯 생기가 넘쳐 흘렀다.
[왜 말이 없어요? 말 좀 해 봐요.]
나는 머쓱해져서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게 좀...]
[호호호. 괜찮다니까요. 내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래요?]
[이거 쑥스러워서, 원...]
[호호. 좋아요. 그럼 존댓말로 하세요. 됐죠?]
나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카마의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발랄한 목소리가 내 고막
을 간지럽혔다.
[내가 시험을 하겠다고 했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하지만 메모는 하지 마세요. 이틀
후, 오월 팔일이 되겠네 요. 롯데 호텔과 롯데 백화점을 잇는 통로로 가세요. 거기에는 보석 상점이 많
은데 그 중에 마라라는 상호를 가진 상점이 있어요 . 정확하게 세 시에 그 상점 앞에 가서 상점 안을 들
여다 보세요. 연한 코발트블루 원피스를 입고 같은 색 모자를 쓴 여자가 있 을 거에요. 모자 챙이 넓으
니 금방 알아볼 거에요.] 그러나 나는 메모를 하고 있었다. 짐짓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 여자를 다섯 시까지만 쫓아다니세요.]
[네? 미행을 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렇게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누군가를 관찰했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잖아요? 살기 바빠 그럴 기회도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에요. 다
음에 다시 연락할게요.]


5장

10여년 전, 서울지방 국세청장으로 있다가 뇌물수수 혐의로 직위해제 당한 이후로 아버지는 죽은 듯 조
용하게 지냈다. 반면 어 머니는 날개를 단 백마처럼 온 서울을 휘젓고 다녔다. 아버지가 지방 국세청 국
장 시절부터 받은 뇌물로 일찍이 사 두었던 강남 땅들을 굴려 만든 돈으로 어머니는 청담동에 그때 돈으
로 200억짜리 빌딩을 지었다. 그러한 부모님들이 싫어서, 나는 취직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다. 하지만 부
모를 원망하는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의 피와 살을 만들어 줬으니까.
카마와의 약속대로 백화점으로 갔다. 어버이 날이라서 그런 건지 평일인데도 백화점은 몹시 붐볐다. 2시
50분 경에 보석상점 마라 앞에 도착했다. 쇼윈도에 나와 있는 큼지막한 에메랄드 반지와 귀걸이 세트가
내 눈길을 끌었다. 내 뒤로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느낌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내 뒤
에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행인들밖에 없었다 .
다시 마라 안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놀랍게도 코발트블루 원피스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백설처럼 하
얀 핸드백을 든 여자가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실크 치마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챙에 가려
져 보이지 않던 그 여자의 얼굴이 주인을 따라 움직이면서 옆모습을 보여주었다. 피부가 너무나 하얘서
파란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귀에 새까만 점처럼 블루 사파이어 귀걸이가 박혀 있었
다. 우수에 찬듯한 눈과 오똑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코, 약간은 얇아 보이는 입술 그리고 입술가에 진 엷
은 미소, 입술을 벌릴 때마 다 다소곳이 내비치는 하얀 치아가 눈부셨다. 그 여자를 놓쳐서는 안되기도
했고 그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끝내 내 쪽 으로 얼굴
을 돌리지 않았다. 그 여자가 마라에서 나올 때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보게 될 거라는데 생각이 들어서야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 기 오줌이 마려웠다. 에메랄드를 살펴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그 여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다 싶었다. 자 주 와 본 곳이라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릴 필
요도 없었다. 마라와는 채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한 2-3분 정도 걸렸을까? 아무리
길어야 5분이었다.
내가 다시 마라의 쇼윈도 앞으로 돌아갔을 때 그 여자는 없었다. 귀신이 곡 할 노릇이었다. 길은 두 갈
래, 롯데 호텔이 아니면 롯데 백화점밖에 없었다. 보석 상점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호 텔 쪽으로 치우쳐 있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그 여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백화점으로 난
길을 택했다. 몇 년이나 찾아다니던 전설 속의 파랑새를 바로 눈 앞에서 날려보낸 심정이었다. 파랑새,
그리고 신비스러운 그 여자. 어쩌면 둘 다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그냥 먼 곳을 바라보는데, 거기에 그 여자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그 여자의 챙 넓은 모자가 1층
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쯤에서 강물에 띄운 종이배처럼 둥실둥실 위로 흘 러가고 있었다. 나는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람들을 어깨로 밀어젖히며 에스컬레이터로 달려갔다. 내 등 뒤에서 터져나온
비명 소리와 욕설 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겼지만 그 여자만은 자세를 흐트
리지 않았다.
내가 겨우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은 것은 이미 그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사
람들이 꽉꽉 들어찬 에 스컬레이터에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1층에 도착하는 즉시 달리기
위해서 제자리 걸음을 했다. 길어야 1-2분이었을 그 시간 이 얼마나 더뎠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
를 것이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또다시 맥이 빠졌다. 그 여자가 1층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층으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이어 탔 을 가능성을 미리 계산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멀뚱히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려다보고 있던 나를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야릇한 느낌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내 시선은 어지러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머리를 지
나 챙이 넓은 모자에 가서 곧장 박혔다. 마치 그 모자가 나에게 나 여기 있어,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으며 사람들을 헤쳐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모자가 사라
진 지점 위에서 주차장이란 팻말을 발견했다. 나는 다시 사람들 사이로 달려가 그 팻말 아래서 오른쪽으
로 획 꺽었다. 그때 그 챙이 넓은 코발트 블루색 모자가 초록빛이 감 도는 검은 승용차 뒷 좌석으로 사
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발을 멈추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차는 미끄러지듯 내 시야를 벗어났다. 그 차 뒤꽁무니에 낙인
처럼 찍힌 볼보라는 글자 가 나를 비웃는 듯 했다.
[당신이 그 정도밖에 안된다니 실망스럽지만, 아무튼 재밌군요. 당신 얼굴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기는 하
네요.]
내가 자동응답전화기의 녹음 버튼을 눌러 두었다는 사실을 카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카마의 목소리를
남겨 두고 싶었다. 카마 와의 관계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생각되는 상황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그쪽
을 실망시켰습니다.]
[당신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 봐야겠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인정하긴 싫지만요...]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내가 왜!]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무작정 길거리로 나갔다. 내 발길이 멈추어 선 곳은 신림 사거리 근처 도
림천 옆 길이었다. 그 길에는 룸싸롱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싸구려 룸싸롱들이 연인, 열정, 촛불, 피앙
새,미인촌 같은 촌스런 이름을 달고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술김에 한두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기억나는
이름이..., 피앙새였다. 빨간 전등이 켜진 왼쪽 창 가에는 손님을 유혹하려고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겨
우 통로가 보일 정도인 낮은 조명을 따라 칸막이 쳐진 룸이 두셋 있는데, 맨 끝에 있는 룸에는 8명 정도
앉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피앙새에 들어가기 전에 창 가에 여자들이 앉아 있는 여
자들을 쓱 훑어보았다. 두세 달 안 온 사이에 일하던 여자들이 모 두 바뀌었는지 기억나는 얼굴이 없었
다. 통통한 여자와 여위어 보이는 여자 둘이 나를 보고 반색을 했다. 나는 계면쩍게 웃으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맨 끝 룸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내 뒤를 따라오 는 여자
목소리를 빼고는 조용했다.
[혼자 오셨어요?]
[내가 둘로 보이냐?]
그러면서 여자를 훑어 보았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묶어서 이마가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그 여자는 뚱
뚱한, 아니 날씬한 여자 였다. 뚱뚱하다고 한 건 그 여자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인상을 말한 것
인데 그 여자의 젖가슴이 엄청나게 커서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서 있는 그 여
자의 상체 전부가 곱추의 등처럼 불룩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의 찰싹 달라붙은 원피스가 드러
내는 곡선은 대담하고 간결했다.
[처음이세요?]
가슴이 푹 파인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 여자는 몸을 숙여 탁자에 손을 짚으며 내게 물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진 젖가슴이 허옇게 드러났다. 나는 그 젖가슴에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대꾸했다.
[아니. 니가 좋겠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감싸 올리며 말했다.
[술 한 상에 십만 원이구요, 아가씨 팁은 사만 원이에요. 아시죠?]
나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달라졌어도 가격은 비슷한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젖혀 소파에 기
댔다. 여자는 보란 듯이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끝나는 원피스를 허벅지로 끌어내렸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내 엉덩이의 몇 배나 됨직한 그 엉덩이를 감상했다. 여자는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씩 웃고는 홀로 나
갔다.
[아저씨는 술 마시러 온 거에요, 주무르러 온 거에요?]
[둘 다지.]
내가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그 여자, 정 뭐라고 했다,는 벌써 세 병을 비웠다. 과일 안주도 거의 비
어 있었다. 만약 정이 정말로 뭘하고 싶은지 솔직히 말하라고 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백 번 주무르기 보다 한 번 벗겨 보고 싶다, 벗어!]
정의 엉덩이와 엉덩이에 짖눌린 소파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체중에 눌려서인지 엉덩이가 몹시 탱탱
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른 손으로 내 엉덩이 아래 손을 넣어 엉덩이를 만져 보았다. 확실히 정의 엉덩이
가 단단했다.
[웃기는 아저씨네. 어디 비교할 게 없어서 아저씨 거 하고 비교를 해요?]
[여기 너하고 나밖에 없는 걸 어떡하냐?]
[아저씨, 그럼 아가씨 한 명 더 부를까요? 그럼 비교도 되고, 재밌잖아요?]
[됐네, 이 사람아. 너도 다 못 봤는데, 딴 여자는...] [아가씨가 오면 더 재미있게 해 드릴게요.]
[아냐, 난 체질에 안 맞아. 대신 너한테 두 여자 팁을 줄테니 두 배로 재밌게 해 봐.]
[아저씨, 뭐 이상한 거 시킬려고 그러는 거죠?]
[이상한 거라니?] 정은 갑자기 약간 부풀어 오른 내 성기를 덥석 쥐었다.
[와, 아저씨 꺼 엄청나다...]
[이건 더 비싼가 보지?]
정은 내 성기를 몇 번 주물럭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다 틀렸구나 생각했
다. 정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나가지는 않고 밖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안으로 걸어 잠
궜는지도 모르겠다.
[십만원이에요. 하지만 섹스는 안되요. 소리를 질러도 안되구요.]
[미친 년, 내가 왜 너랑 섹스를 해?]
그 말이 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럼, 빨아봐.]
[내가 사정할 때까지야, 알았지?]


6장

연락을 끊은 지 사흘만에 카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나 고맙고 반가와서 나는 들떠 있었다. 카마가
또 훌쩍 떠나버릴지 모른 다는 생각에 서둘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 용서해 달라는 말부터 했다.
[전 당신을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당신이 집 밖으로 나가 내가 준 카드를 썼으면 차라리 좋았을 거에
요. 그랬으면 멀리 있지 않은 나를 느꼈을 건데... 당신이 그렇게 집에만 있을지 미처 몰랐거든요.]
[카마..., 라고 불러도 괜찮겠어요?]
[좋아요.]
[카마, 정말 당신은 누굽니까? 난요...]
[좋은 뜻으로 듣겠어요. 나는 당신에 대해 다 아는데 당신은 나에 대해 모르지요. 불만일 거에요. 하지
만 알고 모름이 무슨 차 이죠? 그래요. 당신에 대한 정보가 매일 내게 보고되지요. 그런데 이상하죠? 정
보가 쌓일 때마다 점점 더 당신을 모르겠어요. 생 각해 보세요. 누군가를 안다는 건 옳지 않은 말이에
요. 어떻게 알겠어요? 정보를 통해서 예측은 할 수 있겠지요. 사람을 아는 일 과 주가나 우승마를 예측
하는 일은 분명히 다른 거에요. 그러니 나를 알려들지 말아요. 알면 더 혼란스럽기만 해질 거에요.]
[그렇다면 왜 당신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겁니까?]
[단순히 당신을 알아보자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난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을 해야 하거든요. 당
신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될 거에요. 그래서 당신에 대한 내 확신이 생길 때까지 당신의 질문에 대
한 답을 미뤄둬야겠어요. 지금 섣불리 대답했다 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당신이 나를 떠나겠다고
했다면 어떡해요?]
[이런 말 하는 건 좀 웃기지만 말입니다,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성급하게 굴지 말아요. 일본에 갔다가 어제 저녁에 도착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아직 만날 때가 안됐거
든요. 참, 당신 선물도 가져 왔어요. 정오면 도착할 거에요.]
[아니요. 한 번 만나자구요.]
[보채지 말아요.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꼭 만나게 될테니까요. 그리고 피앙새 같은 곳에는 가지 말아요.
그런 여자와 어울리는 건 자학이에요.]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아요.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영화도 보러가고 그래요. 푸석푸석한 당신 모습,
상상이 안 가요. 얼른요 .]
[찰칵.]
카마는 또 그렇게 떠났다.

7장

벨이 울리는 소리에 나는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내 손목 시계로는 정확하게 12시 2분 38
초였다. 나는 문을 열자 마자 신경질을 냈다.
[이 분 삼십팔 초나 늦었잖습니까?]
문 밖에는 역시 카마의 선물을 배달하러 온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나 지난 번 배달원과는 복장이 틀렸
다.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직 일 분 남았는데요.]
그러면서 자기 시계를 보여주었다. 정말 그 사람 시계로는 정오까지 1분 10초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렇
다면 내가 쓸데없이 2분 38초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건데,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인
상을 쓴 채 인수증에다 사인을 해주고 선물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는 소리나게 문을 닫아 버렸다. 곧장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116을 눌렀다.
[뚜... 현재 시간은 열한 시 오십구 분 이십 초입니다. 뚜...]
놀랍게도 내 시계가 틀렸다.
[이런...]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컴퓨터를 켜 컴퓨터의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국에서 알려주는 시간과 컴퓨터의 시
간은 5초밖에 차이가 나 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내 시계를 컴퓨터의 시간에 맞췄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카마가 또 뭘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할까 궁금했지만 풀어보기가 망설여졌다. 그렇
다고 마냥 쳐다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달랑 비디오 테
이프 하나뿐이었다. 아무튼, 카마가 보낸 선물이니 고맙게 받기로 하고 텔레비전 아래에 있는 브이티알
에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침대로 가 비슴듬이 기댄 채 리모콘을 눌렀다. 잠깐동안 치지직거리
더니 곧 화면이 나타났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약간 사각으로, 그러니까 키보다 높은 창문을 통해 방 안
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비스듬하게 아래로 고급스런 어떤 방이 비춰지고 있었다. 화면의 중앙에는 대리석
질감이 느껴지는 파란 더블 침대가 있었다. 침대 시트는 자주색 천에 기하학적인 초록색 무늬가 어지럽
게 그려진 것이었다. 그 위에 발가벗은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그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다. 웨이브가 큰 파마 머리를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자는 양반 다
리로 앉아 있는 남자의 허벅지에 올라탄 채 목을 감싸 안고 키스를 퍼붓는 중이었다. 둘은 침대 중간쯤
에서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있었지만 여자의 머리카락 때문에 둘의 얼굴 모두 보 이지 않았다. 나는 더
자세히 보려고 텔레비전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포르노 테이프를 수없이 보아온 내 판단에 따르면 카
마의 테이프는 홈 비디오로 촬영된 것이었다. 이렇게 촬영된 아마추어들 테이프라면 일본에서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카마가 포르노 테이프를 보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
을텐데 정확한 의도가 뭔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일단은 지켜보는 도리밖 에 없었다. 오랜 키스가 끝나자
남자는 시트와 같은 색 베개 쪽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허벅지 위로 올라
갔 다. 그 놈의 머리카락이 문제였다. 여자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때문에 여자의 몸은 물론 남자
까지도 가려져 버렸다. 보이는 거라고는 남자의 다리와 여자의 머리카락 뿐이었다. 화면으로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어 소리로라도 상황 판단을 해볼까 해서 볼륨을 잔뜩 키웠다. 그러자 남자의 웃음 섞인 신
음 소리와 여자의 간드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떻게 해요?]
나는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간지러운 여자의 목소리에 내 귀를 의심했다. 일제가 아니라 한국제 포르노
였다. 일본까지 가서 왜 한국제를 사 보냈을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섹스 산업을 통해 내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해 왔다. 그러나 나는 성기 삽입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안돼요. 고집 피우지 마요.]
여자는 약간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대 밖으로 나와 커다란 여행 가방을 열었다. 그 속에서 여자는 검은
가죽으로 된 물건들을 한 아름 꺼내 침대로 돌아갔다. 당당한 체격의 남자는 침대에 기댄 채 여자가 침
대 위에 올려놓는 물건들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물건들을 다루는 남자의 손놀림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여자는 남자에게 등을 돌린 채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남자는 은빛 쇠장식 박힌 가죽
개목걸이를 여자의 목에 걸었다.
[아파요. 너무 조이지 마요.]
여자는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남자가 능글맞게 웃는 걸 보았다. 그 다음으로 남자는 여자 앞으로 가서
가죽 마스크를 여자에게 씌웠다. 그리고는 톤을 높여 장난같이 말했다. [죽이는데?]
페티시즘이나 새디즘을 소재로한 포르노라는 걸 나는 직감하고서야 그 테이프가 일본까지 수출이 된 이
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남자는 역시 가죽으로 된 브래지어를 여자에게 입혔다. 브래지어에도 마스크와
마찬가지로 은빛 쇠장식이 치렁치렁 달려 있었다 . 여자를 세우더니 가죽으로 된 콜셋을 입혔다. 여자는
남자가 끈을 조일 때마다 교성을 질렀다.
[아아... 아하아... 너무 조이지 마하요. 아아... 아파요.]
남자는 여자의 소리에 전혀 반응이 없는 듯 했다. 남자는 여자 등 뒤로 가 브래지어 끈과 팬티 끈을 잡
아 당겨 꽉 조였다. 여자 의 살과 가죽 옷이 만나는 부분에는 살들이 불룩 튀어나서 보기 흉했다. 남자
는 그것도 부족한지 여행 가방으로 뛰어가 뭘 잔뜩 꺼내 왔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폭주족들이 차고 다
니는 쇠 장식이 주렁 주렁 달린 가죽 팔찌와 발찌가 여자에게 채워졌다. 남자는 여자를 아래 위로 훑어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가죽으로 된 조끼를 걸쳐 입었다. 옷에 만 신
경을 쓰느라 몰랐는데 그새 남자의 성기가 완전히 커져 있었다. 하지만 별 거 아니었다. 남자가 위협조
로 말했다.
[꿇어.]
한국제나 일제나 할 거 없이 그 다음 스토리는 뻔한 거였다. 아침을 건너 뛴 바람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
가 나서 빨리 감기 버튼 을 눌렀다. 비명 소리, 채찍 소리, 신음 소리같은 건 무성 영화처럼 빠르고 우
스꽝스럽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행위 뒤로 숨어 버 렸다. 내 예상대로 너무 판에 박힌 진행이라 아예 정
지 버튼을 누르고 빨리 감기 버튼을 다시 눌렀다. 혹시나 다른 장면이 있나 싶어 중간에 한두 번 재생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같은 등장인물에 똑같은 방이었다.
테잎은 내버려두고 책상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카마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편지를 쓸 참이었다. 컴퓨터
가 위잉 소리를 내며 켜 지는 사이에 왼팔을 쭉 뻗어 텔레비전을 향해 리모콘 버튼을 눌렀다. 정지 버튼
을 누른다는 게 실수로 재생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화난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
왔다.
[...했어요. 그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하겠어요?]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쭉 뽑아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목소리는 다름아닌 카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화면은 아까 보았던 방을 계속 비춰주고 있었는데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커튼이 젖혀져
있고 창 밖이 환했다. 그런데도 카마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
시킨 채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똑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아까 본 여자
와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색하게 여자가 남자에게 키스를 하는 장
면에서 갑자기 화면이 밝아지더니, 아무도 없는 환한 방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았
다. 그것도 잠시, 딸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카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얼른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역겹나요? 혹시 내가 조금 전에 보았던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혹시 그런 생각을 했다면, 틀렸어
요. 벌써 목소리부터 틀 리잖아요.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나도 모르는 여자였어요. 지금은 잘 알게 되었
지만요. 아까 그 남자 있잖아요? 내 남편이에요. 후우...]
카마의 웃음 소리에는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참, 여긴 일본이에요. 창 밖을 보세요. 건물들이 보이죠? 당신도 도쿄에 온 적이 있으니까 금방 알 수
있을 거에요.]
내 시선은 건물들이 보여주는 스카이 라인을 훑었다. 정확히는 어딘지 모르겠지만 신주쿠 근처가 아닌가
싶었다. 카메라는 다시 방을 비추었다.
[당신에게 내 남편을 이런 식으로 소개하게 돼서 유감이에요. 차려 입고 있을 땐 얼마나 멀쩡하다구요.
얼굴을 잘 살펴봤다면 낯이 익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죠. 가끔 뉴스 시간에 얼굴을 내비치기도 하거든요.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난 돈이 참 많아요. 당 신도 상속받을 재산이 많다는 거 알고 있어요. 당신 아버
지도 서울지방 국세청장 시절에 저희 집에 몇 번 오셨죠. 당신 아버지 일은 안됐어요. 국세청장뿐만 아
니라 경제부총리도 욕심낼만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아버지가 집으로 직접 찾아갔을 정도라면 보통 거물이 아니었다. 상대가 공무원이라면 최소한 차관급 이
상은 되야 하고, 재계 인물이라면 대기업 대표이사 정도는 되야 했다. [당신이 전혀 인연이 없는 사이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이 사는 모습도 좋았구요. 이제 고백하겠어요. 전 오래 전부터 당
신을 관찰해 왔어요. 당신이 나에게 거부감을 느낄까봐 일부러 피씨 통신을 통해서 당신에게 다가간 거
에요. 화내지 말 아요.]
기가 막혀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난 참 따분하게 살아왔어요. 대학 시절까지 어딜 가든 경호원과 함께 가야 했어요. 지나친 상상은 마세
요. 누구 소설에 나오는 대통령의 딸은 아니에요. 내 아버지가 아주 까다로운 분이셨어요. 특히 제 순결
에 엄청 집착을 하셨죠. 외동딸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요, 제가 얼마나 아버지의 과보호 아래
짓눌려 신음했는지는 모를 거에요. 그래서 제가 택한 길이 뭐였는지 아세 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집
을 가는 거였어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정해주는대로 따랐죠. 휴...]
화면은 침묵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마는 한참을 아무 말 없었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빨기 감기를 할 수
가 없었다. 그렇게하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처음 볼 땐 근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남편 말이에요. 알고 보니 저런 꼴이에요. 신혼 여행을 다녀
온 후로 나는 남편과 침 실을 같이 쓰지 않아요. 대신 남편이 준 테이프를 보죠. 사실 처음엔 안 봤어
요. 남편의 정사 장면이 담긴 테이프를 보는 게 얼 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에요. 남편은요,
성중독증이에요. 남편이 보내준 테이프에는 페티시즘, 의상 도착, 밴디즘, 오랄, 애널, 그룹 섹스, 채찍
질 등 없는 게 없어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피부의 여자들과 섹스를 하고 그 장면을 촬영 해서
내게 줬어요. 어느 날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아요. 무척 짜증나고 무료해서 새벽까지 잠을 못 잔
날이었던 것만은 분 명해요. 침실에 비디오만 꽂아두는 장이 있거든요. 거기에 가득 들어 있는 남편의
테이프를 바닥에 다 쏟아놓고 하나씩 보기 시 작했어요. 그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하겠어요? 난
정말이지 창녀보다 못하다는 참담한 기분이었어요. 나중에 보게 되면 알겠지만 난 완벽한 여자에요. 아
버지가 날 그렇게 만드셨어요. 이런 말을 하다니, 내가 흥분했나 봐요. 어쨌든... 그 테이프들 을 보면
서 남편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나를 쓰레기처럼 취급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해 주
고야 말겠다구요.]
카마의 차가운 목소리는 내 온 신경을 일으켜 세웠다. 예전의 우아하고 고상한 음색은 어디론가 달아나
고 없었다. 카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본 남편의 모습은 가장 최근 거에요. 현장 검증을 하는 기분으로 여기 왔어요. 당신과 보는 각
도는 다르지만 나도 지금 남편이 뒹굴었던 침대를 보고 있어요. 보세요. 평화스럽지 않아요? 모든 일은
한 번 지나면 끝이죠. 영원히 지속되는 일은 없어 요. 누가 이 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상상이나
하겠어요? 막상 여기 와 보니 마음이 편하네요. 뭔가를 깨달은 기분이에요. 그게 뭔지는 시간을 두고 생
각해 봐야겠어요. 서울로 돌아가면 당신을 가까이서 볼 작정이에요. 당신은 나를 못 보겠지만요. 억 울
하다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 말아요.]
나는 인터넷으로 들어가 카마에게 편지를 썼다.
[선물 잘 받았습니다. 그쪽은 나를 놀라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군요. 내가 뭘 도와
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원했다면 돕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카마를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지금 나갑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나를 지켜볼지 모르겠지만요. 옷차림이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내 모습이 당신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8장

조선 호텔 일식당에 예약을 해 두었지만 예약 시간이 지나 버려서 근처에 있는 롯데 호텔로 방향을 틀었
다. 나는 호텔 로비 프런트 앞 푹신한 대기용 의자에 기대어 유리로 된 호텔 정문에 시선을 던져 두고
있었다. 차를 가져 왔으니 술 도 마실 수 없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연방 회전문을 밀고 들락거리는
뻔지르르한 사람들을 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무전기를 들고 있는 호텔 경호원 하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할 일 없이 그렇게 앉아 있다가는 의심 받기 쉽지요.]
[네 눈에는 내가 그것밖에 안 되 보이냐?]
나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어 보이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프런트로 갔다. [며칠 묵어 갈
작정인데...]
거만한 얼굴로 반말처럼 말했다. 특급 호텔 프런트에서는 예약도 하지 않은 내국인에게, 특히 나처럼 별
거 아니게 보이는 사람 에게는 방을 잘 내 주지 않는 게 무슨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프런트 직원은 순
식간에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미안하다는 표 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이 있긴 한데요, 지금은 최고급 특실밖에 없습니다.]
직원은 최고급이란 말에 힘을 주었지만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것 괜찮군.]
[게다가 더블입니다.]
[좋아.]
나를 호텔에서 며칠 왕처럼 지내다가 어느날 훌쩍 도망가버릴 위인으로 봤는지 직원의 얼굴은 점점 엉망
이 되어갔다.

다음날 일찍 카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카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짜증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
다.
[아침부터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전활 했습니까!]
그 소리에 놀란 건 카마만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자고 있던 여자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어제 말했죠. 당장 집으로 들어가 테잎을 없애라구요. 왜 안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런 막 되먹은
여자들 만나지 말라고 했죠? 왜 내 말을 안 들어요. 네?]
내 눈치를 살피던 여자는 시트를 몸에 두르고 침대를 빠져 나갔다.
[도대체 대관절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한테 나는 뭡니까? 왜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어디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봐요!]
만약 내가 막 된 집안에서 자랐다면 벌써 욕지거리라도 퍼 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교양
있게 행동하도록 교육받 으며 자랐다. 욕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 버렸다. 욕실에서 샤워하
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을 뿐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나는 카마에게 들리도록 소리나게 콧방귀를 뀐
후 수화 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나는 얼른 침대 옆에 반듯이 개어져 있는 가운을 걸쳤다. 함께 잔 여자도, 지난 밤 일도 좀처럼 생각나
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어지는 버 릇이 있었다. 까치발
로 욕실에 다가간 나는 가운을 여미며 욕실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은 힘없이 스르르 열렸다. 여자는
목욕 거품을 잔뜩 풀어 놓은 동그란 대리석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여자는 동그란 눈가에 웃음
을 그리며 말했다 .
[누구? 부인?]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카마와의 관계를 어떻게 얘기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여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혼자 조니워커 한 병을 다 마시고 호텔 지하 디스코텍에
갔던 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여자가 어떻 게 만난 여자이고 어떤 여자인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
았다. 그 기억을 내게서 찾기 보다 그 여자에게서 찾는 편이 낫겠다 싶어 욕조에 걸터 앉으며 대충 둘러
댔다.
[아니야. 전화하는 걸 들었으면 알잖아.]
흰 타올로 머리를 감싼 여자는 나를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 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여자도 다정스럽게 말했다.
[어제하고 너무 틀려서 그래. 그치만 지금처럼 말하는 게 한결 나아.]
내게 반말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꽤 많은 얘기를 했거나 막 되먹은 여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였다.
나이는 많아야 스물 다섯 , 여섯 정도. 화장을 지웠는데도 갸름한 얼굴과 동그란 이마, 짙은 눈썹 등 전
체적인 인상에서 우아함이 풍겼고 피부도 고와 보 였다. 길거리 여자는 아닌 듯 했다.
[어제 어땠어?]
나는 은근 슬쩍 지난 기억의 소재를 물어 보았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나부터 말하라면... 꼭 나쁘지는 않았어. 그쪽은?]
나는 대답이 궁해서 여자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내 이름도 몰라?]
[촌스럽게 또 왜 그래? 서로 잊기로 약속했잖아.]
[그랬지? 나도 나쁘진 않았어.]
내 말에 여자는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여자는 거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난 있지, 그쪽이 아주 좋았단 말을 해 주길 바랬거든. 어제처럼 거창한 말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잊
지 못할 거라는 말 정도 는 해 줄지 알았어. 내가 그쪽에게 해 준 모든 일이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니까
좀 그러네...]
말을 하는 동안 여자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도대체 그 여자가 내게 뭘 해 줬고, 내가 그 여자에게 뭘
했는지 알아야 무슨 말 이라도 할 게 아닌가. 나는 여자의 눈치를 슬슬 살피다가 욕실에서 나와 버렸다.
나는 방을 휘둘러 보았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연두색 투피스가 몸만 빠져나온 것처럼 바닥에 반듯하
게 놓여 있었다. 투피스 끝자락에서 종아리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흰 구두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내 옷도 마찬가지였으며 바지 끝 부분에 랜드로 바가 있었다. 호텔에서 알몸으로 함께 일어난 젊은 남녀
가 옷을 전혀 헝클어뜨리지 않고 쇼윈도에 진열하듯 잘 정리를 해 놓았다면, 둘 다 의 식이 있어서 그렇
게 하기로 합의를 했거나 둘 중 하나가 꼭 그렇게 해야 했다고 고집을 부렸거나 해서 일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런 요구를 한 건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그랬을까? 왠지 모르게 섬짜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을 입으려고 침대 주위를 돌며 속옷을 찾기 시
작했다. 그런데 침대 주위, 위, 심지어 밑에도 속옷이 없었다. 여자 속옷 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을 이
리저리 헤매던 나는 창가 소파에서 폴라로이드 즉석 카메라를 발견했다. 그 아래 즉석 사진 여러 장 이
잘 포개진 채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사진 속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중에는 욕실에 있는 여자뿐만 아니라 언 젠가 내가 카피를 맡았던 의류회사 디자이너의 얼굴
이 끼어 있었다. 얼른 사진을 넘겼다. 다음 사진에는 그 디자이너와 욕실에 있는 여자 그리고 술에 취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내 얼굴이 있었다. 다음 사진에는 욕실에 있는 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 다음 사진에는 내 런닝과 팬티가 마치 투명인간이 입은 것처럼 간격을 두고 바닥에 곱게 놓
여 있었다. 그 다음 사진에는 앞 사진과 마찬가지로 내 옷이 반듯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욕실에 있는
여자의 속옷과 원피스가 각각 다른 다음 두 장의 사진 속에 있었다. 나머지 사진 한 장에는 여자 속옷을
입은 채 히히덕거리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속옷 찾을 생각은 포기하고 바닥에 있는 바지부터 집어 들었다. 발을 집어넣으려고 바지를 벌리다
그 속에서 팬티를 발견 했다. 팬티와 바지를 동시에 입고 웃옷을 집어올렸다. 가디건을 입고 있는 와이
셔츠 안에는 예상대로 런닝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입고는 랜드로바에서 양말을 꺼내 신었
다. 신발 끈을 묶지도 않은 채 주위를 둘러 보며 뒷주머니에 손을 댔다. 지갑은 그대로였다. 지갑 내용
물을 확인할 할 틈도 없이 사진을 낚아채듯 들고 허겁지겁 방을 나와 버렸다. 담배 연기가 눈을 찔러 눈
꼬리가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태도에요? 정중하게 사과를 해도 받아 들일까 말까하는데.]
카마가 전화한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 내가 편지를 쓰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왜 또 전화를
했냐는 식으로 퉁명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카마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 때문
에 나는 기분이 팍 상했다.
[우리 사이에 또 무슨 볼 일이 남아 있습니까? 사과고 뭐고 쓸데없는 소리말고 전화 끊읍시다.]
[점점... 왜 이래요? 자꾸 그렇게 삐뚤게 나올 거에요?]
[삐뚤고 자시고...]
[느긋하게 생각하세요. 그 사진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깨끗하게 처리했어요.]
나는 카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껌벅거렸다.
[아무튼 당신은 내게 큰 빚을 진 거에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왜 몰라주는지 모르
겠어요. 다시는 나한테 소리치지 말아요. 당신은 나한테 그럴 처지가 못 되요. 알겠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건 내가 술이 엄청나게...]
[됐어요. 남자들은 다 그렇게 말하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당신을 바꿔 놓겠어요. 여섯 시에 그
사진 사본이 당신에게 배달될 거에요. 칼라 프린터로 프린터 했는데도 사진이 선명하더라구요. 이제 나
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신 이 결정해야 할 차 례가 된 거 같네요.]


9장

카마의 말대로 6시에 사진이 배달되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사진은 잘 받았어요?]
카마였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후로 반시간동안 카마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마지막엔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카마는 어이없다는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경찰이 누구편일거 같아요? 세금탈세자인 당신의 아버지? 이것보세요 나는 당신을 보호하는 사람이에요
적과 아군을 구별 못하다니....]
[아마도 이 사진을 당신네 아버지한테 뿌려야 겠군요... 그럴 필요성을 못느껴서 가만히 있었지만...]
나는 수화기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덜덜 떨며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카마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고액 납세자 순위 백 위 안에 드는 전 서울지방 국세청장의 아들이 변태라는 사실이 사진과 함께 여성
지에 일제히 실리면 볼만 할 거에요.]
나는 억울했다.
[누가 변태라고 그래요? 전 아닙니다. 아니라니까요. 그건 술김에...]
카마는 새침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변태가 아니란 걸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지요. 사진만 보고 판단할
거에요.]
카마가 앞에 있다면 발이라도 붙잡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당신이 뭐라든... 그냥 하라는대로 하겠습니다.]
카마는 그것도 모자란지 나를 더 몰아 붙였다.
[요즘 당신 어머니가 너무 설치고 돌아다닌다고 불평들이 많아요.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나요? 그
렇잖아도 당신 어머니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어요. 아들은 변태, 아버지는 부패 공무원, 어머
니는 탈세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집 안이지요?]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내 얼굴은 눈물과 식은 땀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은 말할
힘도 없었다. 가까스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제발...]
[언론에서 당신 집안을 무척 환영할 거에요. 안 그래요?]
카마는 나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나를 몰아붙일 수 있었겠
나? 그렇다고 화를 낼 처 지가 못 되었다. 더러운 돈만 있고 사람은 없는 집안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평
생을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
다. 내 흐느낌은 카마의 귀에 미쳤다.
[그래, 그래... 아가야, 울지마라, 응?]
그 말에 내 감정은 더 복받쳐 올라 아예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고 말았다.
[됐어, 됐다니까. 내가 널 보살펴 줄게. 울지마, 응?]
내 귀에는 그 소리가 카마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주 젊을 적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한참을 울고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티슈를 뽑
아 코를 팽 풀고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아직 거기 있습니까?]
카마는 아주 느리게 그리고 나른하게 말했다.
[으음... 그래.]
반말이었다. 그런데도 내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가슴에 얹어 심장을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됐어. 다신 쓸데없는 생각 마.]
약간은 들떠 있는 듯한 카마의 목소리는 어지러웠던 내 머리 속을 물로 씻어내는 듯 상쾌한 느낌을 주었
다. 카타르시스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나는 제법 배시시 웃을 정도로 기분이 나아졌다.
[이젠 그쪽을 믿겠습니다. 그쪽이 하는 일 모두가 다 날 위한 일이란 걸 알겠습니다.] 카마도 내 태도에
만족해 했다.
[요, 귀여운 고양이.]


