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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이른바 이반들의 집합소, 라 불리는 그 곳에서 녀석을 보았다. 그것은 앗,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올 만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곳에서, 낯선 타인의 모습으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동화되어 있는- 어쩐지 생경한 그 모습에, 혹시 다른 녀석을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녀석의 얼굴을 곁눈질로 훑었다.
착 가라앉아 이마와 관자놀이를 덮고 있는 새까만 머리칼이, 웃을 때면 반달 모양으로 휘는 눈이, 날카롭게 솟아있는 콧대가,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얇고 조그마한 붉은 입술이, 쌍둥이가 아닌 이상 확실히 「우재혁」그가 맞았다.
하지만 유두가 보일 정도로 풀어헤쳐진 셔츠라든지, 허벅지의 연한 살이 다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청바지와 목에 치렁치렁 걸려있는 목걸이 같은 것들이, 어쩌면 쌍둥이일 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뭐, 쌍둥이든 아니든 내겐 상관도 없는 일이었고,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조금은 껄끄러운 일이기에 애써 다가가 아는 척 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학교를 곧 그만 둘 것이고, 그가 겨우 안면만 트고 지내는 과 동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역시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오늘따라 취기가 빨리 올랐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의 팔을 누군가의 손이 잡아왔다.
" 가냐? "
옆에서 자신의 파트너와 열심히 입술박치기를 해대며 나는 안중에도 없던 「문도희」가 시큰둥하게 내게 물었다. 도희의 파트너는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간만에 왔는데 그냥 가면 섭하지. "
그렇게 덧붙이는 말에 픽, 하고 웃자 녀석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 아이씨, 박석영. 너 내가 입 꼬리 한쪽만 올리고 웃지 말랬지. 그거 보는 사람 무지하게 벨 꼬이게 만드는 웃음이란 말야. 꼭 비웃는 것 같아서 무진장 기분 나쁘다구. "
" 시끄러.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란 말이냐? "
" 쳇, 정 떨어지는 녀석. 말도 꼭 지같이 하지. "
" ...간다. "
" 야아- 박석영. 섭하게 진짜 가냐? "
" 피곤해. 마주치고 싶지 않은 녀석도 있고.... "
" 누구? "
" 아아, 있어. "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희가 재빨리 내 입술을 훔치고 달아난다.
어이가 없어서 황망하게 눈만 껌뻑이고 있자, 맞을까봐 다가오지는 못하고 몇m 떨어진 곳에서 "굿바이 키스야!" 하고 소리치는 녀석이 보여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고 말았다.
곧 녀석은 자신의 파트너에게 들켜 어쩔 줄 몰라 쩔쩔맸지만, 그 모습이 즐거워 나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하여간 심심하지는 않은 녀석이라니까.
설명하자면 문도희, 저 녀석은 제 딴에는 탑이라고 우겨대지만 아무리 봐도 녀석은 천상 바텀이다. 저렇게 귀여워서야, 이제까지 잡아먹히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뭐, 저 성질머리로 잡아먹는 녀석도 꽤나 고달프겠지만....
하고 여전히 큭큭 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앞에서 오던 누군가의 어깨와 부딪히고 말았다.
" 아, 미안. "
하고 무성의하게 사과하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오른쪽으로 비껴가려는데, 순간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저쪽에서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남자에게 앞이 가로막히는 경험은 안 당한 사람은 모른다. 냉장고에 몇 달 푹 익혀준 요구르트를 한꺼번에 꿀꺽 삼키는 그런 기분이랄까...암튼 무지하게 더러운 기분이 든다.
나는 '기분 나쁨' 이라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 채 이번엔 왼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앞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시팔, 하는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꿀꺽 삼키고, 쫘악 찢어져서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눈으로 앞에 서 있는 녀석을 힘껏 노려봐 주었다.
" 헉?! "
숨을 삼키는 소리. 그것은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던 녀석이 맞나싶을 만큼, 녀석의 얼굴이 단숨에 핏기가 가시면서 새하얗게 질리는 게 리얼하게 보였다. 그리고 차마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해 슬금슬금 눈길을 피하는, 겁에 질린 갈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하아, 하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중생활을 하다가 들킨 녀석들을 가끔 보긴 했지만, 이 녀석처럼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마치 이제 내 인생은 끝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뭐, 학교에서의 모습과 여기서의 모습이 180도 틀려서 나조차도 조금 놀래버렸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떨 필요는 없잖아, 죄인도 아니고.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 하고 차고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우재혁은 여전히 굳은 채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어서, 저대로 망부석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는 상관없지만.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졌다. 고작 담배 불빛 하나에 몸이 따뜻해 질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일한 내 마음의 안식처이기고 하고. 지금의 나는 기분이 정말 꿀꿀하니까.
라이터가 어딨더라, 하고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는데, 갑자기 우악스런 손에 어깨가 붙잡혀 벽에 밀어붙여지고 말았다. 벽에 부딪힌 어깨 죽지가 아파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아까운 담배 하나를 빗물이 고인 질척한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 제길! "
아픈 것보다 피 같은 담배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욕지거릴 내뱉으며 이를 빠드득 하고 갈았다. 그러잖아도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화가 나자 더 험악해진 인상에,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우재혁의 손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대체 용감하게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우재혁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 뭐야, 우재혁? "
하고 퉁명스럽게 뱉어내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묻고 있는 듯한 녀석의 표정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 병신, 너는 날 아는데, 나는 널 모를까봐? 게다가 과 수석으로 입학해서 전교생이 다 아는 너 같은 유명인사를 모를 리가 없잖아. "
일부러 비꼬아 말했는데, 그걸 눈치 챘는지 우재혁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화난 게 분명한 표정. 그런데도 대놓고 화도 못내는 바보 같은 자식.
" 왜, 입막음이라도 하려고? "
담배를 떨어뜨려 버린 화풀이라도 하려는 건지, 내 목소리는 여전히 정나미 뚝뚝 떨어지게 흘러나왔다.
" ...그, 그래. "
예상치 못한 녀석의 대답에 나는 조금 놀래버리고 말았다.
떨리는 목소리에, 여전히 어깨를 꽉 누른 채로 떨고 있는 손끝, 덩치에 맞지 않게 겁에 질린 갈색 눈동자가, 분명 다른 녀석의 것이었다면 나는 애처로운 그 모습에 순순히 그래, 비밀로 해 줄게,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도도하신 도련님의 이미지를 풍기던 녀석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내게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순간 짓꿎은 생각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술김이었는지, 담배를 떨어뜨려 버린 화풀이였는지, 아니면 어깨를 부딪힌 게, 비를 맞으며 어깨를 잡힌 채로 서 있어야 하는 지금이 화가 나서인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단순한 장난이었는지도.
" 큭, 천하의 우재혁이 별 일이군. 세상에 두려울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표정으로 캠퍼스를 활보하시더니, 게이라는 걸 들키는 게 그렇게 두려운가? 내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두려워? 경멸받는 게 그렇게 두려워? "
뭔가 반박을 하기 위해 열리던 입술이 잠깐 달싹이더니 다시 천천히 닫힌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 그럴 테지. 넌 손가락질이라곤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을 테니, 두렵기도 하겠지. "
" ...너도...들켜서 좋을 건 없잖아? "
" 나? "
꼭 다문 입술이 정면에서 보인다. 조금 시선을 들자 그 곳에는 꼭 다문 입술만큼이나 고집스러워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 이봐, 뭘 모르는군. 세상에서 나 같은 인간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 밑.바.닥.인.생, 이라고 부르지. 너 같은 잘난 인생은 모르겠지만, 나 같은 녀석은 말이지 늘 바닥에만 뒹굴고 있어서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어. 너는 다르겠지만. "
" !! "
" 그래, 입막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
" ...뭐든지.... "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웅얼거림이었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 뭐든지라.... "
녀석이 했던 말을 반복해서 읊조리자, 녀석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개졌다. 여전히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다.
" 그럼 「뭐든지」하겠다는 네 성의를 좀 볼까? "
단순한 치기 혹은 유치한 장난기라고 하기에, 지금의 내 말엔 가시가 있었다.
" 지금 땅바닥은 비에 젖어 축축하겠지? "
" ?? "
" 기어봐. "
" ?!! "
" 기어서 내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봐. "
" !!! "
모멸감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믿을 수 없다는 눈, 거짓말이지,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 뭐야? 네가 게이라는 걸 학교에 까발려도 좋다는 거야? 이 정도면 입막음료 치곤 싸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프라이드 높으신 도련님께선 이 천한 것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기엔 자존심이 상하시다 이건가? "
경멸이 섞인 목소리에서 이것이 결코 장난이 아님을 깨달은 그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프라이드 강한 도련님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날 싫어했던 거냐? "
" 응, 싫어. "
대놓고 싫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의 눈이 커진다.
" ...왜...? "
" 병신, 사람이 싫은데도 이유가 있냐? "
하고 말하는 내게,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 얼굴이, 평생 사랑 받을 줄 밖에 몰랐지, 한번도 미움받아 본적이 없다는 그 얼굴이, 보기 싫어 여전히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거칠게 밀쳐내 버렸다.
" 야아, 빨리 하고 끝내. 언제까지 이 빗속에 서 있을 작정이야?!! "
나의 재촉에 천천히 내게 고개를 숙이는,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그리고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리는 남자가 보였다.
가끔 모든 걸 가진 자의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희열감에 몸을 떨기도 했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썩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물을 삼킨 것 마냥 속이 메슥거리고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 병.신. "
내 가랑이 사이로 자나간 덩치 큰 남자를 향해,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끊어서 내뱉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진실로, 내 인생에 다신 보고싶지 않은 남자였다.
그 후 썰렁한 자취방에서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채, 이틀을 내리 감기몸살로 앓아 누워 버렸다. 그리고 내 자신도 더 이상은 못 견디겠던지 3일째 되는 날 움직여지지 않은 몸을 겨우 겨우 일으켜, 잠깐 병원에 들렸다.
감기몸살에, 영양실조, 빈혈까지, 하여튼 허접한 병명은 다 갖다 붙이며 그 늙은 의사는 잔소리를 한 바가지나 쏟아놓았다. 처방전이나 빨리 써줄 것이지,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노인네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려 약을 사고, 마트에 들려 레토르트 죽도 두어가지 샀다. 위궤양으로 버린 속을 더 이상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였다.
오늘따라 오르막길이 그렇게 길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죽을 먹고 약 기운에 푹 잘 수 있어, 란 생각을 하며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어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렇게 터벅터벅 걷고 있노라니 어떤 염병할 놈이 좁은 골목에 떡 하니 차를 세워놓은 게 보였다. 니미럴, 화가 나서 근처에 있던 돌멩이를 하나 주워 길게 기스를 내주었다.
골목을 지나고 또 기다란 계단을 올라가자 칠이 벗겨진 갈색 대문이 보였다. 그 철 대문이 오늘따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삐이꺽, 하는 소리도 오늘만은 반갑게 느껴진다.
빨리 가서 약 먹고 한숨 자야지,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 자취방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로 인해 그 생각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양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상당히 건방진 포즈로 서 있는 우재혁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자식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니, 그것보다 왜 이 자식이 내 눈앞에 있는 거야, 그때 이후로 다신 안 보게 될 줄 알았는데, 하고 생각하며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리고 녀석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취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힌 채로 돌려세워져 놀라고 말았다.
잡혀진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서 앗, 하는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녀석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더 세게 내 손목을 옭아 매왔다.
이 자식이!!! 하고 화가 나서 한마디 해주려고 고개를 드는데, 무시무시한 증오를 품고 있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고 말았다. 시퍼런 날이 선 그 눈빛만으로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서 살해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착각이 일만큼 놈의 눈빛은 강렬했다.
"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별이 보였다. 발라당 뒤로 나자빠지며 일순 눈앞이 깜깜해졌다. 찬 바닥에 엉덩이가 시럽다고 느낀 순간, 턱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에 아, 맞았구나, 하고 태연하게 생각했다.
" 윽!!! "
이번엔 명치를 구두 굽으로 세게 얻어맞았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에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처음으로 하늘이 빙빙 도는 체험을 했다. 그러잖아도 피죽도 못 먹어 골골대던 몸이 두 번의 공격으로 완전히 넉다운이 되고 말았다.
일으킬 힘도 없어 아픔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낑낑거리고만 있자, 머리위로 놈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틈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때 가랑이 사이로 자나갔던 게 그렇게 억울했었냐,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개 패듯 패는 게 어딨냐,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거릴 힘도 지금의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순간 우재혁에게 다시 손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아까 잡혔던 손목에 멍이 들었는지 다시 잡힌 손목이 우라지게 아팠다. 또 패려는 건가, 하고 이젠 아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자, 몸도 성치 않은 나를 그대로 도살장에 소 끌고 가듯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옘병!!! 정말 욕 나올 뻔했다.
말 그대로 내 몸뚱이를 질질 끌고 간 놈은, 좁은 골목에 세워져 있던(내가 돌멩이로 기스를 냈던) 은색의 BMW앞에 멈춰 서더니 뒷문을 열고 나를 구겨 넣듯 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차라리 죽여라, 죽여, 하고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그런 말을 할 힘조차 지금의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부웅, 하는 엔진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뻑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니면 기절했거나.
찰샥 찰샥, 뺨을 때리는 아픔에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리자, 우재혁의 얼굴이 보여서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너 여기 왜 있어, 하고 물으려고 했는데 바짝 마른 입술이 잘 열리지 않았다. 혀를 내밀어 살짝 입술을 핥자, 뜨거운 숨결이 쉭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자 뺨을 때리는 아픔에, 힘겹게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자지 마. "
하고 그가 명령했다.
웃기네, 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만큼 주먹으로 얼굴을 세게 얻어맞았다. 제기랄, 광대뼈에 정통으로 꽂혔는지 더럽게 욱씬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 아팠다.
다시 눈이 감기려고 하자, 싸늘한 어조로 그가 다시 자지 마, 하고 명령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뜨자, 만족했는지 더 이상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잠자코 있으려니 열이 나는지 엄청 더웠다. 보지 않아도 지금 내 몸은 땀으로 흥건하겠지. 물이라도 한 모금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은데, 갑자기 아래쪽으로 옷이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늘한 공기가 뜨거운 피부에 닿는 게 기분 좋았다.
내가 웃고 있었나? 그 순간 웃지 마, 하는 놈의 명령과 함께 또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코에서 피가 나는지 엷은 피 냄새가 났다.
피부가 쓰라려 올만큼 거칠게 옷이 벗겨졌다. 아무리 열에 들뜬 몸이라도 갑작스런 한기에 적응할 수 없었는지 몸이 부르르 하고 떨렸다. 그 순간 놈의 픽, 하고 웃는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채지마, 하는 놈의 목소리.
뭘?
의아함은 곧 풀렸다. 놈이 내 팬티에 손을 대려고 하자, 아, 이 놈 게이였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 자식 날 덮치려는 거구나, 하고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하고 말았다.
기겁해서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팬티를 움켜쥐었다. 놈은 그 손을 너무도 쉽게 밀쳐내 버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뭐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려 보았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쉭쉭, 거리는 뜨거운 숨소리만 거칠게 새어나왔다.
곧 팬티까지 벗겨져 놈의 앞에서 적나라하게 내 모든 곳을 보이고 말았다. 저항한답시고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오히려 내가 얻어맞고 말았다.
두 손이 머리위로 올려져 단단한 무언가에 묶여지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무표정한 그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늘 웃고 있는 녀석과는 다른, 어쩐지 생소한 얼굴이 나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이 베개 위에 처박힌 채, 이번엔 내가 개처럼 엎드려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릎이 몇 번이고 꺾이자, 그럴 때마다 볼기를 심하게 얻어맞았다. 고통에도 비명은 나오지 않고 쉭쉭, 거리는 불규칙적인 숨소리만 토해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울었다.
가까스로 세워진 무릎이 후둘거렸지만 또 맞을까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엷게 피 맛이 났다. 엉덩이가 높게 들어올려지고, 남자의 눈앞에,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나의 치부가 드러났다. 좁고 여린 통로 안으로 남자의 흉기가 한번에 깊고 세게 밀고 들어왔다. 악, 하는 비명을 내지를 사이도 없이 끔찍한 고통에 현기증이 일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볼기를 찰샥 찰샥 때리자 헉, 하고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남자의 것이 빠져나갔다. 잠깐의 안도감. 하지만 곧 억지로 쑤셔오는 흉기에 생살이 찢어지는 엄청난 고통을 맛봤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어떠한 배려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것의 흉측함에 나는 치를 떨어야만 했다. 내장까지 꽉 들어찬 느낌에 구토기가 올라왔다. 속이 메슥거리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내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은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탁한 신음을 토해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몇 번이고 박았다 뺐다를 반복했다. 성욕도 채워지지 않을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행위. 그런데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섹스가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한 단순한 행위인 것만 같았다.
내가 기절하자, 그는 억지로 나를 깨워 한순간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몇 번이고 의식을 잃었지만 그럴 때마다 얻어맞으며 눈을 떠야만 했다.
남자가 내 안에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다시 쑤셔오는 남자로 인해, 나중에는 고통도 무뎌져 그가 움직이는 대로 내 몸도 따라 흔들렸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흔들리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자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비참해서, 그냥 이대로 딱 죽어버렸음 좋겠다고, 눈을 감으면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진심으로 바라며 숨죽여 울었다.
의식의 끈을 놓으려 할 때마다 고문처럼 내 뺨을 후려갈기는 아픔에 억지로 눈을 뜨자, 새벽 안개처럼 뿌연 시야사이로 어쩐지 괴로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고통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남자를 동정해 버리고 말았다. 정작 불쌍한 것은 나인데, 하고 혀를 차면서....
이미 남자의 정액으로 가득 차버린 그 곳을 다시 커져버린 남자의 흉기가 쑤셔왔다. 하지만 이젠 살이 찢기는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뇌가 굳어버린 것처럼, 거기도 굳어버린 걸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이미 말라버린 뻑뻑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흔들림에 내 몸도 따라 흔들렸다.