10장

잠시 무료해졌다. 채팅방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를 꼬시고 있다가 5명쩌 포기하자 끊고 가만히 드러누워
뒹굴고 있으려니 전화가 왔다.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 나하고 통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나 꼬시고 다니니?]
카마는 앙칼지게 말했다.
[난 그저 습관적으로...]
나는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정말 나는 여자를 꼬실 마음이 없었다. 뭔가를
하지 않고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컴퓨터 앞에 앉은 거고 잠깐 떠벌렸을 뿐이었다.
[습관? 너도 통신 중독증 환자니? 안됐다 정말.]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정말 통신 중독증 환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나면 컴퓨터에만
매달려 있었고, 컴퓨터 를 켜면 습관적으로 통신을 하였다. 게임도 온라인 게임만 했다. 일을 할 때 빼
고는 거의 통신에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에 있든, 뭘 하든 전자 메일이 와 있지 않을까 불안해서 계속
확인을 해 봐야 했고 직장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보다 통신에 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얘기할 때 더 안정
감을 느꼈다.
[그럼, 용서해 주는 겁니까?]
이해해 주는 거냐고 묻는다는 게 용서해 주는 거냐고 묻고 말았다. 완전히 카마에게 주눅이 들었는지 혓
바닥까지 비굴해졌다.
[그게 어디 금방 고쳐지는 병이니, 어디? 휴... 하지만 대신 약속해.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찾아 다니지
말기로. 그리고 있지? 이왕 통신을 하려거든 좀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해 봐. 이를테면 동호회에 들
어가서 제대로 사람들을 사귀어 본다든지, 아니 면 홈페이지를 만들어 본다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대답은 카마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생각해 보겠다? 그런 대답이 어딨어?]
나는 점점 내 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 대답은 예였다. [좋아. 그리고
힘 좀 내. 남자가 그게 뭐니? 그리고 전화 끊는대로 내 홈페이지로 와. 알겠지?]
홈페이지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예?]
카마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새 주소라며 가르쳐 줬잖아?]
카마는 새 인터넷 메일 주소가 kama@sutra.com이라고만 했었다. 홈페이지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
다.
[그럼, 홈페이지 주소가 http://sutra.com입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카마는 도리어 반문했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 참, 미안. 내 홈페이지 주소는 본래 http://yen.blue.or.jp/~kama거든. 너무 길어서 그래서 인터넷
메일은 짧고 간단하게 바꿨지. 넷 어드레스란 사이트에 가면 그렇게 만들어줘. 잘 받아 적었어?]
[받아 적긴 했는데... 이해가 잘 안되는네요. 그리고 주소 끄트머리가 jp로 끝나는 걸 보니 일본 사이트
에 홈페이지를 등록한 겁니까?]
[넌 그냥 http://yen.blue.or.jp/~kama로 찾아오기만 하면 돼. 그리고 네 아이디는 아수라, 비밀번호는
아루사야. 알겠지?]
카마가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나는 전화를 끊은 후에 바로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반신반의하면서 위치
를 적는 곳에 카마의 홈페이지 주소를 쓰고 go를 클릭했 다. 화면 왼쪽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쓰라는
상자가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겨우 카마의 홈페이지에 도달했다. 카마 개인 홈페이지라길래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누가 디자인해 주었는지 내 상상을 초월했다. 파란 별들이 반짝이는 하얀 바탕의 밑그림
을 배경으로 화면 왼쪽에서 둥근 빨간 달이 떠올랐다. 그 달은 반원을 그리며 오른쪽 으로 떠가면서 점
점 기울더니 화면 중앙에서 초생달로 변했다. 바로 거기서 초생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화면
을 꽉찰 정도가 되었다. 빨간 달의 중간쯤에서 작은 점이 나타나더니 제트기처럼 내게로 곧장 날아오면
서 커졌다. 스피커에서는 제트 엔진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엄지손톱만하게 된 그 점이 갑자기 그물이 펴
지듯 커지며 글자를 만들어 냈다.
[잘 왔어.]
스피커에서는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 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폭발음이 나면서
화면이 꺼멓게 변했다. 그러나 그 검은 화면은 평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이 살아 있는 듯 검은 화
면은 계속 꿈틀거렸다. 무엇이 나타날지 잔뜩 긴장한 채 화면 속의 어둠에 눈을 붙들어 매두었다. 타이
프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화면 위쪽부터 글자가 찍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긴 내 세계야.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지. 너를 위해 만든 거야. 어때?]
나를 위해? 나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 글자들은 별처럼 반짝거리기만 했다.
[불행스럽게도 넌 내 기대 이하야. 그래서 너를 단련시키는 긴 여행을 보내는 거야. 마음 편하게 마법에
걸린 공주를 구하러 가 는 게임을 했다고 가볍게 생각해도 좋아. 이제 지도가 나올 거야.]
글자들 아래로 오래된 보물지도처럼 생긴 누런 지도 한 장이 펼쳐졌다. 지도에는 산과 계곡과 강과 들판
과 마을을 잇는 여러 갈 래의 길들이 보였다. 그러나 어디가 출발점이고 도착점인지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 중앙에 우뚝 솟은 산 아래 초록색 으로 그려진 마을이 있었다. 지도 아래로 글자가 찍혀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올 때마다 네가 갈 곳이 초록빛으로 표시되어 있을 거야.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오늘은
산 아래 마을로 가. 마을 을 둘러본 후에 뭘 보고 뭘 느꼈는지 내게 편지를 써. 다음 목적지에 가서도
마찬가지야. 내가 가르쳐 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지마. 널 지켜 보겠어. 잘해 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마우스를 움직여 초록색 마을을 클릭했다. 그러자 마을의 한 거
리를 확대된 듯한 지도 가 화면을 채웠다. 남북으로 뻗은 큰 길 양쪽에는 1930년대 프랑스 풍 목조 상점
들이 만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화면 제일 위, 파 란 하늘에 free market이라는 이탤릭체 글자가 구름 모
양으로 적혀 있었다. 내가 온 곳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네비게이터에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박스
로 눈길을 돌렸다. http://www.freemarket.com /index.htm라고 적혀 있었다. 프리마켓 주소를 알았으니
북마크를 해 놓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었으므로 조급할 게 없었다. 그래도 카마가 굳이 프
리마켓으로 왜 보냈는지 궁금했다. 컬러 오브 환타지, 스몰 해피니스, 매직 파워, 맥시멈 엑스터시 등으
로 된 상호로는 무얼 파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거 리 중앙에 있는 제일 큰 상점, 스몰 해피니스를 클릭했다. 물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어야 했
다.
[저희 사랑의 악세사리 전문점에 잘 오셨습니다. 오늘의 기획 상품은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금줄입니다.]
헤죽거리는 대머리 남자 아래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시선을 반쯤 잘린 화면 중앙의 사진으로 옮겨
갔다. 젖가슴을 드러낸 백인 여자가 활짝 웃으며 약간 비스듬히 서 있었는데 그 여자의 까만 젖꼭지와
젖꼭지가 금줄로 이어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줄 끝에 달린 집게가 젖꼭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었다. 여자 사진 아래로 화면을 움직였다. 가격은 14달러 95센트. 비자와 마스터 카드가 가격 아래 그려
져 있었다. 그런 걸 악세사리 라고 했다는 게 좀, 어쨌거나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그 상점을 빠져 나
와 버렸다. 다음으로 들른 상점은 컬러 오브 환타지로 스몰 해피니스의 건너편에 있었다. 멋들어지게 휘
갈겨 쓴 간판 글씨가 마음에 들어 클릭했다.
[당신같은 행운아가 또 어디 있을까요? 저희 인형 전문점에서 당신을 위해 특별 상품을 준비해 두었습니
다. 당신이 남자이면 바 바라를 여자이면 잭슨을 눌러 주세요.]
나는 파란 눈의 금발인 바바라의 코를 마우스로 꾹 눌렀다. 그러자 바바라가 나체로 소파에 기댄 채 고
혹적인 웃음을 띄우며 나 타났다. 사진 아래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번에 준비한 상품, 바바라와
함께 떠나는 환상 여행은 당신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성으로 만들어 드릴 겁니다. 실물 크 기로 제
작된 바바라의 몸은 특수 실리콘 재질로 되어 있어서 인체와 꼭같은 느낌을 주며, 온기까지 느껴집니다.
만약 금발이 싫 증나면 어떻하냐구요? 붉은 가발과 검은 가발을 함께 드리는 건 물론 다양한 색깔의 렌
즈와 모조 손톱까지 끼워 드립니다. 잠깐 만요!]
이전 화면으로 돌아가려고 마우스를 누르려던 참이었다.
[바바라의 하이라이트를 말씀드리지요. 바바라의 그곳은 정조대를 채우듯 잠궈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
다. 열쇠는 단 하나, 당신 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와우! 굉장하지 않습니까? 특별 세일 가격 249달러
95센트에 드립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런 인형에게 정조대를 채우겠다는 발상이 웃겨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인형을 몰래 숨겨 놓고 지낼
텐데 정조대가 무슨 소 용이 있겠나 싶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상점은 매직 파워. 컬러 오브 환타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거기는 남성 모조 성기
전문점이었다. 미국 섹스 샵에서 몇 번 물건들을 본 적이 있어서 별 관심은 없었지만 어떤 괴상한 걸 만
들어냈나 싶어 신상품이라고 크게 적힌 파워 스네 이크를 클릭했다. 길이가 12인치라는 파워 스네이크는
투명한 실리콘 재질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안이 훤하게 보였는데, 그점이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척
추나 목 뼈를 옮겨놓은 듯 휘어진 뼈 모양의 골격이 파워 스네이크의 기능을 무언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므로 어떤 체위로도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은 도리어 구차하게 보였다. 파워 스
네이크는 바이브레이터가 달려 고환을 축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모조 성기를 봤을 때처럼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격은 119달러 99센트. 만만찮았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이런 걸 내놓고 판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여성의 성을 엄격하게 통제 하는 가부장적 사회니까 의외로 살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이 머리를 스쳤다. [삽입이 뭐 그리 좋다고...]
나는 중얼거리며 다음 상점으로 향했다. 매직 파워에서 뚝 떨어져 길 끝 쯤에 있는 스콜피오였다. 락 그
룹 스콜피언스를 떠올리 며 들어간 그 상점에서는 커다란 황금색 전갈 한 마리가 독이 든 꼬리를 끄덕거
리며 나를 반겼다.
[당신의 별자리가 전갈좌가 아니더라도 환영합니다. 스콜피오가 개업 2주년을 맞았습니다. 손님께 감사
의 선물로 기획 상품 초 특별 세일을 마련했습니다. 짜잔! 살아있는 전설, 바이브레이터 스콜피오! 200
달러인 이 상품을 파격적인 가격 120달러에 모시겠 습니다. 거기다 그룹 스콜피언스의 베스트 씨디까지
끼워 드립니다.]
나는 바이브레이터란 말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 상품이 뭔지 궁금했다. 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바이브레이터 스콜피오이란 글자를 클릭했다. 화면에 나타난 사진은 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
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사진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다리를 쫙 벌린 여자의 음부 전체를 황금
빛 전갈 한 마리가 가리고 있었다. 사진으로는 전갈의 꼬리가 항문에 꽂혀 있는 걸로 보였다. 어쩌면 항
문을 사진으로 보여줄 수 없어 가린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으로만 봐서는 바이브레이터 스콜피오의 용도
를 알 수가 없었다. 아래에 적힌 설명을 읽어 보았다.
[획기적인 신상품 바이브레이터 스콜피오는 여성 여러분의 모든 성감대를 동시에 자극하도록 제작되었습
니다. 스콜피오의 섬세 한 입은 크리토리스를, 다리는 질을, 꼬리는...]
더 읽어보지 않아도 뻔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사이 잊고 있던 카마가 왜 그때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카마가 나를 왜 그런 곳 으로 보냈나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섹시 언드웨어로 스콜피오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길 끝에 있었다. 섹시 언드웨어는
상호 그대로 섹시한 속옷 전문점이었는데 입구가 여러 개였다. 먼저 섹시 웨어라고 적힌 입구로 들어갔
다. 원피스 수영복처럼 몸에 짝 달라붙는 속옷에서부터 비키니 스타일의 속옷까지 여성잡지에서 보아왔
던 그렇고 그런 여성용 속옷 들이 가득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의 모두가 망사나 스토킹 천처럼 아주
얇은 천으로 되어 있어 젖꼭지나 음모가 그대로 보인 다는 정도였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끈 속옷은 원
피스 수영복처럼 생겼는데 젖가슴 부분만 동그랗게 파인 것이었다. 모델의 가슴이 커서인지 그 런 속옷
이 처음이어서였는지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가격은 55달러로 싼 편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내 시선을 붙들어 매놓은 건 가터 벨트였다. 허리를 조이면서 스토킹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가터 벨트는 외국 영화나 포르노에서나 나올 뿐, 한국 여배우들이 입고 나온
걸 본 적이 없었다. 왜 다른 건 다 따라하면서 가 터 벨트를 잘 입고 나오지 않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
었다. 영화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껏 한 번도 가터 벨트를 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스토킹이
너무 긴 탓인지 치마를 벗겨 보면 허벅지에 밴드를 둘둘 말아 동그랗게 만든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리
가 짧은 한국 여자들에게 스토킹은 너무 길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 곽 재은은 언제나 가터 벨트를 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가터 벨트가 있었다.
나는 레이스로 장식된 검은 빛이 감도는 초록색 가터 벨트의 가격을 마우스로 눌렀다. 곧바로 주문서가
화면에 나타났다. 카마가 준 신용카드 번호와 내 주소를 적어 넣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주문한 건 아니
었다. 여자 속옷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가터 벨트였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나 는 주문
서를 바로 프린트했다. 프린터에서 나오는 주문서를 눈 앞에 보이는 벽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벽에 덕지덕지 메모지를 붙여 놓는 건 내 버릇이었다. 카피를 쓸 상품 사진이나 중요한 약속을 쓴 메모
지들이 아직도 그대로 벽 에 붙어 있었다. 깨끗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다 떼내고 도배를
하든지 색지를 붙여 정리를 하려고 들겠지만 난 별 로였다. 그냥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붙어 있다가 제
풀에 떨어지면 주워 치우는 정도였다.
섹시 레더 웨어를 파는 입구를 찾아갔다. 속옷의 재료가 가죽이라는 것 빼고는 섹시 웨어를 파는 곳의
내용물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포르노에서 볼 때는 징그럽기만 하던 그
가죽옷들이 감히 만질 수도 없는 값비싼 보석같이 빛이 났다. 가죽이라 속이 내 비취지 도 않고 검고 차
가운 질감이 공포를 자아내는 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마력같은 게 있었다. 마치 금지된 일을
몰래 할 때의 짜릿함 같은 거였다.
얇은 체인이나 쇠 조각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목걸이나 브래지어, 허리띠, 팬티와 가터 벨트, 그리고 긴
부츠와 팔뚝까지 입는 손가락이 드러나는 장갑 하나하나를 차례로 눈여겨 살펴보다가 한 세트로 파는 가
죽 속옷 사진 앞에서 손을 멈췄다. 체인을 여러 겹으로 겹쳐 축 늘어뜨린 목걸이와 젖가슴이 드러나게
구멍을 뚫은 브래지어와 단단히 허리를 졸라매고 있는 가터 벨트와 음부가 드러나게 갈라진 팬티와 발부
터 허벅지까지 꽉 끼는 가죽 부츠를 신은 모델이 말 채찍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다. 각각의 가격을 다 합
치면 300 달러에 가까웠다. 그걸 사서 카마의 남편에게 보내주면 놀라겠지 하는 생각이 떠올라 피식 웃
고 말았다. 카마야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중독자인 남편에게 물이 들지 않
았다면 왜 나를 이런 곳으로 보냈겠 나 싶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인터넷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 [잘 구경했습니다. 근데 저한테는 필요없는 물건들만 잔뜩 있더군요. 왜 저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얘기
해 줄 수 있습니까?]
내가 식탁에 앉아 광어회를 잔뜩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을 때 카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카마는 다짜고
짜 말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단 말야? 거짓말 하지마.]
나는 대꾸를 하려고 입에 있던 광어회를 재떨이에 뱉어냈다. 그러나 카마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쇼핑을 해. 카드는 뒀다 뭐해?]
[뭘... 말입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네가 갖고 싶은 거. 아무 거나 좋아. 그것들로 네 방을 채워. 그리고 주문한 목록
은 내게 보내.]
[그런 게 필요가 없는데요?]
카마는 소리를 빽 질렀다.
[시끄러! 그냥 하라면 해!]
카마가 나를 너무 막 대하는 게 아닌가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나는 카마에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알았습니다. 특별하게 필요한 건 없습니까? 혹 제가 빠뜨리면 안되는 물건이 있다든지...]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네. 누가 주인인지를 깨닫는 거, 너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해.]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듣는 자이지 말하는 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잊지 마. 쇼핑한 물건 목록! 내가 필요한 건 그것뿐이야. 알겠어?]
[네.]


11장

카마는 내가 보낸 쇼핑 목록에 만족스러워 했다. 카마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상점을 돌아다
니며 눈에 띄는 물건들을 다 주문했다. 카드로 긁은 금액이 대충 따져도 2,000 달러가 넘었다.
[몇 가지 필요 없는 물건도 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물건이 도착하거든 포장을 뜯지 말고 그대로 놔
둬. 찾으러 보낼테니. 그리고 정각 열두 시에 예약을 해 놨으니까 열 한시 반까지 내 홈페이지로 와.]
카마와의 게임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카마의 말을 거역할 힘은 없었다. 시간에 맞춰 찾아
간 카마의 홈페이지에서는 지난 번과 같은 요란한 환영 행사는 없었다. 지도가 펼쳐진 페이지가 바로 나
를 맞 았다. 지난 번에 갔던 마을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강 가에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별장처럼 지어
진 집이 보였다. 자주색으로 칠해진 목조 건물인 그 별장만이 지도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카마의 목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 나왔다.
[괜찮은 별장이지? 좀 유럽풍이긴 하지만. 난 이런 별장이 좋아.]
어머니도 한탄강 부근에 콘크리트로 지은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강변에서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
었는데, 울창한 나무들 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강으로 향한 창은 모두 푸른
빛이 감도는 통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 빼고는 별 볼 게 없는 별장이었다.
[오늘 네가 만날 여자는 킴이야. 오 진택으로 예약해 두었어. 먼저 킴과 즐겨. 하지만 흥분해선 안돼.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 남편이 킴의 단골이거든. 킴을 만나러 샌프란시스코에 몇 번 갔다왔을 정도
야. 테오 장이라면 알 거야. 내 남편이 어떤지 알 아봐.] [어떤지라니... 너무 막연합니다.]
[정말 어떻게 하는 걸 좋아하는지, 어떤 여자들과 어울리는지 알아보란 말야. 킴은 순순히 말해 주지 않
을 거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알겠어?]
나는 별장 문 앞에서 예약을 확인 받고서야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가 약속 10분 전이었다. 거
실처럼 꾸며진 화면이 내 앞에 펼쳐졌다. 화면 정면에 걸려 있던 초대형 벽걸이 텔레비전이 환해지면서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하이, 미스터 오? 약속 시간까지 지루함을 달래드릴 수잔이에요.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지만 말고 소파
에 앉으세요. 아, 좋아 요. 이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세요. 한결 낫죠?]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수잔은 스튜디어스 복장이었다. 보통 스튜디어서와 달리 치
마가 엄청나게 짧고, 플 레이보이 모델처럼 예쁘고 쫙 빠졌다. 녹화에 문제가 있는지 전송에 문제가 있
는지 화면이 약간 부자연스럽기는 했지만 눈요기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저는요, 가끔 당신이 제 엉덩이를 찰싹 소리나게 때려주는 꿈을 꾼답니다. 제 엉덩이가 어때요?]
수잔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엉덩이를 내 쪽으로 향한 채 제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
으면 제가 부끄러워요. 어서 손을 뻗어 제 예쁜 엉덩이를 만져 보세요.]
당신도 알겠지만 그 엉덩이는 실제로 만져볼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차가운 화면이나 만지게 될 뿐이었
다. 수잔은 머리에 쓰고 있던 앙징맞은 캡을 벗으면서 애교를 떨었다. [제가 예쁘지 않아요? 저를 가지
고 싶지 않으세요?]
수잔은 꽉 조이는 느낌을 주는 검은 상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전 스튜어디스지만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다 하죠. 어때요? 제 가슴.]
수잔은 하얗게 드러난 젖가슴을 두 손으로 받치고는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고개를 야하게 흔들며 말했
다.
[전 아직 열 아홉밖에 안 됐어요. 섹스를 해 본 적도 없어요. 보세요, 제 젖꼭지가 얼마나 예쁜지. 전
당신이 벨을 울리기만 기 다려 왔어요.]
수잔은 한 손을 천천히 길고 가느다란 배꼽 아래로 밀어 내렸다. 긴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
시선은 따라갔다. 수잔의 손가락은 금방 치마 속으로 사라졌다. 수잔은 다른 손으로 목과 턱을 어루만지
며 콧소리를 냈다.
[아, 아아흐... 당신은 정말 대단할 거에요. 절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전 당신을 원해요. 보세요. 제 몸
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 올랐는지. 어서요. 어서 와요. 내 사랑.]
내 성기는 어느 정도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별로 흥분되지 않았다. 수잔이 시간 떼우기용
비디오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잔이 타이트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바닥에
주저 앉아 다리를 쫙 벌린 채 크리토리스를 제 손으로 애무하는 모습을 보고도 내 몸은 별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점점 커지고 있는 수잔의 교성이 도리어 신경에 거슬렸다. 내 시계로는 12시가 다 되어 있었
다.
[어서요. 날 좀 어떻게 해 줘요. 제발. 더 이상 못 참겠어요. 네? 으하아...]
수잔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질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나를 유혹했다. 수잔의 음부로 앵글이 맞춰지면서 화
면에 붉고 검은 빛이 가 득해졌다. 스피커에서는 계속 수잔의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뿐이었다.
[오래 기다렸죠? 킴이에요. 어서 오세요.]
차분하게 깔리면서도 섹시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베이지색 가죽으로 덮힌 소파에
약간 기댄 금발을 짧게 자른 회색 눈의 킴의 전신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킴은 윤기가 도는 정장 스타일
의 검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커다란 링 모양의 은제 목걸이와 산호색 반지가 내 눈길을 끌었다 . 빨
간 루즈를 얇게 바르고 작은 금테 안경까지 쓴 채 다리를 꼬고 있는 폼이 꼭 샤론 스톤의 도도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시간은 돈이죠. 뭘 원하시죠?]
킴은 나를 무시하는 듯 약간 깔아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킴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킴의 별장도 여느 별장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꾸며져 있었다 . 그러나 한 가지 잇
점이 있다면 킴이 내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컴퓨
터에 카메라가 붙어 있다고 해도 내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마이크도 연결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는 쪽을 택했다. [당신은 남자를 지배하는 스타일입니까?]
킴은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최소한 당신은 매조키스트가 아니군요. 그렇다고 새디스트도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하게 뭘 원하죠?]
낯선 식당에 들어섰는데 메뉴판도 보여주지 않고 주문을 재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태도였다. 킴처
럼 고자세인 여자는 인터 넷에서 처음이었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자판을 두드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운을 떼어놓고 포스트 잇에 적어놓은 카마의 남편 이름을 확인했다.
[내 친구 테오 장처럼 하길 원합니다. 테오를 잘 알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킴은 철저하게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손가락은 유연하게 움직였다.
[당신이 모른다니 이상하군요. 테오가 당신을 만나러 몇 번이나 샌프란스시코까지 갔었다던데...]
킴은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금방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아하, 그 한국인 미스터 장? 하지만 꽤 돈이 많이 들텐데요?] [그 정도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자, 시
작해 볼까요?]


나는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킴과 했던 일을 글로 옮긴다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저... 그러니까 테오는 관음증이 심한 새디스트였습니다.]
이렇게 첫 줄을 쓰고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킴은 저를 지하 감옥처럼 생긴 음침한 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고문실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킴 은 로프에 꽁꽁 묶인 채 천정에 매달린 동양 여자를 남겨두고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그 동양 여자의 입에는 재갈이 물 려져 있었습니다. 매달려 있기 힘든지 계속 신음 소
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킴은 광택이 나는 검은 가죽 콜셋을 입고 나타났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의 뒷굽은 10센
티미터가 훨씬 넘어 보 였다.
[킴은 벽에 걸린 채찍 중 승마할 때 쓰는 가죽 채찍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동양 여자의 엉덩이를 사정
없이 때리기 시작했습니 다. 동양 여자의 얼굴은 금방 시뻘개졌고 괴상한 신음 소리가 났습니다. 킴은
채찍질을 멈추더니 다시 신음 소리를 내면 정해진 횟수보다 두 배로 더 채찍질을 하겠다고 앙칼지게 소
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동양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동양 여자의 얼굴을 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라도 나처럼 외면하고 싶
었을 것이다. 내가 망설 이고 있는 사이에 킴은 30대도 넘게 채찍질을 했다. 스폿 라이트를 받고 있던
동양 여자의 엉덩이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러나 동양 여자는 용케 잘 참아내고 있었다.
[당신이 특별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요구의 종류에 따라 가격이 틀리다는 거 알겠죠?]
[난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좋아요. 계속 할테니 마음이 바뀌면 말해요. 이번에는 좀 더 자극적인 걸로 바꾸겠어요.]
[킴은 가죽 벨트를 골라 동양 여자의 등을 후려쳤습니다. 킴이 말했죠. 동양 여자가 벨트를 이겨내는 한
계는 스물 다섯대라구요 . 스물 다섯대를 때리고 난 후에 킴은 두 대를 더 때렸습니다. 한계를 연장시키
기 위해서라더군요. 그 다음으로는 밤송이처럼 생 긴 빗을 가져와서 동양 여자의 젖꼭지를 때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 조그만 젖꼭지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사정없이 빗을 세워 때렸 습니다.]
나는 그때 내가 그만두는 게 그 동양 여자를 위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 그만해요.]
그러자 킴은 나를 향해 알듯말듯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이쪽 사람이 아니군요. 몇 년 전 테오가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는 꼭 당신 같았죠. 그렇게
겁먹지 말고 이렇게 생 각해 봐요. 당신 마음대로 여자를 모욕주고 때리고 있다고요. 당신의 머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섹슈얼한 환상이 현실이 되 는 순간이에요. 긴장을 풀고 즐겨요.]
나는 도리질을 하며 자판을 두드렸다.
[제발 그만...]
[당신이 정말 이 동양 계집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면 이 계집이 황홀경에 빠지도록 계속 맞게 내버려
둬야 해요. 쾌락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이 계집이 불쌍하지도 않나요?]
킴은 동양 여자의 머리채를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내 말이 틀려?]
그러자 동양 여자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새디즘이나 매조키즘 포르노를 통해 이런 장
면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실제로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킴은 내 마음을 읽고 있는 듯 했습니다. 서커스
맹수조련사가 들고 다니는 길다란 채찍을 가져와 동양 여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채찍이 볼
에 닿을 때마다 검은 피멍이 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그냥 컴퓨터를 꺼버렸습니
다. 그게 제게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유일한 방법? 내숭 떨지마.]
카마는 인터넷 메일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는지 좀 흥분해 있었다.
[너희 남자들은 다 새디스트야. 특히 한국 남자들 말야!]
나는 카마의 목소리에 눌려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채찍질 당하는 것만 고통스러운 게 아냐. 여자를 노예처럼 생각하는 남자들의 그 못된 사고방식이 더
고통을 주지, 안 그래!]
[전 그런 남자가 아닙니다.]
[흥! 웃기고 있네. 중간에 빠져나왔다는 게 핑계가 될 줄 알아? 그런 걸 싫어했다면 처음 채찍질을 할
때 나왔어야지. 너도 즐 긴 거야. 그렇지?]
[당신 남편이 거기서 뭘했나 알아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젠 말대꾸까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려 들었는지, 내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카마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달래듯 말했다.
[넌 나한테 항상 솔직해야 해. 내 말 알겠어? 그러니까 속마음을 털어놔. 정말 어땠는지 말야.]
이왕 내친 걸음이다 싶었다.
[좋습니다. 처음엔 포르노 테이프를 본다는 정도로 생각되서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나를 위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묘한 쾌감같은 게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게
좋다는 쪽의 감정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저는 그때의 제 감정을 아직도 제대로 모릅니다. 왜 해선 안되는 일을 할 때의 아슬아슬한 감정 있잖습
니까?]
[그리고?]
카마는 집요하게 추궁해 왔다. 그렇다고 내가 달라질 건 없었다.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고수 했다.
[내가 물을 땐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돼. 알겠어? 아직 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르는 것 같
아. 혹시 나를 곽 재은 정도도 안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곽 재은과 카마를 비교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질적으로 틀린 상대를 같은 저울로 잴 수 없는 일 아닌가? 카마는 내 침묵이 무
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네게 곽 재은의 본 모습을 보여주겠어. 그걸 보고 나면 네 생각이 엄청 달라질 걸? 네 컴플렉스도 해소
되겠지. 나한테 감사해 야 할 거야.]
[네?]
내가 카마의 그 말 뜻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뒤따랐다. 바로 그날 카마는 사람을 보내 내 여권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음날 뉴욕 행 왕복 비행기표와 함께 여권을 되돌려 주었다. 카마는 전화로 말했다.
[뉴욕에 도착하면 누군가 널 마중나와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해.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에 대한 네 태도가 엄청나게 변할 거야. 날 숭배하게 되겠지. 내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곽 재은을 완
전히 제거해 줄테니까. 호호호.]
뉴욕에서 나를 기다린 건 썬팅이 된 흰 리무진과 라틴계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눈썹, 크고 맑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 여자의 이름은 비니였다. 비니는 자극적인 노란 미니 원피스를
입은 채 내 옆에서 계속 말을 시켜서 창 밖을 내다볼 틈도 없었다. 비니는 도심에 있는 최고급 호텔에
방을 얻어 두었다.
[피곤하면 한잠 자 둬요.]
비니는 간이 바에서 가져온 크리스탈 잔에 담긴 위스키를 건네 주며 말했다. 나는 단숨에 위스키를 비웠
다.
[그렇게 긴장할 거까진 없어요. 제가 옆에 있잖아요.]
카마는 뉴욕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비니도 내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 물고 있었다. 기다리면 모든 걸 알게 될 거란 식이었다. 위스키를 거푸 세 잔을
마시고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귀를 간지럽히는 야릇한 느낌 때문에 눈을 뜨니 비니가 내 귀
를 핥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비니는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트인 파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큼직한 자수정 목
걸이와 귀고리가 눈을 시 리게 했다.
[당신 옷은 저기 있어요.]
비니가 가리키는 옷걸이에 턱시도가 걸려 있었다. 어디 파티라도 갈 모양이었다. 비니는 시녀처럼 공손
하게 내 옷을 벗기고 턱 시도를 입혀 주었다.
[이제 파티를 즐기러 가요.]
호화스러운 집이 줄지어 선 동네로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솔직히 말해 턱시도를 입고 가야 하
는 파티는 내게 처음이라 좀 긴장이 되었다. 리무진은 넓은 잔디밭 사이로 난 아스팔트를 지나 대리석과
목조로 지어진 고풍스런 저택 앞에 도착했다. 촌놈처럼 눈만 껌벅이고 있는 내 손을 비니가 다정하게 잡
아 당겼다. 리무진이 스르르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니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다 왔어요. 여기가 바로 바닐라 클럽이에요. 짖굳은 이름이죠?]
[짖굳다?]
그때 나는 비니가 왜 바닐라 클럽이란 이름을 짖굳다고 했는지 몰랐다.
[이 클럽에서 벌어질 일을 잘 모르신다면서요? 체인징 파트너란 거 들어 봤어요? 그거에요.]
가끔 천리안 성인 클럽 게시판에 가면 30-40대 부부를 찾는다는 사람이 있었다. 생활에 활력을 주기 위
해 성적인 만족을 교환할 부부가 있으면 연락하라는, 한마디로 웃긴 광고였다. 비니는 내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애인 사이에요. 당신 이름은 헨리 강. 잊지 말아요. 그리고 내 옆에서 절대로 떨
어지면 안되요. 다른 여 자가 말을 붙여와도 무시해 버려야 해요.]
비니는 내게 선글라스를 끼워주었다.
[당신한테는 이 편이 훨씬 편할 거에요.]
자주 왔던 곳인지 비니는 거침없이 정문으로 향한 계단으로 올라갔다.
[여긴 헨리 강. 내 새 애인이야.]
[왜 이렇게 늦었어? 벌써들 시작했는데...]
눈 가에 잔주름이 진 갈색 머리의 여자가 나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서 연방 끈적끈적한 미소를 던
졌다.
[여긴 산드라. 이 집 주인이야.]
비니는 정말 애인인 것처럼 내게 몸을 기대며 아양을 떨면서도 연신 홀 안을 살펴 보았다.
[낸시는?]
몇 십명이 한꺼번에 무도회를 열어도 충분할 그 홀 중앙에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무대 위에는 지붕이
없는 집이 지어져 있었 는데 커다란 창문과 목조 문은 열린 채였다. 그 무대를 빙 둘러 원탁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온갖 종류의 술병으로 가득한 바가 있었다. 잘 차려입은 남녀 가 무대 가까
운 원탁에 듬성듬성 앉아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는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쪽보다는
무대 옆에는 대형 멀티비젼으로 눈길이 쏠렸다. 멀티비젼에는 여러 쌍의 남녀가 난교를 벌이는 화면이
비춰지고 있 었다.
화면 위쪽에 네비게이터의 메뉴바가 있는 걸로 봐서 인터넷 티브에서 방영되는 포르노인 모양이었다. 산
드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던 비니가 내 팔을 살짝 잡아 끌었다. 나는 산드라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비니를 따라갔다. 비니는 무대 바로 아래, 그러니까 무대 위의 집 창문 너머
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면서 그 집 안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자 리에 나를 앉혔다.
[창문 안을 살펴 봐요.]
나는 비니가 시키는 대로 약간 고개를 빼고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언지 알
게 된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웃음 소리에 섞여 있어서 정체가 분명하지
않던 묘한 신음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무대 위의 집 안에서는 발가벗은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뒤엉킨 채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건장한 백인 남자는 침대에 누운 채 검은 머리 여자의 젖가슴을 하
고 있었고, 금발 여자는 요란스러운 고개짓을 하며 남자의 성기를 빨고 있었다.
[잘 봐요. 저 검은 머리가 바로 당신이 찾는 낸시에요.]
머리를 숙인 채 젖가슴을 빠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신음하고 있던 검은 머리 여자가 못참겠다는 듯 머리
를 흔들며 고개를 하늘로 치켜 들었다.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 그 여자의 게슴츠레한 눈과 내 눈이 스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젖
혔다. 그 러자 비니가 내 팔을 붙잡았다 .
[뭐가 잘못 됐어요?]
목까지 말이 차 올랐지만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목이 경직되어 버렸다.
낸시라고 불린 그 여자 는 다름아닌 곽 재은이었다. 비니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그랬는지 바짝 내 옆에
붙어 앉았다.
[낸시는 양성애자에요. 이 사교 클럽에선 유명하죠. 저기 바에 앉아 있는 갈색 머리 보이죠?]
어깨가 딱 벌어진 백인 남자가 여유만만하게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낸시와 5년째 동거하고 있는 지미에요. 공인회계사지요. 저 사람도 양성애자에요. 여기 모인 여자 대부
분이 양성애자지만 난 안 그래요. 난 레즈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룹으로는 안하고 남자와 일대일로만
해요.]
비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비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내고 곽 재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곽 재은은 남자의 가슴에 올라타고 앉아 그 가슴에 엉덩이를 마구 비벼대고 있었다.
[이런 건 물어보지 말랬는데요...]
비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내 시선은 곽 재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처럼 순진해 보이는 사람이 왜 낸시 같은 여자를 찾는지 모르겠어요. 말해 줄래요?]
나는 엉덩이를 남자의 얼굴 쪽으로 옮기는 곽 재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안해요. 당신이 원했다면 지금이라도 저기 가서 낸시와 어울릴 수도 있어요. 낸시 아래에 있는 샘은
양성애자는 아니지만 당 신이 샘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뭐라고 하진 않을 거에요.]
곽 재은의 신음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사람은 겉으로 봐서 모르는 거야. 어때? 이제 곽 재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카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왜 그런 걸 보게 했냐고 따져야 할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
나 그런 두 생각이 묘하 게 섞여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닮은 여자도 많지 않습니까?]
솔직히 나는 낸시라는 여자가 곽 재은이란 걸 믿으려 들지 않았다. 곽 재은이 그런 여자여서는 내 꼴이
불쌍하게 되는 거였다.
[그럼, 내일 곽 재은에게 전화해 봐. 오늘 밤에 도착하거든.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어. 그냥 낸시 블레
어를 아느냐고만 물어봐 .]