단지 그것뿐 섹스에 대한 감흥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기절이란 이름의 배려를 허락지 않았다. 기절하지 않고 눈만 감으려해도 솥뚜껑 같은 그의 손바닥이 날아와 내 뺨을 인정사정 없이 가격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억지로 눈을 뜬 채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으로 흔들리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드디어 남자의 것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채 식지도 않은 그것이 허벅지를 타고 흐른다. 닦으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포기했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 위는 그가 흩뿌린 정액과 내가 흘리는 피로 흥건하다.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피부로 닿는 질척한 감각과 정액의 시큰한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로 알 수 있었다.
나의 치부는 이젠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죽는 걸까, 몽롱한 의식 속에 생각했다. 정신은 아직도 말짱한걸 보니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그럼 완전히 내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그가 또 내 안을 침범할까. 또 철저하게 짓밟고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걸까.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 아직도 멀었어. "
이 악문 소리로 그가 말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자 그가 억지로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서늘한 갈색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눈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의 우악스런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마치 턱을 부서뜨릴 듯이 강하게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고정시켰다.
" 이것만으로 분이 안 풀려. 아무리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실컷 패주면 사라질 줄 알았어. 그런데도 분노가 사라지지 않아. 너를 내 아래 굴복시키면 사라질까 싶었지. 한 번이면 될 줄 알았어. 몇 번이고 너를 굴복시키고 유린해도 사라지긴 커녕 더 커지기만 해. "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진심으로 나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 너를 차라리 죽일까 했지만 그건 너무 쉬워 관뒀다. 조금 더 고통을 주자, 하고 생각했어. 내가 느낀 고통의 딱 두 배만큼만 네게 고통을 주자, 그래서 내 고통이 얼마나 컸을 지를 몸소 깨닫게 해주자, 하고 내내 이를 갈며 생각했다. "
천천히 눈이 감겼지만 다행히 그의 손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제 잠들어도 되는 건가, 하고 점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남자의 말은 마치 자장가처럼 내 귀를 파고들었다.
"너를 놔주지 않아. 이 분이 풀릴 때까지인지, 혹은 네가 죽을 때까지인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쉽게는 너를 놔주지 않아. 명심해라, 박석영.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나는 여전히 그의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정액과 피로 범벅인 그 곳에 여전히 알몸인 채로 누워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려봤지만 햇살 때문인지 잘 떠지지 않아 그대로 감고 있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까딱도 하지 않았다.
비참해서 눈물이 흘렀지만 각막이 깨질 듯이 아파 와, 더 이상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려는 걸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장 안에 가득 찬 이물질의 감각에 토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나오는 건 쓰디쓴 위액 뿐, 그것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토해내지 못하고 몇 번을 다시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해가 저물자 여전히 빡빡한 안구가 시야를 흐릿하게 했지만, 더 이상 따끔거리지 않아 눈을 뜰 수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후장에서부터 등줄기를 가르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다시 침대에 엎드려지고 말았다. 다 쉬어버린 목에선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힉- 힉- 거리는 괴상한 숨소리만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동안 고통이 가시길 기다리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으윽, 하고 몸이 반쪽으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딱 까무러쳤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아직도 너무나 아팠다.
손 안 가득 진득한 땀이 베어든다. 겨우 일으킨 몸뚱이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버티려다가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배와 턱이 방바닥을 강타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이 후장을 내리쳤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아 열심히 헐떡이며 폐 안으로 공기를 집어넣으려고 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위로 식은땀이 비 오 듯 쏟아졌다.
이렇게 죽는가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나 버리고 말았다.
방바닥에 한쪽 뺨을 대고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꽤 오랜 시간 그러고 있어서 아픔도 가셨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눈물을 훔쳐낼 기력도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두었더니, 그러잖아도 힘겹게 뜬눈이 쓰리고 아파서 제대로 떠지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도 처량하고 한심한데 눈물까지 흘리는 구질구질한 모습 따위 보기 싫어, 울지 말아야지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눈물이 났다. 얼마나 울었던지 나중엔 진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머리가 띵, 하고 공명을 하듯 울렸다. 아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콱 혀를 깨물고 죽어도 시원찮을 판에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에 태평하게 오뎅 국물에 소주 한 잔 걸치면 딱 일텐데, 하는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원래 이런 녀석인 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커튼이 처져있는 창가로 햇살이 다시금 비춰들자, 나는 또 하루가 지났구나 하고 이해했다.
잠결에 오줌을 싸버린 건지 눈을 뜨자 아래쪽에 이미 식어버린 액체의 감촉이 느껴졌다. 오줌냄새는 나지 않아서, 정액과 피 냄새에 파묻혀 버렸거나 이틀동안 공기가 통하지 않은 밀폐된 공간에 있어서 코가 미쳐버렸거나, 둘 중 하나의 이유로 냄새가 나지 않는 거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서 떨어진 뒤 방바닥에 엎드린 그대로 누워있었다. 살짝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자, 그 동안 굳어있던 근육들이 일제히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을 주장했다. 뼈마디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으으으-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여전히 괴상한 소리가 되어 목구멍을 타고 새어나왔다. 침을 삼키자, 목구멍이 바짝 말라버렸는지 침이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의 살들이 모두 뜯겨나갈 것처럼 아파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엄청나게 후려갈긴 뺨이 아픔으로 요동쳤다.
다리가 오무려지지 않아 똥싼 바지 같은 폼으로 느그작 느그작 거리며 방을 나섰다. 걸을 때마다 엉덩이 사이가 서로 마찰하며 눈물이 고일 정도로 아팠다. 욕실에 도착하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직까지도 내 몸은 지독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로 샤워를 했더니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욕실 안에 있는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는 그대로 기겁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두 눈 두덩이는 부어 올라 처참했고 양쪽 뺨은 부어오르다 못해 짙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엄청난 멍 자국이 새겨져 있고, 몸뚱이엔 퍼런 멍들이 훈장처럼 여기저기에 잔뜩 찍혀있었다. 마치 공포 영화 속의 괴물 같은 몰골에 저게 과연 내가 맞나, 하고 한참이나 거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 곳에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자 안구가 뽑혀나갈 듯이 아파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자 푸르스름한 안개가 낀 듯 주위가 뿌옇게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이내 안개는 사라져 버렸다.
천천히 욕조에 두 손을 기대고 거울을 향해 엉덩이를 쭈욱 하고 내밀었다. 볼썽사나운 자세에 혼자 있는데도 얼굴이 다 벌개졌다.
그 자세로 엉덩이를 벌리자 아픔에 으으- 하는 괴상한 신음이 나왔다. 이를 악물어 꾸욱 참고 손가락을 집어넣자 아픔은 그 배가 되었다. 잘 들어가지 않아 억지로 쑤셔 넣자 그나마 아물어가던 그 곳이 뚜둑 소리를 내며 다시 찢어져 버렸다. 고통에 다시 눈물이 흐르자, 눈이 따끔거려 얼른 눈물을 훔쳐냈다.
굳어버린 남자의 정액이 후두둑 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욕실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기엔 간간이 붉은 액체가 뒤섞여 있었다. 그 붉은 액체는 끊임없이 내 허벅지를 타고 흘러, 곧 바닥을 붉게 물들여놓았다.
피비린내가 확 하고 끼치자 토악질이 나왔지만, 텅 비어버린 위장 안에선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지 이젠 위액도 나오지 않고 헛구역질만 계속 했다. 그것만으로 진이 다 빠져 정액과 피로 더러운 욕실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렸다. 그 부분이 몹시도 쓰라렸지만, 그것보다 다시 찬물에 몸을 씻어야 했다는 생각에 일순 아픔도 싹 가셨다.
덜덜 떨며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야 목욕가운이 없는 걸 깨달았다. 수건 하나만 덜렁 허리에 두르고 방으로 가 옷장 문을 열자 안은 거짓말처럼 텅 비어있었다. 혹시나 해서 서랍장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텅 비어있었다.
이거 우재혁의 집이 아니었나, 머리를 갸웃하며 새삼 방안을 둘러보니 옷장과 서랍장, 그리고 퀸 사이즈의 침대만이 덜렁 있을 뿐, 시계나 액자는커녕 그 흔한 달력하나도 없는 방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실은 더 처참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운동장처럼 넓은 원목마루 뿐이었다. 그나마 주방에 싱크대와 냉장고가 갖춰져 있는 걸 다행이라 여기며 냉장고문을 여는 순간, 하마터면 욕 나올 뻔했다.
있는 거라곤 커다란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수 뿐, 온통 생수뿐이었다. 혹시 라면이라도 있나 싶어 싱크대를 다 뒤져봤지만 주방기구들이 다 갖춰져 있는데 반에 먹을 거라곤, 한 말 정도의 쌀이 전부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굶어 죽이진 않을 모양이었다.
빨간 색의 밥통에 쌀을 씻어 넣고 밥이 되길 기다리는 동안, 엉망인 시트와 침대보를 모조리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렸다. 설마 이걸 다 손 빨래해야 하나, 하고 난감해 했었는데 다행히 세탁기가 욕실 한 켠에 놓여져 있었다.
수건이 하나 뿐이라,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도 마저 세탁기에 넣고, 거실 바닥에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잠깐 움직인 것뿐인데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서 잠시 쉬게 할 요량으로 거실바닥에 누웠는데, 의외로 원목마루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밥이 되는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귀기울였다. 하루종일 잤는데도 또 잠이 쏟아졌다.
무료한 일상이었다. 달력이 없어서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시계가 없어서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몰랐다. 그저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또 하루가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주일 정도가 지나자 쌀이 떨어져버렸지만, 움직일 일이 없어서인지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수도 며칠 후면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배고픔 따위 질릴 정도로 맛보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난 창가에 붙어, 내내 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아마도 내가 있는 곳은 어떤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인 것 같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아주 작은 개미 정도의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루종일 개미들의 움직임을 구경하다, 그것도 지겨워지면 하늘의 구름을 감상했다. 오늘처럼 구름이 시시각각 변하면 이것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데, 구름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이거나 잔뜩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이면 내내 같은 풍경이라 금새 지겨워져 버린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씨가 제일 좋다.
발가벗고 다니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처음엔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쑥스럽고 민망하더니 이젠 아래의 덜렁거림조차 신경 쓰이지 않게 될 만큼 아무렇지 않아져 버렸다. 이래서 인간은 어디서든 적응하며 살아가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주일쯤 지나자 생수도 떨어져 버리고 수돗물로 배를 채우자 자꾸 설사가 났다. 내용물도 하나 없는 머얼건 물 같은 설사였지만,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더 이상 수돗물은 마시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마치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어느 날 꿈속에 죽은 엄마가 나타났다. 잘 있니, 하고 물어서 응, 하고 대답해줬더니 너무 슬픈 듯이 웃어서 꿈이라는 걸 아는데도 나는 조금 울고 말았다.
엄마는 살아생전에 내게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을 꿈속에서도 하셨다. 어휴, 불쌍한 것, 이 불쌍한 것을 두고 어찌 눈을 감을까, 벌써 죽어놓고 또 그 말이네, 하고 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내 웃는 모습에 엄마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해서 더 환하게 웃어줬다. 그래도 눈물이 났다.
그런 나를 엄마가 슬픈 듯이 바라보고 계셨다.
막 잠이 들 무렵 몸이 부웅- 하고 뜨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저항할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몸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현기증이 일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 끄응, 하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자, 나를 안고 가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뿐 남자는 곧 나를 안은 채로 이동하더니, 조심스럽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싶을 만큼 아주 얌전하게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아마도 우재혁은 내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시트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피부가 닿자, 차가운 그 감각에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 잠깐의 움직임에도 남자는 조심스러웠다.
분명 나를 깨우고 싶어하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그 다음으로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의도를,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우재혁. "
한동안 내 머리칼을 만지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불빛조차 새어들지 않은 지독할 정도의 어둠 속에 나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용히 귀 기울여보면 그의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생각했던 만큼 크게 나와주지 않았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 그 소리에 묻혀버릴 아주 작은 목소리. 하지만 내 목소리를 그가 못 들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혼자인걸 깨달았을 때, 바람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영원히 그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또 며칠이 더 지났을 때,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었다. 하지만 또 며칠이 더 지나자, 지독할 정도의 적막함 속에서 나는 가끔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라도 내 곁에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그가 보고싶었던 게 아니었다. 단지 이 곳에서 나가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건 오로지 그 뿐이기에, 그가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한 달만에 그가 돌아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가 나를 또 얼마나 버려 둘지 기약할 수가 없다. 또 다시 그 고독을 맛봐야 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의 심장은 금새라도 오그라들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나직하게 우재혁을 불렀다. 그는 어둠 속에서 미동조차 없다. 어떤 말이든 해서 그의 화를 풀어야 했다, 그리고 비굴해지더라도 용서를 구하자, 그를 달래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 우재혁, 거기 있지? "
혹 내 망상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 싶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여전히 대답이 없자 애가 탄다. 그가 저 문을 박차고 당장이라도 나를 버리고 갈까봐 두렵다.
" 재혁아.... "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처음으로 성을 빼고 불러보았다. 그가 나가버릴까 봐 조바심이 나서, 그의 바지가랑이라도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그럴 작정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 순간 난폭한 힘이 내 몸뚱이를 침대 위로 밀쳐내 버렸다. 그 바람에 반쯤 일으켰던 몸이 침대 위에 그대로 처박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곧 발가벗은 육신위로 남자의 무게가 더해졌다. 그의 재취가 확 하고 끼치자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던 육신이 먼저 반응했다. 떨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는지 내 몸은 그의 아래에 깔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두렵다.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거부할 수가 없다. 아니, 거부해서 안 된다.
" 재혁아. "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맞추어, 조금이라도 그의 비위를 상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곧 어떠한 준비도 배려도 없이 곧바로 그의 흉기가 쑤셔올 거라는 두려움에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다행이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진득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시선이 어디 있을지 가늠해 보고 그의 갈색눈동자가 있을만한 곳에 시선을 맞추었다.
" 우재...?! "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왼쪽 뺨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너무 세게 얻어맞아서 이빨이 달그락 거리고 입안이 터졌는지 알싸한 피 맛이 났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오른쪽 뺨을 얻어맞고 엉덩이가 세워진 채로 얼굴이 베개에 처박혀 버렸다.
꽤 화가 났는지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대체 나의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할 말을 찾기 위해 애꿎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짓 따위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낼 수 있을 텐데....
" 으읍!!! "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감각이 후장을 가른다.
역시 녀석은 손가락으로 안을 넓혀주는 아량은 베풀지 않았다. 그저 바지 지퍼만을 열어 자신의 성기를 꺼내 조급하게 좁은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이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지 그는 몇 번이나 거칠게 뺏다가 억지로 쑤셔 넣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신음했다. 아니, 신음을 참기 위해 더욱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나의 모습조차 그의 눈에는 거슬렸는지,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으어어억- 하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는 자신을 내 안에 넣은 채로, 내 몸뚱이가 그의 정면을 향하게 돌려세웠다.
그러잖아도 좁은 구멍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압박감에 몸이 잘근잘근 씹히는 끔찍한 고통을 맛보고 있는데, 거기에 그 고통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감각이 내벽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히끅, 거리며 울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그의 등뒤로 서서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늘 나는 몇 번이나 기절했는데도 그의 손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의식이 없는 와 중에도 그는 피스톤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내 안에 수그러든 남자의 페니스가 다시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신음하며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길 빌었다.
내 마음속의 바람을 그가 들었는지(그럴 리 없겠지만) 서서히 내 안에서 그의 것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뇌가 명령하기도 전에 나는, 조금 절박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의 바지 깃을 부여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손을 놓으면 또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에 나는 온 힘을 그러모았다.
내 안에서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남자가 천천히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먹이 날아올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침묵한 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등지고 있는 그의 얼굴은 잔뜩 인영이 드리워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말을 꺼내기가 더 쉬울 텐데, 라고 생각하며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움직였다. 입술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 혀끝으로 입술을 몇 번 축이고 나서야 겨우 입이 열렸다.
" 잠.... "
잠깐만 기다려 줘,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생각만큼 제대로 나와주질 않았다. 한참이나 끙끙 거려도 목소리가 나와주질 않자,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서 그의 감색 양복바지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제발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주길 빌었다.
" 요...용서...해 줘.... "
간신히 목소리가 나와줬다. 그는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뭘? "
한참의 침묵 끝에 딱딱한 그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가 내 말에 반응해 주었다는 사실이 나는 마냥 기뻤다.
" ...뭐든지.... "
나는 겨우 입술을 움직여 그렇게 말했다.
"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
한쪽 입 꼬리만을 비틀어 웃으며 그가 조소하듯 말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그에게 끌려와 감금당하고 강간당할 만큼 나쁜 짓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의 약점을 쥐고 있었고 그것을 빌미삼아 잠깐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 짓(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했던 것)을 저지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내게 이런 짓을 저지를 만큼 그렇게 엄청난 짓이었던 걸까?
" 아니.... "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 전혀...모르겠어.... "
하고 덧붙였다. 부연설명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긴 말을 하기에 지금의 내 목 상태는 너무 좋지 않았다.
" 박석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구제불능인 녀석이구나. 이유도 모르면서 사과를 해? "
정확히 말하면 사과를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용서를 구했을 뿐이다. 미안해, 가 아닌 용서해, 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굳이 그걸 따져서 그의 화를 돋구고픈 생각은 없었다.
" 이유를 말해주면......쿨럭 쿨럭...!! "
목에 뭔가 걸린 듯한 느낌에,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한번 터진 기침은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몸이 뒤척이듯 튕겨 올랐다.
그 미세한 움직임은 내 안에 반쯤 꽂혀있는 그의 물건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주 작게 몸이 흔들린 것뿐인데도 그의 성기가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올랐다.
" -윽! "
뜨거운 것이 다시 안을 가득 채우는 압박감과 열기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끅끅, 거리고 있자 나를 때리는 데에만 사용되었던 그의 큼지막한 손이 조심스레 다가와 내 등을 쓸어주었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변화에 의아해 할 사이도 없이 나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있는 그의 허벅지위에 올라탄 자세로, 다정한 연인처럼 그를 꼬옥 끌어안고 있었고 그 역시 겉으로는 다정한 척 연신 내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 박석영. "
우리 사이에 흐르던 기묘할 정도의 부드러움은 그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내 안을 침범함으로 끝이 났다.
" 아, 아팟...! "
지퍼만 열고 바지를 벗지 않고 하는 행위에, 몸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그의 허리띠와 버클에 여린 살들이 쓸려서 아팠다.
내 비명소리에 일순 그가 멈칫했다. 그 틈에 여전히 그의 목을 끌어안은 볼썽사나운 형상으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 아, 아파...네, 바지.... "
웅얼거리듯 더듬거리며 말했는데도 용케 알아들었는지, 그가 혀를 쯧 하고 차며 서둘러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나도 덩달아 들썩여 허리가 찌릿찌릿 하고 울렸다.
오늘의 그는 조금 이상하다. 아니, 많이 이상하다 못해 지금이 제일 이상하다.
그는 거친 피스톤운동을 하는 대신 내 입술위로 살짝 자신의 입술을 겹쳐왔다.
그와의 키스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이런 부드러운 키스를 할거라곤 생각조차 못해서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랫입술을 빨며 조심스레 혀를 집어넣는 그 답지 않은 행위에 내가 더 안달이 난다. 내가 조급하게 그의 혀를 휘감자 그는 감질 맛나게 해놓고 비겁하게 내 입안에서 혀를 빼내버린다.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혀로 쓰윽, 핥고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 위로 다급하게 입술을 포갰다. 그 순간 그의 킥,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그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 으읏! "
갑자기 내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남자로 인해, 그의 성기가 내장 깊숙한 곳을 찔러오자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튀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혀가 내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와 부드럽다곤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불이 번쩍했던 그 곳만을 남자의 흉기가 집요하게 찔러오는데, 이대로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엄청난 쾌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지금 이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다. 자지러질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몇 번이나 좋아, 하고 뱉어내는 날 향해, 말했다.
지금 이것은 내 몸이 아니다. 그의 아래에서 고통보다는 쾌락에 미친 듯이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날 향해, 말했다.
지금 날 안고 있는 녀석은 우재혁이 아니다, 그의 탈을 쓴 다른 인간이다. 오늘따라 고통이 아닌 쾌감만을 주는 그를 향해, 내가 말했다.
세 번이나 내 안에서 사정을 하고 또 커지는 그의 존재를 느끼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며 나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눈을 뜨자 어느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겨우 몸을 일으키자 어쩐 일인지 몸은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불을 켜자 시트도 깨끗하게 빨아져 있어서 정사의 흔적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순간 그게 꿈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둔부를 찌르르 울리는 이 감촉이 지난밤이 절대 꿈이 아니었다고 대변해 주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확실히 지난밤의 우재혁은 이상했다고, 천천히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녀석의 단순한 변덕인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간단하게 치부하기로 했다. 복잡하게 생각했다 한들 이상한 기대나 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기대를 한만큼 더 절망하게 될 테니까.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기대도 하지 않고, 또 절망도 하지 않은 채로....
꼬르륵.
배가 고프다는 자각은 전혀 없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들린 엄청난 소리에 문득 며칠 동안 생수밖에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펴지지 않는 허리를 두 손으로 짚으며 어그적 거리는 볼썽사나운 자세로 겨우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고지가 바로 저 앞이다, 하고 마음속으로 소리치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생수도 다 떨어지고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길,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이 자식 결국은 나를 굶어 죽일 심산인 거야, 하고 나는 단정했다.
혀를 쯧, 하고 차고는 할 수 없이 수돗물이라도 배를 채울 요량으로 주방에 불을 켜는데, 문득 식탁 위에 올려져있는 **마트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는 비닐봉지에 시선이 닿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안을 뒤져보니 안에는 야채를 비롯 온갖 식료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얼른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안에는 생수와 음료수들이 종류별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이없게도 기쁜 마음보다는 이 놈이 미쳤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확실히 어제 밤부터 이상하긴 했지, 하고 혀를 차며 돌아서다 문득 비밀 봉지 안에 식료품말고 다른 게 하나 껴있는 것을 발견했다.
뒤져보니 그것은 작은 연고였다.
" 푸하하하하!!! "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은가, 배려라곤 눈곱만치도 없이 박아대던 녀석이 그 곳에 난 상처에 바르라고 연고를 사 가지고 오다니....
설마, 죄책감 때문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 보지만 또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이 되어, 이 곳에 온 후로, 아니, 어쩌면 생전 처음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그 뒤로 그는 일주일, 혹은 이 주일에 한 번 꼴로, 내가 자고있는 새 몰래 다녀가곤 했다. 그럼 마치 애완동물에게 먹이라도 주는 양, 식탁 위와 냉장고안은 꼭 먹을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랄까, 점점 애완동물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지난밤에 식탁을 치우지 않은 채로 잤다는 걸 깨달았다.
이 곳에 지낸 지 두 달 남짓,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유일하게 집안일 뿐. 음식솜씨도 꽤 늘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솔직히 TV도, 책도 없는 이 곳에서 시간 죽이기란 쉽지 않다. 처음엔 미친 듯이 청소에 매달렸다. 쓸고 닦고를 하루에 서너 번도 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 게 여의치 않아 식사를 잘 안 챙겨먹음에도 불구하고 식사시간이 되면 꼬박 꼬박 음식을 만들었다.
솔직히 내 위장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게 더 많았지만, 어쩐지 요리는 내게 있어 자기 만족의 한 종류가 되어 버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종종 지난밤처럼 나는 식탁 위에 음식들을 즐비해 놓은 채 깜빡 잠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음식들이 반쯤 줄어들어 있었다. 의아해서 싱크대 속을 보니 누군가 밥을 먹고 간 흔적이 있는 밥그릇과 수저가 놓여있었다. 설마 우재혁이 먹고 간 건가?
의심해 볼 여지도 없었다. 여기에 출입할 수 있는 인간이란 우재혁, 그 하나 뿐이니까.
그 날 이후로 나는 일부러 식탁 위에 그를 위한 음식을 차려놓고 잠이 들었다.
그것은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내게 주어진「할 일」이란 것이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식탁을 준비했고, 그는 매일 밤이라곤 할 수 없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 꼴로 불규칙하게 다녀가곤 했다. 그럴 때면 다음날 싱크대 속엔 그가 먹고 간 것으로 보이는 밥그릇과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가지런함이 어쩐지 그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차려준 밥을 그가 먹으러 와주기를 어느 날부턴가 기다리고 있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내게 옷을 준 것은 여기에 온지 두 달하고 보름 정도가 더 지나서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발가벗은 채 방안 여기저기를 활보했고, 그것도 꽤 적응하며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 새벽잠이 많은 내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게 새벽에 눈을 뜬 역사적인 날이었다. 아마도 저녁에 먹은 갈치 조림의 간이 셌던 건지, 엄청난 갈증에 눈이 떠졌다.
눈이 반쯤 감긴 채 배터리가 다 된 장난감처럼 무울, 무울, 하고 연신 웅얼거리며 불이 켜진 주방으로 들어섰다.
불이 켜져 있다는 걸 깨닫기는커녕 주위를 살펴볼 여력도 없이, 그저 비틀 비틀 걸어 들어가 자동적으로 냉장고문을 열고 컵에 따르지도 않은 채 병째 들고 꿀꺽 꿀꺽 마셨다. 다 마시고 난 후에는 잊지 않고 버릇대로 캬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 이제 자야지, 하고 병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물기에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쓰윽 하고 문질러 닦았다.
그런 다음 주방을 나올 생각이었다. 만약 그때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리 했을 것이다.
" 너어...? "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내게, 누군가의 방해는 꽤 불쾌한 것이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채로 나는 그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뚜벅 뚜벅 주방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뒤로 남자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대로 주방을 빠져나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엔 당혹감이 역력히 묻어나 있었다.
" 음? 우재혁? "
아직 잠에 취해있는 채라 그런지, 우재혁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분명 펄쩍 뛰고 놀라며, 어떡하든 그의 비유를 맞춰서 어떻게 이 곳을 나갈 수 있을까 전전긍긍했을 테지만, 지금의 내겐 우재혁을 어르고 달래서 이 곳을 빠져나가는 일보다, 일단은 잠이 우선이었다.
" 언제 왔...우아아아함-!!! ...어? "
그래도 다행히 단순한 인사말 정도는 해야겠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그를 향해 띄엄 띄엄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잠결이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리고 도중에 기나 긴 하품이 나왔지만 그도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길래 나도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가 뭔가 입을 열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잠이 쏟아져서 도무지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말을 하거나 말거나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마 그가 날 침대까지 안아 눕혀주고 간 모양인데, 다행히도 그 뒤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지난밤의 기억(잠들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르자 나는 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지난밤의 내가 얼마나 어이없어 보였을지, 아니 얼마나 때려죽이고 싶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내릴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다음날 아침 현관 앞에 얌전하게 개어진 속옷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지난밤의 행각에 대한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던 내겐, 조금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 트렁크와 러닝셔츠만은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다행이다 싶었다.
" 에- 에- 에- 에취이-!! "
코끝이 근질근질 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딱히 감기에 걸렸다기 보다 누가 내 욕을 몰래 할 때 나는 그런 재채기 같았다.
이제 여름도 어느덧 끝자락에 들어서고 있었다. 달력이 없어서 날짜개념은 없었지만 비가 오지 않음에도 해질 녘이면 쌀쌀해지는 공기로 인해, 내가 모르는 밖은 이미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고층빌딩, 그것도 맨 꼭대기 층이라 아래로 보이는 건 개미보다 더 작은 사람들뿐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좋았다.
할 일이 없으니까 이것 저것 생각하는 일도 많아졌다.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고, 또 텅 빈 거실에 앉아 혼잣말을 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바보같이 대답해 줄리 없는 벽에 대고 혼자 웃고 떠들며 어릿광대 흉내내는 것도 지겨워져 버렸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엔 꼭 신파극이 되어버려 혼자 질질 짜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꼴사나운 일인지라 나중엔 혼잣말하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
창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부끄러운 모습의 날 엄마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 그것도 곧 그만두었다. 그래서 마지막엔 줄창 개미떼 같은 사람들만을 구경하게 되어버린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 동안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 허덕이며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것보다 지금 이 생활이 훨씬 낫지 않느냐고- 조금 따분하긴 하지만 지난날에 비하면 천국 같은 생활이 아니냐고- 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그래도....
쓸데없는 자기합리화.
오늘도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겹겹이 둘러쌀지....
예전에도 그리 좋아했던 건 아니었지만...점점 내 자신이 싫어진다.
저녁이 되자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정말 감기인가 싶어 내가 내 이마를 짚어 열을 재봐도 알 도리가 없다. 옷이라도 껴입으면 괜찮을까 싶어 러닝셔츠를 몇 겹으로 껴입었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저녁준비를 하기도 전에 그대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식사준비를 해야지 했는데, 까무룩하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무울, 하고 웅얼거리자 차가운 것이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목구멍이 마치 불에 데인 듯 뜨거워서 금방이라도 타죽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조금이나마 열을 식혀주었다.
열리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자 뿌연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석영아, 하고 누가 불렀지만 확인하기도 전에 눈꺼풀이 다시 닫혔다. 그와 동시에 이마에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닿았다. 커다란 손. 내 작은 이마에 열이라도 재듯 짚어주시던 엄마의 커다란 손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
" 엄마.... "
하고 부르자 차가운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죽었으니까. 분명 꿈일 거라고-. 그래도 꿈에서나마 엄마의 체온을 더 느끼고 싶어서 눈물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을 잡았다.
크고 차가운 손이 잠깐 움찔하는 가 싶더니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나는 그 손을 내 이마에 올려놓고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다시 한번 엄마를 부르면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는 험악한 표정의 우재혁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갈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마치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어서, 이 녀석 이번에야말로 정말 날 죽이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겨우 그것만으로도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굳어졌다. 어느새 그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인지, 그가 내게 주는 고통을 아는 육체가 먼저 반응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나타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멀찍이 선 채로 나를 뚫어져가 바라보며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 박석영. "
그의 입술에서 나온 내 이름은 어쩐지 아주 생소하게 들려서 내 이름 같지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어놓고, 덕분에 남은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렇게 애태울까 하며 긴장하고 있는데, 정작 말을 꺼낸 남자는 언제나의 무표정으로 위장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가운 눈빛이, 비장할 정도의 무표정이, 꽉 다문 고집스런 입술이, 언제나와 같은 우재혁이란 남자인데, 어쩐지 지금은 타인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생경하고 지독히도 낯설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가 얼른 입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현기증에 한순간 머리가 지잉- 하고 울렸다. 잠자코 이마에 손을 댄 채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자, 남자가 다가와 이마를 짚고 있던 내 손을 휙, 하고 낚아챘다. 덕분에 채 가시지 않은 현기증에 눈앞이 뿌옇게 보여 잠시 몸을 가누지 못 할 만큼 비틀댔다.
그런 나를 덩치 큰 남자가 마치 아기를 품에 안 듯 안아, 다시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주었다. 그리고 이마를 짚어보더니 아직도 열이 있군, 좀 더 누워있어, 하고 들리지 않을 정도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뭘까, 하고 나는 의아했다. 내가 아파서인지 이상하게 상냥한 건 알겠는데, 그런데도 좀 체 알 수 없는 놈의 심중하며, 왠지 모를 이 위화감은 대체 무엇인지...그 동안 그에게 당한 그대로 그의 인상이 굳어져 내 머릿속에 각인된 까닭인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의 우재혁은 훨씬 다정하고 친절한 녀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입장과 녀석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은 상당히 이상한 제스처였고, 나의 과대망상이 절대 아니었다. 확실히 얼마 전부터 놈은 조금 이상했다.
" ...할 말 있어? "
여전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남자가 답답하기도 하고, 이대로 나가버릴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해서, 일단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약간 싸늘한 어조로 튀어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듯 여전히 변함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속내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그 눈빛에 입안이 타 들어가는 듯 했다.
"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애매한 대답에, 일순 맥이 탁 하고 풀려버려 나도 모르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순간 그의 눈썹 끝이 활을 튕기듯 올라가, 그러잖아도 웃으면 제법 볼만하지만 무표정일 땐 사람 하나 때려죽일 것 같은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보여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런 나의 작은 변화조차 놓치지 않고 주시하던 그의 눈이 마치 탐색하듯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마치 유혹하듯 귓가에 잔잔하게 울리는 낮고 고요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 ...두려운 거냐? "
" ? "
" 큭! 난 또, 네가 너무 태연자약해서 너 같이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는「밑바닥인생」은 두려움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았지. "
조롱하는 듯한 어조. 그의 목소리에 일순 넋이 나가버린 내가 바보 같다고 느낄 만큼 정신이 확, 하고 들 정도의 조롱 섞인 어조, 그는 예의로라도 그 어조를 숨기지 않고 마음껏 쏟아냈다.
분명 녀석은 날 비웃고 있었다. 이 곳에 갇히고도 모자라 아무런 반항조차 못하는 병신 같은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 불만이 있을 리가 없겠지. 생각해보면 밖에서의 벌레 같은 네 인생보다 훨씬 편하고 몇 배는 나을 곳 일테니, 애초에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얌전히 있는 거 아닌가? 머리만은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너이니...그 정도 계산은 머릿속에 하고 있을 테지. "
" ....... "
" 너무 적응을 잘 해서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재미가 없더군. 난 좀더 네가 반항해주길 기대했는데 말야. 아니면 그 보잘 것 없는 목숨이라도 끊어서 날 기쁘게 해줄 줄 알았지. "
" ....... "
" 철저하게 짓밟고 벌레 취급하면 자기연민에라도 빠져서 난 네가 죽을 줄 알았다. 발가벗겨 놓으면 수치심에라도 손목을 긋는 성의라도 보일 줄 알았지. 그것조차 네 끈질긴 목숨에 비할 바가 아니라면, 지겨울 정도의 고독을 맛보게 해주면 혹 죽는시늉이라도 할까 했지. 그런데 너는 그런 프라이드조차 없는 모양이야. "
" ....... "
" 나는 그래도 네가, 싫어하는 인간의 밑에 깔린 채 밥 버러지처럼 그런 놈 밑에서 기생하는 것에 조금은 수치심에 괴로워 할 줄 알았더니...내가 너를 너무 과소평가 했나? "
" ....... "
할 말을 잊어버린 건가, 이 경우는? 아니면 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 해야할까?
재혁의 말은 나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던 것이라 나는 감히 그의 말에 입도 뻥끗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너에겐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음 했겠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녀석인데, 자신의 손은 더럽히기 싫고...이런 곳에 가둬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기다렸겠지.
그런데 어쩌냐, 우재혁? 너의 말대로 너는 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는 걸. 이 정도로 죽을 나였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야.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의 존재조차 거부하고 우리들을 버린 그 날, 혹은 증오해야 마땅한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했다고 말하며 어머니가 죽던 날 밤, 난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아니면 가난에 허덕이다 못해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목숨을 연명하던 그때 죽었어야 할까? 이도 저도 아니면 대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창녀처럼 몸을 팔던 그때 죽었어야 했을까?
미안하지만, 우재혁. 나는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하지만 나의 그런 마음을 애써 말로 설명하진 않았다. 그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 했을 뿐더러 일부러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나만의 치부였고, 무덤까지도 짊어지고 가야 할 나만의 짐이었다. 굳이 나의 약점을 드러내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진 않았다.
" ...왜 아무 말도 않지? "
그는 내가 반박이라도, 하물며 변명이라도 하길 기대했던 건가? 무표정에서 조금 더 화가 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자리잡았다. 그것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 아니면 감지하지 못 할 아주 미묘한 감정변화였기에, 딱히 그의 얼굴에 나 화났소, 하는 표정은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화가 났다고 짐작했다. 이제는 그의 아주 작은 감정 하나 하나에도 나의 시신경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 인정하는 건가, 스스로가 벌레라고? 밥 버러지처럼 기생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거냐, 지금? "
남자는 잘도 아무렇지 않게 내 심장을 찢어 발겨놓고 있었다.