[낸시 블레어 하고 무슨 사입니까?]
망설이느라 오전을 다 보내고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서야 곽 재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곽 재은은
금방 내 목소리를 알아 차렸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에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곽 재은는 목소리를 낮춰 애원조로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습니까?]
[사진까지 보내놓고 그건 왜 물어요?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사진이라니?]
곽 재은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원했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날 곤란하게 만들진 말아요. 그러지 말고 당장 만나요. 어디가 좋
겠어요?]
[다시 연락하지.]
곽 재은과 낸시가 동일 인물이란 확신이 서자 내 말투도 바뀌어 버렸다.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네가 원했다면 곽 재은을 회사에서 쫓겨나게 만들 수도 있어. 이제 내 힘을 알겠어?] 나는 카마에게 꼼
짝없이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나는 어눌하게 물었다.
[저어... 그러니까... 어떻게... 곽 재은...의 비밀을...]
[알아냈느냐?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줘. 이번 일에 만 달러 들었어. 내게 빚진 거야. 잊지마.]
내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카마가 빠르게 말했다.
[요즘 네 어머니 뒤를 캐고 있거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네 집안 미래가 달렸어. 내 말뜻, 알겠니?]
목이 잠겨 겨우 대답했다.
[네.]
카마는 통쾌하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카마는 목소리를 다정하게 바꿔 말했다.
[이번에 네가 할 일을 알려줄게. 곽 재은을 만나. 그리고 복수를 해. 네 컴플렉스를 완전히 떨쳐 버리란
말야. 네가 어떻게 해 도 아뭇 소리 못하고 따를 거야. 좋은 기회지?]
카마와 통화가 끝나자마자 여느 때처럼 자동응답기 녹음장치의 정지버튼을 누른 후 소형 녹음 테이프를
꺼냈다. 테이프 라벨에 날자를 적은 후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었다. 그걸 오른쪽 책상 서랍 속에 날자 별
로 정리되어 있는 테이프 케이스들 옆에 세워 놓았다. 아직 쓰지 않은 녹음 테이프 하나를 꺼낸 후 서랍
을 닫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12장

곽 재은과 만나기로 한 63 빌딩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도로 오른쪽으로 훤하게 불을 켜고 있는 주
유소가 보였다. 기름 넣 을 때는 멀었지만 핸들을 꺽어 주유소로 들어갔다.
[가득 채워.]
나는 주유소로 들어오는 검은 차를 발견하고 짧게 말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여의도를 한바
퀴 빙돌았다. 시간에 맞춰 63 빌딩 앞에 도착하니 곽 재은이 약속대로 길 가에 서 있었다. 곽 재은은 회
색 쟈켓과 같은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쟈켓 안에는 검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얄팍한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 다. 겉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이 당당했지만 불안한 듯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계속 두리
번거렸다. 내가 경적을 울리자 곽 재은은 허리를 굽혀 나를 확인했다. 곽 재은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디든 어서 가요.]
나는 백 밀러를 통해 뒤쫓아 오는 차가 없나 확인하면서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아까 주유소에서 본 검은
차는 보이지 않았다.
[잘못 짚었나?]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곽 재은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내가 더 말이 없자 고개를 앞으
로 획 돌렸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곽 재은은 호텔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반말은 아니었다. 나는 곽 재은의 시선을
피하며 창 가로 걸어갔 다. 곽 재은은 나를 쫓아오며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딱딱하게 굴었던 거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업무상 어쩔 수 없어서 그랬지 당신에게 감
정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구요.]
창 가에 놓인 응접 소파에 앉으며 곽 재은에게 건너편 소파를 가리켰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거기 좀 앉아요.]
곽 재은은 열이 나는지 상의를 벗어 팽개치듯 침대 위에 던지고서야 소파에 앉았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
다.
[난 당신 성생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당신 자유니까요.]
곽 재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양성애자면 어떻고 동성애자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곽 재은은 말을 가로채며 상체를 내 쪽으로 숙였다.
[문제는 뭐죠?]
곽 재은의 눈부시게 흰 목과 불룩한 가슴 윗 부분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당신과 내 인연이 악연이었다는 겁니다.]
곽 재은의 양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악연? 그게 무슨 뜻이죠?]
나는 다리를 꼬며 몸을 뒤로 젖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나는 같은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사이란 말입니다.] [말을 빙빙 돌리
지 말고 남자답게 말해 봐요.]
나는 그 말에 양미간을 찌푸렸다. 곽 재은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쓰던 말이었다. 뭘 그렇게 망설이느냐?
그렇게 용기가 없어? 무슨 남자가 그러냐? 정말이지 성차별적인 그런 발언들이 얼마나 나를 처참하게 했
다. 그 사실을 곽 재은은 몰랐거나 일부러 이용했을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입장이 바뀐 걸 아직 모르나 보지?]
나는 그렇게 똑 쏘아 붙였다. 그러자 곽 재은은 좀전까지와는 달리 완전히 딴 얼굴로 앙칼지게 말했다.
[흥! 치사한 자식. 내가 널 경찰에 고소하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워 해야지. 어디서 허튼 수작이야?]
정말 뜻밖이었고, 충격이었다. 뭘 믿고 곽 재은이 갑자기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는지 알 수 없어 어리
둥절했다. 곽 재은은 정말 동네 건달처럼 말했다.
[너같은 피라미한테 당할 내가 아니야. 알아?]
같이 흥분했다가는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담배를 피워 물고 곽 재은을 깔아 보았다. 곽 재은에게도 내
반응이 뜻밖인 모양이었 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침묵을 고집하였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가 걸려올 데가 없었 다. 나는 주저하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수화기를 들
어올렸다.
[고전 중이지? 안 봐도 뻔하지.]
카마였다.
[좀만 시간을 끌어 봐. 곽 재은이 아뭇 소리 못하게 할 게 그쪽으로 가고 있거든.]
절대로 카마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절망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내 고개가 스르르 떨구어졌다.
굉한 머리 속에서는 술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룸서비스를 불렀다. 곽 재은은 나
를 계속 다그쳤지만 나는 석상처럼 뻣뻣히 서서 창 밖만 내다 보고 있었다. 정지해 버린 것 같았던 시간
을 뚫고 벨 보이가 왔다. 벨 보이가 끌고온 카터 위에는 주문한 위스키와 과일 안주 외에 포장된 물건이
있었다.
[손님께 갖다드리면 안다고 하시던데요?]
나는 누가 그랬냐고 물을 뻔했다. 묻지 않아도 뻔했다. 위스키를 한 잔 쭉 들이키고는 포장을 뜯었다.
곽 재은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촬영이라도 하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고 있었 다. 아무 말도 하지 않
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었다. 포장 안에 든 물건은 비디오 테이프였다. 테이프의 라벨에는 바닐라 클
럽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곽 재은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뭐야?]
[일단 보라구.]
나는 브티알 일체형인 텔레비전에 테이프를 밀어 넣은 후 소파로 돌아가 텔레비전 방향으로 틀어 앉았
다. 곽 재은도 속이 타는 지 위스키를 조금씩 마시며 텔레비전으로 눈길을 던져 두었다. 화면에는 화려
한 중세풍의 방이 나타났다. 방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침대에 전라의 흑인 남자 둘과 여자 하나
가 있었다. 여자는 곽 재은이었다. 나는 곽 재은을 힐끗 쳐다 보았다. 공포에 질린 곽 재은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화면 속의 곽 재은은 음부를 내 보인 채 팔뚝만큼이나 긴 흑인의 성기
를 양손에 잡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하드를 빨 듯 맛있게 빨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으으윽...]
성기를 빨리고 있던 흑인이 크게 신음 소리를 내자 곽 재은은 다른 성기를 빨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허연 정액이 곽 재은의 볼에 쏟아졌다. 정액을 받아 먹으려고 곽 재은이 혀를 낼름거리는 찰라, 다른 성
기에서 정액이 쏟아졌다. 정액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곽 재은은 함박 웃음을 지었다. 곽 재은이 벌떡 일
어서는 걸 나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화면은 풀장으로 바뀌었다. 곽 재은은 화면의 왼쪽
에서 가운데 누워 있는 백인 여자의 혀를 탐욕스럽게 빨고 있었고 오른쪽에 있던 흑인 여자는 백인 여자
의 음부에 코를 박고 있었다 .
[그만해. 그만 하라구.]
곽 재은은 텔레비전으로 달려가며 소리 질렀다. 나는 곽 재은을 막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끄고 돌아선
곽 재은의 눈빛은 표독스 럽기 그지 없었다. 다른 때라면 그 눈을 얼른 피해버렸을 게다.
[이 테이프, 얼마나 카피해 뒀지? 얼마면 되겠어? 응?]
카마가 내 멱살을 부여쥐고 있는 것 같아서 곽 재은의 비참한 모습에도 나는 행복해지지가 않았다.
[이 개자식!]
곽 재은은 테이프를 꺼내 바닥에 내팽개치며 악을 썼다. 사실 나는 곽 재은에게 뭘 바라는 게 없었다.
곽 재은이 나를 짓누를만 한 존재가 아니란 것만 확인하면 됐다. 그리고 그런 확인은 이미 뉴욕에서 끝
낸 상태였다. 난 허탈감에 사로 잡혀 온 몸에 맥이 풀려 버렸다.
[됐어. 넌 네 자리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목에 힘주고 살아. 더는 나를 볼 일이 없을 거고. 약속하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는 내게 곽 재은이 소리를 질렀다.
[너, 날 잘못 건드렸어.]
[난 널 건드린 적 없어. 건드릴 가치도 없지. 처음부터 네가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인 줄 알았어야 하는
건데... 허허.]
나는 축쳐진 어깨를 보이며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방문에 가 닿은 게 있었다. 내
귀를 스치며 날아온 그 테이프였다.
[야이, 변태 새끼야.]
곽 재은은 영어로 소리 질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무섭게 곽 재은을 노려보
며 말했다.
[난 절대 변태가 아니야. 변태는 너지.]

[너, 약속해. 절대로 날 믿고 따르겠다고.]
카마는 집으로 돌아와 축 늘어진 나를 잠시 틈도 주지 않고 전화 앞으로 불러 세웠다. 내 지친 심사쯤이
야 안중에도 없는 모양 이었다.
[네.]
[또 약속해. 날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다고.]
나는 역시 맥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네.]
[내 말에 따르는 동안 네게 행복이 머문다는 걸 잊지마.]
[네.]
[왜 안 좋았니? 네가 바란 게 그런 거 아니었니?]
[내가 그랬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나는 그냥 침묵을 고수했다.
[네가 바랬건 바란 게 아니었건 상관 없어. 오늘 일로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았을테니
까.]


13장

당신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깊은 산 암자에 가부좌를 튼 선승과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고 해야 고작 은행이나 수퍼마켓이나 비디오 대여점에 들르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먹고 자고는 시간을 뺀 거의 모든 시간을 면벽을 하듯 컴퓨터를 마주보며 산 셈이었다.
내 시간들은 마구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아침과 저녁, 새벽과 한낮의 구분도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몸이 원하는대로 움직였다. 컴퓨터를 통해 온갖 기호와 정보들이 햇살처럼 내 눈을 향해 내리꽂혔
다. 나는 감당하기에 벅찬 그 엄청난 기호와 정보들 앞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당신이 보기에는 내
가 자포자기한 걸로 볼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고의적으로 내 모든 가치와 정보
체계 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로부터 구속되지 않는 내 근원을 찾아낸 후 전혀
새로운 나를 건설해 나가기 위한 예비 작업일 뿐이었다.
물론 카마라는 암초에 걸릴 때마다 번번히 내 방어 체계를 복구시켜 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이미
내 방어 체계는 복구의 가능성이 희박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카마가 들러보라고 한 밴디스트 사
이트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컴퓨터 화면에는 일본 여자가 밧줄에 묶인 채 꿇어 앉아 고개를 쳐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
정이 꼭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비웃는 거 같던 여자의 표정이 제발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여유만만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는 그 여자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새끼 손가락 굵기의 파란색 로프가 뒷짐을 진 여자의 팔과 몸통을 정교하게 묶여져 있었다. 거
기서 연결된 두 가닥은 여자의 엉 덩이로 이어져 있었다. 산처럼 치솟은 엉덩이 사이로 사라진 그 로프
는 허벅지와 종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엉덩이가 사진의 키포인트인 모
양이었다. 나는 달덩이 같은 엉덩이에 시선을 던져두고 멍하게 앉 아 있었다. 그냥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엉덩이 너머 채찍을 들고 선 남자의 사진에 서 내 시선이 멈췄다.
그 사진은 초점이 맞지 않아 얼굴이 분명치 않았으나 그게 더 좋았다. 그 얼굴이 내 얼굴로 바뀔 수 있
는 여지도 있으니까 말이 다. 순간적으로나마 카마가 바로 엉덩이를 치켜든 그 여자가 되고 내가 그 남
자가 되었으면 했다.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카마의 온 몸을 후려 치고 나면 속이 시원해 질 것만 같았
다. 카마가 돈 많은 남자들이나 유혹하는 갈보같은 여자나 돈을 받고 맞기도 하는 여자라면 돈다발을 싸
들고 가서라도 원껏 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로프에 결박당한 다른 여자들의 사
진과 동영상까지 남김 없이 보고서야 그곳을 빠져 나왔다. 상상이었지만 그 사이에 얼마나 많 이 그 여
자들을 구타하고 짓밟고 모욕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 덕분인지 속이 후련했고 머리도 맑아졌다.
[오늘 들른 밴디스트 사이트에서 나는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얼마간 해소했습니다. 아주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하지만 내가 상상 속에서 했던 일들을 실제로 하라면 아마 난 못할 겁니다. 미치지 않고 그
런 짓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뒷 부분은 완전히 거짓도 진실도 아니었다.
[그건 미친 것 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야. 쾌락을 얻는 방법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미쳤다고 단정지으
면 안 되지. 그건 마치 네가 낚시를 안 좋아했다고 낚시하는 사람을 모두 미쳤다고 하는 거나 같아.]
카마의 전화를 받고 나는 또 얼어 붙어 버렸다. 인터넷 메일을 보낼 때만해도 나는 카마에게 꿀리지 않
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 래서 궤변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카마의 말에도 나는 대꾸를 못하고 있었다.
카마는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결박을 당해야 성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몰라서 그럴거야. 변태라는 선입견
을 버려야 왜 그 사람들 이 그런지 이해를 하지. 넌 변태가 아닌 거 같니?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네가
변태야. 당장 어떻게 컴섹, 폰섹이나 하고 사냐고 할 걸?]
억울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설마요? 실제로 고통을 주지도 않는데 그게 무슨 변탭니까?]
[고통도 일종의 쾌감에 속하는 거 모르니? 그건 사람마다 느끼기 나름이야. 그리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성인이 음란한 글이나 말로 떠벌이는 게 비정상이지 몸을 부딪히면서 쾌감을 찾는 게 비정상이니? 강제
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서 그런다는데 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지 몰라.]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요, 당신도 그런 사람입니까?]
카마는 매섭게 되물었다.
[그런 사람이라니? 분명하게 말해봐.]
폰섹스를 할 때는 주절주절 말도 잘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못나긴... 난 있지? 앞에서는 안 그런 척하면서 뒤로 호박씨나 까는 인간들이 변태라고 생각해. 꼭 너
같은...]
아무리 기가 죽었다고 해도 그런 소리까지 듣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내가 무슨 변태라고 자꾸 그럽니까?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변태 같습니다. 변태들
을 옹호하는 궤변만 늘 어놓고...]
카마는 웃음 소리로 내 말을 가로 막았다.
[깔깔깔. 제법 대들 줄도 아네.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바닐라란 말을 들으면 바닐라 아이스
크림이 제일 먼저 생각날 거야. 근데 네가 말하는 변태들은 너처럼 평범하다고 악을 쓰는 사람을 바닐라
라고 부르거든. 흔하고 밋밋한 맛뿐인 인생, 그게 바닐라 인생이고 네 인생인 거야.]
나는 삐죽거리며 말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왜 밋밋합니까? 달콤하고 맛있기만 한데...]
[바보. 바닐라가 달콤한 게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달콤한 거지. 바닐라는 그냥 향신료일 뿐이야. 원했다
면 평생 바닐라만 먹고 살아 봐. 누가 그러지 말래? 하지만 계피나 생강을 넣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욕하진 말란 말야. 알겠지, 내 말 ?]
나는 카마가 슬슬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변태를 찾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카 마가 한낱 돈많은 남자에 붙어사는 정부에 불과하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으므로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나도 남편 때문에 성중독증에 대해 조사하다가 그 사람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거야. 이해는 하지
만 왜 그렇게 사는 건지 는 모르겠어. 난 아직 한 번도 누군가에게 묶여 본 적도 없고 맞아 본 적도 없
어. 때려본 적도 없어. 물론 너처럼 여자 옷 입고 헤헤거리며 사진을 찍은 적도 없지. 믿을지 모르겠지
만... 난 아직 처녀야.]
나는 내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정말 웃기는 소리였다.
[너 지금 웃고 있지? 바람 빠지는 소리 비슷한 게 들리는데?]
나는 수화기를 멀찍이 들고 겨우 대답했다.
[웃기는요. 다 믿습니다.]
카마는 목소리를 쫙 깔면서 말했다.
[웃고 싶으면 웃어. 결혼한 지 3년도 넘는 여자가 처녀란 걸 믿을 사람이 어딨겠니?]
사실 여부는 둘째였다. 애잔하게 밀려온 카마 목소리가 내 마음에 파문이 생기게 했다. 그 느낌은 내 머
리카락을 쭈뼛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마에게 다가갔다가는 엄청난 재앙을 맞
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휘감았다.
[참, 널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했어. 내일 아침이면 소식이 갈 거야.]
카마의 목소리에서 애써 기분을 살리려는 느낌이 묻어 나왔다. 카마가 전화를 끊은 후에도 나는 한참동
안 수화기를 내려 놓지 못했다. 가슴 한 언저리가 묘하게 쓰렸다.


14장

[오늘 하루를 아저씨랑 같이 지내야 해요.]
당신이라면 불쑥 찾아온 예쁜 여자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할 때 어떻게 하겠나? 화장도 하지 않은 여
자의 나이는 스물 두셋쯤. 질끈 뒤로 묶은 생머리에 헐렁한 노란 티셔츠와 물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
다. 나는 그냥 문을 열어둔 채로 침대로 돌아갔다. 잠은 다 달아나 있었지만 낯선 여자와의 서먹서먹한
시간을 일단은 잠을 핑계로 넘기고 싶었다. 그 여자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으며 내 방 안을 휘둘러 보
았다. 그리고는 곧장 창가로 가 창문을 열어 젖혔다.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등을 돌리며 담요를 뒤집어 썼다. 낮은 발자욱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스피커에서 나비 부인이 흘러 나왔다. 나는 아예 귀를 막아 버렸다. 동굴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한 삼십 분 정도 그러고 있다가 아랫배가 슬슬 당기는 바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그러나 곧장 화장실로는 가 지 못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웅크리고 앉아 어질어진 내
방을 치우고 있는 여자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파출부로는 안 보이는데...]
한 번도 눈을 찡그리지 않고 일하는 그 여자에게 내가 꺼낸 첫 마디가 고작 그거였다. 그러나 여자는 허
리를 굽힌 채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마가 자기를 드러내면서까지 직접 그 여자를 선
택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아가씨를 보낸 사람, 잘 압니까?]
여자는 허리를 펴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란 말, 천박하게 들려서 좀 싫어하는 편이거든요. 굳이 이름을 부르시려거든 마라라고 불러 주세
요.]
[마라라면...]
롯데 백화점에 있는 보석상 이름과 똑같았다. 온 피가 귀로 몰려 귀가 뻣뻣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절 보낸 분도 잘 알지요.]
그러나 역시 카마는 쉽게 얼굴을 내보이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내 방에서 뭘 하려는 건지 얘기를 할 차례 같은데요?]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한 여자는 방바닥에 모은 쓰레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이것들 좀 치우고요. 좀 주제 넘은 말인 것 같은데요, 먼지도 나고 하니까 그동안 세수라도 좀 하
시는 게 어때요?]
그렇잖아도 침대를 내려갈 핑계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변기 물통 위에 놔 두었던 담배를 피워 문 채 턱을 괴었다. 도무지 카마의 꿍꿍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속이 편해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나는 이빨을 닦으면서도
거울을 보고 있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머리를 감을까 말까 망설여졌다
. 그러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냐는 생각보다 괜히 마라에게 딴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비춰질지 모
른다는 생각이 강했다. 결국 세수를 하면서 머리카락에 물을 묻히는 정도로 끝내고 말았다.
오른쪽 귀 뒤 부분이 삐쳐나와 눈에 그슬렸지만 기어코 머 리는 감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눈
이 휘둥그레졌다. 길어야 20분 정도밖에 안됐을텐데 바닥은 물론 싱크대와 침대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얼른 아무렇게나 헝클어 놓았던 책상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책상 위는 그대로였다. 나올 때
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라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내게 건넸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아주 연하
게 탄 블랙 커피 였다.
[냉동실에 바다 가재 한 마리가 들어 있던데, 그걸 요리해 드릴까요?]
바다 가재를 맛본 적도 없을 듯한 허름한 옷 차림이었지만 말하는 모양새는 당장이라도 기가 막힌 요리
를 해낼 듯 했다. 나는 커피잔을 감싸 쥔 채 침대에 걸터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저 당신이 정말 누군지, 왜 나한테 이러는 건지부터 말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은데...]
마라는 커피잔을 들고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나는 경계하는 눈빛을 내비치며 엉덩이를 조금 옮겼다. 마
라는 커피를 애들처럼 호 호 불어 한 모금 마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직업은 정부였어요. 한때는 현지 처라고도 불린 적도 있어요. 창녀하고는 전혀 달라
요.]
마라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나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 집 안을 꾸미고 음식을 장만하고 남자와 같이 잠 잤지요. 섹스는 기본이었죠. 가끔은 저도 사랑이나
그리움같은 감정을 느 끼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남자의 집으로 찾아오긴 처음이에요.]
마라가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도록 나는 일부러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라는 내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네... 제가 듣기로 아저씨는 저를 거부할 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라던데요?] 나는 커피잔을 내
려놓고 머리를 감싸쥔 채 벅벅 긁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저도 뭘해야 할지 몰라요.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여기 있어야 해요. 하룻
동안 아저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가 생겼다고 좋게 생각하세요.]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당신한테 이렇게 말하라고 일일이 지시하든가요?]
[그 여자? 아, 그분? 아니요. 아저씨와 하루를 보내고 오라고만 했어요. 이런 일은 제가 그분보다 더 전
문가인 걸요?]
[그 여자를 잘 안다고 했는데 얼마나 잘 아는 사입니까? 그 여자가 마담 뚜라도 됩니까?]
[사실은 그분보다 그분 남편을 더 잘 아는 편이죠. 한동안 그분 남편의 정부였거든요. 그분은 저와 자기
남편이 그런 사이란 걸 알고서도 저에게 잘해 줬어요. 보통 여자분이 아니죠. 하지만 저도 그분과는 전
화로밖에 얘길 못해 봤어요. 가끔 남편과 함께 여성지나 신문에 얼굴이 실린 걸 봐서 어떻게 생긴 분인
지는 알지요.]
[그렇다면 여자의 이름도 알고 있겠군요?] [그럼요. 하지만 괜히 애써서 알려고 하지 마시래요. 때가 되
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시데요.]
마라는 내 어깨에 슬쩍 팔을 올려 놓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뭘 하나?]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라는 혼자 나불거렸다.
[아저씨가 결정하지 않으면 제가 결정할래요. 누가 결정하든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안되요. 아시겠죠?]
나는 자리가 불편해서 책상 앞에 있는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등 뒤에서 마라가 푸푸 웃는 소리가 들렸
다. 그 바람에 귀볼까지 새빨게졌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남편 얘기도 하지 말라던가요?]
[어느 선까지만요. 해 드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라는 침대 끄트머리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는 거의 무릎이 닿을 듯 말 듯하게
가까워졌다.
[회장님, 아니 그분 남편은요, 지배욕이 무척 강해요. 어릴 때부터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면서 살았으
니까 그럴 거에요. 그분 남편이 어느날 전 주인과 같이 제 아파트에 오셨는데 그 다음날부터 그분 남편
이 제 주인이 되었어요. 주인이란 말, 귀에 거슬리 는 거 아니죠? 입에 붙어서요.]
나는 왈가왈부할 계제가 아니었다. 마라는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동시에 제 아파트와 승용차 소유주도 바뀌었고 제게 생활비를 보내는 곳도 바뀌었지요. 무슨 뜻인지 알
겠어요? 그분 남편이 전 주인으로부터 저를 인수했다는 뜻이에요. 쉰이 넘는 일본인보다 젊고 돈많은 새
주인이 생기는데 제가 싫어할 이유가 뭐 있었겠 어요.]
길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여대생처럼 청순한 얼굴로 마라는 천연덕스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일부러 말을
꾸미는 것도 대사를 외 듯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불안했다. 그러나 중간에 말을 끊지는 않았다.
[전 열아홉부터 이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몇 년 지나다보니 제 일
이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 천직이란 말 있죠?]
마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쭉 빼서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아저씨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좀 겁나요. 얼굴을 좀 푸세요. 네?]
사실이지 나무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내 표정을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
을 쫙쫙 펴며 말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얘기나 계속하십시오.]
[말투도 그래요. 하십시오가 뭐에요. 그냥 해라, 하세요. 전 그게 편해요.]
나는 여전히 얼굴을 펴면서 대꾸했다.
[그래. 해.]
마라는 깔깔 웃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하하. 아저씬 너무 순진하세요. 그게 매력이지만요.]
나는 손을 내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얘기나 하라니까.]
마라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려고 했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웃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네. 저도 그분
같은 주인은 처음이었어요. 그 주인은 내 시간 모두를 지배하려고 했어요. 매일 스케줄을 정해 놓고 꼭
그대로만 하도록 했어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정해진 시간 안에 씻고 정해진 식사 안에 식사를 하고
정해진 장소로 가서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물건을 사야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아무리
값진 보석을 가지게 된다해도 무슨 소용 있겠어요?]
나는 마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걸 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마라의 얘기에 빠져들어 갔다.
[사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케줄을 따랐어요. 지금 생각해도 기적적인 일이었죠. 나흘째 되는 날,
전 제 마음대로 해 버렸 어요. 너무 갑갑해서 미칠 것만 같았거든요. 그날 저녁에 주인이 저를 찾아와서
는 시킨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벌을 받아야 했다고 했어요. 그게 주인과의 첫날 밤이었죠.]
내 무릎은 어느새 마라와 무릎이 닿아 있었다.
[난 벌로 커다란 소파에 앉아 있는 주인 앞에서 발가벗고 꿇어 앉아야 했어요. 거실 바닥에 부드러운 양
탄자가 깔려 있었지만 몹시 무릎이 아팠어요. 사실은 자존심이 상했던 거에요. 전 주인들은 절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겼거든요.]
마라는 제 무릎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애처로운 듯한 마라의 맑은 눈이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다리가 저려서 도저히 더는 못 앉아 있겠어서 주인에게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어요. 주인이 말
했어요. 넌 내 거야. 내 마음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널 내 거라고 할 수 있지? 넌 벌을 받아 마땅해. 그
말이 얼마나 제 속을 긁었는지 모를 거에요. 발 딱 일어나서 그대로 아파트에서 나와 버리고 싶더라니까
요. 하지만 전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마라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채 입을 열었다.
[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더라구요. 몇 대 맞을 땐 장난같아서 까르륵 웃기도
했는데 나중엔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어요. 그리고 난 맞을 때마다 잘못했어요 주인님이
라고 말해야 했어요. 맞는 거 보다 그게 더 싫었 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왜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마라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내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렇게 맞고나
서 저는 양탄자 위에 엎드려야 했어요. 주인이 말했죠. 네가 내 거란 걸 확실히 해 두어야겠다. 제 귀에
혁대를 푸는 소리가 들렸어요. 절 혁대로 때리려는 건지 알고 잔뜩 얼어 있었어요. 근데...]
마라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말이에요, 주인이 내 항문에 자기 걸 찔러 넣는 거지 뭐에요. 전 그렇게 하는 게 처음이었거든요.
꼭 달아오른 인두로 제 몸을 지지는 것 같이 아팠어요. 눈알이 눈 밖으로 툭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니까
요. 전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내려 고 했지만 얼어붙었는지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어요.]
볼이 달아올라 반쯤 벌려져 있던 내 입에서 뜨거운 김이 새어 나왔다. [그 일은 제가 겪은 일들에 비하
면 시작에 불과한 거에요.]
마라도 약간 들뜬 듯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라가 내 무릎을 손톱을 세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
으나 나는 거부하지 않 았다.
[전요, 그날부터 복종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완전한 복종으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고통을 거쳐 가야했어
요. 그러다보니 고통이 없는 사랑은 점점 싱거워지더라구요. 주인을 만나기 전에는 뺨 한 대도 맞기 싫
어했는데... 우습죠? 하지만 복종을 즐기게 됐어 요. 그러고나니까 주인이 꼭 내 강아지 같이 귀엽더라
니까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라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집어 삼킬 듯 바라보았다. 마라는 내 눈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걸 내가 원했다면 마라를 고통스럽게 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내 깊은 곳에는 단 한 번만, 두 번도 아니다, 여자를 무참하게 능욕해 봤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마음이 자 리잡고 있었다. 나는 내 무릎에 와 있던 마라의 손을 꽉 쥐었다. 마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 아파요. 이러지 말아요. 뭘 오해하신 거 같네요.]
나는 얼른 손을 놓아주고 마라의 입술만 눈이 시리게 쳐다보았다.
[아저씨, 전 아무한테나 복종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저를 지배할만한 사람이란 확신도 없이 어떻게 복종
할 수 있겠어요? 지배에 는 책임이 따르는 거에요. 지배는 폭력하고는 틀려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마라는 나를 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먼저 저를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을 주도록 당당해 지세요. 이렇게 성급한 걸 보니 아저씬 주인될 자격
이 없는 거 같네요. 괜 한 헛수고일 거에요.]
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걸 마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뜨거운 김이 코와 입으로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며? 그래 놓고 지금 무슨 딴 소리냐?]
마라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저씨 좋을대로 섹스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절 폭행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폭행? 지금 폭행이라고 했어?]
[네. 제가 때려 달라는 거와 아저씨 마음대로 절 때리는 건 완전히 틀려요. 그 차이점을 아시겠어요?]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흥분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성기는 불처럼 벌겋게 달아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집
어치우고, 벗어.]
마라는 벌떡 일어섰다.
[이런 취급 받으면서 하긴 싫어요. 나 갈래요.]
나는 마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안돼.]
마라는 현관문을 힐끗 쳐다보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흥분을 해서 이래요? 아저씨도 힘으로 여자를 짓누르면 된다는 못난 생각 하고 있는 거에요?
강제로 제 몸을 가지면 기분이 좋을 거 같아요? 섹스는 그런 게 아니에요.]
마라가 침착한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내 심장은 더 뛰었다. 나는 와락 마라를 껴안았다. 마라는 꼼짝
도 하지 않고 푸대 자루 처럼 내게 안겨 있었다. 내 손은 어느새 헐렁한 마라의 티셔츠를 밑으로 들어가
고 있었다. 마라는 내 귀에 대고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저 밖에 내 경호원이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소리를 지르면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올 거에요. 그
렇게 되면 아저씬 성폭 행 혐의로 고소당하게 될 거에요.]
내 손은 어느새 마라의 브래지어 밑에 숨겨져 있던 풍만한 젖가슴을 더듬고 있었고, 내 혀는 마라의 목
덜미를 하고 있었다. 그 러나 마라는 반항도 하지 않고 대사를 읊듯 말했다.
[정말 나를 가지고 싶으면 먼저 나를 존중하세요. 이러는 건 짐승과 다를 바 없어요.] 나는 그 말에 아
랑곳하지 않고 마라를 침대로 쓰러뜨렸다. 정말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마라의 입술을 덮치려는 순간, 마
라가 손 으로 내 입을 막았다.
[잠깐!]
냉기가 서려 있는 마라의 눈이 내 눈에 가득찼다. 마라는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벗을래.]
그 말에 멈칫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마라는 나를 밀쳤다.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마라
는 일어나 청바지 단추를 풀더니 팬티와 함께 무릎까지 쭉 내렸다. 그리고는 음부를 내게로 향한 채 바
닥에 개처럼 엎드렸다. 잘 다듬어진 음모와 약간 열려진 분홍빛 질, 쵸콜릿 색깔 항문까지 그림처럼 아
름다웠다. 마라는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냉랭하게 말했다.
[어서 해.]
미련없이 내 총각 딱지를 떼도 좋을만큼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라가 바닥에 엎드린 그 순간,
이미 내 성기는 수도꼭지 처럼 아래로 휘어져 버렸다.
[됐어. 미안해.]
내가 마라에게 다가가자 마라는 나를 노려 보면서 일어났다.
[아저씨한테 실망했어.]
나는 청바지를 걷어올리는 마라에게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잠근 후에야 마라는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고 있는 나를 실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저씨한테는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성보조 기구가 더 필요할 걸? 아저씬 사고방식부터 바꿔야 해.
그러지 않으면 아저씨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도 그 여자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 거야. 수치심만 주고
말거야.]
뭐가 잘못된 건가를 생각하는 참이었던 내 귀에 마라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쭈뼛거리고 있던 나는 마라
가 현관 문을 열 때야 입을 열었다.
[이거 봐.]
그러나 마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나는 수치로 달아오른 내 볼을 감싸쥔 채 방을 서성거
렸다. 머리 속은 마치 늪 같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생각의 진창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것들은
길바닥에 붙은 껌처럼 뒤엉킨 채 끈적거리기만 했다. 내 고막을 찌르는 전화벨 소리가 있었다.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알만했다. 나는 뚝뚝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꺽으며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자동응답으로
전환해 놓지 않아서 전화벨은 열 번을 넘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뚜껑을 닫고 앉
았다. 그리고는 귀를 막아 버렸다.
[전화를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거야. 그런 거야. 때를 잘못 맞춰
전화한 사람이 잘못이지 , 난 아냐.]
전화벨 소리가 그치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서 담배만 피워댔다. 화장실 안이 담배 연기로 가득차 눈이
매울 지경이었다. 덜컹, 화장실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나는 변기에서 떨어질 뻔 했다. 내 놀란 눈에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선 여자가 맺혔다.
[뭐 해요?]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마라였다. 너무 반가워 목이 멨다. 나는 어눌하게 대답했다.
[담배 피우고 있었어.]
그러나 마라는 아까와 다른 모습이었다. 짙은 화장을 하였고, 흰 줄이 가로로 쳐진 하늘색 원피스를 입
고 있었다. 가발을 썼는 지 짧은 파마 머리였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으며 마
라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소심해요?]
나는 뒤가 마려운 개처럼 뻣뻣하게 걸어 회전 의자에 가 앉았다. 내 앞에 버티고 선 마라의 모습에서 아
까의 청순한 이미지는 찾기 힘들었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그분이 그러지 말라시데요. 전 그분에게 복종하고 있거든요. 오핸 마세요. 그분
남편과 헤어진 지 반년도 넘어 됐으니까요.]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그럼, 그 여자도 자기 남편처럼 새디스트야?]
마라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새디스트가 아니에요. 제가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그분과 직접 만난 적이 없다구요.]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에게 복종을 한단 말야?]
잔뜩 인상 쓴 내 얼굴이 뭐가 웃기다고 마라는 호호 웃었다.
[그분은 자기 남편에게서 나를 빼앗어요. 아파트랑 승용차, 생활비까지 다 그분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첨엔 레즈비언인 줄 알았 다니까요. 하지만 다른 주인들처럼 저를 가지려 들지 않았어요. 그냥 날 내버
려 뒀어요. 사실 그땐 불안했어요. ]
마라는 내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오며 말했다. 10센티미터도 훨씬 넘어보이는 하이힐인데도 걸음걸이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전 그분의 성적 매력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그분의 돈에 복종을 하는 거에요. 그분이 원하는 것도 돈으
로 나를 지배하는 거였 어요. 재밌잖아요? 난 그 돈으로 내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요. 그래서 내가 원하
는대로만 날 지배하게 만들죠. 겉으로 봐서는 남 자가 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가 지배하는 거
에요. 이 편이 훨씬 나아요.]
마라는 작고 가는 손을 내밀어 내게 잡으라는 듯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두 손을 모아 허
벅지 사이에 꽂아 넣었 다.
[주차장에 내려가서 그분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분이 그러시데요. 아저씬 쑥맥이니까 제가 리드를 해야
할 거라구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저씨를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
데... 미안해요.]
마라는 내 무릎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쌌다. 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마라는
내 머리를 자기 젖가슴에 가져다 댔다. 나는 목에 힘을 준 채 젖꼭지를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라의
심장 소리인지 내 맥박 소리인지가 내 귀에 쿵쿵 울려댔다.
[사람 잘못 봤어. 난 쑥맥이 아냐.]
내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만난 수많은 여자들을 마음껏 가지고 놀았다. 언제나 삽입이 문제 거리가 되
었지만 난 내 방식대로 잘 해결했다. 나는 손을 마라의 엉덩이로 옮겼다. 탄력있는 엉덩이에 손이 닿는
순간 성기로 피가 쏠렸다. 엉덩이를 받쳐든 채로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마라는 어머, 하며 내 목을 바싹
끌어 안았다. 그렇게 선 채로 불끈 솟은 성기를 마라의 엉덩이 사이에 바짝 밀어붙었 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마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저씨, 이게 뭐에요?]
나는 엉덩이를 들어올려 마라를 어깨에 들쳐 메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는 침대에 내팽개쳤다. 마라는 약
간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바지를 쭉 내리며 말했다.
[난 널 복종하게 만들 생각 없어. 그냥 보조 기구처럼 널 사용할 거야.]
내 성기를 보고 입을 쫙 벌린 마라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아저씨 잠깐만요.]
마라는 손을 내저으며 뒤로 슬슬 물러났다. 나는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내 성기는 완전히 발기되어 배
꼽에 닿을락말락했다. 마 라는 침대 건너편에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엉거주춤하게 선 채 물었다.
[아저씨 거 왜 그래요?]
[왜? 싫어?]
[어떻게 그게 그렇게 몸에 딱 붙어 있을 수 있어요?]
나는 성기를 손가락으로 툭치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궁금하면 와서 만져봐.]