" 내가 굳이 인정하지 않아도, 네가 그렇게 생각하잖아, 나를......읏?!! "
툭 내뱉은 말에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세게 뺨을 얻어맞았다.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 하고 일었다. 그러잖아도 어질어질한 머리가 그 충격으로 획 돌아버렸는지, 잠시 기묘한 패닉상태가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 너...사람을 아주 환장하게 만들어. "
하고 그가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그리고 그 커다랗고 우악스런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자신을 향하도록 고정시켰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를 봐, 라고 명령하면 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그의 말에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다면 육신이라도 아프게 할 요량인지,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지독하게 내 턱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파서 앗, 하고 비명을 토해내자 그제야 희열감에 가득 찬 만족스런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 그렇게 애써 내 화를 돋구어봤자, 네게 돌아갈 이득 같은 건 전혀 없을 텐데? 아니면 내 손에 죽고 싶은 거냐? 그래서 일부러 나를 자극하는 거냐, 박석영? "
자극이라고? 내가? 널? 설마...그 정도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 그래, 실컷 나를 자극해봐라. 그럼 알아? 생각보다 훨씬 빨리 네게 질릴지...질려서 너를 놔주게 될지.... "
" ?!!! "
놀란 내 두 눈과 마주치자, 그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턱을 아프게 움켜쥔 채로 말캉한 자신의 혀를 우악스럽게 내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치 입안에 있는 타액이란 타액은 모조리 빨아먹을 속셈인지, 그의 혀가 거칠게 내 입안을 헤집어놨다.
" ....허억!!! "
입안을 가득 메우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한꺼번에 공기가 폐 깊숙한 곳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것은 꽤나 고통스런 감각이라 나는 어쩔 수 없는 고통에 한동안 헐떡여야만 했다.
채 닦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볼썽사납게 흐르고 있었지만, 그런 자각조차 없이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악당 같은 표정으로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 놔준다는 말이, 그렇게 솔깃했나? 그 동안 다 죽어 가는 표정만 짓던 주제에, 너답지 않게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눈까지 빛내더군. "
그가 자신의 입가에 흐르는 타액을 혀끝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게 잘생긴 그의 얼굴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빌어먹게도 색스럽게 보여,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침 삼키는 민망스런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목 울대를 울리며 보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지독하리 만치 차가웠다.
" 안달하지 말라구. 네가 나를 싫어하는 만큼 나도 너를 싫어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네 안은 맘에 들거든. 그렇다고 너를 기분 좋게 할 생각은 없어. 어쨌거나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 넌 벌을 받고 있는 거니까. "
하고 말하며 내 팬티를 무릎께까지 한번에 벗겨내더니 곧 지퍼만을 열고 아무런 전희도 없이 어느새 커져버린 자신의 분신을 삽입시켰다. 그것은 말 그대로 쑤셔 넣는 행위라, 귀두만 살짝 들어갔을 뿐인데도 나는 고통에 몸서리쳐야만 했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삭이며 숨을 고르고 있자, 그의 것이 막무가내로 쑤시고 들어왔다. 비명소리가 차마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목 언저리에 걸려 기묘한 신음소리를 만들어냈다.
" ...크헉!!! "
한번에 밀고 들어온 그것이 또 한꺼번에 쑤욱, 하고 빠져나가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몸이 전율하듯 떨렸다. 덕분에 고통을 참기 위해 꽉 다문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었는지 알싸한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허리가 둥글게 말아 올려졌다. 그러잖아도 힘이 하나도 없는 몸이 그를 힘겹게 받아들이느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으스러져 버릴 것 같은데, 누군가 허리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는 듯한 고통에 딱 까무러칠 것 같은데, 그는 일체의 배려도 허용치 않고 또 한번에 내 안을 침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내장 끝까지 자신의 페니스를 박아댔다.
" 흐읏!!! 너무...읏...아팟...재, 혁...?!!! "
참지 못하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사정해볼 요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더 거칠게 피스톤 운동을 해오는 바람에 너무 아파서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거라곤 쉭쉭, 거리는 불규칙하고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역시 입구가 찢어졌는지, 그가 사정을 끝내고 나가는 그 잔잔한 주름들에 쓸려 그 곳이 무지하게 아파 왔다.
흠칫 흠칫 떨며 윽, 윽, 거리는 신음을 토해놓자, 그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어땠는지 다시 커져버린 그의 것이 입구를 찔러와서 순간 소스라치지 놀라고 말았다. 그럼에도 애널은 그가 쏟아낸 애액을 찔끔거리며 그 커다란 불기둥을 담기 위해 멋대로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양새에 그가 킥킥거리자, 순식간에 온 몸이 벌개져버렸다. 수치심에 두 눈을 질끈 감자, 처음보다 조금은 수월하게 그의 것이 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아파서 앗, 하고 비명을 토해냈더니 그의 입술이 덮쳐왔다.
" 흣...흐읏...흐, 흐읏.... "
집요하게 한 곳만으로 찔러오는 남자로 인해, 흐느낌 같은 신음이 쉴새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고통에 눈물을 질질 쏟아내면서도, 점점 머릿속을 장악해오는 지독한 쾌감에 몸서리치며 흐느껴야만 했다. 어느새 흐느낌은 저절로 신음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조금만 더 하면 끝이 보일 듯한 그 순간에 일순 그의 피스톤 운동이 멈추었다. 분명 의도적임이 분명한데, 그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겠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뇌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애원하듯 흐느적거리며 꼴사납게 멋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 순간 그의 픽, 하는 웃음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그가 지분거렸던 그 곳을 찾아 허리를 흔들었다.
" -하앗!!! "
그 곳이다!!! 하고 생각한 순간, 허리가 튕겼다. 온 몸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정도의 지독한 쾌감에 순식간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흔들리는 의식 속에 쾌감만을 좇아 온 몸을 내맡겼다.
벌을 주는 건데 느껴버리면 어쩌겠다는 거냐, 멀어지는 의식 속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또 그가 말했다. 역시 창녀의 자식답군, 이라고.
" 뭐...? "
하고 묻자, 곧 입맞춤으로 입을 봉쇄 당했다. 더 이상은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자, 당연한 듯이 나는 지독한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허리를 관통하는 고통에 잠시 숨을 헐떡이며 그대로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 멋대로 느끼고 멋대로 반응하고 또 멋대로 엉덩이를 흔들어버린 나는 미쳤던 게 분명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하고 또 멋대로 자기합리화를 해버리고 겨우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몸을 맡기고 있자, 조금은 머릿속이 맑아져 왔다. 지금이라면 조금이라도 그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생각, 이란 걸 말이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내고 거실로 나오자, 깜깜한 주방에서 뭔가 규칙적으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게 뭔가 해서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못한 휴대폰이 놓여져 있었다.
우재혁이 놓고 간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재빨리 폴더를 열어 번호를 누르자, 이상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메시지만이 떴다.
그럼 그렇지, 하고 우재혁이 허술하게 휴대폰 따위나 떨구고 갈 녀석이 아니지, 하고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저만치로 밀어놓았다.
다음날 우재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 꼬박꼬박 전화 받아. "
하고 그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이 그대로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마치 감시라도 하듯 하루에 한번, 혹은 아침저녁으로, 그에게서 꼬박꼬박 전화가 왔다.
후에, 그것이 내가 또 아파서 쓰러져 있을까봐 염려한 그의 나름대로의 배려나는 걸 깨닫고, 병 주고 약주는 건가 싶어 나는 홀로 쓴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휴대폰 하나가 놓여져 있고 나는 몇 시간 전부터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에게 전화가 오는 것은 이맘때 즈음, 햇살이 점차 수그러들고 하늘이 붉게 타오를 저녁 무렵이었다. 아마도 학교에서 나올 즈음이거나 집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받은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게 전화를 했다. 솔직히 통화라고 해서 긴 대화를 했다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등의 것이 아니라 주로 그가 말하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식의 통화였고, 나는 처음 일주일정도는 아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게 화가 나서 하루는 전화를 받자마자 여보세요, 도 하기 전에 내가 일방적으로 이것저것 갖다대며 실컷 퍼부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몰아쉬려고 말을 멈춘 순간 이미 전화는 끊어져 신호음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착 가라앉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저음으로, 다시 한번 그런 식으로 전화를 받았다간 당장 휴대폰을 박살내버리겠다고 그가 협박조로 잔뜩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나는 할 수 없이,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다신 안 그럴 게,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 낮아질수록 더 무섭게 들려서 그 순간 내가 쫄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대답했지. 하지만 처음부터 내겐 선택권 따윈 없었다. 나는 그가 명령하면 무조건 YES를 토해낼 수밖에 없는 신세일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후, 그는 웬일로 오랫동안 침묵하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더니 예상치 못한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 뭐 필요한 거 없어? "
순간이지만 이 자식이 술에 취했나, 하고 나는 의심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그런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왜...왜...? "
놀랍고 또 당황스러워서 나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 ...필요 없는 거냐? "
" 아, 아니!!! "
그대로 그가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초조해져서 황급히 대답했다. 덕분에 목소리가 약간 떨리게 나왔다.
" 사...사주려고? "
혹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에 굳이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전화를 끊지 않는 걸로 봐서 그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럼, 담배!!! "
별로 고민하지 않고 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알았어, 란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저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떨어진 식료품에 대해 물어본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순식간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어쨌거나 그는 강자요, 하는 약자였으니 말이다.
" -쿡! "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나는, 그의 웃음소리에 이내 어리둥절하기 시작했다. 웃어? 아님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곧 그의 언제나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 왔다. 역시 그 웃음소리는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 담배라...난 TV니 VTR이니 아니면 하물며 카세트나 책 같은 좀더 그럴듯한 걸 말 할 거라 기대했는데...언제나 내 예상을 깨버리는 박석영군이로군. 뭐, 그 점이 질리지 않아서 좋지만.... "
대충 의미는 알겠지만 왠지 바보취급 당한 것 같아 조금 화가 나려했다. 게다가 질리지 않아서 좋다고? 내가 장난감이나 니네 집 애완동물인줄 아냐, 하고 퍼부어 주고 싶은 걸 입술을 지긋이 깨무는 것으로 참아냈다. 일단 담배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 좋아. 내일 필요한 물품과 같이 보내지. "
다행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모양인지 그는 순순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회색깔의 연기가 공중에서 퍼졌다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매캐한 연기를 폐 속 깊이 들여 마셨다. 그러자 목 안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가 다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니코틴의 향이 기분 좋은 울림으로 뇌에까지 전달되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한 대를 다 태우고 필터만 남은 부분을 빈 접시에 비벼 끄자, 창 밖으로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실 중앙에 놓여있는 휴대폰은 아예 울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화해주지 않는 건가, 하고 딱히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공기 속에 길게 연기를 토해내며, 나는 그대로 뒤로 벌러덩 들어 누워 버렸다.
휴대폰을 받고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딱히 그가 걱정되는 건 아니라고 폐부 깊숙이 연기를 담아내며 생각했다. 그에게 사고라도 나면 나는 영원히 혼자였다. 혼자일 뿐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어갈 것이다. 그 생각에 잠시 어깨를 흠칫 떨었을 뿐, 곧 그것도 무감각해져 갔다.
나는 그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그가 필요할 뿐이었다.
감금 당한지 석 달째, 점점 익숙해져 가는 이 현실 속에서 그는 단지 나의 필요충족을 채워주는 존재일 뿐, 그리고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점점 내가 생각하는 증오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그에게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서인지, 나를 안아 올리는 지극히 조심스런 움직임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주위는 새까만 어둠 속이었고 그렇게 전화를 기다리다 거실에서 깜빡 잠이 든 나를 우재혁이 안아서 침실로 옮겨주고 있었다.
그 순간 깨어있다는 걸 알리고 왜 전화를 하지 않은 건지 물어야지 했다가, 곧 생각을 바꾸었다. 깨어있는 걸 알게 되면 분명 날이 샐 때까지 그에게 시달리게 될 게 뻔했다. 일부러 알려서 몸을 혹사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를 눕혀주고 이불까지 덮어준 남자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상태였지만 얼굴에 닿는 그의 시선으로 알 수 있었다. 혹 깨어있는 걸 들킨 게 아닐까, 하고 긴장했지만 내 염려와는 상관없이 그는 곧 방을 나가버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살짝 열려진 문틈사이로 빛줄기가 새어들고 있었다. 그 빛줄기가 침대를 가로질러 길게 선을 만들었다,
뭘 하는 걸까, 하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달그락 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저녁도 준비하지 못했는데...냉장고에 밑반찬과 점심때 먹다 남은 김치찌개가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설마 그걸로 밥을 먹으려는 건가하고 문틈사이로 내다보고 있자니, 정말 그가 식탁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었다.
요즘엔 일주일에 6일은 여기에서 저녁을 먹고 가긴 하지만 나라면 밖에서 뭐라도 사먹을 텐데- 그는 진득하게 앉아 금새 밥 한 그릇을 비워내고 있었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후다닥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뛰쳐 들어올 것만 같아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잠자코 있으려니 한동안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여전히 빛이 새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직 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대체 뭘 하는 걸까, 자꾸 조바심이 났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렸으면 하고, 정말 잠을 청해볼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고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혹여 내가 깰까싶어 다급하게 전화를 받는 약간 당황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언제나의 나직하고 고요해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싸늘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서두실 일이 아닙니다. 네,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1년이던, 5년이던, 혹은 그 이상이 되더라도 세상에는 나가지 못하게 꼭 묶어두겠습니다. 아아, 그의 측근들은 염려 마십시오. 함부로 입 놀리지 못하게 진작에 손을 써두었습니다. "
아버지...하고 통화중인 건가? 가족한테도 우재혁은 저런 말투구나, 하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어쩐지 목소리가 점점 뚜렷하게 들린다고 생각할 즈음 다시 그가 말했다.
" 한 달만 잠잠해도 언론은 금새 잊기 마련이죠.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세상의 눈이 두려우시다면 평생 묶어둘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영원히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완전히 세상과 차단시켜 버릴 수도 있습니다. "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아해하며 어둠 속에서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비웃는 것처럼 비열하게 들려서, 일순 소름이 등줄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 이쪽은 제게 맡기십시오. 아버지는 주위에 입 단속이나 철저히 시키십시오. 이 이야기가 어머니 귀에 들어가는 것은 아버지만큼이나 저도 원치 않으니까요. "
점점 그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뜻밖에도 방안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갑작스레 닥친 일에 눈을 감을 생각도 못하고 있던 나의 시야에 얼어붙을 것 같은 갈색 눈동자가 들어온 것은 그 다음이었다.
" 박석영. "
여전히 통화중인 상태에서 그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부른 게 아니었다.
" ...은 걱정 마십시오. 서류 상으로도 그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니까요. "
상대편에게 말하고 폴더를 닫는 순간까지도 그의 갈색 눈동자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혀 빈정대지 않고 무감동한 음성이 건조하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혹 잘못들은 건가 싶어 올려다본 시선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지독히 무관심한 눈이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와 주먹을 꽉 쥐자, 이젠 그 떨림이 팔을 지나 등과 어깨, 점점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갑작스런 한기가 등줄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 ...우재혁...무슨...소리지...? "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 다 쉬어빠진 목소리가 용케도 목구멍을 뚫고 새어나와 주었다. 그리고 우재혁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기대서서 끈질기게 내가 말을 끝까지 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결코 나를 비웃지 않고 대신에 마른 장작같이 바짝바짝 마른 건조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 네가 들은 대로야. "
겨우 그 말뿐, 재혁은 그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그의 천연덕스러움 때문인지, 왠지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덕분에 떨려오는 몸을 두 팔로 감싸며 애써 태연을 가장해 말했다. 그럼에도 목소리에 엷게 떨림이 묻어났다.
" 난...너처럼 머리가 좋지 못해서...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어. 그러니...귀찮겠지만 네가 친.절.히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
" 설명할 것도 없이 정말 네가 들은 대로야. 방금 네가 들은 대로 넌 이미 서류 상으론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 인간이고, 어느 분의 부탁으로 너를 이곳에 감금한 거지. "
" ......!!! "
" 설명 따윈 필요 없어. 의미는 네가 알아서 생각하면 돼. "
" 무슨...? "
"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중요한 것은 네가 서류 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아니야. 아니, 그 사실이 네겐 중요하겠지만 내겐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 "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멍하니 있자니, 그는 제멋대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 중요한 것은 네가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이지. 알아듣겠어? 이제 넌 내 손을 벗어나선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
" -!!! "
" 이미 서류 상으론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니 여기를 벗어나서 살아갈 수는 없겠지. 만약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조차 너는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거야. "
" ......!!! "
떨리던 심장이 흡사 번개라도 맞은 듯, 분노로 터져 버릴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활활 타서 재로 변해버릴 것 같은데, 남자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마치 책을 읽어내려 가듯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그의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은 걸 애써 눌러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정말 이것이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의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었나? "
" 개인적인 원한이라...너무 까마득해서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군. 혹여 네가 기억해내면 모를까.... "
점점 말 길을 흐리던 남자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아예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내 반응을 기다리는 듯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듯한 남자의 눈이 날 향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나는 까마득히 몰랐을 사실들을, 우재혁은 너무도 태연히 우연을 가장하여 일부러 내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고 또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마치 나를 화나게 하려는 듯이.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즐기려는 듯이.
며칠 전에도 그랬었다. 일부러 내 속을 박박 긁어놓는 말들만 꺼내 나열해 놓더니, 내가 반응하지 않자 대놓고 분풀이를 해댔었다. 그렇다면 분명해졌다. 우재혁은 일부러 내 화를 돋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최악의 남자였다, 우재혁은.