[아저씨 거 너무 크고 딱딱하다.]
피앙새에서 만났던 정, 뭔가하는 여자는 내 바지를 벗기는 동안은 제법 농담까지 했었다. 그러나 막상
내 성기를 눈으로 확인하 자 몸을 뒤로 젖혔다.
[이게 뭐야?]
내 성기는 30센티미터 정도지만 너무 빳빳해서 일어서도 귀두가 거의 곧바로 하늘을 향했다. 처음엔 겁
을 집어먹는가 싶더니 어 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신기한 듯 자꾸 주물러대기만 했다.
[장난치지 말고, 어서 빨기나 해.]
[입에 들어가겠어요, 어디?]
그러면서 정은 양 손을 다 써서 밑둥을 잡은 채 입을 갖다댔다.
[완전히 말아놓은 김밥이잖아?] 정은 낄낄거리며 귀두를 입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몇 번 움직이는가
싶더니 숨을 몰아쉬며 캑캑거렸다.
[아저씨, 숨이 막혀서 못하겠어.]
나는 짜증이 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끝까지 다 하래? 귀두부터 네 손 있는데까지만 해.]


[그냥 갈래요.]
마라는 손을 앞으로 뻗은 채 게 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마라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걱정마. 삽입은 안 할테니까.]
마라는 손을 내저었다.
[처음엔 다 그렇게들 말하죠. 저도 그 말에 속아 이 꼴이 됐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담임 새끼한테 당하지만 않았어도 다른 애들처럼 대학도 가고 평범하게 살았을 거라구요. 그냥 만
지기만 했다고 해 놓고. ..]
[난 아직 한 번도 삽입한 적이 없어. 걱정마.]
마라가 뒤로 빼면 뺄수록 내 성기는 더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라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
다. 무슨 수를 쓰지 않으 면 마라가 정말 나가 버릴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날 묶
어.]
나는 마라의 눈에서 빛이 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나는 마라를 충분히 이해했다. 내 알몸을 본 여자 중에서 놀라지 않은 여자는 스무살 때 만난 여자애밖
에 없었다. 그 여자애는 내 걸 보기 전까지 남자의 성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애였다. 나는 침대
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양 손을 깍지낀 채 위로 들어올렸다. 나는 끈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마라
에게 말했다.
[책상 오른쪽 아래 서랍 열어봐. 거기 테이프가 있을 거야.]
마라는 손목 넓이의 초록색 테이프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해요.]
[알았다니까.]
마라는 침대로 올라와 내 팔목을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지 제법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그래도 못 믿겠으니까 다리도 묶어야겠어요. 괜찮죠?]
묶인다는 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을뿐더러 묘하게 사람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맘대로 해라.]
마라는 내 발을 겹친 후에 테이프로 발목을 칭칭 감았다.
[어디 한 번 움직여 봐요.]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얼마나 단단히 감았는지 꼼짝 달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약간 불안해
졌다.
[너무 꽉 묶은 거 아냐?]
마라는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칭얼거리긴... 됐어. 얌전하게 이대로 있어. 엉덩이 좀 들어봐.]
나는 낄낄거리며 시키는대로 했다. 마라는 테이프를 엉덩이부터 한바퀴 빙 돌려 성기까지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이럴 필요는 없잖아.]
마라는 아무 대꾸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가 현관 문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어디 안 가니까 걱정마.]
현관 옆에는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커다란 가죽 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라는 그걸 집어들고 내게로
들고 돌아왔다. 백을 의 자에 던져둔 마라는 팔을 등 뒤로 돌려 원피스 지퍼를 내렸다. 마라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걸 겪게 될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 좋게 생각해. 알았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지는 원피스를 따라 마라의 몸매를 훑어내려가느라 정신이 팔린 내 귀에 마라의 말
이 들어오지 않았다. 터 질듯한 젖가슴과 군살없는 아랫배와 깔끔하게 다듬어진 음모는 내 눈을 시원하
게 만들었다. 마라는 잠시 춤추는 것처럼 몸을 비틀더니 내게 윙크를 했다.
[나 어때?]
[좋아.]
내 머리 속에는 마라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어서 빨리 침대로 올라와주길 바라는 내 간절함을 비웃기라
도 하듯 마라는 백을 열 었다. 거기서 마라가 꺼낸 건 뜻밖에도 승마용 채찍이었다. 마라는 그걸 내게
휙 던졌다. 마라는 나를 아래로 깔아보면서 백에서 꺼낸 가죽옷을 입기 시작했다. 몸에 쫙 달라붙는 원
피스형 가죽 콜셋이었다. 나는 테이 프를 끊어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 노력을 비웃는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호호호.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아직도 놀랄 게 많은데...]
나는 인상을 쓴 채 마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마라의 손에 비디오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왜? 계속 버둥거려 봐.]
시키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그 사이 마라는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실실 웃으며 내게로 다가와 채찍을
집어들었다.
[아저씨가 나를 때리는 장면이었으면 더 효과가 있을텐데... 하지만 이 정도만해도 아저씨 아버지한테는
충격적일 거야.]
[뭐?]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까 내 말이 잘 안들리지. 잘 들어. 이 장면을 아저씨 아버지한테 보낸다고
그랬어. 좀 편집이 필 요하겠지만 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러는 거야? 너, 누구야?]
마라는 장난스럽게 채찍으로 내 성기를 툭툭 내리쳤다.
[내가 누군지 알 거 없어. 어차피 난 조연이니까. 후후. 내가 뭐 아저씨 물건이 커서 놀란 줄 알아? 내
가 본 거 중에서 아저씨 게 제일 크기야 크지. 하지만 내 몸 속을 들락거린 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
냐.]
나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마라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럴수록 결박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거의 비 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마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성기에 카메라를 갖다대며 깔깔 웃었다.
[여기 핏줄이 꿈틀거리는 거 좀 봐.]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야!]
마라는 인상을 쓰며 비디오 카메라를 내려놓더니 한쪽에 있던 테이프를 쭉 찢어들고는 침대 위로 올라왔
다. 하이힐을 신은 채였 다. 마라는 뾰쪽한 하이힐 뒷굽으로 내 가슴을 짓눌렀다. 조금만 세게 밟히면
구멍이 뚫릴 것같이 짓눌린 부분이 아팠다.
[움직일수록 더 아플 걸? 난 있지, 내가 원하지 않을 때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걸 싫어해. 애원하는 거라
면 괜찮지만... 알아?]
마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입을 테이프로 막아 버렸다.


15장

나를 마음껏 농락한 마라는 주머니 칼을 던져두고 가 버렸다. 내 온 몸에 채찍 자국이 시뻘겋게 남아 있
었다.
[왜 얼른 전활 안 받아?]
몸의 부기를 빼려고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카마의 전화인 줄은 알
았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 는 몸으로 달려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동안에
도 벨소리는 귓볼을 아프게 잡고 늘어졌다. 당신이라면 소리를 지르고 따졌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힘이 없었다. 겨우 했다는 일이 녹음 버튼 을 누른 후 천천히 전화를 받는 일
정도였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샤워하고 있었습니다.]
[힘들었지?]
카마는 어린애를 얼르는 투로 말했다. 나는 말줄임표로 대답했다.
[이해해. 난 너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거든. 근데도 아직 네가 의심스러워. 이유를 모르겠어.]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본래 사람을 못 믿는 성격이라 그건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면 당신 한테도 좋을 게 없어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카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왜냐면 그 말은 입 속도 아니고 머
리 속에서 맴돌다 만 말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내게 믿음을 줘.]
카마의 목소리는 내 귀에서 우울하게 들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겁니까?]
[무슨 일은... 그냥 마음이 좀 그래. 나도 힘들 때가 있거든. 오늘 일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텐
데... 네가 마라에게 한 짓을 전해듣고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 내가 마라를 보낸 걸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카마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난 말야, 네가 마라를 통해서 날 느꼈으면 했어. 그래서 마라를 민낯에 청바지를 입혀 보냈던 거고. 그
런데 네가 한 짓이 뭐냐 ? 너는 왜 여자라면 아무한테나 짐승처럼 덤벼드는 거니? 네 피가 원래 그런 거
니? 아님, 남자들이란 족속들은 다 그런 거니?]
나는 또르르 감기고 있는 녹음 테이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라를 강제로 겁탈하려고만 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그때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다. 내가 한 일과는 상관
없이 그렇게 되도록 각본이 짜여 있는 걸로만 알았다.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넌 네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 나는...]
나는 카마의 말을 가로채고 말았다. 카마의 심기를 살피고 어쩌고 할 경황이 없었다.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그 테이프를 아버지한테 보내지는 말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어! 누가 주인이지!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안됩니다. 제발이요...]
[아직도 뭘 모르는 거니? 네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알아!]
얼굴이 화끈거렸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네, 압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것만은...]
[좋아.]
카마는 선심쓰듯 말했다.
[오늘 일은 일단 덮어두지. 이렇게까지 사정을 하는데 용서를 안해준다면 날 속이 좁다고 생각할테니까.
하지만 내 손에 녹화 테이프가 있다는 걸 잊지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암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뭐든 시키십시오. 뭐든이요.
두 번 다신 실망을 안 시키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게 벌써 몇 번짼데?]
내 입술은 접착제를 봉해진 듯 떨어지지 않았다. 마라가 다녀간 후로 나는 카마가 우주 건설 회장 부인
일 거라고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16장

인터넷으로 들어가 하릴없이 헤매고 다니던 나는 문득,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나는 카마에게 내가 얼
마나 충실한가를 보여주 기 위해서 서둘러 카마의 홈페이지를 찾아갔다. 화가 났는지 홈페이지에 들어섰
는데도 카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불안했다. 예의 지도만이 덩거러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눈길을 옮기다가 중앙의 산 오른쪽 계곡에서 조그만 통나무집이 깜박거리는 걸 발견하고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 마가 나에게서 영영 등을 돌린 게 아니었다. 얼른 그걸 클릭하자 화면이 바뀌
었다. 작을 때는 몰랐는데 통나무집이 화면을 모두 차지할만큼 크게 확대되어 나타나자 금방이 라도 쓰
러질 듯 을씨년스러웠다. 통나무집 현관 위에는 한 귀퉁이만 아슬아슬하게 붙은 나무 조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무 조각에는 인두로 지져 쓴 듯 네크로필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네크로필리아?]
어디서 들은 듯한 말이긴 한데 가물가물했다. 그 화면에서 마우스가 손 모양으로 바뀌는 곳은 유일하게
그 나무 조각밖에 없었 다. 내가 그곳을 클릭하자 그 나무 조각은 툭 떨어졌다. 그것이 땅에 닿자마자
귀를 찌르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통나무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통나무집의 잔해 뒤로 뻥
뚫린 동굴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화면에 있던 모든 것들이 그
동굴로 쑥 빨려 들어갔다. 마치 내가 그곳으로 빨려드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히고 말았다.
화면은 동굴 속으로 바뀌었다. 동굴은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깊은 어둠을 간직한 오른쪽
동굴 입구 위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글씨였다. 좀비, 분명히 그렇게 불꽃이 글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두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인 왼쪽 동굴 위에는 철조망을 구부려 만든 리버 오브 페
인, 즉 고통의 강이라는 글자가 전기난로의 구리선처럼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이건 실제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고통이니 좀비니 하는 어느 쪽도 꺼림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 는 온 길을 돌이킬 입장이 못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면서 내가 누른 건
좀비 쪽 동굴이었다.
[잘 왔도다. 이곳에서 당신의 어두운 꿈을 이루어지리라.]
화면이 바뀌면서 음산한 느낌을 주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나 정작 화면에는 공포
영화에나 나옴직한 흉칙 한 몰골의 흑인 여자의 사진이 나타났다. 나는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그
여자는 아스팔트 위에 누운 채였다. 약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그 여자의 왼쪽 눈동자는 거의
위쪽에 붙어 있어서 희멀건 눈자위가 전부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의 뒤
통수가 수박이 깨진 것처럼 터진 채 피로 얼룩져 있었다. 꼬불꼬불하고 짧은 머리카락이 찢어진 소파에
서 튀어나온 용수철처럼 흉칙했다. 나는 연신 눈을 찡그리며 사진 밑에서 깜박거리는 글자로 시선을 옮
겼다.
[베키 그린. 21세. 키 172cm. 미주리 주립대학생. 애인 빌로부터 버림을 받은 슬픔을 참지 못해 빌의 집
앞 도로에서 빌이 보는 앞에서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 목숨을 끊음. 사용 총기 데저트 이글
.44 버전, 길이 26cm, 무게 1.7kg.]
그 아래에는 은판에 검은 글씨로 NEXT라고 적힌 아이콘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마우스를 눌렀다. 이번에
는 반듯이 수술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사진이 화면을 채웠다. 기분 나쁘게 파르스름한 피부에는 털이 하
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슴 한복판에 마구 뒤엉킨 뱀 문신과 데드 마스크같이 굳은 얼굴의 그 남자에
게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사무엘 존슨. 45세. 키 182cm. 텍사스 출신. 성폭행 전과 5범. 네브라스카 형무소에서 심장마비로 사
망. 네브라스카 의대 시체 해부실에서 촬영. 지미 브라운 제공.]
그 아래에도 NEXT라고 적힌 아이콘이 있었지만 나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속이 메스껍
고 구역질이 나서 그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미친 놈들이 이런 시체들을 보여주고 또 어떤 미친
놈들이 시체들을 보려고 하는지 정말 역겨웠다. 나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진 동굴 앞에 섰다. 리버 오
브 페인을 건널 차례였다. 또 어떤 역겨운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좀 전에 좀비에서
봤던 것들보다야 낫지 않겠나 싶었다. 그렇다고 찡그리고 있던 내 얼굴이 펴진 건 아니었다.
[그래요. 어서 날 찔려줘요. 내 몸에 구멍을 만들어 주세요. 제발...]
리버 오브 페인을 클릭하자마자 들려오는 애원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내 머리카락은 쭈볐 일어섰다. 온갖
연장들의 사진이 가득 한 화면 왼쪽 위에 동영상을 보여주는 조그만 화면에 바닥에 꿇어 앉은 금발 여자
가 두 팔을 벌린 채 신들린 듯한 눈으로 누군가 를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그러자 화면에 쫙 벌린 채 버
티고 선 그 누군가의 두 다리가 나타났다. 벌거벗은 금발은 그 다리 사이로 애처롭게 보였다.
[헬무트, 제발...]
화면이 손바닥만해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 차리기 힘들었다. 헬무트라고 불린 그
남자의 뒷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헬무트는 번들거리는 고무 삼각 팬티를 입은 채 오른손에 얼음 송
곳을 들고 있었다. 카메라의 방향은 두 사람의 옆 모습을 보여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수염이 꺼칠꺼칠한
헬무트의 피곤에 쩔은 얼굴과 금방이라도 자지러질듯한 금발의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카메라는 금발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가며 보여주었다. 금발의 귀에는 귀고리 대신 엄지 손가락만한
볼트와 너트가 죄어져 귓볼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코에는 작은 동전만한 금으로 된 링이 끼워져
있고, 입술에도 비슷한 크기의 은색 링이 걸려 있었다. 카메라는 목선을 따라 내려와 금발의 젖꼭지에서
멈췄다. 아래로 축 늘어진 젖꼭지를 뚫은 가는 링은 은 목걸이같이 가는 체인 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체인의 중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체인이 달려 있었다.
카메라가 그 체인을 따라 움직이다 멈춘 곳에는 밤송이만한 스테인레스 추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금
발은 고통을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카메라는 거기서 갑자기 헬무트가 들고 있는 얼음 송곳에 앵글을
맞추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 얼음 송곳의 용도가 금발의 몸 어딘가에 구멍을 뚫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온 몸이 오싹했다. 설마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어떤 책에선가 이런 비슷한 경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귀나 젖꼭지에 구멍을 뚫기에 얼음 송곳은 너무 굵었다. 어느새 화면은 금발
의 볼을 비추고 있었다. 점점 볼은 확대되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볼에 귀고리
를 하려고 귓볼에 뚫은 구멍처럼 푹 들어간 자국이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어느 포
르노에선가 크리토리스에 구멍을 뚫어 링을 끼고 있는 여자를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실처럼
아주 얇은 링이 어서 끼고 있어도 아플 거라는 생각은 별로 해 보지 못했다. 생살을 싹뚝 잘라내는 포경
수술에 비하면 사실 그건 아무 것도 아 니었다. 그렇지만 볼에 구멍을 뚫는 건 문제가 틀렸다. 당장 느
끼는 고통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때의 수치가 더 클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금발은 그런 걱정은 전혀
없는 건지 마약에 취한 건지 계속 헬무트에게 더 큰 구멍을 뚫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헬무트의 얼음 송곳이 클로우즈 업 되는 순간, 나는 화면을 뒤로 돌려 갈라지는 동굴이 나오는 화면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다시 화면을 뒤로 돌리자 네크로필리아라고 적힌 나무 조각이 흔들거리는 통나무집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내 가 좀전에 다녀온 곳을 잊으려 해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
을 것만 같았다. 나는 현실과 다른 세계, 가상의 그 세계가 가상에서 끝나지 않고 내 현실 속에서 꿈틀
거리다 언젠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 안이 나를 엄습했다.
잠시후 카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카마는 화를 내고 있었다.
[제가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 만족하겠습니까?]
[네가 네크로필리아를 다 돌아보지 않았단 걸 알아. 당장 네크로필리아로 돌아가. 그래서 고통이 뭔지
제대로 알아둬! 네가 그 꼴이 될 수 있다는 거, 잊지마. 알겠어!]
역겹지만 그 정도라면 못할 게 없었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네.]
[흥, 그 정도로 끝날 줄 알았니?]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럼요?]
카마는 일부러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 당장 미장원에 가서 왼쪽 귀만 뚫어. 대신 구멍은 두 개로 해.]
귓볼에 구멍을 뚫는 건 따끔거릴 정도라고 듣긴 했지만 리버 오브 페인에서 본 금발의 귀가 기억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 몸서리 가 쳐졌다. 게다가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17장

나는 허름한 동네 미장원에서 카마가 시킨대로 왼쪽 귀에 구멍을 두 개 뚫었다.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한
네크로필리아를 돌아다 니며 귀를 뚫는 게 무척 고통스러울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주사 맞는
것보다 덜 아팠다. 그러나 늙은 미용사 때문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 나를 붙잡고 금 귀고리를 하지 않으
면 구멍이 막히거나 귓볼이 곪을 수 있다며 수다를 떨던 미용사도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니까 나중
에는 넋두리 비슷하게 말하고 돌아서 버렸다.
[귀고리도 안 할 거면서 귀는 왜 뚫어?]
나는 나대로 투덜거리며 미장원 문을 나섰다.
[누군 뭐 좋아서 하는 일인 줄 아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게 발 끝에 뭔가 툭 걸리는 게 있었다. 불을 켜고 보니 금박으로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내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런 게 없었다. 신문이나 우유 따위를 넣을 수 있도록
뚫린 구멍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의자에 앉자마자 상자 포장부터 풀었다. 남보라색 벨벳 천으로 덮힌 보
석함뿐이었다. 나는 보석함을 여는 대신 얼른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그런 걸 보낼 사람은 카마밖에 없었
다. 예상대로 카마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귀 뚫는 거 쉽지? 그 정도로 내 화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니? 후후. 내가 보낸 귀고리, 아직 안 했지?
지금 당장 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보석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가락지 모양의 은인지 백금인지 분명치 않은 귀고리가
두 개 들어 있었다. 하 나는 가운데 손가락에 꼭 맞을 정도고, 다른 하나는 새끼 손가락에 꼭 맞을 정도
였지만 두께는 큰 것보다 더 두꺼워 1센티미터는 됨직했다. 다행이 귀에 꽂는 부분은 실처럼 가늘었다.
그렇다고 귀에 걸 엄두가 나는 건 아니었다.
[백금이야. 넌 귀고리가 처음이니까 굉장히 거북하고 아플 거야. 귀고리가 무거워 네가 뚫고 온 구멍이
점점 길어지겠지.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귀고리가 아직 아물지 않은 네 살을 계속 패이게 할 거란 거
지. 혹시 피가 나거나 곪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매일 약 바르고 소독하는 거 잊지마. 피는 보기 싫으니
까.]
나는 작은 귀고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아래위로 손을 약간 흔들며 무게를 가늠해 본다. 손바닥에서 중
량감이 느껴지는 걸로 봐 서 한 두 돈은 되는 듯하다.
[네가 편지를 본 시간과 네가 답장을 쓴 시간을 내가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란 것쯤은 인터넷을 쓰니
까 알고 있지? 이 편지 를 읽는 즉시 답장을 써. 네 지시가 황당하다고 느끼거나, 못하겠거든 사실대로
써도 좋아. 그 대신 그만한 값을 치뤄야지. 귀고 리를 하는 고통보다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겠지? 그간 내가 얼마나 참아 주었니? 네 잘못을 반성하 는 데 이 정도의 벌이면 적
당하다는 내 판단에 어떤 하자도 없다고 봐. 너도 불만 없지? 암 그래야지.]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귓볼에 구멍을 뚫을 때 간격을 멀리 하지 않았다. 무거운 귀고리를 하고 다
니다가는 두 구멍이 하나 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런 건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예 귓볼이 찢어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집 안에서 귀고리를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거든. 내일 일찍 나가서 디지털 캠코더를 하나 사.
그걸로 네 모습을 찍어 서 동영상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으로 나한테 전송해. 매 시간마다 전송해. 전송
하는 데 10분 정도 여유는 주겠어. 혹시 시간 조 작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컴퓨터라면 너보
다 내가 훨씬 위라는 걸 잊지마.]
귀고리를 하는 것밖에는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귀고리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얄밉게 반짝거리는 귀고리를 귀에 대 보았다. 눈 뜨고 못볼 정도는 아닌 게 다행이었
다. 그러나 귀고리를 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왼손으로 귓볼을 잡아당기며 구멍을 확인하면서
작은 귀고리의 뾰족한 부분 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뾰족한 부분이 구멍 근처에만 가면 따끔거려 불에
데인 것처럼 손을 떼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 니 식은 땀이 이마에 맺히고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나는 변기 옆에 있는 휴지통에 귀고리를 집어던지고 화장실
을 나와 버렸다.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마저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담배를 부벼 끄고 마우스를 움직여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카마의 편지를 내 컴퓨터에 저장했다. 그
러면서 보니까 아깐 무심코 지나 몰랐는데 카마 말고 다른 데서 인터넷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 편지
를 화면에 불러 들였다 . 발신자는 네크로필리아로 되어 있었다.
[회원 가입 후 처음으로 저희 사이트를 방문해 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저희 사이트는 항상
회원 여러분의 쾌락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귀하가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러브 오브 페인의
영화, 킬링 미 소프트리 위드 유어 스크래치의 후속편을 한국 시간으로 내일 정오부터 관람하실 수 있음
을 알려드립니다.]
킬링 미 소프트리 위드 유어 스크래치는 카마의 지시를 받고 재차 네크로필이아에 갔을 때 본 30분짜리
영화였다. 카마가 그 사 이트의 모든 코너를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해서 보긴 했는데 그건 정말 눈 뜨고
못볼 거였다. 영화에서는 천정에 매달린 쇠사슬에 묶여 있는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옷을 입은 동남아시
아 여자를 배가 불룩한 백인 남자가 가시 철사로 채찍질하는 걸 보여주었다. 연약한 여자의 피부가 긁히
고 찢겨 피가 튀는 잔인한 광경이 편집없이 보여졌다. 돈을 벌자고 그러는 거라면 정말 미친 짓이었다.
나는 그걸 띄엄띄엄 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영화를 감상하려고 본 것이 아니라 끝났나 끝나지 않았
나 확인하느라 보았던 것이다. 그 영화 말고도 영화가 두 편이 더 있었는데 내용은 잔인하기로 따지면
그 영화와 막상막하였으나 킬링 미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킬링 미 소프트리 위드 유어 스크래치에 나왔던 소품들을 구입하시려면 러브 오브 페인의 쇼핑
몰을 찾아주십시오. 회원 가입에 감사하는 뜻으로 특별 할인가에 모시겠습니다.]
나는 상술에 혀를 내둘렀다.
[마지막으로 가입비와 한달 이용료 합계 200달러가 귀하의 신용카드에서 인출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혹시 아래에 적힌 귀하의 인터넷 메일이나 주소, 연락처, 신용카드 번호가 바뀌게 되면 즉시 연락바랍니
다. 감사합니다.]
무심코 편지 맨 끝에 있는 내용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인터넷 메일이나 주소, 연락처는 틀림없이
내 것이었지만 신용 카 드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이었다. 그리고 카드의 주인은 손 정윤이었다. 그렇다
면 카마의 이름이 손 정윤? 나는 무릎을 쳤다. 그 러나 아직까진 확실하게 아니었다. 나는 메일을 저장
해 놓고 서둘러 한글 검색 엔진, 다찾니를 열었다. 거기서 우주 건설 홈페이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
다. 우주 건설 홈페이지로 들어간 나는 회장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 강호,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회장의 가족 관계에 대한 정보는 실려있지 않았다. 다시 다찾니
로 가서 우 강호와 관련된 사이트를 찾아 보았다. 출력된 내용들 중 제일 위에 조선 일보에서 우 강호란
이름이 있 었다. 그 이름을 클릭했다.
[우 강호 우주 건설 회장이 어제 오후 13시 50분 서울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대한항공 편으로 아르헨티
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리오 댐 건설 계약을 체결하러 열흘간의 일정으로 출국하였다...]
손 정윤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방법을 바꿔 검색 엔진에서 손 정윤을 바로 찾아보기로 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 데 손 정윤과 관련된 사이트가 몇 개 있었다. 그 중에 우주 건설, 우 강호, 손
정윤이 함께 나와 있는 사이트가 있었다.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그 사이트는 한국판 여성잡지 르 끌레
몽이었다. 목차의 명사 탐방이란 코너에 우 강호, 손 정윤을 발견했다. 카마가 우주 건설 회장 부인이라
는 게 확실해지 는 순간이었다.
그 부분을 떨리는 손으로 클릭했다. 화면 왼쪽으로 사진이 떠오르는 중이고 오른쪽으로는 이미 기사가
나와 있었다. 기사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뚫어 지게 사진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의 크기
가 150K나 되고 전송 속도가 1.0K를 넘지 않아 무척 짜증이 났다. 사진의 맨 위는 하늘이 차지하고 있었
다. 잠시 후 대리석으로 마감된 삼각 지붕이 나타나 하늘을 가렸다. 연이어 햇살을 튕겨내 는 새파란 나
뭇잎들과 그만큼의 그늘이 나타났다. 전송 속도가 1.5K로 빨라지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머리가 보이기 시
작했다.
거기에도 햇살이 반지르르하게 묻어 있었다. 머리카 락 끝이 약간 거친 느낌을 주는 파마를 하고 있는
쪽으로 나는 시선을 모았다. 잘 펴진 이마가 보이고 다듬지 않은 듯 짙은 눈썹이 보였다. 그 뒤를 잔잔
하게 빛나는 눈이 따랐다.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그리고 단정한 코. 내 시선은 손 정윤에게로만 향했
다. 연한 붉은색 루즈가 발린 입술과 깍아놓은 듯한 턱이 보이고, 희고 긴 목이 보였다. 목에는 보랏빛
보석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진 금 목걸이가 있고, 브이자로 파인 고전적인 블라우스가 나타났다. 볼륨
감이 느껴지는 가슴을 지날 무렵에 나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손 정윤은 너무나도 청초하고 단아하면서
도 화려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도식적인 수사로 도저히 손 정윤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낼 수가 없다. 단정적으로
말해 손 정윤은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곽 재은이나 크리스티 톰도 비교가 안 되었다.
나는 사진 속의 카마가 배 위에 살짝 올려놓은 손과 구김없이 쫙 빠진 검은 바지와 별 장식없는 구두를
차례로 보면서 화끈거리 는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 카마가 손 정윤이라는 건 확
실하지만 단정적으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카마가 두태의 말대로 우 강호의 정부라면 우 강호
가 손 정윤의 이름으로 카마에게 신용 카드를 만들어 주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진 전송이 완료되었다
는 메시지가 나오자마자 나는 마우스를 손 정윤의 얼굴에 놓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저장하겠냐는 질문 상자가 나타났다. 사진을 저장할 때 파일 이름을 kama.jpg로 바꾸었다. 손 정윤이 카
마였으면 하는 바램 때문 이었다. 손 정윤이 카마인지 확인하는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긴 했다. 카마의
목소리를 알고 있으니 손 정윤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될 일 이었다. 문제라면 손 정윤의 전화번호를 모른
다는 거 였는다.

18장

디지털 캠코더 설명서를 한 손에 든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컴퓨터와 캠코더를 연결했다. 디지털 캠코더를
처음 다루는 건 아니었 지만 내 손으로 설치하기는 처음이었다. 은빛 캠코더를 컴퓨터 모니터 위에 올려
놓고 리모콘을 누르자 컴퓨터 화면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방송국 카메라 수준의 선명도 를 자랑했다는
광고가 거짓이 아니었다. 아직 이마에 맺혀 있는 땀방울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오후의 진한 햇살이 내 왼쪽 얼굴을 밝게 만들고, 눈부시게 빛나는 귀고리와 발갛게 상기된 귓볼은 대조
를 이루고 있었다. 벌써 2시간도 넘게 귀고리를 달고 있어서 귀가 얼얼했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왼쪽 눈을 찡그리며 왼손을 귀고리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살짝 당겨보았다.
[아야!]
고통이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내 희망 사항은 헛되었다. 그러나 손 정윤이 원했다면 더한 고통도
참아낼 것만 같았다.
[고통은 꼭 나쁘지만은 않아. 필요할 때도 있는 거야. 그런데 네가 고통스러워 하지 않아 좀 실망했어.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 한 모양이야. 그리고 왜 저녁이 다 되어서야 보내는 거니? 내가 일찍 나가라고
했지?]
저녁도 먹지 않고 편지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카마는 그렇게 맥빠지는 말부터 했다. 나는 캠코더를 사러
다니면서도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미행하는 놈에게 보란 듯이 말이다. 그걸 모를 카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귀고리가 잘 어울려. 괜찮아 보였어.]
단지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나는 눈동자를 다음 말로 옮겼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내 실수야. 널 탓하진 않아. 나라도 궁금해서 그랬을테니까.]
나는 양미간을 좁히며 마침표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카마가 손 정윤이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짜릿함도 잠 시였다. 곧이어 공포가 나를 덮쳤다. 손 정윤의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아침 나절에도 낑낑댔지만 소득이 없었다. 대기업 회장집 전화번호를 알아 내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허탈했다. 그래서 몇 군데 전화를 넣어 알아봐달라고 해 두었는데... 내가 핸
드폰을 가진 걸 어떻게 알고 그것마저 도청을 했는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 뒤를 노려서 그랬는지도... 아니야. 그랬다면 치밀한 계획을 세웠겠지...] [그건 오햅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계획을 좀 바꿨어. 계획보다 서둘러 널 만나기로 했어. 모레 정오에 누가 널 데리러 갈 거야. 그 사람
을 따라 와.]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던져두고 얼굴을 화면 가까이로 갖다댔다. 카마는 한 행을
띄우고 다시 말을 이었다.
[모레까지 나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워. 심지어 네 기억까지도 지워. 이건 명령이야. 네가 집
을 나선 다음 누군가가 네 집을 방문할 거야. 그때 네가 내 말을 어긴 게 탄로난다면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물론 네 부모까지도. 내 말 알겠지?]
또 협박조였다. 그렇다고 내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니터 위에서 디지털 캠코더가 나를 노
려보며 계속 돌아가고 있 었다. 계속 내 모습을 촬영하라는 카마의 명령 때문에 50분 단위로 캠코더로
촬영한 동영상을 카마에게 전송하고 있었다. 전송하는 데 걸리는 10분을 빼고는 카마의 시선을 피할 길
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게 시간 당 10분의 여유가 있다는 뜻도 되 었다. 나는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6시 34분. 정확하게 16분 후부터 10분 동안은 카마의 눈을 피하게 된다. 나는 태연
한 얼굴을 지은 채 카마의 홈페이지로 찾아갔다. 카마의 홈페이지는, 뜻밖에 썰렁했다. 검은 바탕에 오
렌지색 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마의 편지를 읽기 전, 그러니까 한 20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 여길 찾아올 필요 없어. 넌 날 만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돼. 이제
네 북마크도 지워 버려. 네스케이프 캐시 디렉토리에 있는 파일들도 모조리 지워. 그리고 내가 준 신용
카드... 태워 버려. 넌 모레까지 집밖으로도 나 가지 못할테니까. 쓸 일도 없잖니?]
모레 만날 때 되돌려 받을 수도 있는 신용 카드를 없애라는 부분에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캠코더 앞에
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컴퓨터 옆에 있던 지갑에서 신용 카드를 꺼내 캠코더에 가까이
비친 후 라이터와 재떨이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신용 카드에 불을 붙였다. 신용 카드는 지직거리며 잘
도 타 들어갔다. 완전히 신용 카드를 태운 후에 자판을 두드리며 캠코더에 대고 말했다.
[이제부터 북마크도 지우고 캐시된 파일들을 지웁니다.] 그러나 나는 캠코더의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
북마크를 지우고 인터넷을 빠져나와 파일 관리자로 가서 네스케이프의 캐시 디렉 토리에 있던 파일들을
지우는 대신 윈도우의 서버 디렉토리로 모조리 옮겨 버렸다. 그리고는 메일 디렉토리에 있던 카마의 편
지 파일들을 글로 일단 옮겨 놓았다. 시간이 나는대로 그 파일들의 확장자를 엉뚱하게 바꿔 버릴 작정
이었다. 이를테면 ini나 hwp로 말이다. 쥐죽은 듯 이틀을 지냈다. 카마가 보기에 내가 구석에 몰려 잔뜩
웅크린 생쥐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내게 허락된 10분 동안 카마 의 흔적들을 숨기느라 발이 보이지 않게
뛰어 다녔다. 그럴 때 귀고리가 부딪쳐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내게는 채찍소리처럼 들렸 다. 그 덕분에
카마의 메모에서부터 카드 영수증, 카마의 비디오 테잎, 카마의 음성이 녹음된 전화녹음 테잎, 카마의
인터넷 편지를 저장한 파일이 담긴 디스켓까지 꼭꼭 숨겨 놓을 수 있었다.
그중 부피가 제일 큰 비디오 테잎은 침대 시트를 찢어 넣어 두었고, 전화녹음 테잎들은 방수처리된 비닐
봉지에 넣어 변기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메모나 카드 영수증같이 종이로 된 건 랩에 싸서 몇 달동안 냉
장고에 얼려둔 채로 있던 쇠고기 덩어리를 녹여 그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디스켓은 컴퓨터 본체를 열어
그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11시 55분, 마지막으로 카마에게 동영상을 전송하는 동안 나는 집안을 휘둘러 보았다. 이틀 동안 머리를
굴려가며 이렇게 숨겨 보고 저렇게 숨겨 보느라 정신없던 시간들이 내 눈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해도 빠져나올 구멍은 마련해 둔 셈이었다. 나는 뒤돌아 서서 거울을 쳐다보며 내게 물었
다.
[이만하면 카마를 만날 준비는 끝난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씩 웃었다.


19장

카마가 말한 그사람과 오는동안 추풍령 고개를 넘어 구마 고속도로를 타고 마산과 통영을 거쳐 거제도
끝, 해금강까지 오는 동안 정확하게 여덟 번 메모를 전달 받았다. 그곳 항구에서 보니까 어부한명이 기
다리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데기는요? 바다지요.]
그러면서 어부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어부가 가는 길은 차를 타고 온 방향과는 반대였고, 그 길 끝
에는 정말 바다가 기다리 고 있었다. 해금강 유람선이 떠 있는 선착장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둥근 가로
등이 노란 불빛을 사력을 다해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형 어선의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위에서는 불빛이 괴로워하며 부숴지고 있었다.
어부는 나를 비좁은 선실로 데려갔다. 어선은 파도를 따라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차선도 없고 가로등
도 없는 어두운 바다로 달려야 했다는 게 불안했다. 그런 내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어부가 시동을 걸면
서 말했다.
[구름 밖으로 달이 나오모 괘안해질낍니더.]
그 말을 듣고 하늘을 보니 머리 위 하늘 두터운 구름의 윤곽을 달빛이 뿌옇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까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누굽니까?]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어선이 흔들렸다. 엔진 소리 때문에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 시간 가까이 찬 바닷 바람을 맞은 후
에도 듣지 못했다. 어선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둥그런 섬에 가까워지자 섬의 끝자락에서 불이
켜졌다. 불빛이 만들어낸 풍경은 뜻밖이었 다. 뿌옇게 빛나는 여섯 개의 등이 목조 선창을 정물처럼 그
려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선체보다 긴 닻과 안테나가 달린 미끈한 요 트가 한 척 정박해 있었다.
[저 섬 이름이 뭡니까?]
어부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추도 아입니꺼?]
어선의 엔진 소리는 그르렁거리며 잦아 들고 있었다. 어선은 달려온 힘에 의지해 선창으로 미끄러져 갔
다. 정적, 그리고 불빛. 낮은 파도 소리. 그게 전부였다. 나를 선창에 내려준 어부는 내가 주위를 기웃
거리고 있는 동안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냥 가면 어떻합니까?]
[그라모, 지보고 우짜라꼬요? 지 일은요, 선생을 요까지 모시다 주는 깁니다. 누가 나올낍니더.]
어부는 포말을 일으키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대신 선
창 끝으로부터 차례로 등이 꺼지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빛이 남아 있는 쪽으로 걸
음을 옮겼다. 그럴 때마다 발 밑에서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 소리는 머리카락을 쭈뼛거리
게 했다. 마지막 남은 등 밑까지 쫓겨갔을 때 나는 구름을 뚫고 나온 달을 보았다. 휘영청 밝기도 한 그
달도 선창 끝에서 숲 사이로 난 계단 전부를 비춰주지는 못했다. 그 계단은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길이었
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 계단에 왼발을 올려놓자 계단 옆에서 등이 켜졌다. 그 등은 겨우 계단 한두개를 비
칠 정도로 작았다. 오른 발을 올리자 다른 등이 켜졌고, 왼발을 떼자 등 뒤의 등은 꺼졌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등이 켜져 길을 밝히게 되어 있었지만 계단의 끝을 보일만큼 밝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파르다는
느낌을 주던 계단이 어느 정도의 높이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꺽이면서 완만해졌다. 그러다가 아래로 난
계 단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계단을 밝히는 등은 아까 보다 밝아 앞의 너댓 계단까지 비출 정도였다.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그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확 꺽여 자갈길이 나타났다. 무성한 등나
무로 둥그렇게 천정을 만 든 그 길의 끝에 희끄므레하게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나를 따라 가슴 높이의 등이 차례로 켜졌다. 20여미터에 이르는 등나무 길이 터널처럼 훤해졌다.
등나무 길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발을 멈추었다. 밑면이 넓은 직사각형으로 된 3층 대리석 건물이 내 앞
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 2층 높이는 됨직한 육중한 현관문이 나를 압도했다. 고개를 젖혀 둘러보니 2
층에만 커다란 창이 8개가 있었다. 현관에 불이 켜지는 바람에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현관문은 소
리도 없이 스르르 열었다. 그와 동시에 불빛이 쏟아져 나왔 다. 나는 눈이 부셔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면
서 실눈을 떴다.
[선착장이 섬 건너편에 있어서 오시느라 힘드셨을 겁니다.]
왠지 모르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불빛을 받아 검게만 보이던 남자의 윤곽이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
했다. 크고 당당한 체격 에 턱시도를 차려 입은 말쑥한 남자였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
그러나 그 남자는 몸을 획 돌리며 말했다.
[벌써부터 기다리고들 계십니다.]
그러면서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홀이 나를 맞았다. 양쪽으로 주단이 깔린 계단이 2층으로 나 있었고, 비스듬하게 각진 천정은 유리로 마
감 되어 있어서 밤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홀 오른쪽으로 난 복도로 앞장 서 걸어갔다. 몇 개의 커다란 방문을 지나 복도
끝에 있는 문에 다다랐 다. 남자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내가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남자는 영어로
말했다.
[오셨습니다.]
푹신한 카페트의 느낌 때문에 놀라 고개를 푹 숙이던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둥
그렇게 놓인 기다란 베 이지색 소파에 앉아 있던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늘씬한 여자들이 일제히 나를 쳐
다 보았다. 그 중에는 백인, 흑인도 있었다. 여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
음질이 쳐졌는데 어느새 문이 닫혀 있고, 나를 데려온 남자도 사라진 후였다. 지팡이 손잡이처럼 생긴
문고리를 움직여 보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은 머리에 갈색 눈의 여자가 내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왜 그래요? 저 모르겠어요? 비니에요.]
그러고보니 뉴욕에서 나를 바닐라 클럽으로 데려갔던 여자, 비니였다.
[저기 낸시도 왔어요.]
[낸시라면?]
나는 비니의 코발트색 손톱이 가리키는 쪽으로 황급하게 시선을 옮겼다. 금발 둘 사이로 소파에 발을 꼬
고 앉아 허벅지가 드러 낸 동양 여자가 있었다.
[곽 재은!]
내 입 속에서 그 이름이 튀어 나옴과 동시에 내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여자들이 이끄는대로 터벅
터벅 곽 재은에게로 걸 어갔다. 치렁치렁한 퍼머 머리에 진하게 화장을 한 곽 재은은 우두커니 선 나를
올려다보며 씽긋 웃었다. 어떤 여자가 내 팔을 끄는 바람에 소파에 털썩 앉게 되었다. 그것도 바로 곽
재은의 옆이었다. 나는 곽 재은에게서 고개를 돌렸 다. 그러자 낯선 동양 여자의 얼굴이 내 코 앞에 나
타났다.
[안녕?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네...]
그 여자는 눈을 찡긋했다. 어디서 본 듯한 여자였다.
[아...]
바로 카마가 보내 준 비디오 속의 그 여자였다.
[이제 주인공이 왔으니까 시작해야지. 페트리카? 어서 주인공 분장시켜. 나머지 사람들은 다 분장실로
가.]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 벽이 새까만 유리로 된 걸
보고 흠찔했다. 나는 유 리 너머를 볼 수 없지만 그쪽에 있는 누군가는 나를 볼 수 있는 그런 유리인 게
분명했다. 가슴이 거의 드러나는 흰 드레스를 입은 늘씬한 금발 여자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야, 페트리카. 네가 날 좋아한단 얘기 들었어.]
딱 벌어진 내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페트리카 올슨?]
페트리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크리스티 톰 이전에 인터넷에서 내가 제일 좋아
하던 누드 모델이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페트리카는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쇼 타임이야.]
나는 페트리카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페트리카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쟈스민 향이 나를 몽롱하게 만
들었다. 페트리카는 나를 소파 뒤 쪽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왼쪽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은 삼면의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었고, 나머 지 한쪽 벽의 반은 갖가지 의상으로 가득했고, 나머지 반은 티크장이 차
지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남보라빛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 페트리카는 나를 티크장 앞에 세우더니 왼쪽
유리벽의 어느 부분을 누르며 말했다. 어디선가 낮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네 모든 환상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될 거야. 오늘, 네가 하고 싶었던 모든 걸 할 수 있어. 넌, 선택된
거야.]
페트리카의 목소리는 에코를 가미한 듯 조금씩 떨렸다. 나는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숨기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조금씩 잘라 내뱉았다. 그러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까지는 숨길 도리가 없었다.
페트리카는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드레스를 팔죽지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드레스는 페
트리카의 풍만한 가슴에 걸려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분홍빛 유판이 반쯤 드러난 그대로 페트리카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난 네가 좋아하는 포즈를 다 알아.]
손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나는 팔짱을 끼어 버렸다. 그 순간, 내 눈 앞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이 들었다.
[놀랄 거 없어. 유리야. 너와 나를 갈라놓는 거지. 우린 언제나 이렇게 만났잖아?]
나는 손을 쭉 뻗어 보았다. 그러나 손끝에는 아무 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용기를 내어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며 허공을 더듬어 보았다. 다시 한 발자욱을 더 옮겼을 때, 내 손을 완강하게 막는 무언가가 느껴졌
다. 내가 그것에서 손을 떼자 뿌옇게 손가락 자국이 남 았다.
[네 앞에서 벗고 있는 나를 원했잖니? 다른 뭘 원했어?]
내가 원한 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놓을 용기가 없었다. 나는 잔뜩 풀이 죽
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 다. 페트리카는 오른쪽 젖가슴을 드러냈다. 파르라한 핏줄이 다 비칠 정도로 투
명한 피부였다. 페트리카는 드러난 젖가슴을 왼손으 로 쥐어짜듯 잡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목선을 완전
히 드러냈다. 내 이빨 사이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와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가 완벽한 젖가슴이라고 칭
찬해 마지 않던 바로 그 젖가슴이 이제 는 모두 드러났다. 페트리카는 두 손으로 가슴을 받쳐 들며 약간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눈을 깔았다. 페트리카는 마치 바디 빌더들처럼 움직였다. 한 포즈에서 다른 포
즈로 넘어갈 때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표현하고자 하는 포즈에 이르러서는 사진의 한 장면처럼 꼼짝도 하
지 않았다. 그러나 페트리카의 새끼 손톱만한 젖꼭지가 바르르 떨리는 걸 나는 보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한발짝 앞으로 다가가 페트리카의 젖꼭지에 손을 갖다댔다. 물론 유리 위였다. 컴퓨터
모니터에서는 페트리카의 젖꼭지에 손가락을 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젖꼭지가 얼마간 떨어져 있다는
게 틀렸다. 페트리카는 몸을 일으켜 엉덩이 중간까지 드레스를 내리고 약간 몸을 틀었다. 그리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면서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공처럼 탄력이 있어 아래로 늘어지는 법이 없었던 그 젖가
슴 그대로였다. 나는 유리 위에서나마 손가락으로 페트리카의 윤곽을 따라갔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직접
페트리카의 몸을 만지고 있는 듯 했다. 꿈꾸는 듯 눈을 감고 있는 페트리카의 입 속에서 신음 소리가 흘
러나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페트리카의 윤곽을 다 그리자 페트리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뻗어
드레스를 허벅지 아래로 밀어 내렸다. 감탄해마지 않 을 동그란 엉덩이. 그리고 빛나는 금발의 음모. 나
는 페트리카의 음모를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다가 삼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멈
칫했다. 내 욕망은 음 모보다 페트리카의 음부가 비치는 유리 쪽으로 향했다. 페트리카가 음부를 드러낸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페트리카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활처럼 등을 뒤로
젖혔다. 음부는 완벽하게 가려져 버렸다. 머리카락을 잔뜩 부풀려 올리면서 페트리카가 말했다.
[내가 싫어진 거니? 날 볼 때마다 네가 하던 일, 그건 어떻게 됐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날 사진으로 생각해. 그리고 여긴 우리 둘밖에 없잖아. 나도 날 사랑하는 네 모습을 보고 싶었어. 정말
이야.]
나는 곁눈질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무도 여기에 들어오지 못해. 확인해 봐.] 페트리카는 눈짓으로 문고리를 가리켰다. 나는 주춤거리다
가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손에 난 땀 때문에 문고리가 차 갑게 느껴졌다. 문고리는 움직이
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페트리카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정말 보고 싶어?]
페트리카는 우아하게 고개짓을 했다.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페트리카의 사진을 보며 자위 행위
를 할 때 의자에서 하는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페트리카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다.
[그냥 서서 해.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
[미리 말하면 재미 없잖아?]
나는 뒤로 돌아서서 혁대를 풀었다.
[아냐. 내가 볼 수 없잖아.]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돌아서서 지퍼를 내렸다. 혹시 카마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허벅지
가 다 드러나는 삼각 팬 티를 입고 나온 터였다. 그런 마음이 꼭 들켜 버리는 것 같아 바지를 벗기가 망
설여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야.]
내 팬티는 짙푸른 남색에 아주 작은 노란 별이 듬성듬성 박힌 거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바지를 주욱 내
렸다. 이미 발기할대로 발기해 있던 내 성기의 귀두 부분은 팬티의 윗부분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귀두
끝에는 반짝이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페트리카는 내게 말을 거는 대신 카페트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도
페트리카를 따라 쪼그리고 앉았다. [넌 서서 팬티를 벗어.]
나는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나 팬티는 앞부분부터 천천히 내렸다. 그동안 페트리카는 엉덩이를 카페트에
대고 다리를 모으면서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몸을 가슴을 완전히 뒤로 젖혔다. 깔끔하게 역삼각형으로
깍은 음모가 허벅지 사이에서 눈부셨다. 페트리카가 천정을 향해 눈을 감고 있는 틈을 타서 나는 서둘러
팬티와 바지를 한쪽에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성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페트리카의 몸을 뜯어 보며 귀
두 쪽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페트리카는 아주 조금씩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내 손놀림도 빨라졌다.
[넌 날 사랑하니?]
그 말에 내 손은 멈춰졌다. 페트리카가 고개를 들고 내 성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 훌륭
해.]
그러면서 페트리카는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페트리카의 음부가 그대로 드러나는 자세였다. 그러나 허벅
지가 만드는 그림자 때 문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대담하게도 오른손을 움직이면서 앞으로 걸어
갔다. 페트리카는 내게 보란 듯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털이 하나도 없는 질구가 내 눈으로 와
박혔다. 조금 열린 페트리카 의 연분홍빛 질는 은은하게 빛났다.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그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보이는 맑은 질구. 내 성기는 이미 거기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더 깊숙히 페트
리카의 질구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입술을 핥으며 오른손을 더욱 재게 움직였다. 페트리카는 몸을 뒤집
어 엉덩이를 내 쪽으로 보이면서 몸을 숙였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유리에 비친 내 성기를 보며 말했
다.
[네 성기가 너무 커서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몰라.]
그 말은 나를 더 흥분시켰다. 나는 두 손으로 성기를 터져라 움켜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금에서 짜
릿함이 느껴졌다. 페트리카의 질구는 조금씩 더 열리면서 색깔도 짙어져 갔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 쉬
면서 다시 손을 움직였다.
[네가 사정할 땐 내 입에 다 해 줘.] 그 말에 나는 왼손을 주먹 쥐어 허공에 휘둘렀다. 둘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를 박살내고 싶었다. 아니 그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첫 번째 주먹질은 헛탕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왼 주먹을 휘둘렀다. 그 사이에도 오른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왼 주먹도 헛탕이
었다. 그쯤이면 분명히 유리가 있어야 했다. 나는 왼팔을 내밀고 더듬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페트리카
와는 점점 가까워졌고 유리는 없어졌다. 유리가 걷히는 걸 흥분해서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 여기 있어.]
나는 발정기의 사자처럼 페트리카에게로 달려 들었다. 오래된 삽입에 대한 내 악몽이나 거부 반응도 어
디 갔는지 사라지고 없 었다. 페트리카의 따뜻한 엉덩이가 손에 닿았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눈깜짝할
사이에 페트리카의 엉덩이 사이로 내 성기를 들이 밀 었다. 페트리카는 머리를 쳐들며 머리카락이 한꺼
번에 일어설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컷!]
어디선가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멈칫했다. 동시에 내 눈 앞에 있던 유리가 갑자기
눈부시게 빛났다. 곧 정체모를 그 빛은 사라졌다. 그런데 믿지 못할 광경이 유리 너머에 펼쳐졌다. 아까
본 여자들이 일렬로 서서 나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 곽 재은의 얼굴도 끼어 있었
다. 나는 너무 놀라 온 몸이 꼿꼿이 굳어 버렸다. 페트리카는 뱀처럼 유연하게 내 다리 사이에서 빠져
나가며 윙크를 했다. [네 성기처럼 딱딱하면서 큰 건 처음이야. 나중에 단 둘이서만 만날 수 있지?]
그 말만 남기고 페트리카는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여자들의 시선이 내 성
기에 쏠린 걸 눈치채기까 지는 그러고도 얼마가 더 걸렸다.


20장

[금방 벗게 될테니 많이 입을 필요는 없어요.]
영국 하녀 복장을 한 새까만 흑인 여자가 페트리카가 빠져나간 방문으로 들어와 한 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잔뜩 웅크렸 다. 빠글빠글 말린 머리카락하며, 검정물을 뒤집어 쓴 듯 까만 피부하며 펑퍼짐
한 코, 두툼한 입술이 영락없는 토종 흑인이었다.
시 리도록 하얀 눈자위와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아니었더라면 얼굴과 뒤통수를 구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생각난 듯 한 손으로 성기를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흑인 여자를 밀치며 벗어던진 바지를 찾아 보았지만
바지는 보이지 않 았다. 그새 흑인 여자는 옷걸이에서 연한 황토색 가운을 꺼내 왔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에요?]
가운을 낚아채듯 받아들고는 여자들이 보였던 유리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유리에 비췬 건 볼썽 사
나운 내 모습과 재밌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는 흑인 여자 둘 뿐이었다.
[괜찮아요. 이제 아무도 없어요. 있어도 그렇죠. 벌써 다 보여줬는데, 뭘 그러세요.]
참 당돌한 여자였다. 그러고보니 쌍꺼풀 진 동그란 눈이 귀엽고 장난스러워 보였다. 나는 돌아서서 가운
을 걸치며 물었다.
[도대체 저 여자들 뭐하는 여자들이냐?]
등 뒤에서 통통 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런 걸 묻는 내가 잘못이었다.
[여기서 일한 지 오래 됐니?]
[오래 됐음 좋겠어요? 아님 며칠 안 됐음 좋겠어요? 그건 그쪽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가운 끈을 묶고나
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나는 돌아서서 흑인 여자한테 물었다. 보면 볼수록 너무 애띤 얼굴이었다.
[너, 도대체 몇 살이냐?]
[열 네살이에요.]
한국 나이로 따지자면 열 다섯이나 열 여섯이 되겠지만 키는 160센티가 넘어 보였다. 열 여섯이라고 해
도 나이보다 숙성해 보였 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나 애띤 눈매로 봐서는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어쩌
다 먼 한국까지 와서 하녀 노릇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일단
카마를 만나야겠다 는 생각밖에 없었다.
[네 주인은 어디 있냐?]
[주인님이 먼저 목욕부터 하시래요.]
[목욕?]
[네. 목욕. 목욕이 뭔지 모르세요?]
[알기야 알지. 하지만...]
흑인 여자애는 나를 무슨 지렁이 보듯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몸으로 주인님을 만나려 하세요?]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고 어찌된 영문인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긴 했지만 카마가 이 일을 불쾌하게
생각할 건 뻔했다. 내 얼 굴이 금방 붉어졌다.
[꼬마야, 그럼 앞장 서.]
그러자 흑인 여자애는 나한테 톡 쏘아 붙였다.
[숙녀한테 꼬마가 뭐에요! 내 이름은 실비아에요. 실비아!]
[미안, 실비아.]
흑인 여자애, 아니 실비아를 따라 처음 들어갔던 방 바로 옆에 붙은 방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방 중앙
에 둥근 욕조가 버티고 있었는데 욕조에서 김이 피어 올랐다. 욕조 주위가 꽃들로 장식되어 있어 꽃밭에
욕조가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욕조로 통하는 공간 역시 카페트가 깔려 있고 카페트 중앙
에 금빛 카터가 놓여 있었다. 카터에는 얼음에 채운 샴페인과 여러 과 일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주춤거
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유리벽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카메라가 몰래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신경을 곤 두 세웠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페트리카와의 일은 실수였다. 인터넷에서
만 만나던 페트리카를 실제로 만나 가상 세계와 현실을 잠깐 착각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무엇에 끌리듯 욕조로 다가가고 있었다. 욕조에서 피어오르는 장미향이
내 신경을 이완되게 하였다. 나는 허리띠를 풀었다. 가운을 벗으려다가 보니 뒤통수가 간질간질 했다.
실비아가 내 뒤까지 쫓아와 있었다.
[됐으니까 넌 나가 있어. 목욕 다 끝나면 부를테니까.]
실비아는 무슨 소릴 하냐는 얼굴이었다.
[전 시중을 들어야 해요.]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내가 어린앤 줄 아냐?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나가.]
실비아는 울상이 되었다.
[주인님이 절 가만 두지 않으실 거에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쓸데없는 소리. 내가 너희 주인 만나면 얘기할테니 어서 나가라, 응?]
실비아의 얼굴은 겁에 질린 듯 했다. 피부가 너무 어두워 표정을 확실하게 읽지 못해 단정지을 수는 없
었다.
[정 그렇다면요...]
실비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방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 문이 잠
겼나 확인하고서야 욕조 로 되돌아 왔다. 가운을 벗고 나자 내 모습이 그 여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
꽝스러웠는지 알만 했다. 비뚤어진 쟈켓과 그 아래로 삐죽 튀어나 온 셔츠. 그걸 보니 귓볼까지 붉어졌
다. 나는 얼른 그것들을 부정한 것이라도 되는 양 휙 벗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풍덩, 욕조 속으로 뛰
어 들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다. 욕조 턱에 목을 대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천정을 훑어보며 내게 닥친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내 생각은 번번히 신경을 자극하는 묘한 소리 때문에 끊어졌다. 그 소리는 어떤 때는 좌르르 파
도에 자갈 구르는 소리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방울뱀이 꼬리를 흔드는 소리같기도 했다. 조금씩 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방의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분명해지면서 아주 작은 방울들을 한꺼번에 흔
들릴 때 나는 그런 소리일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졌다. 나는 물 밖으로 얼굴만 삐죽 내놓은 채 주
위를 두리번 거렸다. 처음엔 여러 소리로 들리던 그 소리가 점점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마치 누가 낯
선, 그러나 경쾌한 노래에 맞춰 흔드는 것 같 았다. 그 리듬은 나를 불안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그 소리를 쫓고 있던 내 귀는 내 뒤쪽으로 쏠렸다. 나는 몸을 틀며 고개를 획 돌렸다. 백합 다발이 내
시야를 가렸다. 그 위로 눈을 치켜 들자 시꺼먼 그림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헉!]
몸을 뒤로 젖히다가 욕조에 풍덩 빠져 버렸다.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그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실비 아였다. 어쩌면 다른 흑인인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린 나는 몸을 물 속에 숨긴
채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저요. 실비아.]
내 시선은 실비아의 얼굴이 아니라 허리에 가 닿았다. 은빛 반짝이는 작은 방울을 이어 만든 두 줄의 허
리띠와 거기서 역삼각형 으로 늘어져 음모를 가리고 있는 철망같은 장식이 아니었더라면 실비아를 그림
자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들어왔어? 어서 나가지 못해?]
그러자 실비아는 몸을 돌려 제 등을 보여 주었다. 등에는 검정 피부와 대비되는 서 너개의 선홍색 핏자
욱이 가로로 나 있었다. 살이 터진 건지, 찢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손님이 저를 거부하시면 저는
또 채찍질을 당해야만 해요.]
나는 등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외면하려고 눈을 찡그렸으나 거기서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 핏줄기
는 등허리의 패인 골을 따라 위로 올려붙은 배구공같은 엉덩이 사이로 흐르거나 엉덩이를 지나 대리석
조각처럼 미끈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타고 흘렀다. 열네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였
다.
실비아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는데도 방울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가면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 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비아는 내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제발 제가 시중을 들게 해 주세요. 어린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그때 나는 실비아의 아랫배가 저
혼자 쉴새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를 일이었으나 거 기서 방울
소리가 나는 것만은 분명했다.
[좋아. 하지만 네 상처부터 치료하고 와. 그리고 옷도 입고 오고.]
그러자 실비아는 백합 다발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와 욕조로 발을 내딛었다.
[그게 아니고...]
내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표범처럼 나를 덮친 실비아의 두꺼운 입술이 내 입을 막아 버렸다. 겨우 두
팔을 뒤로 해서 욕조 바 닥을 짚어 넘어지는 건 면했다. 어린애와의 황당한 키스에서 벗어나려면 쓰러지
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몸은 그 렇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실비아의 입술은 두꺼웠지만
혀는 뱀의 혀처럼 작고 길었다. 실비아의 혀는 내 입술과 잇몸, 이빨, 입 천정, 혓바닥 어느 것 하 나
놓치지 않았다. 그 혀에서 흘러나오는 침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고 혀의 놀림은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
다. 길고 격정적인 키스는 내 몸에서 온 힘을 빼 버렸다. 나는 기어코 물 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그러나
실비아는 물 속에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두태의 비아냥거리는 얼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몸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비비 꼬이기만 할 뿐이
었다.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나를 실비아가 밀어 올려 주었다. 욕조턱에 뒷목을
기대게 해 놓고 실비아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키스가 아니었다. 물의 따뜻함과는
분명히 다른 서늘함이 성기에서 느껴졌다. 성기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듯 허전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마치 쭈쭈바가 된 기분이었다. 성기를 통해 내 모든 게 실비아의 입 속으로 빠져나가 나중엔 쭈글
쭈글한 껍질만 남지 않을 까 불안했으나 전신을 파고 드는 짜릿함은 그 불안마저 파괴해 버렸다. 내 온
몸 전체가 성기가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기가 발기되었을 때, 실비아는 물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흰 눈자위와 백 상아같은 이가 실비아의 얼굴을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게슴츠레하게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보면서 나는 씩 웃었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실비아의 까만 피부보다 더 새까만 젖꼭지를 내
코 앞에 갖다댔다. 손을 오무렸을 때 빈 손아귀에 꼭 맞을 정도로 앙징맞은 젖 가슴이었다. 실비아는 내
손을 끌어다가 제 가슴 위에 놓았다. 얼마나 피부가 매끄러웠던지 내 손은 젖가슴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쭈욱 미끄러져 버렸다. 어쩌면 손에 힘이 빠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실비아는 다시 내 손을 제 젖가
슴에 올려놓았다. 나는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채 젖가슴을 어 루만졌
다. 그새 실비아는 내 성기를 후루루, 제 몸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 일이 벌어졌는지 나
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나는 깜짝 놀라 엉덩이를 움직여 보려했지만 실비아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
다. 실비아의 몸 속에 있는 뭔가가 내 성기를 꽉 물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아악!]
나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요. 내 사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는 힘을 뺐다. 실비아는 몸을 아래위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냥 몸 전체를
바르르 떨고 있을 뿐이 었다. 내 성기는 여자의 성기 모양을 한 남성용 바이브레이터 속에 끼인 것보다
더 기분좋게 자극을 받았다. 바이브레이터가 단순히 진동만 했다면 실비아의 그것은 성기를 물었다가 놨
다가 빨았다가 뱉았다가를 반복하면서 내 정신을 빼 놓았다. 내 몸은 벌써부터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졌
으나 내 성기만은 철판이라도 뚫을 정도로 빳빳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성기에 뻑뻑한 느낌이 없고 오히
려 풍선처럼 불었다줄었다하는 느낌이었다. 실비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게 보였다. 물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은 물 속이 아니라 마치 마술사가 최면을 걸 어 공중에 띄워 놓은 사람처럼 둥둥
떠 있는 것 같았고, 내 주위를 포근한 무언가가 감싸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자의 몸에 삽입 하는 게 이
렇게 황홀한 건지 그때까지는 정말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공중에 뜬 내 성기를 하늘로 낚아채 올리는 것 같았다. 내 등은 활처럼 휘어져 공
중에 매달린 꼴이 되었 는데, 한순간만 방심하면 성기를 통해 내 영혼이 모두 빠져 나가 버릴 것 같았
다. 절정의 순간은 그렇게 다가왔다. 내 머리는 아무 것도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풍선이나 마찬가
지여서 누군가 바늘로 내 머 리를 꼭 찌르면 그걸로 끝장이 나 버릴 지경이었다. 좀처럼 눈이 떠지질 않
았다.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정한 후에도 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일이었다. 때가 되었다. 나는 이미 참을만큼 참았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내
존재가 지워져 버려도 좋다는 결심하고 눈을 번쩍 떴다.
[아아아아...]
내 성기는 용암을 뿜어내기 직전인 활화산처럼 완전히 수축했다. 내 눈자위는 거의 뒤집히기 직전이었
다.
[컷!]
그 소리에 내 몸은 천근만근인 채 땅 속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 놈의 컷, 소리와 동시에 실비아
는 나를 버렸고, 나는 절 망에 빠졌다. 절망보다 큰 좌절감이 나를 엄습했으며 내 몸은 똥보다 더 누추
해졌다.
[왜?]
실비아의 생글거리는 얼굴에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내겐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넌 왜 날 기억하지 못하니?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었나 보지? 사실 좀 실망했어.]
실비아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욕조를 빠져 나갔다. 실비아의 몸에서 나는 방울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야 실비아 가 누군지 알아 보았다. 실비아 폴락, 흑인 발리 댄서이자 포르노 배우.
[설마!]
누군가 내 뒤통수를 둔기로 후려치는 것 같았다. 나는 실비아의 비디오를 인터넷으로 보면서 몇번인가
실비아와의 섹스를 상상 하며 자위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비아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다. 흑
인 얼굴을 잘 분간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내가 기 억하는 건 실비아의 얼굴이 아니라 배꼽과 아랫배였다.
내 머리는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미국 경찰 복장을 한 글래머 둘이 곤봉을 가죽 장갑을 낀
손바닥에 탁탁 치면서 내 앞으로 걸어왔다. 모자를 눌러 쓰기는 했지 만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터넷과 그들을 연관시켰다. 답은 곧 나왔다. 하드 바디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쌍둥
이 자매였다. 하드 바디는 여성 바디 빌더들의 누드 사진을 모아 놓은 사이트였고, 그네 들의 이름은 알
리사와 사만타였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내 몸을 가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알리사와 사만타는 똑같이
욕조 턱에 발을 턱 올려놓았다. 그중 하나 가 위협조로 말했다.
[넌 미성년자를 성추행했다. 너 같은 놈에게는 묵비권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없다. 법정에 갈 필요
도 없다.]
알리사가 말했는지 사만타가 말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둘 다 옷을 벗고 있다면 음모 옆에 거미
문신을 새기고 있는 쪽 이 알리사란 걸 금방 알겠지만 말이다.
[누가 알리사지? 난 너희들을 알아. 그리고 너희도 알겠지만 실비아 폴락은 열네살이 아니야. 23살. 이
집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어. 아마 디트로이트에서였을 거야. 안 그래?]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이려고 다리를 꼬아 성기를 가리며 팔짱을 끼었다. 그러나 그건 내 오산
이었다. 둘 중 하나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며 욕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곤봉으로 내
목을 죄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야이, 개자식아! 우리가 지금 할 일이 없어 여기 있는 줄 알아?]
나는 숨이 막혀 캑캑대며 발버둥을 쳤다. 욕조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만타, 우리를 존경하도록 저 더러운 유색인종 놈한테 본떼를 보여줘.]
그러니까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여자가 사만타인 셈이었다. 사만타는 힘을 주어 내 목을 끌어당기며 일어
섰다. 사만타의 팔뚝을 주먹으로 치며 반항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숨이 더 막혔다. 목을 죄지 못하도록
곤봉을 붙잡고 버티며 사만타가 끄는대로 욕조 밖 으로 나갔다. 알리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곤봉
끝으로 내 명치를 찔렀다.
[욱!]
나는 바닥으로 푹 꼬꾸라져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막 옆으로 쓰러지려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후려쳤다.
나는 발랑 뒤집어졌다.
[엄살 떨지 말고 일어서! 이 개자식.]
바닥에 깔려 있는 폭신한 카펫도 내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
로 고통스러웠다. 겨우 내가 한 일이라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추리는 것 뿐이었다.
[ 끌고 가자구.]
알리사와 사만타는 내 팔죽지를 하나씩 붙잡고 나를 질질 끌었다.