지금 이 상황이, 내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고 미친놈처럼 난리를 피워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자 활화산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가 조금은 수그러들고 좀더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이라면 내 속이 썩어 문들어진다 하더라도 절대 화 따윈 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 인생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더러운 생쥐 꼴이라 할지라도, 비록 그의 아래 깔려 신음하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아니, 그에게 깔리는 것보다 더한 수모를 당했다 할지라도, 절대 그가 즐거워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리라!!!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살짝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남자가 그런 나의 반응을 놓칠리 없었다.
일순 그의 한쪽눈썹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내 표정에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내 뇌수를 파헤치고 온몸을 휘감는, 그 뜨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그 눈길을 피한 것은 나였다.
" ...더 이상 묻지 않는 군. "
나직한,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런 음성으로 그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반응하지 않자 여전히 그 시선을 거둬들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 언제나 내 예상을 깨버리는 박석영군이로군. 조금 더 날뛰어서 나를 즐겁게 해줄 줄 알았더니...왠지 샴페인을 퍼뜨리기도 전에 김이 팍 새어버린 기분이야. "
노골적인 표현이 맘에 들지 않아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하고 일그러뜨렸다가 얼른 표정을 굳혔다. 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애써 입에 담아 그를 즐겁게 해주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질릴 정도의 침묵에 먼저 손을 든 건 우재혁이었다.
"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냐? "
" ....... "
" 내게 묻는 게 싫어서 일부러 묻지 않는 건가? 아니면, 내가 말 할 진실이 듣고 싶지 않은 거냐? "
" ...둘 다. "
그를 힐끔거리며 썩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자, 내 답이 의외라는 듯이 그의 눈썹 끝이 활시위를 당기듯 보기 좋게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 이런...네 의문을 풀어줄 생각 따위 전혀 없었는데, 어쩐지 생각이 달라지는 군. "
여전히 문가에 선 채로 그가 말했다.
그런 그를 힐끔거리자 내 시선을 똑바로 직시하는 그의 갈색눈동자가 보였다.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은 지독히도 차가운 그 눈빛에 순간이지만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선을 똑바로 응수하며 그가 계속 말을 이어주기를 기다렸다.
" 난 이런 식으로 서두를 꺼내놓으면 네가 알아서 달려들 줄 알았는데...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지? 넌 알고 싶지 않은 거냐? 네가 여기에 왜 갇혀 살아야만 하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은 거냐? "
" ...알고 싶어.... "
진심이었다.
하지만 탁 까놓고 얘기하자면, 나는 그가 꺼내놓을 '진실'이 두려웠다. 그 진실이 내 심장을 옭아매고 내 목을 조여올까 봐, 그래서 끝내는 이미 쩍쩍 벌어져서 곪아 가는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않을까 봐, 그리고 그 상처를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다시 파헤치게 될까 봐,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그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바엔 영원히 '의문'으로 남겨두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편했다. 혹자는 이런 나를 비겁자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비웃음을 감당하고서라도 내 자신이 침몰해 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리고 곤두박질 치는 나의 처절한 모습 따위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험은 한번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 보이지 않게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 하지만 나는 견뎌낼 자신이 없으니 일찌감치 패스-. "
" 겁쟁이로군. "
" 맞아. "
하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 나도 인간인지라 때론, 너에게 함부로 다루어지고 아무렇게나 취급되어지는 거, 마치 너의 물건이 되어버린 듯한 내 존재가, 불쾌할 만큼 수치스럽고 미친 듯이 화가 날 때가 있어. 그렇지 않는 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워낙에 태평한 성격일지라도 말이야. "
" ....... "
" 하지만 역시 태평한 성격에 여기저기 막 굴러먹던 인간이라 그런지, 이 생활도 그럭저럭 살만해지긴 하더군. 그리고 가면 갈수록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리기도 하고. 이런 내가 말이다, 어찌보면 참 짜증나는 성격인데도, 또 한편으론 참 편리한 성격이라고 생각하거든. "
" ....... "
" 분명 난 너에게 피해를 입혔을 거야, 솔직히 네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지금도 생각은 나지 않지만 말이야. "
" ....... "
" 따지고 보면 나라는 인간, 먹고살기 위해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뭐든 하는 녀석이거든. 그로 인해 아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와중에 네게 피해를 입혔겠지. 아니면 네가 화를 낼만한 어떠한 일을 저질렀거나. 뭐, 대충 그럴 거라 생각해. 난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
" ....... "
" 그러니 네 화가 풀릴 때까지 나를 어떻게 다루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용서를 구해도 넌 나를 용서할 생각이 없고, 네가 기대한대로 나는 전혀 자살할 생각도 없거든. 뭐, 도망치는 건 무리니 그건 일찌감치 포기했고. "
" ....... "
" 게다가, 이 상황에서 이유 따위를 안다고 해서 네가 날 놓아줄 건 아니잖아, 안 그래? "
" ...훗! 그렇지. "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한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주제에 한쪽 입꼬리만을 올려 웃는 폼새가 비윗장이 팍 하고 상했지만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그래, 즐겁게 해줄 줄 알았던 장난감이 제 손 위에서 놀아주지 않으니 화가 난 거겠지. 게다가 내 화를 돋굴만한 어머 어마한 패를 손수 준비해 오셨는데 나라는 인간은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고. 거기다 보란 듯이 떠들어대기까지 했으니, 내색은 안 해도 대단히 화가 나있겠지, 우재혁.
그런 의미에서 우재혁은 나라는 인간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나는 도발에 넘어갈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막 굴러먹던 놈이라 나름대로 내 몸 하나 사릴줄은 알았다.
어쩌면 우재혁은 내가 가난해도 자존심하나는 굳건히 지키고 사는, 그런 나름대로 대단한 놈이라 생각한 모양인데, 난 내 목숨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 버리고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 있는 남자였다. 자살 따위, 개한테 주라 그래. 자살할 바엔 평생을 갇혀 지내도 목숨이 붙어있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것이 이제껏 이 험난한 인생에서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 어떤 식으로 괴롭혀도 절대 상처입지 않는다...라 이 말이지...확실히 벨 꼬이게 만드는 인간이로군, 너란 녀석은. "
" ....... "
" 수치심을 자극해도 태연하고 말이야. "
" ....... "
" 어쩐지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박석영이란 존재는 내 멋대로 그려놓은 상상화 같단 생각이 드는 군 그래. "
" ....... "
" ...너 원래 그런 녀석이었나? "
" ....... "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에 잠깐이나마 미소가 그려졌다 사라졌다. 분명 기분 나빠야 마땅할 터인데 남자는 흥미로운 눈길로 날 바라보며 은근히 즐거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아니면 저것도 날 화나게 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 중 하나일까? 하고 생각이 든 나는 일부러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비굴한 인생이라도 내 나름대로 지고싶지 않은 오기였다.
" 뭐, 네가 어떤 녀석이든 상관없겠지. "
재혁은 내 대답 따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 앞으로 너를 알아갈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알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비웃음이나 억지로 비틀려 짓는 웃음 따위가 아니라, 순수하게 즐거워서 짓는 그런 웃음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사심 없이 웃는 남자의 얼굴은 어쩐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것 같아, 나를 조금 놀라게 했다.
그 뒤로 남자는 저녁때가 되면 잊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와 이 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그럼 나는 마치 퇴근하는 남편을 맞는 새댁 같은, 상당히 복잡 미묘한 기분이 되어 그를 위한 식사를 준비해놓고 그를 맞이했다.
그는 내가 설거지를 끝내길 기다렸다가 마치 신혼부부라도 되는 듯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처음엔 갑작스런 그의 포옹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는데, 이제는 적응이 되어버렸는지 그게 당연한 하루의 일과처럼 여겨졌다.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마치 음미라도 하듯 한동안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는 살짝살짝 허리가 튕길 정도의 은밀한 애무를 하곤 했다.
우재혁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가끔 심각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것이 녀석이 말한(아마도) '나를 알아 가는' 한 종류일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고민해봤자 이유 따위 짐작조차 하지 못할게 뻔했고 어쨌든 녀석이 싫증나기 전까지 녀석은 이 행위를 멈추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녀석은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애무에만 매달린다. 그러면서도 요령 좋게 내 옷을(비록 속옷뿐이지만) 하나하나 벗겨나가고, 다 벗겨내고 나서야 겨우 나를 안고 침대로 이동했다.
애무에 걸신들린 듯한 그의 행위는 침대에서도 이어졌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우재혁과는 너무 판이하게 다른 행동이어서, 나는 문득 이 녀석이 정말 제정신인가 하고 가끔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있다.
내 몸이 기억하는 우재혁과의 섹스는 언제나 고통뿐이었다. 마치 내게 고통을 주고, 나를 괴롭히기 위한 그런 행위같이. 그는 끊임없이 내 안을 휘젓고 나를 거칠게 안고 수치심을 자극할 정도로 지독하게 나를 유린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재혁은, 억측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흥분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분명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핀잔을 주겠지만, 그런 말밖에 지금 우재혁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내게는 없었다.
매일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남자는 가끔 이 곳에서 식사를 하고 섹스를 하고, 그리고 자고 가기도 했는데, 그렇지 않을 땐 꼬박 꼬박 전화를 해서 자신의 사정을 알려주었다.
또 이상한 점은 늘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남자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우재혁은 마치 대화라도 하려는 듯 전화를 할 때면 내게 이것저것을 묻곤 했다.
대게 필요한 것은 없느냐,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 하는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그래도 재혁은 통화를 할 때면 늘 물어봐 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것이 한도 끝도 없어서 가끔 그와 내가 어떤 상황에 있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된 듯 그와의 대화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나갔고 내가 묻는 질문에도 친절히 답해주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 상으로 시시콜콜한 것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할지라도, 막상 얼굴을 맞대게 되면 그는 어쩐 일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도 얼굴 한 번 쳐다봐 주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을 하더니, 내가 말을 걸어볼라치면 그저 딱딱한 단답형의 대답만을 해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 나도 그의 앞에선 아예 입을 열지 않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면 그는 어김없이 나와 섹스를 하곤 했지만, 그가 아예 이 집에 들어와 살다시피 하게 된 후부터는 더 이상 섹스에만 연연하지 않았다. 종종 책을 읽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레포트를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인가(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안 쓰는 방 하나에 컴퓨터와 책장, 책상을 차례로 들여놓더니, 아예 그 방을 자신의 서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엔 그 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고 나올 줄을 몰랐다.
뭘 하나 하고 그의 주위에 기웃거리다가 며칠동안은 아예 대놓고 그를 구경했더니, 급기야는 집중이 안 된다며 화를 냈다. 거기에 나도 지지 않고 심심한걸 어떡하냐고 덤벼들었더니, 웬일로 화를 내지 않고 다음 날 바로 TV를 사주었다.
그리고 TV를 보다가 그대로 거실에 엎드려 잠들어 자 버리는 일이 많아지자, 며칠 후엔 누워서 잠을 자도 거뜬할 만큼 커다란 소파도 사주었다.
어느 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려했다. 내가 난방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차라리 집에서 입을 옷을 몇 벌 사달라고 했더니, 우재혁은 정말 가지가지 했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팍 하고 일그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여지없이 손수 쇼핑을 한 듯한 종이가방을 들고 현관을 들어섰다.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인상을 팍팍 구기며 종이가방을 내미는 그가 하나도 예뻐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와 준 그가 고마워 답례로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해주고 빙그레 웃어줬다.
그 뒤로 재혁은 가끔씩 내 옷을 사들고 현관을 들어서곤 했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창 밖으로 하이얀 눈발이 춤을 추듯 휘날리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채로 마치 꿈이라도 꾸는 양 그것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입에서 와아- 눈이다,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내린 눈에 신이 나서 노크도 없이 그의 서재로 뛰어든 것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지극히 충동적인 행위였다.
" 너어...?! "
하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인상을 팍 하고 쓰며 한껏 무언가를 퍼부어 대려던 재혁은, 환하게 웃으며 "재혁아, 눈이야."하고 말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 모르게 당황하는 눈빛으로 말문을 닫았다.
얼마동안 잠을 못 잤는지 그의 눈에 빨간 핏대가 서 있고, 얼굴도 파리한 게 피죽도 못 끓여먹은 몰골로,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꼴이, 다른 사람이 봤더라면 우스꽝스러웠을 몰골이, 내 눈에만은 공포감을 조성해서 짐짓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얼른 표정을 굳힌 채 뒷걸음질치며 미안, 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나직하고 서늘한 음성으로 단지 "나가."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어서 나는 어떠한 말도 없이 후다닥 서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졸업논문 준비로 요즘 유달리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다가갈라치면 마치 전염병환자라도 대하듯 치를 떨어댔고, 어떨 땐 나의 출현자체를 꺼려하는 듯 일부러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정말 나를 피하려는 듯 화장실에 가는 걸 제외하곤 아예 서재에서 나오지 조차 않고, 식사도 내가 잠든 틈을 타 몰래 먹곤 하는 것 같았다.
저 자식이 왜 저러나 싶어 처음엔 의아해 했다가, 나중엔 왠지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그의 서재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거나 내겐 그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게 편했고, 덕분에 그의 잠자리 상대를 하지 않은 채 여유로운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주일의 금욕생활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그가 초저녁부터 날 덮치다시피 안은 건 엊그제의 일이었다. 꽤 오랫동안 참아서인지 한 번 분출하고서도 그의 욕망은 내 안에서 식을 줄을 모르고 단번에 자신을 드러냈다.
다시 커져버린 그의 것이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자, 이 주일의 공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의 애널은 빡빡하게 그의 것을 조여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서운 속도로 팽창해버리는 그의 것에 적응하지 목하고 기어이 출혈사태를 낳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분명 피가 흐르고 있음이 역력한 좁은 구멍 안을 이성을 잃은 듯 거칠게 쑤셔왔고 기절조차 하지 못한 나는 고스란히 전해지는 고통에 그저 끅끅, 거리는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의 사정 후에야 그는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피스톤 운동을 멈추었다. 여전히 내 안을 가득 채운 그것이 다시 팽창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나는 재빨리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제발 천천히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럼에도 피스톤 운동을 시작해버리는 그가 야속해 나는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려 버렸고, 잠시 후 그는 부드럽게 내 등을 쓸어주며 미안, 하고 사과해 왔다. 그리고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자신의 페니스가 꽤나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그는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나를 보듬어 안은 채 가끔 귓가에 나직한 어조로 괜찮아, 하고 속삭여주며 나를 달래주었다.
울음을 터뜨려 버린 게 대단히 창피하다고 느낄 즈음, 그가 해도 돼,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내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더니, 그는 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는 답례로 환한 미소와 함께 넋이 나갈 만큼 감미로운 키스를 퍼부어 주었다.
행위를 마친 후에 그는 참고 있다, 라고 말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내 이마와 관자놀이, 눈꺼풀과 콧잔등에 차례차례 입맞춤하며 널 보면 그 자리에서 쓰러뜨려 안고 싶은데 한 번 안으면 도저히 자제가 되지 않는다, 고 덧붙였다. 그리고 입술에 몇 번이고 베이비키스를 하며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오면 참을 수 없게 된다, 이 주일 동안 참는 게 너무 힘들었다, 고 마치 거짓말처럼 고백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남자는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빙긋이 웃으며 그러니 논문을 마칠 동안엔 절대 내 근처엔 얼씬도 말라, 고 당부하곤 내 입안으로 말캉한 혀를 밀어 넣었다.
다시 커진 그의 욕망이 허벅지를 찌르자 당혹해하며 어떨결에 그를 밀어버리자 씨익 하고 악당 같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거기에 대고 방금 전에도 마지막이라고 해 놓구선, 하고 대꾸하려는 걸 그의 입술이 덮치듯 키스해오는 바람에 그대로 삼켜지고 말았다.
결국 다시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욕실에서 또 한번 행위를 치르고서야 그는 아쉬워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덧 햇살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고 씻고 와서 한번만 더 하자는 그를 만류하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일어나 보니 커튼 사이로 어렴풋이 동이 터 오는 게 보였다. 그대로 하루를 잠에 쏟아 부었다고 생각하며 혀를 쯧 하고 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손 빼. 감기 들어. "
그의 서재에서 쫓겨나자마자 베란다로 뛰쳐나온 나는, 유리문을 열고 차가운 공지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금새 공중에서 사라져버리는 진눈깨비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금전의 나였다면 이런 어린애 같은 생각 따윈 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란다엔 굵은 철창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는 내 팔뚝 하나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그 사이로 슬쩍 손을 밀어 넣자, 팔 하나가 그대로 빨려 들어가 듯 밖으로 내밀어졌다.
차가운 눈은 그에 상반되는 따뜻한 손바닥에 닿자마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그럼에도 그것이 신기해 추운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남자의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 문 닫아. "
대체 어느 틈에 나온 건지...내가 뽀루퉁한 표정으로 손을 거둬들이지 않고 머뭇머뭇 거리고만 있자, 그가 다시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쳇, 하고 잔뜩 불만 섞인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철창사이에서 팔을 빼내자, 그가 추위로 닭살이 오도독 돋아난 내 팔을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쓸어주며 감기 걸린단 말이다, 하고 마치 변명하듯 말했다.
" 나 눈 좋아한단 말이야. "
여전히 불만을 가득 담아 그렇게 말해주었더니,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그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아까의 딱딱한 어조와는 다르게 마치 애무하듯 귓가에 낮고 부드럽게 속삭이며 말했다.
" 눈 보러가고 싶어? "
" 응. "
" 그럼.... "
하고 서두를 꺼내놓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이로 씹고 잘근거리며 내 귀를 가지고 장난을 치더니, 내가 참지 못하고 간드러지는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자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크리스마스에 나갈까? "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 거렸다. 혹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싶어서 그의 이마에 열을 재보았더니 약간 싸늘한 체온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열은 없어, 하고 그가 쿡 하고 웃으며 말하고는 곧 나를 안고 침실로 가며 덧붙였다.
" 단,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
내 생애 최소의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내가 도망가지 않을 걸 알고 난 후엔, 웬일인지 다정해져서 가끔 나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근사한 미소를 지어보낸다거나, 폭력이나 거친 삽입으로 내게 고통으로 주기보단 마치 내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려는 것처럼 삽입보다는 애무와 전희에 오랜 시간을 들였다.