21장

내가 끌려간 방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고통을 참아내기에도 벅
찬 순간들이었다. 알리사와 사만타가 나를 끌고간 방은 다른 방들과 확실히 달랐다. 일단 어두웠고, 바
닥도 시멘트 그대로였다. 시멘트에서 올라 오는 한기가 내 몸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천정에 달린 갓전
등의 희미한 불빛만이 내 편인 것 같았다. 알리사와 사만타는 나를 붉은 벽돌 벽에 붙여 세우고는 곤봉
을 엑스 자로 교차시켜 목을 죄더니 내 팔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차갑고 축축한 벽돌의 느낌이 내 신경
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촤르르.]
분명한 쇠사슬 소리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기보다 먼저 고개를 돌려 보려 했다. 그러나 고개가 돌아
가지 않았다. 겨우 곁눈질로 둘이 내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거 왜 이래! 놔!]
그러나 그들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철컥.]
그 소리는 거의 동시에 났다. 둘 중 하나가 같잖다는 투로 빈정거렸다.
[임마, 버둥거려 봤자 소용없어, 알아?]
알리사와 사만타는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으나 팔목은 쇠고랑에 붙잡혀 있었다. 나는 팔을 퍼득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대답 대신 쇠사슬이 벽에 부딪히며 내는 쇳소리만이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제복이 물에 젖은 사만타가
모자를 삐딱하게 쓰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곤봉으로 내 턱을 찔러 올리며 말했다.
[! 지금부터 한마디만 더 하면 턱을 완전히 부숴버리겠어. 내 말 알겠어!]
나는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어렵게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사만타는 씩 웃는가 싶더니 내 성
기를 꾹 움켜 쥐었다.
[욱!]
차갑게 젖은 가죽의 느낌이 내 몸을 쪼그라들게 했다.
[사만타, 장난 치지마.]
알리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만타는 내 성기를 잡아 당길 수 있는 데까지 잡아 당겼다가 탁 놓았다.
그러자 알리사가 나를 향해 서치 라이트를 비추었다. 너무나 강렬한 빛이어서 몸에 남아 있던 물기마저
금방 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알리사와 사만타는 서치 라이트 뒤의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끼이익, 기분 나쁜 문 소리가 들렸다. 다시 문 소리가 들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어야
1-2분? 그러나 내게는 그보다 몇 십배로 길게 느껴졌다.
[브레이크 타임이야. 한 5분 정도 여유가 있지.]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서치 라이트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온 몸을 흔들어대며 다급하게 물었다.
[카마는 어디 있습니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날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후후. 나를 벌써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아까는 날 알아보는 것 같던데?]
터벅터벅 걷는 구두 소리가 내 귀에 쩡쩡 울렸다.
[잘 기억해 봐. 친구.]
내 몸을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 나는 절망에 사로잡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목소리는 내가 늘 잊기
를 원해 온 목소리였다. 또한 현관에서 나를 맞은 그 남자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나를 알아보는군 그래. 하하하.]
그는 마쵸맨 마 동식이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불빛을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감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꾸민 짓이냐? 이런다고 뭐가 될 거 같아?]
[안될 것도 없지. 안 그래, 친구?]
마쵸맨은 180이 넘는 키에 바디 빌딩으로 다듬어진 몸매로 여자애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마쵸맨이 원한 건 여자가 아니었다. 나와 마쵸맨의 악연은 대학 2학년 때 교양 과목으로 수영을 배웠는
데, 실내 수영장 탈의실에서 내 엉덩이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빛에서 이상함을 느낀 후부터였다.
어느날 저녁, 마쵸맨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 나를 덮쳤다. 제 차로 끌고가 나를 묶은 다음 한적한
교외로 납치했다. 마쵸맨은 차를 세운 후 나를 끌어내 본네트에 엎드려 놓더니 내 바지를 벗겼다.
[널 진짜 남자로 만들어 주겠어.]
나는 온 힘을 다해 반항을 했지만 마쵸맨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바지가 벗겨진 채 흠씬 두들겨 맞고 축
늘어진 나를 마쵸맨은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 일이 있고 보름 동안은 학교 근처도 가지 않았다. 뿐만 아
니라 내게 삽입에 대한 악몽이 시작된 것도 그 사건 이후였다. 그 후로도 대학 졸업할 때까지 마쵸맨은
잊을만하면 나를 습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한 달 전쯤 새벽에 전화를
걸어왔다.
[알지? 넌 내 꺼다. 하지만 옛날처럼 그렇게 널 가지진 않겠다. 네가 날 사랑하게 만들고 말거니까. 기
다리고 있어라. 우린 꼭 만나게 될 거다.]
그 날부터 며칠 동안 신경쇠약증 환자처럼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내가 널 왜 떠났는지 얘기 안 했지?]
마쵸맨의 목소리는 불빛을 타고 내 몸에 와 닿았다. 나는 벌레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온 몸
을 흔들었다. 쇠사슬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썩 괜찮은 파트너를 만났다. 그때 그 사람 나이가 서른 셋이라고 했지. 그 사람
이 나한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줬다. 항문에 성기를 집어넣는 건 사랑이 뭔지 모르는 놈들만 하는 짓이
라고 했다. 그 사람은 절대적인 복종이 없이는 진정한 사랑도 없는 거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내 말
이해하겠냐?]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마음만 먹으면야 언제든지 네 엉덩이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네가 스스로 내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게 순
서라고 생각했다. 난 강자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분간만 너를 잊고 지내려고 했는
데... 일이 틀어져서 샌프란시스코에 눌러 앉게 됐다 .]
귀를 틀어 막을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왔잖냐? 넌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놈이다. 어딜 가든 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
었다. 이건 진실이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야이 야, 진실이 쥐약 먹었냐? 너같은 놈한테 당하고 산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뭐, 사랑, 진실!
좇까지 마라!]
[후후후. 아직도 성질이 남아 있다니 놀라운 걸? 이 섬에서 나갈 때도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하하
하.]
나는 목에 핏줄이 터질 정도로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야아아!]
마쵸맨은 고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짧게 말했다.
[다시 쇼타임이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치 라이트 뒤에서 알리사와 사만타가 걸어나왔
다.

22장

사만타의 손에는 새끼 손가락 굵기도 안되는 주사기가 들여 있었다. 주사 바늘 끝에 맺힌 물방울이 싸늘
하게 빛났다.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구?]
[알리사, 뭐해 어서 이 자식 팔을 붙들지 않구?]
투닥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알리사의 얼굴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껏 알리사
를 걷어차 버렸다. 그러나 알리사는 여유있게 손으로 내 발길질을 막아냈다 .
[귀엽게 구는데...]
알리사는 몸을 획 돌리면서 팔꿈치로 사정없이 내 명치를 쳤다. 숨이 턱 막혔다. 축 늘어진 내 팔뚝을
주사 바늘이 뚫고 들어왔다.
[착하지..]
사만타가 내 팔목을 묶고 있던 쇠고랑을 푸는 사이 알리사가 나를 안았다. 근육질의 단단한 몸이 온 몸
으로 느껴졌다. 알리사는 나를 들쳐 매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알리사의 단단한 등에 얼굴을 댄 채
흔들리고 있던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배를 탔을 때처럼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누가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도 웅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몹시 눈이 부셨다. 눈을 감으며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뭔가에 묶여 있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깼어요?]
영어로 말하는 여자가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누운 채였다. 내
오른쪽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은 조명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
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문신을 새기고 있어요.]
[뭐?]
일어나려고 용을 써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문신을 망치면 어떻하려고요?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여자는 스탠드 모양의 조명을 꺽어 내 허벅지 쪽으로 불빛을 옮겼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내 기억의 어디에도 없는 여자였다.
[다 끝났다니!]
여자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허벅지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고개를 바짝 당긴 채 여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바늘같은 걸 쥔 여자의 오른손이 내 허벅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왼손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얼룩진 천이 쥐어져 있었다.
[앗!]
허벅지 안이 주사 바늘에 찔린 것같이 따끔했다.
[왜 이래?]
여자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계속 바늘로 내 허벅지를 찔러댔다. 연속적인 따끔거림은 고통으로 변
해갔다. 계속적인 바늘질로 식은 땀이 온 몸에 맺히고 신음이 강물처럼 이어졌다. 천으로 허벅지를 닦아
내느라 잠깐 멈추기도 했지만 그 여자는 내 고통 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는 고통을 잊어보려고 눈을
질끈 감아 보았지만 그럴수록 고통은 더 선명해졌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주위로 눈
길을 돌렸다. 그러니까 나는 큰 대자로 수술대 같은 곳에 묶여 있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 목까지 가죽
띠로 묶여 있었으므로 꼼짝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온 벽이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벽 군데군데에서 장미나 용, 기하학적 무늬 의 문신 형태를 한 네온이
반짝이는 걸 빼고는 텅빈 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중 하나에서 시선이 멈춰졌다. 가냘픈 남자를
짓밟고 서 있는 근육질의 남자 모습의 네온이 있었다. 그건 마쵸맨의 엉덩이에 그려져 있는 문신이었다.
[으으... 제발...]
여자가 내 허벅지를 소리나게 치며 말했다.
[다 됐어요. 마음에 들어요?]
눈을 부라린 채 머리 속으로 할 말을 찾고 있는 나보다 빨리 방 어디에선가 스피커를 타고 여자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좋아.]
동시에 내 머리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알리사와 사만타가 나타났다.
[굉장한데?]
아마 사만타일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내 목에 묶인 가죽 띠를 풀더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얼굴에
천이 닿는 느낌이 꼭 거친 풀에 긁힌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봐, 맞고 끌려갈래? 아니면 순순히 따라갈래?]
반항은 이득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팔과 다리가 자유로와졌다. 알리사와 사만타는 나를 일으
켜 세우고는 가운을 걸쳐 주었다. 나는 인형처럼 그들이 움직이는대로 내 몸을 맡겨 두었다. 나는 차가
운 복도를 지나 푹신한 카페트가 깔린 방을 지났다. 그리고 다시 어떤 방에 들어갔다. 내 몸에 걸치고
있던 가운은 스르르 벗겨졌다. 곧 옷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발 들어.]
발목을 스치는 물체의 느낌은 차가왔다.
[왼발 들어.]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이 전해졌다. 그 느낌은 허벅지를 스치고 엉덩이를 지나 허리에서 멈추었다. 내가
입은 것의 구조는 팬티에 가까웠다. 사타구니와 엉덩이 사이를 지나는 얇은 끈이 있긴 했지만 성기는 그
대로 드러난 듯 했다. 곧이어 목에 개목걸이같은 게 채워졌다. 팔목과 발목에도 가죽 느낌의 물체들이
채워졌다. 그럴 때마다 어디서 찰랑거리는 쇠소리가 들렸다. 누가 축늘어진 내 성기를 툭 치면서 말했
다.
[됐어.]
나는 그 모습 그대로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나른한 로터스 향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이 덮여 있는 침대에 앉혀졌다. 그러자 긴장이 나른하게 풀
렸다. 그러나 내가 잊고 있던 고통이 온 몸에서 전해져 왔다. 허벅지 뿐만 아니라 가슴, 팔, 엉덩이,
등, 얼굴까지 따끔거리고 등이 쑤셨다.
[좌르르.]
쇠사슬 소리였다. 그러나 아까처럼 신경을 끄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쇠의 재질이 틀리는지 아주
부드럽고 한편으로는 감미롭기까지 했다. 내 팔과 다리, 목 그리고 허리에 쇠사슬이 걸리는 게 느껴졌
다. 알리사와 사만타의 발자욱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
어졌다. 나는 살며시 오른쪽 팔을 움직여 보았다. 팔목에서 쇠사슬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쇠사슬은 팔을
머리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왼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얼른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었
다. 어두운 감이 들 정도로 차분히 가라앉은 조명이 내 눈을 편하게 했다.
내 시선은 곧 장 허벅지로 향했다. 아직도 따끔거리는 허벅지에서 무릎 위까지 는 붉은 색과 초록 색으
로 꿈틀거리고 있는 뱀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타구니 바로 양 옆에서 성기를 집어 삼킬 듯 입을 쫙 벌린
뱀의 모습은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절로 고개가 푹 숙여지면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내 가슴에 뭔
가가 그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가슴 한가운데는 한 남자가 여자의 성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
었다 . 나는 두 손으로 가슴을 마구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지
만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한 손
으로는 가슴팍을 문지르면서 몸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팔죽지에도 벌거벗은 여자들의 누드가 새겨져
있었다.
[야아아...]
나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쇠사슬 때문에 한 발짝 이상을 앞으로 나갈 수 없
었다. 쇠사슬은 침대의 모서리마다 서 있는 굵은 두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있는 힘을
다해 쇠사슬을 잡아 당겨 보았다. 그러나 기둥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몸에 묶인 고리 부분을
푸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쓸데 없는 짓이야.]
나는 놀라 성기부터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에 나타난 여자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금칠이
되어 있었다. 바디 페인팅을 한 누드 모델을 본 적이 없었더라면 귀신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황금빛
여자는 오른팔을 쫙 펴고 있었는데 그 손에는 긴 채찍이 들려 있었다. 여자는 명령조로 말했다.
[앉아!]
그러나 그 말은 내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여자를 향해 돌아서서 온 몸으로 침대를 잡아당겼다. 시뻘
게진 얼굴과 목의 핏줄과 팔과 다리의 근육이 끊어질 정도로 불거졌다. 코로는 더운 김이 터져 나왔다.
[휘익!]
여자가 황금팔을 휘두르느가 싶더니 허벅지가 왼쪽 종아리가 덴 것처럼 아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왼쪽 무릎이 확 꺽이면서 주저 앉게 되었다.
[네 꼴을 봐서 알겠지? 이미 넌 버린 몸이야.] 나는 황금빛 여자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어서 카마를 데려와. 그러지...]
[휘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찍은 내 등을 반으로 갈라놓는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등이 쪼개진 듯 고통스
러워 저절로 일어서졌다.
[네 얼굴은 아직 못 봤나 보구나. 조명!]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정 군데군데 불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방은 환해졌고, 여자는 더 빛났
다. 검고 긴 채찍의 둥그런 끝부분이 방울뱀의 꼬리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왼쪽을 보시지.]
나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눈동자만 천천히 왼쪽으로 돌렸다. 내 눈꼬리가 끝나는 부분에 커
다란 둥근 거울이 반쯤 나타났다. 거울 속의 내 얼굴 전체에 날개를 활짝 편 붉은 새가 새겨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살며시 갖다댔다. 손바닥이 닿자 얼굴이 따끔거렸다. 팩을 한 것처럼 얼굴이 뻑뻑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침을 손바닥에 발라 왼쪽 볼을 살살 비볐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거울에 볼을 비춰보았다. 어느 한 곳도 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침이 묻은 부분은 도리어 선명하
게 보였다.
[이젠 됐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쇠사슬이 스르르 움직이면서 나를 기둥 쪽으로 끌고 갔다. 여자의 왼
손에는 리모트콘트롤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침대에 앉을 수 없었다. 두 기둥 사이에서 팔 다
리가 완전히 엑스 자로 벌려진 채 서 있을 수밖에 없도록 쇠사슬이 당겨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 호호. 그게 네 마음대로 될까?]
팔, 다리가 기둥에서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을만큼 쇠사슬은 죄어졌다. 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
만도 다행이었다.
[넌 내가 원하는만큼만 움직일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네 몸은 내 소유라는 거야. 넌 내 노
예고. 알겠어?]
나는 쇠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마구 버둥거렸다.
[내가 말할 때는 공손한 태도로 듣고 있어야 해.]
여자는 리모트콘드롤을 내게 들이댔다. 그러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이 들리는가 싶더니 내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개목걸이가 내 목을 서서히 죄어와 결국엔 발끝으로 서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볼까? 깔깔깔.]
나는 눈을 치켜뜬 채 황금빛 여자를 노려 보았다.
[음...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래? 그래... 쉽게 굴복하는 놈보다 성질 있는 놈 길들이는 게 재밌지. 하하
하.]
그러면서 리모트콘트롤을 내게로 향했다. 쇠사슬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목을 죄어왔다. 이제는 발끝으로
서 있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배에 있는 힘을 다 주고 악을 썼다. [야이 개같은 년아! 누굴 죽일려
고 작정했냐! 어서 못 풀어!]
[후후... 네 말이 맞아. 벌써 죽이면 재미가 없지.]
촤르르, 쇠사슬이 풀리면서 내 머리는 앞으로 푹 숙여졌다. 내가 캑캑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황
금빛 여자는 어느새 내 앞까지 와 있었다. 황금빛 여자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젖히더니 마구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부벼댔다.
[화아! 괜찮은 걸?]
입술을 떼면서 황금빛 여자는 징그럽게 웃었다. 나는 그 얼굴에 침을 뱉아 버렸다. 그런데 황금빛 여자
는 그걸 좋아했다. 코 옆으로 줄줄 흐르는 침을 혀를 낼름거려 핥아 먹었다. 나는 한국말로 욕을 했다.
[야이 미친 년아!]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소린지 짐작이 갈텐데도 황금빛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버릇을 고치는 건 좀 뒤로 미뤄둬야겠어. 먼저 내 욕심부터 채워야지.]
그러더니 황금빛 여자는 빨간 혀를 낼름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황금빛 여자의 혀는 얼굴에서 시작해서
목을 지나 가슴에 이르렀다. 문신이 새겨진 부분이 따끔거리고 구역질이 날 것처럼 내 몸에 혀가 닿은
게 싫은데도 내 성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안된다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성기는 내 말을 듣
지 않았다.
나는 발기를 막기 위해 머리 속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우하귀의 화점에 흑을 놓고, 좌상귀의 소목
에 백을 놓았다. 좌하귀의 소목에 흑을 놓고, 우상귀의 화점에 돌을 놓았다. 우하귀와 좌하귀 화점의 중
간 지점에 흑을 놓아 삼련성을 만들었다. 백이 둘 차례였다. 그러나 황금빛 여자의 입 속으로 내 성기가
빨려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백 돌을 두지 못했다. 황금빛 여자는 북작북작 소리를 내면서 내 성기를 빨아
댔다.
두 손으로 밑둥을 부여잡고 머리카락을 움직이고 있는 황금빛 여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만하라는 소리
를 하지 못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를 악물었으나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몽롱한 시간
이 한참을 지나 성기가 완전히 부풀어 올랐다. 이빨로 성기를 살짝 깨물면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것 같
았다.
[햐...]
황금빛 여자는 혀로 제 입 가에 흘러내린 침을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리모트콘트롤을 내게로
들이댔다. 그러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내 팔이 뒤로 끌려갔다. 그 바람에 침대 위로 넘어
졌으나 쇠사슬은 침대 네 모서리마다 서 있는 기 둥과 기둥을 이어주는 기둥을 따라 움직이면서 나를 침
대 머리맡으로 끌고 갔다. 내 머리가 베개에 닿자 다시 목과 팔과 다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내 몸은 꼼짝
할 수 없는 엑스 자가 되었다. 입 주위에 금빛이 벗겨겨 커다란 입과 삐죽 튀어나온 솜털이 그대로 드러
난 황금빛 여자가 내 몸 위로 타고 올라왔다.
[어디 너만 좋으면 되겠어?]
그러면서 엉덩이를 내 코 앞에 갖다댔다. 금빛이 번지고 털이 듬성듬성 나 흉칙한 음부에서 시큼한 냄새
까지 났다.
[잘 핥아! 안 그러면 이걸 잘라 버릴거야!]
황금빛 여자는 몸을 돌려 내게 회교도들이 들고 다니던 날이 초생달처럼 휜 칼을 내보였다. 그러더니 제
허벅지를 쓱 그어 피를 보여주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혀를 반쯤 내밀었다. 그때 섬뜩한 칼의 느낌
이 고환을 스치는가 싶더니 성기의 밑둥에 와 닿았다. 나는 혀를 쭉 내밀고 미끈미끈한 질구를 핥기 시
작했다. 떨뜨름한 맛이 혀끝을 괴롭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지만 혀를 멈추지 못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
서 혀를 낼름거리는 동안 황금빛 여자의 질구에서 끈적거리는 액이 흘러나와 내 얼굴을 적셨다. 황금빛
여자는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내 얼굴 전체에 그 액을 칠했다. 내 목에 음모 하나가 걸리는 바람에 나는
캑캑거리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황금빛 여자는 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더 신이 나서 엉덩이를 흔
들어댔다. 몇 번을 더 캑캑거리는 동안 피가 거꾸로 흘러 이마까지 벌게졌다.
[우엑!]
내 몸이 살기 위해 택한 최후의 수단은 구역질이었다. 낮에 먹은 갈비부터 푹 쪄진 회와 상추잎까지 그
여자의 음부에 대고 토해 버렸다. 토사물이 코와 입을 막아 다시 캑캑거렸다.
[꺅!]
황금빛 여자는 급히 엉덩이를 치우려다가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나는 캑캑거리면서도 통쾌해
서 웃고 말았다.
[야!]
황금빛 여자가 채찍을 들고 일어나 나를 후려치려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컷!]
또 그 정체불명의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가 몹시도 반가왔다. 투덜거리며 사라진 황금빛 여자의 자리
를 알리사와 사만타가 채웠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나를 내려보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환하게 인사를 했
다.
[반가워, 알리사. 오, 사만타?]
알리사와 사만타는 팔과 다리에 묶인 사슬은 금방 풀었지만 목에 걸린 사슬은 풀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낄낄대며 말했다.
[사만타. 네가 풀어줘. 네가 알리사보다 날 더 좋아하잖니?]
사만타의 입술을 씰룩거리며 곤봉을 치켜 들었다.
[미친 놈!]
알리사가 사만타를 막아서며 내게 수건을 던져 주었다.
[닦아!]
토사물을 대충 닦아내자 알리사가 목에 걸렸던 사슬을 풀어주었다.
[고마워, 알리사.]
나는 알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샤워를 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는 나를 드럼처럼 두들겨 댔
다. 르느와르의 그림이 그려진 벽의 타일에 손을 짚은 채 나는 꺼억꺼억 울고 말았다. 뭐가 어디서부터
틀어져 여기까지 왔나는 문제거리도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과 슬픔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벅
찼다. 보기 딱했던지 알리사가 물줄기 아래로 걸어와 내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아, 여기 엄마가 있잖아.]
나는 알리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이제 난 어떻하면 좋아. 내 인생은 끝장났어.]
알리사는 나를 꼭 껴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밤 일은 꿈이라고 생각해. 아침이 오고 네가 눈을 뜨면 꿈은 끝나게 돼 있어.] [경치 한 번 좋네.
뭣들하는 거야!]
사만타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알리사는 나를 밀어젖혔다.
[이 새끼가 막 덤비잖아, 글쎄.]
[너한테 덤벼? 야, 어서 닦고 옷이나 입어! 시간 없어.]
내 의상은 검정 바지에 등이 둥글게 파진 흰 와이셔츠, 빨간 나비 넥타이였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
는 사이 알리사와 사만타도 폭주족처럼 가죽 점버에 찢어진 청바지로 갈아 입었다. 둘은 나를 이층으로
데려갔다. 이층 왼쪽 복도 끝방의 입구에는 휘갈겨 쓴 글씨로 쓴 바닐라 클럽이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
다. 두터운 방음문을 지나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홀 중앙에 스폿 라이트를 받고 있는 무대가 눈에 들어
왔다. 무대 주위로 둥근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 있었고 테이블마다 여자들이 앉아 맥주병을 빨거나 담배
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갖가지 술병이 진열된 바가 있었다. 사만타는 주먹으로 내 턱을 툭
툭 치면서 말했다.
[넌 이곳 바텐더야. 바텐더가 뭐하는지 알지? 잘하면 너도 재미 볼 수 있지만, 헛튼 짓 했다가는 그 꼴
같잖은 얼굴을 완전히 뭉개 버릴거야, 알겠어!]
나는 터벅터벅 바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바에 서자 어디에선가 요란한 음악이 터져 나왔다. 멀뚱멀뚱
빈 무대만 쳐다보고 있던 내게 꽉 끼는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 하나가 다가왔다. 비니였다. 비니는 바
건너편의 의자에 걸터 앉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잘 어울리네요. 오늘 힘들었죠? 사는 게 다 그런 거에요. 쉽게 돈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안 그래요? 언제 내 차례가 올지 기대되요. 기다리기가 지루하네요. 벌써 새벽인데...]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니는 손지갑에서 라이터와 검은 종이로 싸인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물고
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해요? 불 붙여주지 않고?]
나는 힐끗 출입구 옆에 버티고 선 사만타를 쳐다 보았다. 사만타는 험상궂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담
배불을 붙여주자 비니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지긋이 감으며 담배를 쭉 빨았다.
[이봐요. 아저씨. 당신이나 나나 별다를 게 없는 인생들이에요. 서로 존중해주는 게 좋잖아요? 마티니
한 잔 주세요.]
나는 바에 놓여 있는 병 중에서 마티니 병을 찾았다. 마티니 잔은 바 아래에 있는 선반에 놓여 있었다.
마티니를 비니 앞에 내려놓자 비니는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뿜었다. [소금하고 올리브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내 왼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올리브 열매가 담긴 병과 소금통이 있었다. 올리브는
꽂이에 꽂고 소금은 작은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서투니까 더 재밌네...]
그 말에 내 얼굴은 붉어졌다.
[오, 아저씨. 당신 얼굴 좀 봐요. 뭐가 그려져 있어요.]
나는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얼굴에 문신이 되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손 좀 치워봐요. 아까는 얼굴이 깨끗하더니 갑자기 어디서 그런 게 생긴 거죠?]
[아까는 없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러면서 나는 몸을 숙이며 두 손으로 바를 짚었다.
[야, 불사조다.]
비니는 홀 쪽으로 몸을 틀며 소리를 질렀다.
[낸시!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홀 왼쪽 테이블에서 금발 머리가 고개를 돌렸다. 낸시라면 곽 재은인데, 화장을 진하게 해서인지 동명이
인인지 곽 재은과는 얼 굴이 영 딴판이었다. 낸시라는 여자는 몸 파는 여자이나 입는 가슴이 푹 파이고
번쩍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술이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내 쪽 으로 걸어왔다. 눈두덩이까지 진하
게 칠한 파란색 아이새도우, 그 위에 뿌린 금가루, 입술보다 크게 그린 붉은 립스틱, 왼쪽 볼 에 검은
점까지 너무나 천박했다. 낸시는 비니 옆에 털썩 주저 앉더니 나를 보고는 헤 웃었다.
[자식, 수줍어 하기는...]
그리고는 비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뭘 보라는 거야?]
목소리도 곽 재은이 아니었다.
[저 바텐더 얼굴! 안 보여? 저 불사조 문신?]
[어디?]
[손 치워 봐.]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비니의 말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뭐가 있다고 그래?]
[아까는 있었는데... 맞다. 술을 한 번 먹여보자. 그럼, 다시 생길지 몰라.]
비니는 마티니 잔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쭉 들이켜 봐요. 기분이 한결 나아질테니까.]
그렇잖아도 속이 탔으므로 술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단숨에 쭉 들이켰다. 싸한 느낌이 식도를
긁으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효과가 없네. 마티니 한 잔 더!]
비니는 입에도 대지 않고 내게 마시라고 했다. 두 잔째 마티니를 마시자 아랫배가 뜨뜻해 지는 게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비니와 낸시는 동시에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정말이네. 야, 바로 일본 게이샤들이 했다는 그 문신이잖아. 아저씨 그거 어디서 했어요?]
[나도 했음 좋겠다. 아저씨 좀 가르쳐 줘요, 잉?]
낸시야 나를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비니는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나는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왜 이래,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겪은 일을 다 알고 있으면서 누구 놀리는 거야? 너희들은 다 한 통속
이잖아!]
그러자 비니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낸시는 벌떡 일어서면서 내게 삿대질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무슨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우리가 갈보라고 깔보는 거야, 뭐야! 응, 개자식아! 가르쳐주기 싫으면 싫
은 거지, 왜 애는 울리고 그래!]
그걸 보고 알리사와 사만타가 달려왔다. 나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사만타의 눈치만 보았다. 그동안에도
낸시의 욕지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만타는 나를 욕하지 않았다. 사만타는 낸시와 비니의 팔을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야이, 똥갈보년들! 어서 꺼져! 우리 클럽에서 소란 피우지 말라고 내가 몇 번 말했어, 응!]
비틀거리며 사만타에게 끌려나가는 낸시와 비니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내게 알리사가 위협조로 말했
다.
[근무 중에는 술 마시지 마!]
그리고는 사만타를 쫓아갔다. 도무지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
것도 잠시, 끈적끈적한 음악이 내 시선을 무대 쪽으로 끌고 갔다. 무대 뒤에서 퉁탕거리는 발소리와 함
께 누군가가 뛰어 나왔다. 그러자 홀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렸다.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쓴 채 꽉 끼는
런닝과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 백인 남자였다. 청바지 위에 착 달라붙는 팬티를 입고 있었는데, 앞
부분이 과장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남자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
자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여자들의 비명과 환호가 귀를 찢었다.
나는 아까 마신 술로 얼굴이 화끈거려 볼을 손으로 가린 채 바에 기대어 홀 안을 둘러 보고 있었다. 테
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화장이 되어 있었고, 가장 무도회에나
어울릴만한 요란한 색깔의 가발이 씌워져 있었다. 한껏 부풀린 노란색 가발을 뒤집어 쓴 뚱뚱한 흑인 여
자가 제 살을 흔들어대며 내게로 다가왔다.
[이봐요, 미남 아저씨? 버드와이저 한 병 줘요.]
내 몸 세 배는 족히 될 듯한 몸매도 부담스러웠지만 조명을 받아 괴기스러운 붉은 형광색 립스틱과 오렌
지색 아이새도우 때문에 여자를 외면하려고 했다. 냉장고에서 버드와이저를 꺼내 바에 올려놓고 얼른 무
대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막 런닝을 제 몸에서 뜯어내듯 찢고 있었다. 여자들의 탄성이 홀을 가득 메
웠다.
[아저씨?]
여자는 어울리지 않게 교태를 부리며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나 어때?]
온 몸을 한기가 쫙 훑고 지나가더니 닭살이 돋아 올랐다. 나는 바의 한 켠으로 슬슬 몸을 옮겼다. 그러
자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지!]
순간 홀에 울려 퍼지던 음악이 뚝 끊어졌다. 동시에 알리사와 사만타가 후다닥 뛰어왔다. 홀 안의 시선
들이 모두 나에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알리사가 어쩔 줄 몰라하며 흑인 여자에게 굽신거렸다.
[죄송합니다. 오늘 처음이라 뭘 몰라서 그랬을 겁니다.]
그새 사만타는 내 목덜미를 붙잡고 흑인 여자에게로 끌고 나와 무릎을 꿇렸다.
[이 분이 누구신지 몰라? 바로 이 클럽 주인이신 베커 부인이셔. 어서 사과드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 나고 싶었다. 나는 베커 부인
의 운동장만한 하이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베커 부인.]
[죄송? 뭐가 죄송해!]
베커 부인의 하이힐이 내 가슴을 걷어찼다. 그 바람에 나는 벌렁 뒤로 넘어졌다. 그 육중한 몸매에서 어
떻게 그런 민첩함이 나오는지 어느새 베커 부인은 하이힐로 내 가슴을 내리 눌렀다.
[아무도 내 클럽에서 날 무시 못해! 알겠어? 이 황인종 새끼야!]
홀 안에 있던 여자들이 내 주위로 다 모여 들어 한마디씩 해 댔다.
[저런 자식은 총으로 벌집을 만들어 버려야 해!]
[사만타, 뭐해? 흠씬 두들겨 패 버려.]
[남자 구실 못하게 그걸 잘라 버리지 뭐해요?]
그 말에 사만타가 나섰다.
[그건 안돼.]
베커 부인이 나를 짓밟고 있던 다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뭐가 안돼?]
사만타가 베커 부인의 귀에 뭐라고 소근대자 베커 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베커 부인은 내 몸에서 다리
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그렇담 할 수 없지. 대신 이 자식 버릇을 확실히 고쳐놔야겠으니까 내 방으로 데려가.] 알리사와 사만
타는 내 팔을 붙잡고 나를 일으켜 세워 무대 옆의 작은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좁고 퀘퀘한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칠이 벗겨진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낡은 책상과 녹슨 커다란 철제 의자 하나가 전부
였다. 나는 책상 앞에 선 채 베커 부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어렵게 좁은 문을 빠져들어온 베커
부인은 나를 가볍게 들어 책상 모서리에 앉히더니 곰발바닥같은 손으로 따귀부터 올려붙였다.
[나가 봐!]
알리사와 사만타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힐끗 보고는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베커 부인은 내
따귀를 때리며 말했다.
[내 몸매가 역겹지?]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베커 부인의 손이 날아 들었다.
[내가 제일 경멸하는 놈이 바로 너같은 놈이야. 사람을 몸매로 판단해!]
[제가 언제...]
베커 부인은 내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나를 번쩍 들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정말이지 참는 데도
한도가 있었다. 나는 발딱 일어나 베커 부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정확하게 내 주먹은 베커
부인의 턱에 한 방 먹였다. 그러나 베커 부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귀엽게 노는데?]
베커 부인이 오른쪽 팔을 들려는 걸 보고 나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볼에 주먹이 꽂혔다. 베
커 부인의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나왔다.
[제법인 걸?]
베커 부인은 그대로 내게 몸을 던졌다.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벌렁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바닥
에 찧었다. 눈 앞에 깜깜해졌다. 얼굴에 뜨뜻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입 속으
로 흘러들어온 물은 짭짜름했다. 번쩍 뜬 내 눈 앞에 엄청나게 큰 시커먼 엉덩이가 보였다. 그건 오줌이
었다. 나는 주먹을 휘둘르며 버둥거렸다. 나는 주먹으로 베커 부인의 엉덩이와 등, 허벅지를 사정없이
두들겼지만 주먹은 고무를 친 것처럼 튕겨져 나오기만 했다. 나는 입을 벌릴 데까지 벌리고 악을 썼다.
[야이 년아! 저리 못 비켜!]
[흐흐흐.]
너무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엉덩이가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디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뿌지직.]
벌리고 있던 내 입 속으로 물컹하고 뜨뜻한 똥이 들어와 숨통을 막았다.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나서 있
는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겨우 얼굴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속에 있던 걸 토해냈지만 베커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볼에다 똥을 누었다. 차라리 내 머리가 몸에서 뚝 떨어졌으면 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눈이 툭 튀어 나와 버릴 것만 같았다.
[야아아!]
나는 젖먹는 힘까지 다해서 시커먼 엉덩이를 두 팔로 밀어젖혔다. 엉덩이가 약간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내 얼굴을 덮쳐왔다.
[이런!]
그러나 베커 부인은 도리어 엉덩이를 얼굴에 대고 비벼 버렸다. 코까지 똥이 막아 버렸다. 냄새도 냄새
였지만 숨쉬기가 힘들어 아예 숨을 멈췄다.
[하하하.]
베커 부인의 웃음 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렸다.


23장

[산다는 게 참 구차하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영어인데도 몹시 낯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침대에 엎드린 그대로
귀를 쫑긋 세웠다. 따뜻한 손길이 내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척추를 따라 위로 올라가더
니 어깨에서 멈추었다.
[나도 너랑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부드러운 실크가 내 허벅지를 스치는가 싶더니 누군가 내 엉덩이에 앉았다. 그러면서 내 뒤덜미를 아주
천천히 주물렀다.
[시간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거야. 긴장을 풀어.]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그 손길에 나를 맡겨 버렸다. 낯선 방이고 낯선 상황이었지만 더 비참한 일이 생
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을 정하고서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널 오해했어. 너를 막대한 거... 미안해. 이해해 줘.]
내 등을 타고 앉은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곽 재은이었다. 그러나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라면 곽 재은 아니라 누구라도 좋았다.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곽 재은이 대답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나? 이유를 꼭 말해야 하니?]
곽 재은이 뭐라고 대답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싫음 관두고...]
[아냐. 얘기해 줄게.]
그러면서 곽 재은은 손을 멈추었다.
[난 너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너하곤 안 어울리는 곳이거든.]
나는 등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다가 그만 두었다. 그러자 곽 재은이 몸을 숙여 내 볼에 얼굴을 갖다댔다.
복숭아 냄새가 났다.
[넌 이 세계를 몰라. 여기 사람들은 특별해.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거물들도 많지.]
나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를테면 우 강호나 손 정윤같은?]
[우 회장 부인?]
곽 재은이 푸푸 웃는 바람에 볼이 간지러웠다.
[그 여잔 바닐라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지. 그래. 너처럼.]
[무슨 소리야? 나를 여기로 불러 들인 게 바로 손 정윤이야.]
[호호호. 미쳤니? 그 여자가 뭘 안다고? 우 회장이 부인 이름으로 널 속였나 보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바람에 입술이 곽 재은의 입술과 부딪혔다. 곽 재은은 내 입술을 지그시 누
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놀래? 나도 왜 너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넌 선택된 사람이야.]
내가 몸을 돌리자 곽 재은은 살짝 엉덩이를 들어 주었다. 곽 재은은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은빛 슬립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살푼 미소를 짓고 있는 곽 재은을 올려다보며 잠깐 머뭇거렸다.
[선택? 그래서 온 몸에 문신을 새겨 넣었다든?]
[후후. 걱정마. 내일 눈을 뜨면 얼굴 문신은 깨끗이 지워질테니까.]
[정말?]
곽 재은은 몸을 일으키려는 내 어깨를 지긋이 눌렀다.
[그럼. 나도 바닐라 클럽에 들어올 때 그랬어.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고 온 몸에 긴장이 쫙 풀려 나른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 세계로 들어오는 절차일 뿐이야.]
곽 재은의 목소리는 귀에서 기분좋게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내 머리 속에서 베커 부인의 시커먼
엉덩이가 툭 튀어 나와 헛구역질을 했다.
[왜 그래?]
나는 곽 재은의 가슴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나를 농락하고 능멸한 것도 다 통과 절차냐? 내가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는지...] 곽 재은은 내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여기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겪은 일이니까. 넌 여기 오기 전까지 이
세계를 맛보지 못했지? 경험이 없었던 너한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만큼
더 짜릿했을텐데...]
나는 곽 재은의 손을 치우며 언성을 높였다.
[짜릿! 내가 너처럼 변탠지 알아?]
곽 재은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너 지금 나한테 변태라고 했니?]
[그랬다, 왜?]
[정말 꽉 막혔구나. 넌 섹스를 왜 하니?]
[왜 하긴? 사랑하는 여자와...]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왜 섹스를 하는지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들어. 섹스는 자기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하는 거야, 알겠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섹스를 해야만 아이가 생기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섹스하는 것도 아니지. 안 그래?]
맞기는 한 말이었다.
[넌 섹스를 하기 위해 결혼을 할 거니? 섹스, 결혼, 사랑 이 중에서 어떤 게 먼저겠니? 이 셋 중에서 강
제성이 없는 건 섹스밖에 없어. 생각해 봐. 누구나가 결혼하는 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섹스는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왠 지 알아? 몸이 그걸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겨우 반박할 구실을 찾아냈다.
[섹스를 하지 않고 사람들도 많아. 그리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게 무슨 섹스냐?]
의외로 곽 재은은 순순히 수긍을 했다.
[네 말이 맞아.]
그러면서 곽 재은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말이야, 섹스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타성에 젖은 섹스는 네가 느낀 굴욕보
다 더 굴욕적이야. 그런 섹스는 짐승들도 다 하는 거야. 기계적이고 규격화된 섹스는 섹스가 아니야. 그
건 자학이야.]
나는 그 말에 신경이 몹시 그슬렸다.
[같잖은 섹스 강의는 집어 치워.]
[그럴까?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해 봐. 내가 파트너가 되어줄게.]
내 성기로 한꺼번에 피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곽 재은에 대한 환상의 불씨가 내 의식 밑바
닥에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네가 당한 모욕을 내게 되돌려 주어도 좋아.]
곽 재은은 천천히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서더니 슬립 끈을 어깨 아래로 밀
어내렸다. 스타킹처럼 얇고 탄력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깍아 놓은 듯한 곽 재은의 몸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곽 재은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 가슴이 터질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곽 재은을 쳐다 보았다. 그런 곽 재은의 눈이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숨이 차 오르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정작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그새 벌써 머리 속으로 내가 하고픈 일들을 몇 가
지나 떠올리고 있었다. 곽 재은에게 잘 입고 다니던 투피스를 입힌 다음 쫙쫙 찢으며 강간하듯 섹스를
하고 싶었다. 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 몸을 샅샅이 혀로 핥게 하고 심지어는 내 항문을 핥게 하고 싶
었다. 위협을 하거나 때리면서 내 성기를 빨게 하고 싶었고, 개처럼 엎드리게 한 다음 사정없이 성기를
쑤셔대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나 나를 찬양
하는 소리를 하도록 하고 싶었다.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손바닥이나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발
로 차고 싶었고, 내게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내 오줌을 마시게 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똥도 먹이고
싶었다. 그렇게 섹스가 끝나면 엉덩이나 배에 내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놓아 언제까지든 나를 잊지 못하
게 만들고 싶었다.
곽 재은을 침대에 눕히고 키스를 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다리를 들어 성기를 밀어넣고 엉덩이를 움직
이다가 사정을 해 버리는 건 너무 밋밋했다. 만약 곽 재은이 아니라 결혼할, 혹은 결혼한 여자라면 그렇
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뭘 망설여?]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곁눈질로 분홍빛 젖꼭지와 음모가 보일 듯 말 듯 가려진 곽 재은의 몸을 훑어 보
았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덤벼 들고 싶은데, 그렇게 된다면 곽 재은의 말에 동의하는 셈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내가 너하고 왜 하냐?]
그렇게 말을 하긴 했으나 내 속은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내가 거북하지? 다른 여자라면 괜찮을 거 같아?]
[너보다 나은 여자라면...]
입 안에서 그 말이 맴돌았다.
[거 봐. 넌 상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중적인 인간이야. 너같은 인간이 바로 변태인 거야.
왜 우리 클럽 이름이 바닐라 클럽인지 모르지? 우리가 보기엔 너같은 인간이 바닐라지만 따지고보면 너
같은 인간이 진짜 변태니까 우리가 바닐라인 게 맞잖아. 내 말이 틀리니?]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할 말이 튀어오르지 않았다.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아. 각자 원하는 걸 얻는 거야. 남을 지배하면서
자기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고, 지배 당하면서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어. 지배 당하는 사람은 일방적으
로 당하기만 하는 것 같지? 천만에. 그 사람들은 있지 자기 고통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아. 고통의 한
계를 넘어서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이 원할 때만 가능한 거야 . 그 사람들이 지배하려는 사
람들을 지배하는 거야. 내 말 알겠니?]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넌 어느 편이지?]
[나? 지배 당하는 쪽이야.]
[회사에서 안 그랬잖아?]
곽 재은은 슬립을 입으며 말했다.
[그건 섹스가 아니잖니. 그리고 지배해 봐야 지배 당하는 기분을 짐작하지, 안 그렇겠어?]
곽 재은의 몸이 가려지자 내 성기가 다시 불끈 솟아 올랐다. 곽 재은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넌 기회를 잃었어.]
곽 재은은 내게 윙크를 하며 뒤돌아섰다. 나는 팔을 뻗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곽 재은은 고개를 돌려 나
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있지, 너희들을 이해 못하겠어. 왜 섹스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꽉 막힌 건지... 서로 원하기만 했다
면 어떤 행위도 상관없는 거 아니니? 누가 자기 침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줄 아는 모양이야.
길에서 돈을 주고 여자를 사려고만 들어. 여자라도 살 수 있음 다행이지. 성기만 빌려 자위 행위하는 거
랑 무슨 차이가 있겠니? 섹스를 너무 몰라. 정말 불행한 일이야.]
자위 행위로 지낸 숱한 밤들이 일제히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 밤마다 나는 수백, 아니 수천의 여자와
그만큼이나 많은 체위로 섹스를 했다. 그렇게 내 청춘은 소모되고 있었다. 마쵸맨에게 당하지 않았거나
정말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한 명만 만났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나갔
다. 나는 곽 재은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참, 내가 잊은 게 있는데, 오늘 네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생방송됐어.]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너도 뉴욕 바닐라 클럽에서 멀티비전 본 적 있지? 너무 걱정마. 바닐라 클럽 회원들만 볼 수 있었으니
까. 네 인터넷 메일 주소도 다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는 너한테 접근을 할 거야. 그 중에는 네 마음에 드
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 아무튼 우리 회원이 된 거 환영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곽 재은은 사뿐사뿐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야! 거기 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곽 재은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나 곽 재은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면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제야 나는 발가벗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얼른 몸을 틀며 성기를 손으로 가
렸다.
[왜? 아직 나한테 볼 일이 남았니?] 문신과 채찍 자국으로 얼룩진 내 몸은 나를 주눅들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곽 재은이 쿡쿡 웃는 소리가 나를 더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넌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말
운명이야. 평생을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 죽겠지.]
그 말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곽 재은을 사납게 노려 보았다.
[너만 그렇다는 건 아니야. 대개들 너처럼 살지. 인정하기 싫겠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안 그래?]
나는 이를 앙다문 채 말했다.
[갈보같은 년...]
[갈보? 호호호.]
곽 재은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 쳤다.
[그러는 넌? 네 눈에는 여자들이 모두 갈보같이 보이겠지. 왠 줄 알아? 네 머리 속에 더러운 생각들만
가득차 있거든. 내 말 틀렸니? 네가 그렇다는 건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 알아. 어제 너에 대한 보
고서가 인터넷에 올려졌거든...]
그 순간 내 눈이 확 뒤집혀 버렸다. 그런 곽 재은은 내 눈을 보지 못했다.
[그 중에 내 얘기도 들어 있어서 너에 대한 오해를 풀었지. 나에 대한 너의 욕망이 그렇게 강한 줄 몰랐
어. 진작 말했더라면 널 더 잘 대해 줄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날 어쩌려는 거야! 지금도 나를 촬영하고 있다면 잘 들어, 이 변태 새끼들아! 난 너희들처럼 되
고 싶지 않을뿐더러 너희같은 년놈들을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경멸해! 알겠어!]
갑작스런 내 행동에 곽 재은도 놀랐는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어디가 이년!]
나는 곽 재은의 팔을 잡아 당겼다. 곽 재은은 뒤로 몸을 빼며 버텼지만 내가 재빨리 몸을 날려 제 목을
팔로 감싸 죄는 걸 막진 못했다.
[어서 나와!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구야! 안 그러면 이년을 죽여 버리겠어!]
곽 재은은 내 팔을 잡아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쳤다.
[미쳤어! 왜 이래? 여긴 우리 둘 뿐이야!]
[웃기지 마!]
[다들 보고 있잖아!]
[캑캑. 놔! 숨막혀 죽겠어.]
곽 재은은 온 몸을 버둥거리며 저항을 했다. 곽 재은의 긴 손톱이 내 팔뚝을 파고 들어 피가 주르르 흘
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카메라가 숨겨졌을만한 곳들을 찾으며
고함을 질러댔다.
[야이 들아, 어서 안 나와! 이년이 죽어야 나오겠냐!]
내가 곽 재은을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팽팽한 침묵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침묵은 나는 섬뜩하
게 했다. 나는 곽 재은을 획 밀쳐 버렸다. 바닥으로 쓰러진 곽 재은은 목을 감싸쥐며 캑캑거렸다. 나는
곽 재은에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어서 말해! 모두 어디 있어! 다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곽 재은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오라고 난리야? 넌, 아무 것도 아닌 놈이야.]
나는 곽 재은의 허벅지를 힘껏 걷어찼다.
[뭐? 내가 어떻다고? 한 번 더 말해 보시지?]
곽 재은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닌 놈이라구.]
나는 발 뒷꿈치로 곽 재은의 등을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아악!]
[뭐라고? 뭐라는지 내 귀엔 안 들려.]
곽 재은은 아예 얼굴을 바닥에 대고 헉헉거렸다. 나는 다시 곽 재은의 등을 내리찍었다. [살려달라고 소
리질러 봐! 어서!]
그러나 곽 재은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머리를 흔들어댔다.
[이년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나?]
나는 발로 곽 재은의 잘룩한 허리를 짓밟아 버렸다.
[악!]
[이제 내가 어떤 놈인지 알겠지? 난 대단한 놈이야!]
[헉헉... 미친 놈...]
나는 바르르 떨리는 곽 재은의 머리를 짓밟으며 말했다.
[뭐? 다시 말해 봐. 어서!]
[으으... 미친 놈!]
곽 재은의 날카롭고 높은 고함 소리는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곽 재
원의 머리를 짓밟았다.
[누구야! 누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손 정윤이야? 우 강호야? 아님 마 동식이야? 그것도 아니면 너야?
말 안하면 널 진짜 죽여 버리고 말겠어.]
내 발바닥으로 곽 재은의 볼이 씰룩거리는 게 느껴졌다.
[후후...]
곽 재은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죽여봐.]
[죽여 봐? 좋아. 널 죽여주지.]
나는 곽 재은의 엉덩이 위로 타고 올라가 슬립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얇은 옷을 와락 뜯
어냈다. 곽 재은의 희뽀얀 살결이 그래도 드러났다. 나는 팔을 곽 재은의 허리 아래로 넣어 들어 올렸
다. 곽 재은의 탱탱한 엉덩이가 내 가슴에 와 닿았 다. 내가 오른손으로 엉덩이에 걸쳐져 있는 천 조각
을 걷어내자 진한 갈색의 음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맞으면서도 쾌감을 느낀 건지 곽 재은의 질구는 촉촉
히 젖어 있었다. 나는 바짝 선 성기를 움켜쥔 채 곽 재은에게로 돌진했다. 그러나 내 성기가 가서 박힌
곳은 질구가 아니라 연분홍빛 항문이었다.
[으윽!]
곽 재은은 머리를 쳐들며 비명을 삼켰다. 단번에 조그만 항문으로 내 큰 성기가 들어간다는 건 무리였
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원한 거였다.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항문에 대고 성기를 문질러댔다. 곽 재은도 고통을 참지 못해 날카로운 비명을 울렸다. 내 귀두가
항문을 뚫고 들어갈 때 곽 재은은 고막이 찢어질 듯 크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곽 재은의 허리를 두 손
으로 꽉 쥐며 엉덩이에 더 힘을 주었다. 말라 있던 항문의 뻑뻑한 느낌이 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곽
재은의 몸 속으로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갈수록 뻑뻑함도 줄어 들었다. 그러나 곽 재은의 비명은 여전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완전히 성기를 집어넣은 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냐? 이 개같은 년아!]
그러면서 엉덩이를 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곽 재은은 울음을 터뜨렸다. 애처럼 엉엉 울면서
머리를 있는대로 흔들어대는 곽 재은을 내려다보며 나는 야릇한 승리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문득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던 마쵸맨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내 눈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는 걸 멈추
지 않았다. 도리어 더 세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곽 재은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는 내게 힘이 되었다.
[복수다!]
나는 목을 뒤로 젖힌 채 있는 힘껏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러자 항문에서 미끈거리는 뭐가 흘러나왔다.
피였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항문이 완전히 벌어지자 성기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 대신 뻑뻑한
느낌이 없어졌다. 사정을 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욕망은 거기서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나는
얼른 피에 묻은 성기를 꺼내 곽 재은의 질에다 쑤셔 넣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질은 내 성기에 저항했지
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질을 뚫고 들어갔다. 곽 재은의 울음 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질
벽을 두드릴 때마다 비명은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 소리가 내 본능을 마구 꼬집어 대는 바람에 온 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으으으윽...]
내 몸이 폭발하려는지 잔뜩 움추려 들었다. 나는 더욱 세차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컷!] 또 그 놈의 소
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맥없이 곽 재은에게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알리
사와 사만타가 내게로 달려 들었다. 둘 중 하나가 내 등에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댔다. 나는 몸을 비틀며
곽 재은에게서 떨어졌다.
[으흐흐... 아하하하!]
옆으로 쓰러진 채 나는 정말 미친 놈처럼 웃기 시작했다. 사만타가 내 배에 발길질을 해댔지만 내 웃음
소리는 멈춰지지 않았다.
[와하하하!]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지난 밤의 일들이 현실이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다.
[악몽이었을거야...]
그러나 그건 너무나 생생한 악몽이었다. 그 일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그때의 고통과 모멸감이 함께
밀려왔다. 그걸 견뎌내기 보다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감싸쥔 채 눈
을 떴다. 침대가 물컹했다. 아직 새벽인지 방은 여명에 둘러싸여 있었다. 커튼이 드리운 커다란 창 너머
가 희뿌연 걸로 봐서 아침이 머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리사가 내 팔뚝에 주사를 놓을 때도 웃
고만 있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지난 밤은 사실상 끝이 났다. 스르르 감기는 내 눈에 곽재은을 들쳐 업은
사만타의 화난 얼굴이 마지막으로 각인되었다.
내가 왼쪽으로 몸을 돌리자 침대가 꿈틀거렸다. 낯선 방이었다. 벽 쪽에 화장대가 있었고, 그 화장대의
둥근 거울 속에 희미하게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얼른 시트를 치우고 내 몸을 살펴 보았다. 천박한 문
신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침대가 출렁거려서 중심을 잃었
다. 그것도 짜증이 났다. 나는 침대 오른쪽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가운을 걸치고 침대를 빠져나왔
다. 그리고는 창으로 걸어갔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걸 젖히자 한꺼번
에 햇살이 내 눈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이런!]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방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잘 잤냐?]
마쵸맨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실눈을 떴다. 검은 연미복을 입은 마쵸맨이 옷을 든 채 뚜
벅뚜벅 내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어젠 정말 잘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이 쳐 졌다. 그러자 마쵸맨의 발걸음 소리도 멎었다.
[짜식... 널 위해 근사한 점심을 준비했다. 넌 그만한 대접 받을 자격이 충분해. 어서 옷 입어라. 나가
게.]
마쵸맨은 침대 위에 들고온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햇빛에는 눈이 익었지만 일그러진 표정은 펴지지 않았
다.
[내가 입혀주랴?]
나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웃기지 말고 나가기나 해!]
그러나 마쵸맨은 빙그시 웃으며 창으로 향했다.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쵸맨이 말했다.
[정말 죽이는 날씨잖냐? 역시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너도 좀 봐라. 저 장미숲과
잘 다듬어진 잔디밭, 그리고 꾸며진 정원, 그리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나도 이런 저택을 갖는 게 꿈이
었다.]
나는 마쵸맨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나가라니까!]
마쵸맨은 고개를 획 돌리며 사납게 나를 노려 보았다.
[가만 있으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냐? 어디다가 소릴 질러, 임마!]
떡 벌어진 마쵸맨의 가슴팍에 나는 압도 당하고 말았다.
[어서 세수하고 옷이나 입어! 안 그럼, 발가벗겨서 데리고 나갈테니까!]
달려들어 흠씬 패주고 싶었지만 마쵸맨을 이길 힘이 없었다. 그건 벌써 대학 시절에 터득했다. 나는 얼
른 옷을 들고 마쵸맨이 가리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충 세수를 하고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라 뒤로
젖혀 넘겼다. 다행히 얼굴 문신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별 거
아닌 놈으로 보이기가 싫어서였다. 그리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실크로 된 흰 팬티와 같은 색 같은 소
재의 런닝, 팬티가 다 비칠 정도로 얇은 아이보리색 마 바지와 분홍색 와이셔츠를 차례로 입고 하늘색
멜빵을 맸다. 내가 욕실에서 나오자 마쵸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발은 침대 옆에 있다.]
굽이 없는 흰 신발이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았는데도 신발을 신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
럽고 가벼웠다.
[됐어. 날 따라와.]
나는 슬쩍 거울 속에 있는 내 모습을 훑어보고 마쵸맨을 따라 나섰다. 내가 잔 방은 2층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창문 너머로 정원을 내려다 보았다. 마쵸맨의 말대로 정원은 프랑스 정원처럼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온갖 색깔의 장미와 꽃들이 잔디밭 사이사이에 피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짙푸른 나무들이 기막
힌 조화를 이루 며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등나무로 만들어진 통로가 건너편 숲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햇살을 잘게 부수며 넘실대는 짙은 쪽빛 바다가 숲 건너로 보였다.
[어때? 대단하지?]
경치에 눈이 팔려 있던 나는 마쵸맨이 내 옆에 온 것도 몰랐다. 나는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 회장 할아버지가 일제 시대 때 지은 저택이야. 요즘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저택을 함부로 짓지
못할 걸? 하지만 이 저택, 우씨 집안과의 인연도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 우씨들한테는 안된 일이지...]
마쵸맨은 알 듯 말 듯한 말을 남기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쵸맨을 따라 들어간 방은 어제 내가 처음
들어갔던 1층 오른쪽 끝방과는 정반대 쪽에 있었다. 이삼십 명은 족히 앉을만큼 큰 직사각형 검은색 식
탁이 방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높은 천정에는 샹젤리에가 줄줄이 걸려 있었고, 모네풍의 대형 유화
가 긴 벽을 밝게 채웠다. 마쵸맨은 식탁의 맨 끝으로 데리고 가 나를 앉혔다. 거기에 앉으니까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 너머의 먼 풍경들이 정면으로 한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는 벌써 포크와 나이프, 유리
잔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마쵸맨은 내 왼쪽으로 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멀리 들리는 새 소리를 제외하면 버려진 느낌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흐르고 있었
다. 아주 멀리서 발 자욱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창문 옆 문이 열렸다. 연보라색 니트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서는 마주보이는 식탁 끝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한 눈에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차렸다. 그렇게 내 애를 태우던 카마, 아니 손 정윤이었다. 강렬한 햇빛을 등지고 앉는 바람에 손
정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손 정윤의 해맑은 모습은 쉽게 떠올
랐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아주 큰 방인데도 공명장치가 잘 되어 있는지 손 정윤의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렸
다. 그러나 그 말 뜻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마라에서 본 여자, 기억나지 않으세요?]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던 그 여자의 옆 얼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났다.
[아...]
[이렇게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앉으니까 좀 쑥스럽네요.]
나는 다소곳이 말하는 손 정윤과 카마가 하나로 보이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목소리는 분명 카마의 목소
리였으나 말투가 너무 다르게 들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예.]
내 옆 문이 열리더니 마쵸맨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마쵸맨은 붉은 빛이 감도는 야채 스프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제가 직접 만든 거에요.]
그 사이 마쵸맨은 손 정윤 앞에 오렌지 쥬스를 내려 놓았다. 그러나 손 정윤은 마쵸맨에게는 눈길도 주
지 않고 나만 뚫어지게 지켜 보았다. 그때쯤 내 눈은 햇빛에 익어 손 정윤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식욕
은 없었지만 코 끝을 간지르는 매콤한 냄새가 스푼을 들게 만들었다. 아주 천천히 한 숟갈 입 안으로 떠
넣고는 손 정윤을 바라 보았다. 새콤달콤하면서 매운 끝맛이 내 얼굴을 풀어주었다.
[맛있습니다.]
그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손 정윤의 입 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고마워요.]
내가 스프를 비워내자 내 옆에 와 있던 마쵸맨은 빈 접시를 들고 사라졌다.
[어제 일은 유감이에요.]
손 정윤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손 정윤이 나를 그곳까지 불러들이긴 했지만 내게 고통을 준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전 당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어요.]
손 정윤은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전화로 나를 휘어잡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전 남편이 당신 집안을 싫어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정확하게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제 남편의 아버
지가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신은 아세요? 당신 아버지가 왜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는지?]
그건 뇌물 탓이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일차적인 잘못은 당신 아버지한테 있지만 그걸 폭로한 건 제 시아버지였어요. 복수를 하신 셈이죠.]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일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당신 아버지의 부하 직원들이 바로 우주 건설을 수백억대의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어요. 우주 건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요. 당신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지 모
르겠어요. 비록 몇 개월 아니지만 시아버지는 실 형을 살았죠. 심장 질환이 있던 그분은 출옥 후에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심장병, 그건 시댁의 내력이지요.]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 [그러니까 나를 어떻게 할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입니까?]
손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날 여기까지 불러들여 비참하게 만드는 겁니까?]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지 몰라서요.]
[네?]
그때 마쵸맨이 카터를 밀고 나타났다. 마쵸맨은 내 앞에 넓직한 쟁반을 내려놓았다. 스테이크 종류로 보
였다. 마쵸맨은 옆에 있던 카터에서 포도주를 꺼내 능숙하게 마개를 빼냈다. 그리고는 빈 유리잔에 포도
주를 부었다. 적포도주였다.
[프랑스식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에요. 제가 만들었죠.]
나는 갈색 소스가 뿌려진 스테이크를 내려다 보았지만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일단 포도주로 입을
헹구었다. 마쵸맨은 내 뒤에 차렷 자세로 버티고 섰다.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당신 친구 마 동식씨가 수고를 많이 했어요. 사실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누군지 알지도 못했을
거에요.]
나는 마쵸맨이 내 친구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저 사람은 두 달 전까지 남편의 오른팔이었어요. 정확히 말해서 남편에게 여자들을 소개시켜 주었어요.
뭘 밉보였는지 해고 당했죠. 하지만 그런 건 제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전 남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저
사람이 필요했어요.]
손 정윤은 아주 천천히 오렌지 쥬스를 한 모금 마셨다. 약간 젖힌 목에는 큼직한 에메랄드 목걸이가 반
짝거리고 있었다.
[마 동식씨, 잠깐 나가 있겠어요?]
[네.]
마쵸맨이 문 뒤로 사라지자 손 정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 동식씨에게 당신의 모든 걸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시켰죠. 당신도 알겠지만 저 사람은 그런 일이 전
문이에요.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진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
각되요.]
나는 포도주 잔을 꽉 쥐면서 말했다.
[나를 괴롭히는 게 최선이라구요?]
[그렇게 괴로웠어요? 당신은 마음 속으로 그런 일을 바라고 있었잖아요.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마 동
식씨가 당신 방과 컴퓨터를 샅샅이 뒤진 건 모를 거에요. 당신의 흔적들은 당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당
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욕망이 무언지 말해 주지 요.] [...]
[물론 당신이 원해서 그렇게 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았겠지요.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대신 제 문제를 당신을 빌어 해결하고 싶은 거에요. 공
평한 거래 아닌가요?]
[공평하다구요?]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손 정윤의 얼굴에서 추악한 음모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손 정윤은 너무나 순결
하고 여려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 마시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협박했잖습니까? 비디오를 찍어가고 어머니 뒷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습니까?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협박에 못 이겨서지 제 발로 걸어온 게 아니잖습니까?]
손 정윤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나는 포도주를 한 번에 다 비우고 말했다.
[이건 납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납치가 아니란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아주 급했다면 납치라도 했을지 몰라요. 그렇게 했더라면 당신
은 제가 누군지 몰라도 되고, 저는 당신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모질지 못해요. 당신 스스로 저를 도와주길 바랬어요. 당신이 강 두태란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당신과 제가 이렇게 멀리 앉지 않았을거에요.]
고개가 푹 숙여졌다. 하지만 내 경우가 되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포도주를 잔에 따
르며 말했다.
[저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손 정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 가로 갔다.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서둘지 말아요. 어차피 당신은 나를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나는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내가 못 도와주겠다면요?]
[제가 몇 번이나 말했죠. 제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걸 지키지 않았어요. 당신이
왜 이 먼 곳까지 비행기가 아니라 자동차로 와야 했는지 알아요? 당신 방에 있던 제 흔적들을 찾을 시간
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숨겨둔 것들 을 마 동식씨가 모두 찾아왔어요. 생각해 봐요. 제 말을
듣지 않는 당신을 어떻게 제가 믿을 수 있겠어요?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그만한 대가는 분명히 치루게
될 거에요. 그게 뭔지는 당신이 저보다 잘 알겠지요.]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포도주 탓이 아니었다. 손 정윤의 말은 내 상상에 확신을 보태
주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포도주 병으로 뻗치던 내 손이 덜덜 떨렸다. 겨우 포도주를 잔에 따
라 놓고는 손 정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손 정윤은 창문에 기대 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제 말을 따라주기만 했다면 당신에게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거에요. 이곳에는 이제 당신과 저, 그
리고 마 동식씨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 모두 떠났어요. 지금쯤이면 비행기를 타고 뿔뿔
이 흩어지고 있겠군요.]
손 정윤은 혼자 피식 웃었다.
[그 여자들... 남편이 보내준 비디오에 나온 여자들이었지요. 그 여자들은 남편이 당신을 바닐라 클럽
회원으로 추천한 걸로 알고 있어요. 남편이 돈을 대서 어제 행사를 벌인 줄 알아요. 후후. 그걸 본 남편
이 난리가 났어요. 스케쥴을 취소하고 모레 한국 으로 돌아온다더군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저택에서 자
기가 아끼는 여자들과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즐기는 걸 봤으니까 심장이 가만 있질 않을 거에요. 아
마 심장약을 한 웅큼이나 입 안에 털어 넣었겠죠.]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가 즐기다니요?]
[ 당신 입장으로는 당한 거지만 남편이 보기엔 안 그렇거든요. 남편이 감히 해 볼 엄두를 못낸 일들을
당신이 모두 해 냈어요. 한가지만 빼고요.]
[네?]
손 정윤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한 가지만 제대로 해내면 당신은 자유에요. 당신이 원했다면 저하고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구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킨다는 확신만 준다면요.]
[도대체 그 일이 뭡니까?]
손 정윤은 대답 대신 천천히 문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 정윤을 불렀다.
[저기요?]
손 정윤은 약간 계면쩍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마 동식씨가 알려줄테니 먼저 식사부터 하세요.]
그리고는 나가 버렸다.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손 정윤과 마쵸맨, 결국 그 둘의 각본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마쵸맨이 들어왔
다. 나는 마쵸맨을 보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냐? 왜 하필이면 나냐?]
[그 이유는 손 여사께서 말씀하셨을텐데? 난 그냥 조언을 했을 뿐이다. 굳이 다른 이유를 대라면 네가
보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어? 미친 놈.]
마쵸맨은 내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놈이 바로 너라고 한 거 거짓말이 아니다. 그땐 내가 잘 몰라서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가르쳐줄 수 있단 말이다.]
나는 포크를 집어들며 소리쳤다.
[말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그러나 마쵸맨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네가 날 사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는 걸 안다. 그때까지 난 기다려줄 수 있다.]
너무 기가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이 일부터 끝내자. 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알겠냐?]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거부했다면?]
[이건 내가 시키는 게 아니라 손 여사께서 시키는 일이다. 그러길 바라지는 않지만 만약 네가 거부했다
면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될 거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포크로 식탁을 찍었다. 식탁에 찍힌 포크가 바르르 떨렸다.
[그래, 대체 내가 해야 했다는 일이 뭐냐?]
마쵸맨은 오후 내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일러주고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앵무새처럼 마쵸맨의 말
을 따라하거나 행동을 취해 보여야 했다. 내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마쵸맨의 주먹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석양 무렵에야 마쵸맨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 다.
[내가 가르쳐 준 걸 절대 잊어버리면 안된다. 하나라도 틀리면 넌 이 세상 구경은 다한 줄 알아라.]
[만약에 손 정윤씨가 싫어하거나 다른 걸 요구하면 어떡하냐?]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주먹이 명치를 파고 드는 거였다.
[우욱!]
배를 감싸쥐고 털썩 주저 앉은 내 정수리에 대고 마쵸맨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새끼.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손 여사는 섹스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여자야. 네가 만났던 잡년들
처럼 생각하지마! 네가 좋아서 손 여사께서 이런 일을 하는 줄 알면 착각이야. 단지 널 잠깐 이용할 뿐
이란 걸 명심해!]
그걸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마쵸맨은 내 팔죽지를 걷어찼다.
[여자가 이런 결심을 했을 땐 얼마나 독이 올랐겠나 생각해 보란 말이다. 네 목숨은 손 여사 손에 달렸
다. 절대 손 여사를 당황하거나 화나게 만들지마. 내 손으로 널 어쩌기는 정말 싫다. 알겠냐!]
마쵸맨은 내 뒤덜미를 잡아 끌었다. 나는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마쵸맨이 끄는대로 끌려갔다.