남자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남자의 태도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진 않았다. 이것도 남자의 변덕 중 하나일 거라 여기니 더 이상 의아함도 사라졌다.
나는 그의 놀이개였고 그의 방식대로 갖고 놀아지면 될 터였다. 그리고 실증이 나면 버려질 것이다. 나는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정사를 마친 후 그는 담배를 한 모금 태우고는 그걸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느새 우리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생겨버린 버릇 중 하나였다.
내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그는 나를 꼬옥 끌어안더니 한숨을 쉬듯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평소엔 지독히도 과묵한 남자이면서 유독 정사를 마친 후엔 말이 많아진다.
나는 그걸 담배를 태우며 묵묵히 경청했다.
" 나를 겁쟁이라 생각하지? "
그가 입을 연 건 필터만 남은 담배를 그에게 건네주고 그가 새 담배를 한 모금 빤 후 내게 건넬 때였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대답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픽 하고 조금은 비릿하게 웃더니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 겁쟁이 맞아. 난 세상의 눈도 두렵고 부모님에게 알려지는 것도 두렵고, 무엇보다 나를 아는 이들에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
남자의 뜻밖의 말에 팔베개를 한 채로 그를 올려다보자 눈이 마주친 그가 멋쩍은 듯 수염이 드문드문 난 턱을 어루만지며 씨익 하고 웃었다. 삐딱하게 올라간 입술 선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매혹적일 정도로 멋지다.
평소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정사 후 꺼내놓는 말이라고 해봤자 정치, 경제, 혹은 가십거리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이었기에, 웬일로 속내를 드러내놓는 남자가 신기해서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그렇게 놀랐어, 하고 물어왔다.
내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쿡 하고 웃으며 나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줘서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 내가 게이란 걸 알게 된 건 고 3때였는데, 생각해보면 상당히 늦된 편이었지. 수험스트레스로 지쳐있는 와 중에 같은 반 녀석한테 유혹을 받았어. 꽤나 생긴 게 반듯한 녀석이었는데 그렇다고 여자처럼 생긴 건 아니었고, 그냥 보통의 남자애들보다 조금 더 곱상하게 생긴 정도였지. "
재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고, 예의 그 삐딱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있었다.
" 처음엔 미친 녀석이구나, 하고 생각했어. 멋대로 덮치듯 안겨오는 녀석을 향해 생각나는 대로 폭언을 퍼부어 댔지. 나보다 몸집이 작은 녀석이라 힘껏 뿌리치면 쉽게 떨어져나갈 것 같아서 딴엔 반항도 해봤어. "
" ....... "
"그런데 나는 뿌리칠 수가 없었어. 어이없게 발정해 버린 거지. 어떤 여자를 봐도 반응하지 않던 그곳이 녀석의 애무 한 번에, 키스 한 번에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런 일은 난생처음이라 무엇보다 경악이 앞섰지. "
" ....... "
" 결국 녀석의 손에 욕망을 쏟아낸 채 도망치고 말았어. 내가 게이라는 걸 깨닫게 된 충격보다 그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그게 두려워서 도망쳐 버렸지. 그때나 지금이나 난 지독한 겁쟁이었어. "
웃으며 말했다. 마치 자신을 비웃듯 비릿한 웃음이 입가에 매달려 있었는데, 표정과는 상반되게 웃음소리는 지독히도 슬프게 들렸다. 그럼에도 아주 똑똑한 어조로, 목소리만큼은 조금도 슬프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 수험스트레스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게이가 아니고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것뿐이라고.... "
" ....... "
" 하지만 녀석이 다시 유혹했을 때, 그땐...나 거절하지 못했어. "
" ....... "
" 내겐 약점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남자와 섹스를 하고 내가 게이다 라고 깨달았을 때의 그 충격이란, 지금 생각해도 섬찟해. 그래서 더욱 완벽해져야만 했다고 생각했어. 하나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선 다른 모든 게 완벽해야 했다고,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했다고 생각했어. 너도 알다시피 프라이드보다 네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선택할 만큼, 나는 비겁한 남자이니까. "
" ....... "
"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어. 누군가를 가둬놓고 그 상대를 통해 성욕만 해결하면 그 뿐이라고. 그럼 평생 들킬 일도 없을 거라고. 내가 아무리 게이라도 남자에게 사랑이니, 진심이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고 생각했거든. "
" ...그게 나야? "
질문에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시선을 거둬들이더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웃고 있는 것도 울고 있는 것도, 그렇다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다라고 말하기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 너이기도 하고...혹은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
" 그럼 운 나쁘게 내가 걸린 거네? "
" ....... "
대답하는 대신 남자는 이마 위에 멋대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칼을 소중한 무언가를 만지듯 천천히 쓸어 올려 주었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조심스런 그 동작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내 말투에서 이죽거림을 발견한 그가 성난 황소처럼 다시 덮쳐올 줄 알았더니, 조금도 삐뚤어지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로 내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뜻밖의 남자의 행위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순간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비윗장이 팍 하고 상했다.
사랑이라니 당치도 않다. 나는 동화를 꿈꿀 나이도 지났을 뿐더러 드라마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해피엔드를 꿈꾸는 철없는 청소년이 아니다. 손익을 따질 줄 알며 누군가 내게 접근할 때는 내게 무슨 이익이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우재혁이란 남자에게서 사랑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 차라리 그에게 사랑을 얻는 것보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 너는? "
" 응? "
" 네 얘기를 듣고 싶어. "
하고 그가 답지 않게 말문을 연 건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다라고 생각했지만 애써 입 밖으로 꺼내놓진 않았다.
" 별로...할 얘기 없는데.... "
하고 나는 말문을 닫았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느 곳에나 있을법한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고, 사람들 사이에 가리워져도 전혀 눈에 띄이지 않을 만큼 존재감도 없는 그런 녀석이었기에, 특별히 나에 대해 할 말이란 없었고 그러기에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엇보다 지독할 정도로 가난한 그 집에 대해, 그리고 암울했던 그 기억을 애써 다시 꺼내 열거해놓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그래도 얘기해봐. "
화라도 낼 줄 알았던 남자는 의외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후에도 내가 입을 열지 않자, 듣고 싶어, 하고 대단히 나직하고 침착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쳇, 하고 혀를 차며 그렇게 궁금하냐? 하고 물었더니 은근슬쩍 눈웃음까지 치며 그렇단다. 할 수없이 한숨을 토해내며 말 할 테니 담배를 달라고 하자, 그가 얼른 불을 붙인 담배를 한 모금 태운 후 나에게 건넸다.
" 듣고 하품이나 하지마. 더럽게 재미없는 얘기니까. "
하고 일단 서두를 꺼내긴 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그는 차분히 내가 말을 이어주기를 기다려주었고 나는 담배연기를 서너 번 공기 중에 흘려보내고 나서야 말문을 열 수 있었다.
" 그러니까 우리 집은 빌어먹을 정도로 가난했어. 얼마큼 가난했냐 하면은 몸이 약하신 엄마가 종종 돈을 벌어오긴 했는데 그 돈은 내 학비는커녕 집세로도 모자라서 어떨 땐 이틀 연속으로 밥이라곤 구경도 못하고 맹물로 배를 채워야 했을 정도로 그렇게 가난했어.
" ...... "
" 그 가난을 견딜 수 없어했던 것은, 몸이 약한 엄마도, 나이 어린 나도 아닌, 우습게도 아버지였던 거야.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만 홀로 덩그러니 앉아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울고 있더군. "
" ....... "
" 근데 어이없게도 설마 아버지가 우릴 버렸을 거라곤 눈곱만치도 생각지 않고 어린 나이에 왜 아버지는 안 오냐며 엄마를 붙잡고 물었지. 그 사실을 안 것은 그 뒤로 일주일쯤 지나서였어. 엄마가 죽으려고 일부러 연탄가스를 마셔버렸거든.
" ......!!! "
" 병원에서 알았지. 나를 붙들고 울며 내내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어렴풋이 깨닫게 된 거야. 아아- 엄마와 난 아버지께 버림받았구나 하고.... "
" ....... "
"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어. 우는 엄마를 달래며 나는 눈앞에 닥친 병원 비를 걱정해야 했고, 생각한 끝에 전세로 얻은 집을 월세로 돌리고 일단 병원 비부터 해결했지. 그리고 죽었다 살아난 엄마가 몸저 눕는 바람에 앞으로 먹고 살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어. 9살짜리 어린아이가 말이야. "
말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시니컬하게 웃었다. 토해낸 담배연기가 공기 중에 흩어져 잔잔히 사라져갔다.
" ...원망 안 해? "
" 응? "
내내 말이 없던 남자가 입을 열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었다.
녀석에게 뭔가 관찰 당해지고 탐색되어 진다는 게 목에 가시처럼 걸려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지만, 동정 받는 것도 비웃음 당하는 것도 사양이라 으레 지었던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포장한 채 말했다.
" 내가 말했지. 나 같은 밑바닥 인생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그 시절엔 그나마 지켜야할 엄마라도 있었지만...지금은 정말 아무 것도 없어. "
" ....... "
" 내겐 원망이니 미움이니 하는 감정도 사치일 뿐이야. 그런 거 애저녁에 버렸다.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던 날, 아버지란 존재 자체를 뇌리에서 지우면서, 일찌감치 버려버렸어. "
목으로 넘어가는 담배연기가, 눈물이 핑 돌만큼 유달리 쓰고 매웠다. 젠장,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그에게 필터만 남은 담배를 넘기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순순히 담배가 매워서야, 하고 속으로 변명을 내까리며 얼른 눈물을 감추었다.
" 동정 하냐? "
이마와 머리위로 그의 위로하는 듯한 손길이 느껴지자 왠지 분한 마음이 들어 한껏 신랄하게 퍼 부어댈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전혀 독기를 품지 않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자칫하면 괜시리 풀 죽은 목소리로 들렸을까봐 그가 아니, 하고 대꾸하자 심통이 난 어린아이처럼 최대한 얄밉게 말해주었다.
" 흥, 주제에 동정은...내 보기엔 네가 더 불쌍해. 나보다 훨씬 불쌍해 보인다고, 알아? "
" 그래, 그래. "
" 그러니까 동정하지마. "
" 응, 그래, 그래. "
" 겁쟁이인 주제에.... "
" 그래, 그래.... "
전혀 화난 것 같지 않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자는 여전히 내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자존심이 상할 말들만을 골라 퍼부어 주었는데도 남자는 그래, 그래, 만을 되 뇌일 뿐이었다.
이거 자면서 잠꼬대라도 하나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남자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우스꽝스런 모습의 두 남자였다.
이틀 밤을 꼬박 샌 남자는 논문을 마치자 마자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덮치다시피 뒤에서 껴안아 왔다. 그리고 게걸스레 키스를 퍼부어 대기 시작하더니 그걸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는지 침실까지 가기도 전에 주방 한 켠에 나를 쓰러뜨리고 내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등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다짜고짜 앞치마를 들추고 셔츠를 찢어버린 남자가 그대로 유두를 입에 담아버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겁에 질려 밀쳐내자, 남자는 욕정에 젖어 묘하게 치켜 떠진 눈을 들어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묘하게 색정적인 눈빛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하고 넘어가자 킥, 하고 삐뚤어지게 웃는 남자의 시선이 불룩 솟아난 나의 목울대로 향했다. 곧 그것을 씹어 삼키려는 듯 거칠게 입에 물고 이로 잘근거리고 혀와 타액을 묻혀 정성 들여 빨고 핥아대기 시작했다.
뭔가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평소의 우재혁이 아니다. 평소 욕정을 참지 못하고 짐승처럼 덤벼들던 그 우재혁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재혁은 마치 애정을 바라고 칭찬 받기 바라고 몸을 비벼대는, 발정 난 암컷 같았다.
" 으읏...! "
참을 수 없는 신음이 꽉 다문 잇사이를 뚫고 새어나오자, 이것은 아니다란 생각에 몸을 비틀었다.
허벅지의 살들이 일제히 경련하며, 가늘게 떨리는 몸이 금방이라도 땅속깊이 푹 꺼질 것 같은, 그런 어마어마한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전히 짓꿎은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목울대에 이를 세웠다.
아찔한 아픔에 비릿한 신음을 토해내자 분명 울혈이 생겼을 법한 그 곳을 혀로 할짝이며 갖고 놀기 시작했다.
" 박석영, 알고 있지? "
" ......? "
분명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을 연 그의 음성엔 웃음기 따윈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히 낮고 불분명한 목소리에 잠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그의 혀가 목울대를 지분거리다가 쇄골근처에 또 하나의 흔적을 남기고, 다시 유두에 혀를 갖다대기 시작했다. 내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내 청각을 자극해 수치심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듯 일부러 음란한 소리를 내며 그 곳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 으, 읏...그, 그만...! "
그를 떼어내려고 내민 손을 그대로 붙잡혀 머리 위로 올려졌다. 등에 닿은 찬 바닥의 기운에 몸이 으스스 떨리고 있는데, 그의 지분거림에 다른 의미의 오한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난 너를 갖고 노는 게 즐거워. "
유두와 배꼽 사이를 오가며 타액을 묻히고 놀던 남자가 더 아래쪽으로 혀를 굴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남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지금도 그래. 난 당장이라도 네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것보다 네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는 게 더 즐거워서 참고 있는 거거든. "
" ......!!! "
" 느껴져? "
" !!! "
하고 말하며 남자의 아랫도리가 허벅지를 자극했다.
" 만지지도 않았는데 지금 네 표정만으로도 나, 금방이라도 갈 거 같거든. "
흡사 허벅지가 불에라도 데인 듯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저절로 덜덜- 떨리는 몸이 그 열기를 피해 움직일 때마다 악랄하게 쫓아와 열기를 전해준다.
싫어, 하고 도리질을 하며 몸을 비틀어 빼내려하자, 남자의 억센 팔이 다가와 허리를 강하게 안아 고정시킨다. 더 이상 움직일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감각에 숨이 막힌다. 그걸 남자는 즐기고 있었다.
" 싫지 않잖아, 박석영. "
내 팬티를 끌어내리고 분명 괴롭히는 게 분명한 손길이 은밀한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저도 모르게 허리가 바르르- 떨린다. 이러고도 싫어? 하고 남자는 나의 반응에 짖꿋게 웃었다.
남자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다가도, 때때로 심술이라도 난 듯 나를 괴롭혔고, 짖꿋게 굴다가도 마치 동정이나 위로라도 하듯 나를 품에 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것은 마치 망각한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으려는 행위 같았다. 원래 자신의 위치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고 가끔 그 사실을 잊을 때마다 그런 자신을 질타라도 하려는 듯 더 못되게 굴곤 했다.
마치 마음을 꽁꽁 싸매고 조금도 틈을 보이려 하지 않으려는 듯이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것을 우재혁 본인은 자각조차 없어 보였다.
" ...헉!!! "
일순 허벅지를 찌르는 열기보다 몇 배는 더한 열기에 숨이 막혔다. 허리가 아치형으로 꺾이면서 온 몸의 혈관이 란 혈관은 전부 터져 버릴 듯 세차게 요동쳤다.
혀의 느낌은 소름끼쳤다. 손보다 더 부드럽고, 타액으로 매끈거리고, 그만큼 강렬했다.
차마 내지르지 못한 신음이 목 안쪽으로 새된 소리를 내며 삼켜진다. 참을 수 없어 몸을 비트는데도 남자는 농후한 점막과의 마찰을 멈추지 않는다.
흣흣, 하는 흐느낌 같은 기묘한 신음을 토해내며 기어코 눈물을 떨구어내자 그제야 남자의 입이 떨어져 나간다.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흐르는 입가를 닦지 조차 않은 채, 욕정으로 탁하게 흐려진 갈색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싫었어, 하고.
색기 가득한 그 얼굴이, 땀으로 흥건한 갈색 피부가, 묘하게 매혹적으로 보여 차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재혁은 분명 잘 생긴 남자였다. 잘 생겼다는 말로는 뭔가 조금 부족했지만, 자신의 매력을 알고 그것을 십분 발휘할 줄 아는 교묘한 남자였다. 그리고 페로몬으로 상대를 유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남자였다.
그렇게 잘난 남자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색의 색정적인 입술을 혀끝으로 감질 맛나게 할짝할짝 핥으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눈가를 초승달모양으로 멋들어지게 일그러뜨리며 입 꼬리만을 올려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남자의 미소는 남자인 나의 가슴까지도 두근거리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그것은 명백한 유혹이었다.
" ......!!! "
대답하지 않자, 이미 애액으로 더럽혀진 그 곳에 가만히 혀끝을 갖다 댄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하며 허리를 움찔하고 떤다. 수치심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몸은 그에게 더 해달라고 칭얼대며 조른다.
안타까운 신음이 목구멍을 자극하고 참을 수 없는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결국 그의 입안에 걸쭉한 액체를 쏟아내고 말았다.
하아- 하고 나른하게 몸을 뉘이며 지친 한숨을 토해내자 꿀꺽, 하는 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설마- 하고 경악에 가득 차서 그를 올려보고 있노라니, 그가 입가에 묻어난 허연 액체를 손등으로 훔치며 나를 향해 보란 듯이 씨익, 하고 웃었다.
미친놈- 하고 나는 입 모양으로만 벙긋거리며 말했는데, 그가 알아들었는지 아무렇지 않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자의 행위에 짐짓 소름이 끼친다.
남자는 삽입도 서두르지 않았다. 애널 안을 충분히 시간을 들여 넓히고 또 절대 서두르지 않고 귀두 끝부터 천천히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내가 견디지 못하고 헐떡이면 잠시 멈춰주었다가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고 괜찮다 싶으면 조심스런 동작으로 움직였다.
끝까지 삽입하고 나서도 남자는 내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피스톤운동을 했다. 도중에 내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다싶으면 멈춰주었다가 괜찮아, 하고 물은 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움직였다.