24장

마쵸맨에게 등을 떠밀려 들어간 이층 오른쪽 두 번째 방은 허니문 룸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핑크빛이 감도는 시트가 깔린 침대가 중앙에 놓여 있었고, 침대 주위로 갖가지 꽃 장식이 가득했다. 마
쵸맨의 말대로 여러 대의 비디오 카메라가 침대를 빙 둘러싸고 서 있었다. 나는 마쵸맨이 시킨대로 침대
오른쪽에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보리색이 주조를 이루는 욕실이었다. 이미 욕조에는 따 뜻한
물이 담겨 있었다. 나는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욕조 턱에 놓여 있는 바디 오일을 물에 짜넣고 손
으로 휘휘 저었다. 미끈거리는 느낌이 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로 5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욕조에서 나와 바디 크림을 바르고 샤워를 했다. 풋
풋한 사과향이 코를 진동 했다. 머스크 향이 나는 세이빙 크림을 바르고 면도를 한 후 무스를 칠한 머리
카락을 따뜻한 물로 헹궈내고서야 몸의 물기를 닦 았다. 욕실의 간이 옷장에 검은 바탕에 하얀 점이 박
힌 박스형 사각 팬티와 가운이 있었다. 그것들을 입고 나와 침대 앞에 있는 연두 색 소파에 앉았다. 응
접 테이블 위에 담배 케이스에서 박하향이 나는 담배, 쿨을 꺼내 물고 물고기처럼 생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 사이 방 안 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창 밖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우며 손 정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내 뒤쪽에서 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
리가 들렸다. 걸음 소리가 약간 불안하게 느껴졌다. 옷을 벗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 왔다. 시트
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침묵이 찾아들었다. 나는 담배를 부벼 끄고 귀를 쫑긋 세웠다.
[오세요.]
손 정윤의 목소리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등을 돌리고 있는 손 정윤이 비
워둔 침대 오른쪽에 서 서 가운을 벗고 시트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정윤의 다리가 내
발 끝에 닿았다. 나는 마쵸맨이 시킨대로 천정을 보고 반듯이 누웠다. 손 정윤의 숨소리는 몹시 거칠었
다. 얼마를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 두운 밤, 깊은 우물에 빠진 채 둥그런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게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몸을 뒤척이기를 반복하던 손 정윤이 드디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떨리네요.]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말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손 정윤의 촉
촉하게 젖은 손이 내 가슴께로 다가왔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우습지 않아요?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는 여자가 처녀라는 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손 정윤은 차츰 용기를 얻어갔다. 손 정윤은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문
지르면서 말했다.
[남자의 가슴이 이렇게 부드러운 줄 몰랐어요. 아주 거칠 줄만 알았는데...]
그러면서 손 정윤은 손을 배로 옮겼다. 그러나 배 위에서만 오르락내리락 거릴 뿐이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서툴어도 이해해야 해요.]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손 정윤의 손이 무성한 내 음모에 가 닿았다. 손 정윤은 음모를 만지작거리
면서 말했다.
[아주 야릇한 느낌이 드네요.]
이미 발기되어 있던 내 성기는 손 정윤의 손 등에 닿을락말락했다. 나는 힘을 주어 배쪽으로 성기를 당
겼다. 그러자 손 정윤은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뭐야?]
말은 그렇게 해 놓고도 손 정윤은 손을 다시 집어 넣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성기에 손가락을 댔다. 아마
도 검지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그걸로 내 귀두를 톡톡 건드리면서 손 정윤은 쿡쿡 웃었다.
[뭐가 이렇게 딱딱해?]
그러더니 살며시 귀두를 잡았다.
[아...]
손 정윤은 성기를 쓰다듬으며 들릴락말락하게 신음 소리를 냈다.
[이게 다 내 몸 속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손 정윤은 성기를 눈으로 확인하려는지 시트 속으로 머리를 집어 넣었다. 나는 그제야 눈을 살며시 떴
다.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검은 팬티가 내 시선을 붙들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골
랐다. 그런데도 심장은 주책없이 벌렁거렸다. 그때 촉촉하고도 뜨뜻한 느낌이 성기로 전해졌다. 손 정윤
은 아주 부드럽게 내 성기를 입에 넣었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움직인 탓인지 흥분을 해서인지 손
정윤의 숨소리 도 거칠어져 있었다. 한참동안 내 성기를 애무하던 손 정윤이 뱀처럼 스르르 내 몸을 타
고 올라왔다. 처음엔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성기를 만지작 거리기만 하더니 점점 얼굴 쪽으로 올라왔
다. 뭉클하게 다가오는 가슴 부위의 느낌이 다른 피부보다 미끄러운 걸로 봐서 실크나 벨벳으로 만들어
진 브래지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손 정윤의 얼굴이 시트 밖으로 나오려할 때 나는 눈을 감았다.
손 정윤을 보면 안되는 것, 그것도 지시사항에 포함되어 있었다. 손 정윤은 내 턱에 살짝 입을 맞추더니
하드를 빨 듯 턱을 빨기 시작했다. 턱이 얼얼할 정도로 빨고난 후에는 입술을 찾아 빨았 다. 그러나 혀
는 입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성기를 손 정윤은 꽉 붙잡더니 자기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내 귀두 끝에 둥글고 얇은 팬티 끈 이 느껴졌다. 손 정윤은 팬티를 입은 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처음 섹스를 하는 여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손 정윤이 눈치 못 챌 정도
로 가늘게 실눈을 떴다. 허리를 틀어 뒤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있는 손 정윤의 이마에는 땀방울 이 맺혀
있었다. 검은 망사와 레이스로 된 브래지어는 아슬아슬하게 유두를 가리고 있었다. 브래지어 위로 불쑥
솟아오른 둥근 젖가슴은 내 엉덩 이를 꿈틀거리게 했다. 자세가 여의치 않은지 손 정윤은 엉덩이를 내
사타구니 쪽으로 옮겨 갔다. 기마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질구 가까이로 내 성기를 잡아 당겼다.
질구 주위를 맴돌던 내 성기가 한 순간 블랙홀에 빨려들 듯 질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겨우 귀두 반쯤이 들 어갔을 뿐이었다. 손 정윤은 성기에서 손을 떼더니 뒤로 모아 묶은 머리카
락을 풀어젖혔다. 삼단같은 머리카락이 그물처럼 확 퍼지자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나는 아주 가
늘게 숨을 뱉아내면서 손 정윤을 훔쳐 보았다. 손 정윤은 무릎 바로 위 허벅지에 손을 올린 기마 자세로
아주 천천 히 허리를 움직였다. 묘하게 미끈거리는 느낌이 귀두를 자극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
고 있는 손 정윤의 모습은 성스러웠 다. 손 정윤의 몸놀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재즈 댄서처럼
허리와 머리를 움직이면서 내 성기를 제 몸 안으로 빨아 들였다 . 그 흔들림에 브래지어 뒤에 숨겨진 젖
가슴도 푸딩처럼 탱탱하게 움직였다.
내 귀두가 완전히 들어가자 손 정윤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허밍처럼 들려오는 그 소리는 재
즈 리듬이 담겨 있었다. 내 성기가 반쯤 들어가자 손 정윤의 허밍 소리는 더 경쾌해졌다. 경험이 없었던
여자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한 움직임 이었다. 완전히 내 성기를 빨아들이고 나자 손 정윤의 움
직임은 다소 완만해졌다. 그러더니 내 사타구니 위에 서서히 주저 앉았다. 손 정윤은 터질듯한 엉덩이로
내 고환을 탁탁 치거나 엉덩이를 돌려 내 성기를 질 속에서 회오리치게 했다. 나는 공중으로 붕 뜬 것처
럼 멍한 기분이었다.
[알아요?]
아련하게 손 정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남아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잖았다면 입을
열 뻔했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벌써 시작했을거에요. 난 이 세계를 너무 모르고 살았어요. 아...] 나는 눈을 바
르르 떨며 귀를 기울였다.
[좋...아요?]
나는 망설였다.
[괜찮아. 고개만 움직여 봐요.]
나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손 정윤의 엉덩이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까지 세차게 출
렁거려 내가 튀어나갈 것 만 같았다. 나는 양미간을 모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정윤의 신음 소리도
더 이상 리드미컬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내지르는 괴성에 가 까웠다. 그러나 그 소리가 오히려 나를 더
흥분시켰다.
[이게 뭐야!]
손 정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손 정윤이 고개를 젖히고 있어서 다행히 눈이 마
주치지 않았다. 손 정윤 의 목과 가슴에 맺힌 땀방울이 번들거렸다. 손 정윤이 고개를 흔들자 땀방울이
내 가슴으로 튀어왔다. 도저히 다리를 쫙 펴고 있을 수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세웠다. 손 정윤
은 내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 정윤은 내 가슴을 두 손으로 짚더니 더욱 세차게 나를 몰아 붙였
다. 내 얼굴 위로 땀방울이 비처럼 쏟아졌다. 코를 타고 입술 끝에 맺힌 땀방울은 의외로 달콤했다.
손 정윤은 다시 기마 자세로 돌아가 머리카락을 말아올렸다. 얼마나 움직임이 컸던지 한 번에 귀두에서
고환까지 훑어내릴 정도 였다.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도 용케 중심을 잃지 않고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
는 모습은 인간이라고 보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거의 다달았다. 손
정윤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깊이로 몇 번만 움직여 준다면 사정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사정을 해
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다. 나는 마쵸맨이 시킨대로 헛기침을 했다.
[으흠!]
손 정윤에게 내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손 정윤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좀 더 크게 헛기침을 했
다. 그 즉시 손 정윤의 움직임은 멎었다.
[됐어요.]
손 정윤은 내 성기를 팽개쳐 두고 비틀거리며 침대를 내려갔다. 가운을 걸쳐 입으며 손 정윤이 말했다.
[샤워하세요.]
손 정윤은 얼굴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훑어내면서 침대 뒤로 사라졌다. 나는 손 정윤의 질액이 채 마르지
도 않은 성기를 손으로 움켜 쥐었다. 좀 식긴 했지만 미끈거리는 그 느낌이 마치 손 정윤의 질 속에 내
가 손가락을 넣고 있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얼른 손을 움직여 성기에 힘을 불어 넣었다. 좀 풀이
죽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임마, 뭐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마쵸맨의 호통 소리에 나는 몸을 획 돌려 버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건 둘
째 문제였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절대 사정을 해서는 안된다고 마쵸맨은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나는
서둘러 침대를 내려와 욕실로 달려갔다.
제 2라운드가 시작되는 순간이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나는 가운을 걸친 채 옆 방으로 갔다. 그 방은 방
송국 세트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2라운드의 첫 번째 이야기를 찍을 무대에는 어두운 골목이 세팅되어 있
었고, 그 골목을 향해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설치 되어 있었다. 나는 무대 위에 놓인 때에 절은 청자켓과
청바지를 걸쳤다. 퀘퀘한 냄새가 나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서 무대 위로 올라가.]
나는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제 1라운드는 손 정윤이 스스로 30년 가까이 지켜온 순결과 고별하
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제 2라운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나는 건달처럼 골목 벽에 기대어 한쪽 다리
를 달달 떨면서 손 정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골목의 가로등을 빼고는 모든 조명이 꺼졌
다. 촬영 중임을 알리는 카메라의 빨간 불빛만이 신경을 거슬릴 뿐이었다. 또각또각 걷는 소리가 골목
끝에서 들려와서 고개를 획 돌렸다. 팔이 드러나는 세일러복을 입고 가방을 든 여대생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물론 구식 교복을 입은 여대생은 손 정윤이었다. 손 정윤이 나를 보고 놀라 잰
걸음으로 지나치려 할 때 나는 길을 막아섰다. 나는 손 정윤의 각본대로 말했다.
[이봐. 여학생이 이 늦은 시간에 어딜 이렇게 쏘다녀?]
나는 여대생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그러자 여대생, 아니 손 정윤은 벌벌 떨면서 기
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 다.
[아저씨, 왜 이러세요?]
[왜? 같이 한 번 놀아보자구 그래.]
손 정윤은 가슴을 움추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저씨, 무서워요.]
[무섭긴?]
그러면서 나는 거칠게 손 정윤의 팔죽지를 잡고 벽으로 밀어 붙였다.
[소리 지를 거에요.]
나는 주머니칼을 꺼내 손 정윤의 얼굴에 갖다대며 협박을 했다.
[질러 봐. 요 예쁜 얼굴을 푹 그어 버릴테니까.]
정말이지 손 정윤은 여대생처럼 애띠어 보였을 뿐 아니라 마쵸맨의 말한 것처럼 혼자서 연기 연습을 많
이 했는지 실제로 벌어지 는 일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바람에 칼로 손 정윤을 위협해서 섬을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걸 잊어 버렸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나는 낄낄 웃으며 손 정윤의 세일러복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 정윤의 몸에 닭살이 돋아 있어
서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내 손을 멈추지 않고 딱딱한 브래지어 아래를 파고 들어갔다.
[야...?]
정말 단단하고 탄력있는 가슴이었다. 나는 완두콩만한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만지작거리면
서 헤헤거렸다. 그러자 손 정윤은 털썩 주저 앉으며 얼굴을 감싸쥔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망설여졌다. 각본대로라면 욕을 하면서 손 정윤의 엉덩이를 걷어차야했다.
[야, 이년아!]
손 정윤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손 정윤은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검은 치마가 허벅지 위까지 들어올
려졌다. 나는 얼른 무릎을 꿇고 허벅지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팬티를 움켜 쥐었다. 손 정
윤이 내 팔을 잡고 떼어내려고 할 때, 나는 칼을 손 정윤의 목에 댔다.
[한 번만 더 반항하면 진짜 죽여 버리겠어.]
그러자 손 정윤의 손은 가슴께로 모아졌다.
[찌이익, 찌이익.]
멀리서 카메라 렌즈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가 손 정윤의 음부를 카메라를 향해 드러내야 한
다는 신호였다. 나는 치 마를 걷어올리고 칼로 새하얀 팬티를 찢었다. 손 정윤은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비명에 개의치 않고 손 정윤의 두 발목을 붙잡고 골목 가운데로 질질 끌고가 카메라를 등
졌다.
[찌이익, 찌이익.]
손 정윤은 온 몸을 버둥거렸다. 이제 내가 손 정윤을 강간할 차례였다. 손 정윤을 일으켜 세운 후 벽으
로 밀어 세우고 바지 지 퍼를 내렸다. 내 성기는 정말 실감나게 커져 있었다. 손 정윤의 한쪽 다리를 한
손으로 들어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성기를 손 정윤의 몸 속으로 찔러 넣었다. 손 정윤이 미리 질구에 크
림을 바르고 나와 삽입은 삽시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기계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남은 연기는 전부
손 정윤의 것이었다. 손 정윤은 비명을 지르거나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 나 나를 밀어내려고는 하지 않
았다. 실제로는 그런 상황이 아니겠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단지 연기일 뿐이었다.
[아저씨,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아파 죽겠어요.]
같은 말들이 처음에 시작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손 정윤이 내게 매달리며 [아저씨, 더 세게요.] [아,
미치겠어요.] 로 바뀌어갔다. 그 사이 나는 변함없이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마쵸맨는 손 정윤
의 각본 대부분이 우 강호의 비디오를 거의 그대로 베낀 거라고 했다. 손 정윤은 그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 정윤의 복수극에 동원된 도구에 불과했다.
[으으... 으으흐.... 아아악!]
내 목을 꽉 껴안은 채 매달려 있던 손 정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 사정을 한 건지,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 해서 흉내를 낸 건지 알 길은 없었다. 그 다음 행동과 대사가 내 차례였다.
[어때, 죽이지?]
나는 손 정윤의 땀으로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손 정윤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입술을 빨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각본에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얼른 손 정윤을 떼어내고 바지를
올렸다.
[아무튼 넌 죽여주는 년이야...]
손 정윤은 좀 실성한 여자처럼 내 다리에 매달려 제발 한 번만 더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각본대
로 손 정윤을 내팽개치면 서 골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물론 통쾌한 웃음도 잊지 않았다.
[잘 했어.]
나는 2라운드의 두 번째 이야기를 찍기 위해 옆 방으로 건너갔다. 방은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둔중
하고 넓직한 검은 책상 과 등받이가 무척 높은 회전 의자가 방의 중앙에 떡 버티고 있었다. 카메라는 숨
겨져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우주 건설 회장 우 강호라고 적힌 팻말이 놓여 있었고, 의자
뒤쪽 벽에는 큼직한 유화로 그린 노인의 초상화가 걸 려 있었다. 나는 그 노인이 우 중식이고 우 강호의
아버지란 걸 마쵸맨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망친 인간이라 생각하니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참기로 했다. 일단 샤워를 하고 양복으로 갈아 입은 다음에 우 강호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가죽 의자는 보기와 달리 딱딱했다. 책상 위에서 시거를 꺼내 피워 물고 다리를 꼬았다. 고급 시거인지
향이 부드러웠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쳐다보노라니 내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나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인생이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발
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살고 보자는 식으로 마음을 다 독거리며 시거를 빨았다.
[똑똑.]
나는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들어와.]
어쩌면 무슨 일이야, 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은지 문이 열리고 짧은 커트 머리에 살랑거리
는 꽃무늬 원피스를 차 려 입은 손 정윤이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수건이 놓여 있었다. 손 정윤은 책상을 돌아 의자 옆으로 왔다. 손 정윤이 의자
옆 어딘가를 움직이자 의자가 뒤로 젖혀지면서 편하게 누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뒤로 기대자 손 정윤
은 내 다리를 벌리고는 그 사이에 꿇어 앉았다.
[눈 감고 편히 계세요.]
그러더니 내 혁대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손 정윤이 팬티와 바지를 한꺼번에 끌어내릴 때 나는 살짝 엉
덩이를 들어 주었다. 손 정윤은 내 성기를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나는 1분 쯤 가만 있다가 입을 열
었다.
[이봐, 미스 성?]
손 정윤은 성기를 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결혼한 거 알지?]
역시 손 정윤은 그 자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때마다 좀 간지러웠지만 참아내야 했다.
[내가 첫날 밤 얘기 해 줬던가?] 손 정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스 성도 알다시피 내가 좀 밝히는 편이잖아.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 처녀가 있다는 걸 못 믿는 사람이
되어 버렸단 말씀이야. ]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손 정윤의 이마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객이 4천명이나 몰렸으니... 굉장한 결혼식이었지. 본래 정략 결혼이란 게 다 그렇잖아. 신부 얼굴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결혼식을 해치우고, 파리에서 신혼 첫날 밤을 보내게 됐지. 샹제리제 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방에 들었어. 분위기는 그 만이었다니까.]
손 정윤은 리드미컬하게 고개짓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포도주로 분위기를 잡은 거까지는 좋았어. 보면 볼수록 신부가 너무 예쁜 거야. 정밀신
체검사 결과가 처녀라고 나오긴 했는데, 그렇게 예쁜 여자가 그 나이까지 처녀라는 거 믿을 수가 있어야
지.]
손 정윤의 움직임이 좀 빨라졌다. 꼭 자기 얘기라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침대에 들어서 내가 말했지. 난 당신이 처녀라는 걸 못 믿겠다. 그러니 내 방식대로 첫날 밤을 치루자.
그랬더니 신부가 버럭 화를 내더라구. 못 믿겠음 이혼하자는 거야. 그리고 이미 결혼한 사이에 경험이
있나없나가 무슨 문제냐고 따지는 거 있지. 그때 심장이 벌렁거려서 정말 혼났어.]
손 정윤은 리듬감을 잃고 아무렇게나 성기를 빨아댔다. 나는 그 편이 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신경이
그쪽으로 자꾸 쏠리니까 다음 대사가 가물가물해 진다는 거였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약속한 게 있었다.
[미스 성, 이제 올라와.]
그러자 손 정윤은 하이힐을 벗고 의자 위로 올라왔다. 나는 다리를 모아 손 정윤이 자리를 제대로 잡도
록 도와 주었다. 손 정윤 은 엉덩이에 달라붙은 치마를 걷어올렸다. 금빛 스타킹이 허벅지 중간에서 멈
추었다. 그 위로 음모와 금빛 가터벨트가 보였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손 정윤이 내 성기를 질
속으로 집어넣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입을 열었다.
[왜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싫다고 하느냐고 내가 되물었지. 그랬더니 일단 얘기부터 해 보래.
난 아주 간단하게 말했 어. 질 대신 항문부터 삽입하겠다. 그랬더니 미쳤냐고 펄펄 뛰더라니까. 나는 그
점이 더 의심스러웠지. 처녀라면 항문이 더 민 감하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 안 그래?]
손 정윤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난 더러워서 그 여자 옆에 가질 않았어. 행사나 파티가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같
이 다녔지만 지금까지 각 방을 쓰고 산다니까. 그 여잔 말이 아내지 아내 노릇하는 게 하나도 없어.]
손 정윤은 고개를 뒤로 젖혀 우아한 목선을 드러내며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
대사를 하려는데 어제 곽 재은과의 일이 떠올라 망설여졌다. 벌겋게 피묻은 내 성기... 그땐 어떻게 그
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 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손 정윤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대사를 재촉하는
눈길을 보내는 바람에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참, 미스 성은 항문으로 해 봤어?]
[아니요.]
[어때, 그럼 해 볼까?]
[회장님이 원하신다면요.]
[좋아.]
손 정윤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더니 나를 향해 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상의 아래에서 바로 젖가슴이
드러났다. 허리에는 금빛 으로 빛나는 콜삥이 죄어져 있었다. 치마를 벗자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금빛 카터 벨트와 같은 색 스타킹 사이에서 음모가 더욱 짙어 보였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오르가슴
이란 상표가 붙은 튜브를 꺼냈다. 튜브를 짜니까 와셀린처럼 미끈거리는 젤이 흘러나왔다.
[회장님, 뭐 잊으신 거 없어요?]
각본에 없는 대사였다. 나는 손 정윤이 눈빛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 중식의 초상화가
거기 있었다. 나는 계면 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미스 성이 좀 도와줘야겠어.]
본래 대사였으면 미스 성, 저걸 내리게 좀 도와줘였다. 손 정윤과 함께 초상화를 들고 책상 앞으로 나갔
다. 초상화를 바닥에 내 려놓고 내가 말했다.
[올라가.]
[아니, 회장님 아버님 초상화 위에서 어떻게...]
[괜찮아. 난 원래 그런 놈이야.]
손 정윤은 주저 없이 초상화 위로 올라갔다. 아직 덜 마른 초상화라 물감이 손 정윤의 발에 그대로 묻어
났다.
[이제 어떻게 해요?]
[엎드려.]
손 정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손 정윤의 얼굴 바로 앞에 우 중식의 얼굴이 있었
다. 오르가슴을 잔뜩 성기에 바른 후 손 정윤의 항문에도 듬뿍 발랐다. [처음이라서 좀 아플지도 몰라.
괜찮겠어?]
[회장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나는 초상화 밖에 무릎을 꿇고 손 정윤의 엉덩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손 정윤은 미끌어지듯 내게로
끌려왔다. 나는 서서히 성기를 항문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무리 크림을 발랐다지만 손 정윤의 항문은
바짝 긴장을 해서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마음을 편히 가져.]
[네.]
긴장을 풀어주려고 성기로 붙잡고 항문 주위를 문지르다가 살짝 찔러 보고를 반복했다. [회장님, 제 생
각 안하셔도 되요. 회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아파도 참을 수 있어요.]
각본에 없는 대사였다. 나는 항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림을 잔뜩 묻혀 놓고 성기를 밀어넣기 시작했
다. 그러자 손 정윤은 불에 데인 듯 몸을 움추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손 정윤은 거친 숨을 내쉬
며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 좋아요.]
일단 들어가기 시작하자 성기가 쉽게 움직여졌다. 나는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손 정윤
은 고개를 젖히고 미리 정해진 교성을 내뱉았다.
[회장님, 너무 좋아요. 더 세게 해 주세요.]
손 정윤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도 그 고통을 줄여줄 방법은 없었다. 손 정윤의 말에
따르는 것, 그게 내 최 선의 방법이었다. 나는 힘차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손 정윤은 손바닥으로 우 중
식의 얼굴을 지우면서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렇게요. 네, 맞아요.]
[정말 미치겠어요.]
손 정윤은 눈물을 쏟으면서도 좋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눈물겨운 복수심이었다. 내 욕망은 그것에 반비
례해서 점점 줄어 들었 다. 이번엔 내가 연기를 할 차례였다. 각본에 따르면 나는 사정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성기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흥분한 척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 지금 사정할 것 같아.]
손 정윤의 연기도 대단했다.
[저두요! 으으윽...]
[허헉... 으흑... 아앗!]
각본대로라면 내 성기에 남아 있는 정액을 손 정윤이 빨아 먹게 되어 있었다. 나는 손 정윤이 그러지 못
하게 허리를 잡고 엎드 려 버렸다. 손 정윤도 고통스러웠는지 초상화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버렸다. 나
와 손 정윤의 거친 숨소리가 한동안 방을 가득 메웠다. 마쵸맨도 그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아무 말이 없
었다. 손 정윤은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얼른 손 정윤에게서 떨어졌다. 손 정윤은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허공을 향해 말 했다.
[한 시간쯤 쉬었다 해요.]

25장

샤워를 하고 있는 내게로 마쵸맨이 찾아왔다. 나는 얼른 성기를 가리며 마쵸맨을 노려 보았다.
[나가!]
그러나 마쵸맨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분이 좀 풀렸냐?]
[뭐가?]
나는 황급하게 수건을 아랫도리에 둘렀다.
[네가 겪은 일들과 손 여사와 맞바꾼 거 말이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 어떤 일이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일이 어찌 되었거나 손 정윤
에게는 죄책감 같은 게 있었다.
[많이 아프다든?]
마쵸맨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몸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마음이지. 몇 년 동안 남편한테 모욕당한 걸 갚겠다고 일을 벌이긴 했지만
그게 어디 여자로서 할 짓이냐?]
나는 마쵸맨을 스쳐 지나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너하고 손 정윤씨하고 무슨 사이길래 이러냐?]
마쵸맨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걸 꼭 알고 싶으냐?]
마쵸맨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눈이 젖어 있는 듯도 했다.
[뭐 꼭이라기 보다...]
나는 팔을 뿌리치며 욕실을 빠져 나왔다. 등 뒤에서 마쵸맨이 담담하게 말했다.
[손 정윤은 하나밖에 없는 내 누이 동생이다.]
그 목소리는 욕실에서 울려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 말을 귀에 담지 않으려고 거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발을 멈칫 했다가 다시 걸었다. 가벼운 복장으로 마쵸맨과 나는 식탁에 앉았
다. 냉동 피자 한 판과 버드와이저 맥주 한 병씩이 저녁 식사의 전부였다. 배가 고 파 피자를 들기는 했
지만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맥주 뚜껑을 비틀어 따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맥주 맛이 입에 썼다.
거의 한 병을 다 비우자 속이 뜨뜻해졌다.
[담배 있냐?]
마쵸맨은 연미복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마쵸맨의 표정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를 푸하고 내뿜고 나니 좀 여유가 생기는 듯도
했다.
[아까 욕실에서 말인데...]
마쵸맨은 눈만 살짝 치켜뜨면서 나를 보았다.
[농담이었지?]
마쵸맨은 소리나게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나를 꼬나보면서 말했다.
[아니.]
나는 약간 몸을 뒤로 젖히며 되물었다.
[성이 틀린데...?]
[성이 왜 틀려, 임마!]
나는 어눌하게 대답했다.
[넌 마 동식, 그쪽은 손 정윤...]
마쵸맨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야 임마, 네가 언제 나한테 신경이라도 써 봤냐? 내 별명이 마쵸맨이라고 애들이 장난으로 마 동식, 마
동식이라고 부르다가 그게 굳어 버린 거다, 알아?]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진짜 이름이... 손... 동식이란... 말야?]
[그래, 이 자식아.]
[아깐 손 정윤씨도 널 마 동식이라고 부르던데?]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너한테 내가 마 동식이든 손 동식이든 무슨 상관이냐, 임마.]
나는 담배를 부벼 끄며 말했다.
[끝까지 말하지 말지... 왜 말해가지고...]
마쵸맨은 병 뚜껑을 따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다. 왜 말해 버렸는지...]
마쵸맨은 처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밤새 나는 내가 상상한 적도 없는 과격한 포르노를 손 정윤과 몇
편 더 찍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 속에는 욕망이 전혀 없었다. 복수를 위해 철저히 스스로를 파괴하는 손
정윤을 지켜보는 동안 두려움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손 정윤에게서 숭고을 느 꼈다. 물론 손 정윤
이 택한 방법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손 정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나는 혼자서 손 정윤과의 마지막 이야기를 찍기 위해 꼬불꼬불한 솔 숲길을 지나 섬
의 왼쪽 가장자리에 자 리잡은 벼랑으로 향했다. 그 마지막 이야기만 끝나면 나나 우리 가족에게서 완전
히 손을 뗄 거라는 손 정윤의 약속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나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지만 엄청
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될 손 정윤을 생각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내게도
우 강호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남은 셈이지만 손 정윤에 비하면 내가 더 유리했다. 그리고 내게 어떤 일
이 닥친다 해도 지난 이틀 동안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
는 각본도 없었다. 마쵸맨의 말로는 손 정윤이 하라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
기를 지금 까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거라고 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 밤부터 이 새벽까지 삶에 대해 많은 걸 배우고 깨우쳤다. 이
겨내기 힘든 고통의 터널 을 통과하면서 용케 나는 희망이란 걸 붙잡았다. 삶이란 자기 의지만으로 이루
진 게 아니라는 것, 보잘 것 없는 순간의 선택이 삶을 송두리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삶은
견디는 자에게만 기회를 준다는 것, 그리고 그 기회는 폐허가 된 삶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낼 힘까지
준다는 것... 그러나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람과의 관계가 삶을 지탱하게도 해주고 삶을 파괴하
게도 해 준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살 아오면서 진정으로 나 아닌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나 깊이 반
성을 해 보기도 했다.
나는 사실 한 번도 남을 제대로 이해하 려 들지 않았다. 내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다. 나는 벼랑 끝으
로 가서 손 정윤을 만나 헝클어지고 뒤틀린 관계를 잘 끝맺을 작정이었다. 손 정윤을 용서했다는 건 쉽
지 않았으 나 더는 서로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누구라도 먼저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이 서로의 불행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길 같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희뿌연 여명이 남아 있었
지만 솔 숲길이 끝나자 시야가 확 트였다. 20여미터 정도 떨어진 벼랑까지는 잔디 가 깔려 있었다. 벼랑
끝에는 커다란 포구나무가 가지를 쫙 벌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하얀 색으로 칠해진 나무 벤취가 있었

. 손 정윤은 거기에 새하얀 양산과 새하얀 모자를 쓴 채 바다를 향해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잔디밭 사
이로 난 길은 강처럼 휘어져 흐르며 벤취까지 이어졌다. 나는 밤색 양복 상의를 추스리며 길로 접어 들
었다. 바닷 바 람이 살랑이며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때였으면 절로 휘파람이 나올만한 분위기
였다. 손 정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벤취에 거의 다다르자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손 정윤이 기다렸다는 듯 이 스르르 일어섰다. 바람이 양산 끝에 달린 레이스를 가볍게 흔들었다.
손 정윤은 벤취 앞으로 한 발자욱 걸어나갔다. 벤취에서 벼랑 끝까지는 2미터도 여유가 없었다. 내 머리
에 어렴풋이 손 정윤, 아니 카마가 한 벼랑 얘기가 떠올라 바짝 긴장이 되었다.
[저...]
나는 손 정윤이 놀라지 않게 조그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손 정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체적으로
희게 바른 화장과 의상 때문에 인형 같아 보였다.
[설마 자살하려는 건 아니죠?]
손 정윤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빨간 입술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새침하게 말했
다.
[자살은 아무나 하나요?]
그러나 그 말이 내 귀에 그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손 정윤은 포구나무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앉으세요.]
나는 벤취에 엉덩이만 걸쳤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이 시간이 저는 제일 좋아요.]
나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손 정윤의 옆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이 시간은 갈등이 없어요. 세상의 모든 밝음과 어둠이 화해하는 시간이에요. 어서요. 귀 기울여 보세
요.]
바다 위에는 해무가 엷게 깔려 있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손 정윤은 나에게 다가
와서는 몸을 낮춰 얼굴과 얼굴이 마주 보이게 했다. 그리고는 내 목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제발 날 용서하세요.]
나는 눈을 내리 깔았다.
[이제 와 용서란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당신을 저주하며 살진 않겠다
는 겁니다. 당신을 조 금씩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손 정윤은 가볍게 내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다른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손 정윤의 입술로
전해지는 감정의 물결 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저랑 걸어요.]
그러면서 내미는 손 정윤의 손을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손 정윤의 손끝을 잡고 일어났다. 손 정윤
은 나를 데리고 벼랑 끝 으로 걸어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손
정윤은 벼랑을 등지고 돌아섰다.
[전 삶에 대해 아무런 얘기나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서 있다가 돌이 되어 버렸으면 좋
겠어요.]
그 말은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손 정윤에게 그런 절망을 안겨준 거 같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당신은 내 첫 남자에요. 날 사랑하진 않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처럼 내게 키스를 해 줄 수 있나요?]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초롱초롱한 손 정윤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거짓 사랑으로 보다는 남자와 여자로서 키스를 하는 건 어떨까요?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이로 시작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후...]
손 정윤은 행복에 겨운 듯 눈을 반쯤 감으며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내 마음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래요. 이 키스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길 바랄 게요.]
손 정윤은 눈을 꼭 감으면서 턱을 약간 위로 들었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려고 했다.
[탕!]
총소리와 함께 닥쳐온 엄청난 고통이 내 몸을 뒤틀며 손 정윤에게로 쓰러지게 했다. 손 정윤은 기다렸다
는 듯이 나를 감싸 안고 는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날 용서해요.]
그 소리는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더니 메아리로 변해갔다. 벼랑 아래 바위에 떨어지기까지 나는
참 오랜 시간을 살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내 귀에는 손 정윤의 목소리
가 울려 퍼졌고, 내 눈에는 손 정윤의 얼굴이 가득했으며, 내 몸으로는 손 정윤의 체온이 전 해졌다. 추
락하는 동안 나는 손 정윤과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만나 한평생을 사랑하며 산 것만 같았다. 어
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살이처럼 손 정윤과 만나는 그 하루를 위해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같이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함께 죽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마음 속에 후회나
억울함이 없었다. 나는 죽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대 내게 늦은 사랑이 아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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