머리로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상당히 엇나간 기분, 그리고 가슴을 쿵쿵거리게 만드는 위화감. 그럼에도 쾌감은 등줄기를 가르고 뇌수 속으로 파고들었다.
" 좋아? "
내가 반응한 곳만을 계속해서 찔러대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남자가 왠지 기쁜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답할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허리가 금새라도 녹아 내릴 듯 리듬에 맞추어 흔들거리는 감각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이런 강력한 쾌감은 처음이었다. 오로지 나의 쾌감만을 추구하는, 그런 행위자체가 처음이었다.
좋아? 하고 남자가 다시 물었다. 뭔가 대답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그런데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대신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에게 미친 듯이 매달리며 그의 입술 위에 입술을 덮었다.
마치 아래만으로는 이 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 다는 듯이 위쪽으로 남자의 혀가 안달하듯 얼켜왔다. 결코 부드럽다고는 할 수 없는 키스에 내가 혀를 내밀어 반응하자, 아래쪽에서의 남자의 반응이 거세졌다.
마치 나의 반응이 기뻐 죽겠다는 듯이.
그리고 그런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듯이.
뭔가 반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왠지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벽에 다 달아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 뒤로 남자의 행위는 기묘하게 비틀려져서, 마치 낯선 타인을 대하듯 달라져 있었다.
그것이 또 나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 그거 맛있냐? "
하고 남자가 물었을 때 나는 소금에 간을 하고 참기름을 발라 석쇠에 구워낸 도미구이의 살점을 발라 막 입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입안에는 하얀 쌀밥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고소한 도미구이 한 점을 넣고 맛나게 씹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막 입으로 들어가려던 도미의 허연 살점은 녀석의 엉뚱한 질문에 어이없이 허공을 맴돌고 말았다.
왜 맛없어? 하고 그가 다시 물어오자 나는 그제야 더듬거리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녀석은 수저조차 들지 않은 상태로 건방지게 팔짱을 낀 채 묘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더니, 연신 허공에 멈춰진 채 차마 입에 넣지 못하고 있는 허연 살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건가 싶어 그걸 천천히 내밀었더니 놀라지도 않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냉큼 받아먹어 버린다.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있자니 남자는 느는 건 음식솜씨 뿐이군,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녹두묵에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을 섞어 오물오물 무쳐놓은 탕평채가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이건 맛있냐? 하고 물어왔다.
이게 뭐 하는 시츄에이션인가, 머리가 깨닫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녀석의 입 앞에 묵을 집어 내밀고 있었다.
그걸 또 낼름 받아먹은 남자는 맛있다는 말도 없이 다른 접시를 가리키며 이건 어때, 하고 물어왔다.
" 너...밥은 안 먹어...? "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툭 내뱉어버린 말이 그거였다. 그러자 녀석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 왜? 밥도 떠 먹여 주게? "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밥그릇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암묵적으로 종용하는 남자에게, 비굴하지만 조용히 밥을 한 숟갈 떠서 내밀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내가 한 번 떠먹었던 숟갈인지도 모르고 홀랑 받아먹더니, 또 반찬을 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니 놈은 손이 없냐, 씨팔, 발이 없냐?!! 하고 따지지도 못하고 식사하는 내내 녀석의 밥 시중을 들어야만 했다.
요즘 뜸하다 싶더니 역시 나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녀석이었다, 우재혁이란 남자는.
식사를 마치자 그새 샤워를 했는지 아랫도리에 수건하나만 걸친 남자가 다가와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처음엔 깜짝깜짝 놀라던 남자의 행위에도 어느새 익숙해져, 나도 씻고 올게, 하고 시큰둥하게 말하고 욕실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남자는 됐어, 하고 말하며 아마도 생선냄새가 진득하게 베어있음직한 목덜미에 코를 묻더니 허리를 더 세게 끌어당겨 안으며 이대로 하자, 하고 말했다.
처음부터 거부란 내게 주어지지 않은 단어였고 반항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행위였다.
아무대답도 하지 않는 날 번쩍 안아 올린 남자가 침실로 향하며 어째 점점 말라 가는 것 같다, 고 말했지만 나는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먹는 족족 다 토해내 버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 딴 생각하지마. "
요즘 들어 삽입하기 전 굉장히 오랜 시간을 들여 애무를 해대는 남자로 인해, 문득 행위 중에 딴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것을 눈치채고 남자가 지적해 왔다.
미안, 하고 얼른 사과했지만 딴 세상으로 가버린 생각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 넌, 이상해. "
하고 행위를 마친 후 언제나 그렇듯이 한 모금 태우고 난 담배를 내게 내밀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마치 넋두리 하도 하듯 반라의 몸으로 침대에 반쯤 파묻히다시피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나의 머리칼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듯 가지고 놀며, 말했다.
그 모습이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음성에 조금 의아해 하며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그의 잘생긴 턱이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남자의 얼굴은 왠지 답지 않게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어서, 나는 일순 당혹스러움에 눈길로 돌려야 했다.
요즘 들어 그는 자신의 표정에 자각이나 있는 건지, 긴장감 따윈 전혀 없는 표정으로 무 방비하게 자주 미소짓곤 했다. 그것이 또 왠지 모를 위화감을 조성시켰는데, 정작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미소가 너무 선량하고 착해 보여서 나는 순간이지만, 그가 나를 감금하고 나는 그에게 감금된 상태라는 걸 잊어버리곤 했다. 그것은 실로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워해야 마땅한 대상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로 내겐 잔인한 처사였다.
뭘, 하고 묻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연거푸 뿜어낸 회색깔의 연기가 아직도 그의 머리 위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냐? 나라면 조금이라도 궁금했을 텐데...넌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냐? "
" 쳇, 뜬금 없기는...그럴 리가 없잖아. "
" 그럼 왜 묻지 않지? "
" 물으면.... "
" ? "
" 물으면 대답해 줄 거냐? "
"...모르지. "
긍정적인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렇게 대꾸해 오니 허탈해진다.
" 쳇, 그럴 거면서 왜 물었냐? 하여간 너란 녀석.... "
덩달아 내 말투도 겁대가리를 상실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다.
" 그냥.... "
정말이지 의욕상실 해버리게 만드는 대답이다.
" 석영아. "
뻐끔뻐끔 담배만 태우고 있노라니, 녀석이 또 말을 걸어온다. 늘 부르던 '박석영' 이 아니라 웬일로 '석영아' 라고 부른다.
" 왜? "
" 너...그때.... "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퉁명스럽게 나마 대답해줬더니, 뜸만 들이고 정작 말은 이어나가질 못했다.
" 나 그때 뭐어-? "
" 그때...말하지 않았지? "
" 뭐얼? "
" 그러니까...내가 네 가, 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대신 말하지 않기로 했던 거.... "
" 응? "
" 약속...지킨 거지? "
" 뜬금 없이 그건 왜...? "
" 지킨 거지? "
" ? "
대답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남자는 그럼 됐다, 하고 말문을 닫아 버렸다.
" 내일 눈이 올까? "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입을 연 것은 역시나 그 녀석이었다.
" 일기예보에선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고 난리 치던데...우리나라 일기예보가 딱 하고 들어맞았던 적이 있었나? 아마 안 올지도. "
" ...그래? "
하고 녀석이 대꾸했다.
크리스마스엔 내 예상을 깨고 눈이 내렸다.
약속대로 외출했던 나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녀석의 손아귀에서 도망쳐버렸다.
그것이 녀석과 나의 인연의 끝일 거라,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휘청, 하고 무릎이 꺾이자 넘어지려는 걸 남자의 강인한 팔이 재빨리 부축해주듯 안아왔다.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대시피 한 채 밖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만 무너져 내리려는 몸을 추스렸다. 그가 귓가에 속삭이듯 나지막이 괜찮아? 하고 물어왔지만 현기증으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눈이 올걸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눈이 오지 않더라도 밖으로 데리고 나갈 작정이었던지, 그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예매해야 볼 수 있는 오페라 티켓을 내게 내밀었다.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이,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훑으며 오페라 싫어해? 하고 물었다.
무언가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내젓자, 다행이다, 하고 그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오페라는 웅장했고 매혹적이었으며 또 사람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이런 멋진 구경을 시켜준 그에게 진심을 담아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정도로, 매우 흡족한 공연이었다. 내 감사인사에 그는 하얀 치아가 훤히 다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또다시 속에서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그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리가 휘청하고 꺾이며 그의 팔 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석영아!! 하고 놀란 그의 목소리가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힐끔거릴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두 손으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새하얗게 질려있음직한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나를 안다시피 해서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고 변기에 머리를 처박은 채 나는 아침에 먹었던 걸 모두 게워내고야 말았다. 냄새가 지독했을 텐데도 남자는 말없이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등에 닿는 뜨거운 열기에, 어쩐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지만 애써 울음을 삼켰다.
차라리 처음 감금했을 때처럼 때리고 강간하다시피 거칠게 안을 때가 더 나았다. 그때라면 미워하기가 한결 편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솔직히 잘 모르겠다. 미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훨씬 전부터 깨달아 온 바였다. 그렇다고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이르다.
대체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지금의 나로서는 감도 잡을 수 없지만, 만약 누군가 내게 와서 '우재혁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묻는 다면 나는 두말 않고 그 자리에서 예스를 외쳤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요즘은 그런 확신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머뭇거리게 된다.
딱히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우재혁은 확실히 뭔가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내게 대하는 태도로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자꾸 그럴수록 망설이게 되는 내 자신을 보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재혁의 친절 따위, 거추장스러울 뿐 절대 반갑지 않다.
" 식사는 취소하는 게 좋겠다. "
화장실에서부터 어쩐지 안절부절 하던 남자는 벌써 세 번째 저 말을 하고 있다. 나를 부축하며 화장실을 나선 순간에, "10분만 쉴게, 그럼 나아." 하고 내가 말하며 차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 때, 그리고 막상 레스토랑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나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 괜찮대두. "
나도 세 번째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남자는 나의 말 따위 못 믿겠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갔다. 그러더니 안 되겠어, 라고 혼잣말처럼 툭 내뱉고는 차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시동이 걸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차가 출발해버릴 것 같은 조바심에 재빨리 운전대에 얹은 그의 손을 붙잡아 저지시켰다. 정말 괜찮아, 하고 불만이 가득 담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반년만의 외출이야. 마음대로 밖에 돌아다닐 수 있는 넌 모르겠지만 내겐 고대하던 순간이었고 어떤 날보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야.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
" 그렇지만 너.... "
"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았을 뿐이야. 탈이 난 것뿐이지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라구. "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 그러니 호들갑 떨지마. 아픈 곳도 없는데 환자취급은 질색이야. "
" 너 쓰러졌잖아. 그러고도 환자가 아니라구?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널 데리고 병원에 가고 싶은 심정이라구. "
" 운동부족이야. 매일 집안에만 처박혀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어? "
그를 탓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내 말에 뭔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던 그가 한껏 풀 죽은 모습으로 말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내심 꺼내길 잘했다 싶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의 안색을 살피던 남자가 그치만, 하고 자꾸 뭔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자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재빨리 차에서 내려버렸다.
얼떨결에 따라 내린 남자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듯 불만을 토로했고 이왕 예약한 거니까 밥만 먹고 가자, 는 나의 말에 잠시 망설이는 던 남자는, "나 같은 인간이 언제 이런 비싼데서 밥을 얻어먹어 보겠냐?" 하고 내가 말하자 그제야 앞장서 가는 내 뒤를 마지못해 따라왔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여전히 투덜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에스코트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테라스 쪽으로 안내해주는 종업원을 따라가면서도 남자는 질리지도 않는지 귓속말로 밥만 먹고 바로 가는 거야? 하고 다짐이라도 시키듯 말했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푸훗,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왜 웃어? 하고 남자는 못마땅한 듯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면전에 대고 차마 어린애 같아서 웃었다, 는 말은 못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냉큼 자리에 와 앉아버렸다. 남자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종업원이 건네주는 메뉴판을 받을 생각도 않고 왜 웃었냐니까, 하고 따지듯 물어댔지만 나는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남자 둘이, 그것도 연인들의 장소인 듯한 전망 좋은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게 꽤나 눈에 띄웠던지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식사에만 전념하려 해도 우리 쪽으로만 고정되어있는 그들의 시선이 우리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나는 점점 이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연신 나의 안색을 주시하느라 따가울 정도의 노골적인 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식사를 하는 중간 중간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저음으로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거기에 대고 단답형으로만 짧게 대꾸해주고 나는 일부러 식사에 전념한 척 했다.
누구보다 시선에 민감하고 누구보다 게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될 사람이 우재혁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했고 주위의 시선엔 아랑곳이 없었다. 아니, 태연하다 못해 신경이 굵은 쇠심줄로 되어있는 듯 연신 그의 신경은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보지 않아도 알 정도로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연인에게 대하듯 걱정스레 괜찮아, 하고 묻는 그의 손이 이마라도 짚으려는 듯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쳐내고 말았다.
당황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황망하게 허공에 멈춰버린 그의 손과 그의 당황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어이 고개를 떨구고 만 내가 그보다 몇 배는 더 당황했다.
나는 애써 사과하지 않았고 그도 식사하는 내내 일부로라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화기애애 했다곤 할 수 없지만 그나마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 침묵에 사로잡혀 점점 가라앉아 갔다.
그때 잠깐 실례, 하고 입을 열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든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차분히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이상하게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화났다고 볼 수 없는,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은 남자의 눈이 한참이나 내 눈을 직시하며 뭔가 말을 꺼내려는 듯 보였지만 남자는 기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화장실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호감을 담은 사람들의 시선이 저마다 그의 뒷모습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서나 눈길을 끄는 남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방금 내게 무슨 말을 하려했던 것일까?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곧장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휘청거리는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호흡이 가빠지고 곧 숨이 끊어져 버릴 듯이 가슴이 아파 오는 데도 멈추지 않고, 결국 길 한복판에서 볼썽사납게 넘어져 몇 번 구르고 나서야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질주는 끝이 났다.
해방이다!!! 하고 나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엎드린 채로 흐느껴 울었다.
이 눈물의 의미를 알지조차 못한 채 그저 그에게 벗어났다는 것이 한없이 기뻐서, 서럽게 울고, 울고 눈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울어댔다.
제일 먼저 도희에게 전화를 했다. 유일하게 내가 외우고 있던 전화번호였고 잊지 않기 위해 연신 입버릇처럼 지껄여대던 번호였다.
도희는 좀체 나라는 걸 믿지 않으려 했다. 거기에 대고 그의 자잘한 비밀부터 게이바에서 술 먹고 스트립쇼를 했다는 과거사까지 읊어대자, 세상에!!! 하고 수화기를 떼내야 할 만큼 큰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곧이어 숨 넘어갈 듯 이것저것 쏟아내는 도희를 진정시켜 놓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몰래 데리러 와 달라고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택시에서 내리는 도희를 확인하고 내가 새초롬하게 생긋 웃어준데 반해 도희는 나를 보자마자 그대로 내 품안으로 뛰어들어 오며 와락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것이 때론 시건방지지만 감정표현이 확실한 문도희 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망쳐올 때부터 들었던 왠지 모를 비참함을 괜시리 떨칠 수가 없어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우재혁에게서 벗어났다는 실감이 났다.
" 난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너네 집에 찾아갔더니, 글쎄 네 집은 불타 없어져있고 거기서 새까맣게 탄 시체가 나왔는데, 난 그게 깜쪽 같이 너인 줄만 알았단 말이야. "
여전히 울먹이는 음성으로,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내 손을 꽉 움켜쥔 채 도희가 말을 이어나갔다.
여리고 여전히 아이 같은 도희. 나는 나보다 한참은 작은 도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마도 나를 위해 울어주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도희의 눈물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불타 없어진 집과 새까맣게 탄 시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놀라야 했지만 어쩐지 가슴 깊이 와 닿지가 않았다. 마치 타인의 일인 것만 같은 이질감에 표정마저 싸늘하게 식어갔다.
" 부검을 했던 의사도 그 시체가 틀림없는 너라고 해서...난...흐흑...정말 네가 죽은 줄로만 알고...사망신고서도 봤어...서류를 보는데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정말 믿을 수가 없었는데.... "
" ....... "
" 다행이다, 석영아. 다행이야...정말 다행...흐흐흑.... "
나는 분노하지도 않고 차분히 도희의 말을 경청했다.
도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런 녀석을 품에 안고 작고 여린 등을 토닥여 주며 나는 여전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모두다 우재혁의 짓이다. 나는 별 감흥 없이 태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 대체 어디가 있었던 거야? 이렇게 뻔히 살아있으면서 왜 그 동안 연락조차 안 했던 거야? 젠장, 넌 널 걱정하는 사람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하지? "
울분이 가시지 않는지 내 품안에서 울던 도희는 이내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쏟아냈다.
나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놓는 도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분노하고 도희가 그런 날 달래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도희의 작은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도희는 몇 번 바둥거리다가 마지못해 내 품안에 와 안겼다.
" 얘기하자면 길어. 미안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거든. 가면서 얘기해 줄게. "
내가 차분히 그렇게 얘기하자 뭔가 불만을 토로하려는 듯 도희가 도끼눈을 뜨고 올려다보았지만 녀석이 말문을 열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 그보다 지방 쪽에 지낼만한 곳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 지방이라니? "
" 급해. 지금 당장 알아봐 줘. "
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나를 올려다보던 도희는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 여겼는지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물어 오지 않았다.
" ...우재혁이라고? "
나도 모르게 녀석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어차피 도희가 모르는 사람이라 한순간 방심하고 있다 불현듯 튀어나온 이름에 나 스스로가 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자니 도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고 묻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라고 여전히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잔뜩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저 몇 달 동안 우재혁이란 인물에게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감금되었다는 사실만 간략하게 털어놓은 나는, 그 외의 자잘한 사실을 도희가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흔한 이름이잖아, 하고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어두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까만 어둠 속에 간간이 노오란 불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버스가 흔들리자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 바람에 아까 먹었던 스테이크의 여운이 아직 뱃속에 남아있었는지 갑자기 속이 거북해 졌다. 컨디션이 나빴는지, 아니면 버스의 흔들거림에 익숙해지지 않은 위장이 불만을 호소하는 것인지, 버스에 몸을 실은지 10분도 안 되어 갑자기 토기가 올라왔다.
휴게실이 나오자 마자 참지 못하고 가까운 잔디밭에 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고 말았다. 오늘로서 두 번째다. 아무래도 위장이 단단히 고장이 나버린 건지 감금 당한지 얼마 안된 직후부터 주욱 이 상태다. 아마도 며칠동안 수돗물만 먹고 위액까지 다 토해내 버린 덕분에 얻은 병인 듯 하다.
" 아, 맞다! "
하고 내 등을 두드리던 도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뭔 소린가 하고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손등으로 훔치며 허리를 펴는데, 도희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라 생각했더니, 거기다. 우리 잘 가는 게이바. 거기서 자주 듣던 이름이었는데...아이참, 아깐 왜 생각이 안 났지? "
" ...여직 생각하고 있었냐? "
하고 마음의 동요를 숨기느라 일부러 픽, 하고 웃었더니, 도희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이씨, 내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웃지 말랬지! 하고 내게 하는 잔소리 18번을 해댔다. 예전엔 지겹기만 했던 그 잔소리가 어쩐지 지금만큼 정겹게 들려서 저절로 마음이 녹아 내리는 기분에 잠자코 있었다.
" 거기 넘버원이었던 녀석이잖아, 우재혁이라 함은. "
" ...그랬어? "
나는 진실로 놀라 그렇게 물었다. 금시초문인 사실이었다. 더욱이 나는 그때 처음 우재혁을 만나지 않았던가.
" 네 눈에야 새하얀 피부에 허리 잘록하고 눈 크고 동공 새까만, 네 타입의 바텀녀석들 밖에 눈에 안 들어왔을 테니 모를 수밖에...게다가 우재혁도 너도 탑이었으니 서로의 관심권 밖이었을 테구. "
" ....... "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나도 우재혁도 자주 들렸던 가게라고 하면, 아무리 그래도 한번쯤은 마주칠 법 한데....
그렇다는 건 우재혁 스스로 나를 피해 다녔다는 건가? 아니, 애써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되지 않는가. 내가 다니는 게이바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하나,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물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인데....
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도희가 말문을 열었다.
" 너 토하는 거 보니까 생각나는데...너 윤소령이랑 깨지고 술 진탕 퍼마신 날 있었지. 그때 너, 데려다 주겠다는 내 호의를 끝끝내 뿌리치고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면서 혼자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던 거...기억 나냐? "
솔직히 기억에 없다. 기억나는 것은 필름이 끊겨서 다음날, 나 어떻게 왔냐? 하고 묻는 나의 면전에 대고 그러잖아도 골 울려죽겠는데 한시간 삼십분이나 잔소리를 해댄 문도희 뿐이다. 그 날의 기억은 죽어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 ...그때 왜? "
대답대신 그렇게 되묻자 도희가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준다.
"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네 뒤를 몰래 따라가 봤거든. 근데 너 가게 밖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속에 걸 전부 게워내고 있더라. 그럼 그렇지, 하고 등이라도 두드려줄 심산으로 너한테 다가갔는데...누군가 네 등을 두드려주고 있더라구. "
" ...그거.... "
" 응, 우재혁이었어. "
" ......!!! "
" 그런 널 택시라도 태워 보내려는 모양이었는지 부축하고 찻길 쪽으로 걸어가더라. 왠지 끼여들 수 없는 분위기에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네 녀석이 우재혁의 목에 팔을 감더니 비실비실 웃더라구. "
" !!! "
" 내가 말했지, 너 한쪽 입 꼬리만 올리고 웃으면 졸라 재수 없게 보이는 거. 그래서 나는 너 우재혁한테 실컷 두드려 맞을 줄 알았다? 그래도 친구 놈이라고 말려는 줘야지 하고, 가는데.... "
" ....... "
" 니 새끼가 먼저 그 놈 입에 키스하더라구. "
" -?!!!! "
" 그러니까 설명을 하자면, 너는 그저 입술만 살짝 닿는 베이비키스였는데, 입술을 떼고 비실비실 웃는 네가 얼마나 꼬깝게 보였던지, 네 뼈가 홀랑 다 부러져라 세게 끌어안더니 열라 찐한 키스를 퍼부어 대더라구. 지켜보는 내 얼굴이 다 달아오를 정도였다면 말 다했지. 거기서 끝나면 좋았게? 우재혁이 입술을 떼자마자 너 반쯤 실신해서 그 놈 팔 안에 축 늘어지는데...친구인 내가 다 쪽팔리더라구. "
헉, 하고 숨을 들이키자 분명 새빨개졌을 것이 분명한 내 얼굴을 보며 도희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쯧, 하고 찼다.
" 분명 네게 맘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 자식도 그 이후로 잠잠하더라구. 그래서 다음날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 알고 이거 평생 비밀로 묻어야지 했었다. 게다가 우재혁, 그 자식 그런 걸로 약점 잡아서 떠벌릴 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
뭔가 단단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재혁이 내게 맘이 있다고? 그것만큼 웃기는 소리도 없지 않은가.
약점 잡아서 떠벌릴 녀석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녀석은 내 약점을 잡고도 왜 내 뜻대로 해주었던 것일까?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대신, 그 약점을 잡고 협박해도 됐을 텐데...그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뭔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점점 의문만이 쌓여갔다.
그리고 그 순간 도희는 아주 뜻밖의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다.
" 앗, 그러고 보니 우재혁 그 인간, 너랑 같은 학교에 같은 과였더라?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
어떻게...? 하는 마음속의 물음을 들었는지 도희가 또 친절하게 답해준다.
" 그게...네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여기밖에 없다 싶어서 네 학교까지 갔었는데, 그때 우연히 알게 됐거든. "
" ....... "
" 근데 우재혁 걔 자기 관리하나는 철저히 할 것 같은 녀석이 칠칠치 못하게 그거 하나 감추지 못하고 학교에 소문이 다 났더라고. 그럼에도 얼굴에 철판 깔고 학교 다닌다고 소문이 굉장히 안 좋게 났던데...나라면 당장 학교 그만뒀다. "
도희의 말을 좀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말이 이어졌다.
" 뭐, 다 그렇지. 세상에 게이라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좋아할 만한 사람이 어딨겠어? 그래도 너네 학교는 좀 심하더라. 맘 고생이 심했을 것 같더라구. "
" 뭐...? "
" 응? "
" 무슨...그게...무슨 소리야? "
" 에에-? 같은 과라면서 몰랐어? 우재혁 게이라는 거 학교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
" !!! "
" 듣기로는 같은 과 학생이 게이바에서 나오는 우재혁을 우연히 봤다나 봐. 그래서 소문이 퍼진 거라고 하더라구. 운이 나빴지, 뭐. 하필 그렇게 들킬게 뭐냐? "
" 뭐...? "
순간 우재혁의 원한이 무엇인지 대략 감이 잡혔다.
그렇다는 건 그는 내가 소문을 퍼뜨린 줄 알고 있다? 그제야 이야기의 앞뒤가 짜맞춰졌다.
기껏 입막음이랍시고, 프라이드 강한 그 녀석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자존심이 짓이겨진, 그런 짓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막상 소문이 퍼져버렸으니 화가 날만도 하겠지. 게다가 그는 당연히 나의 소행일 거라 생각을 했을테구.
「약속...지킨 거지?」
순간 그 마지막 말이 생각이 났다.
목이 콱 하고 메이고 숨쉬는 것조차 벅찼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좀체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 같지 않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말라비틀어진 음성에 소름이 돋는다.
" ...돌아가야 겠어. "
" 응? "
" 다시 우재혁에게로 돌아가야 겠어. "
늘 죽어있던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릴 정도로 세게 뛰기 시작했다.
조그만 여관방에 도희와 같이 나란히 누웠지만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일까, 하고 벽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로 눈을 돌리자, 커튼도 없는 유리창사이로 스며든 달빛에 어슴푸레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가 보였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도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싸한 연기가 목구멍을 뚫고 폐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피곤했는지 도희는 이 곳에 도착하자 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막차 시간이 끊겼다는 핑계로 다시 나를 버스에 태운 것은 도희였다.
어떤 말로도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도희는, 이대로 버스를 타고 갔다가 한숨 자고 새벽 차편으로 다시 올라오자고 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잘 생각해서 판단하라고, 그 동안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결정하라고 덧붙였다.
나보다 훨씬 어른스런 녀석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절대 사리분별을 잃지 않고 일단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이성적으로 행동에 옮길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에 비하면, 확실히 아까의 난 감정적이었다. 대체 기껏 도망쳐놓고 무슨 배짱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던 건지....
그가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서라고? 대체 오해를 풀어서 어쩌겠다는 건가? 우재혁과 사랑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자문해 보지만 떳떳하게 답을 할 수가 없다.
녀석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결론지은 마당에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듣는다고 마음이 동 할 리는 없었다. 달라지는 것도 없다.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매케한 담배연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자 통풍이라도 시킬 겸 창문을 열었더니 이미 눈은 그쳐있었다. 언제부터 그쳤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아침부터 눈 따윈 내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본 눈은 바람에 흩날리다가 공중에서 사라져버렸던 비였는지도 몰랐다. 그 빗방울 또한 햇살에 금새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눈이 아니었다.
" 정말 갈 거야? "
아침이 되어 여관을 나오며 도희는 돌연 그렇게 말했다. 새벽녘에 눈을 뜨고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녀석인지라 놀라서 돌아보니, 도희가 신발만 신은 채로 방금 나왔던 방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몸을 반쯤 햇살이 비치고 있는 문 밖으로 내민 채였다.
" 난 네가 무슨 생각으로 가려는 건지 모르겠어. 대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그 놈한텐 왜 다시 가겠다는 거야? 떠나고 보니 새삼 그 자식이 보고파지기라도 한 거냐? "
" 모르겠어. "
하고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 모르면서 간다는 거야? "
" ....... "
" 하아- 내 친구지만 진짜 골 때린다. 네가 옛날부터 똥배짱이 남들보다 두둑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그러게, 하며 웃었더니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 녀석에게 있는 힘껏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눈물이 핑 하고 돌만큼 너무 아파서 가제미 눈을 하고 노려봐 주었더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며 되려 호통을 치는 바람에 얼이 빠져버렸다.
" 확신도 없이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감금까지 시킨 놈인데 제 발로 찾아왔다고 얼씨구나 하고 잘 왔다, 그럴 거 같애? 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죽은 사람이라구. 무슨 말인지 알아? 네가 그 놈한테 죽어도 알아줄 사람 하나 없단 말이야, 이 빙신아. "
" 설마, 죽이기야.... "
하고 말했다가 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 박석영, 너 그거 아냐? 너 말야, 생긴 건 산전수전 다 겪은 날제비처럼 생겨 가지고 이상한데서 물러터진 거 아냐구. "
" ...뭔 소리야? "
" 남 등 처먹게 생겨 가지고 만날 손해만 본다고, 이 순딩아!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좀 약게 살 수 없냐, 박석영? 남한테 죄 퍼주지 말고! "
" 으이구, 또 시작이지. 문도희표 잔소리. "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도 다시 날아올 줄 알았던 도희의 손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문도희 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의 도희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어서, 장난치던 기분도 입가에 맴돌던 웃음도 싸악 사라지고 말았다.
" 젠장, 너만 보면 답답해 죽겠다. 언제나 속으로만 끙끙 앓는 박석영이 보는 거 이젠 지겨워 죽겠어. "
" 미안.... "
진심으로 걱정하는 걸 알기에 나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대뜸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입가에 매달렸다.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녀석의 고운 이마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어린아이처럼 주둥이를 내밀고 볼을 부풀린다. 또 손이 날아올까 재빨리 뒤통수를 사수했더니 녀석의 들어올려진 팔이 내 목을 휘감는다. 놀라서 내게 매달린 녀석을 내려다봤더니 어느새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은 채였다.
" 도, 도희야.... "
이러다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정강이라도 걷어차고 도망가는 게 아닌가 하고 내 딴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녀석을 부르니, 칼 같은 목소리로 녀석이 가만있어! 하고 명령하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문 채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령대로 해야지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무슨 짓을 할지 이젠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다.
" 너 또 그 병 도진 거지? "
" 응? "
첫차를 타고 올라가야 된다는 생각도 어느새 잊어버린 채 여관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반쯤 졸다가 도희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 속병 말야, 네 지긋지긋한 지병. "
하고 도희가 말을 이었다. 도희는 여전히 내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 너 신경 쓰이는 일 있을 때마다 밥 잘 못 먹잖아. 먹어도 항상 얹혀서 다 게워내 버리구. 그게 다 속으로만 삭히느라 생긴 네 고질병이잖아. "
" 아.... "
" 몸은 금방 알아차린단 말이다. 얼마나 예민한데...정말 올해 들어선 뜸하다 했더니.... "
하고 혀를 쯧 하고 차더니 또 말을 잇는다.
" 너 그 자식한테 감금 되서도 줄곧 토하고 그런 거지? "
" 아냐. "
난 서둘러 대답했다.
" 괜히 말했어, 우재혁에 대한 거 말야. 너 그 얘기 듣고 그 자식한테 가려는 거잖아. "
" ...모르겠어. "
" 뭘 계속 모른다는 거야? 모른다면서 왜 굳이 가겠다는 건데? 가서 뭘 어쩌 겠다구? "
도희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 모르니까 가려는 거야. "
" 뭐? "
하고 물었다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도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고 말했다. 거기에 대고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서 가는 거라고, 사실 나는 아직도 내 판단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우재혁에게 처음 끌려갔을 때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아무리 고통에 무뎌지려 해도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면 몸이 저절로 떨린다. 그만큼 나는 우재혁이 두렵다.
그럼에도 가려는 것이다. 내 가슴 안쪽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이 뜨거운 것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래서 가고 싶은 것이다.
천천히 내 목에 두른 도희의 팔을 떼어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도희는 갑작스런 내 미소에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웃지마. 상한 얼굴로 폼도 안 나." 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시선을 피했다.
" 내 곁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
도희의 손을 꼬옥 움켜쥐며 말했다.
놀래서 커진 동공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새까만 유리구슬처럼 놀랍도록 투명하고 매끄러운 동공이다.
뜻밖의 소릴 들었다는 듯이 차마 말을 잇지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다. 귀여운 녀석. 넌 천상바텀이다.
" 내 친구는 너 뿐이야. "
하고 덧붙이며 씨익 웃어줬더니 이내 인상을 팍 하고 찡그리며 "누가 너 같은 거랑 친구하고 싶대?" 하고 픽 토라져서 말했다. 그럼에도 내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지 않고 가만히 체온을 나눠주고 있는 모양새가 그리 싫은 것도 아닌 주제에 괜히 앙탈이다.
귀여워서 히죽 히죽 웃고 있자니, "내가 그렇게 웃지 말랬지!!" 하고 또 잔소리를 시작하려 하기에 이왕 늦은 거 밥이나 먹고 가자고 말하며 녀석의 손을 잡은 채로 앞장 서 걸어갔다. 녀석은 투덜거리면서도 냉큼 쫓아와 내 옆으로 붙어 섰다.
아직도 내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밤새 생각했지만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를 만나고 싶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상반된 두 마음에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 전에 결심을 다질 겸 뱃속이나 두둑히 채워둬야지 생각했다. 뭐,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하고.
일순 발걸음이 뚝 하고 멈춰졌다. 덩달아 멈춰서던 도희가 의아해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웃고 있던 안면근육이 일제히 굳어지고 심장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거짓말처럼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마치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일단 두려움부터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감금된 몇 달을 증명이라도 하듯 뇌가 명령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옆에 있던 도희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의 모든 신경은 눈 앞에 있는 남자에게로 집중되어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왜 거기 있는 걸까?
마치 마음 속의 절규같은 그 질문이 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소름끼치리 만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비웃음을 담아 내게 말했다.
" 내가 사람도 안 붙여놓고 너를 밖에 내놓았을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성큼성큼 내 앞까지 걸어온 남자는, 걸리적거리는 날파리를 떨쳐내듯 한 팔로 도희를 저만치로 내쳐내 버렸다. 아얏, 하고 짧은 비명이 들렸지만 나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를 듯 꽉 쥐어진 남자의 주먹에 고정되어 있었다.
목은 조르지 않더라도 분명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패서 또 도살장에 끌려 가듯 질질 끌고 가겠지. 그리고 내킬 때까지 실컷 섹스를 하고, 이번에야 말로 필히 나를 죽이겠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떨림이 사라졌다. 모든 걸 체념해 버리자 어쩐지 더 이상 두려움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죽는 구나, 하고 마치 타인의 일처럼 여겨져서 현실감이나 긴장감따윈 사라져버리고 어쩐지 생경한 남자의 표정에도 무감감해졌다.
남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니, 샅샅히 훑는 다는 말이 맞겠지. 마치 눈빛만으로 나를 태워죽일 듯이 이글 이글 타는 눈으로 어디부터 고통을 줄까 하고 고민하는 듯 내 몸을 훑어나갔다. 그 분노가 내 피부까지 적나라하게 전달되어 순간이지만 어깨가 흠칫 하고 떨렸다.
얼마만큼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남자는 끝까지 주먹을 치켜들지 않았다. 발길질이나 그 어떠한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다. 다만 침묵으로 자신의 분노를 나타내며 나를 겁에 질리게 했고, 조용히 다가와 잔뜩 움츠려들어 있는 나를 품에 안아들었다.
도희가 달려들었지만 그의 곁에 있던 두 명의 남자에게 금새 저지당하고 말았다. 도희의 울부짖음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 쳤지만 나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볼썽사납게 남자에게 안겨져서 차 뒷좌석에 얌전히 앉혀지고 있었다.
남자가 내 옆에 앉자 곧 시동거는 소리가 잔인할 정도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백미러 너머로 흐릿하게 몸부림치는 도희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고 있자니 도희는 두 남자에게 억지로 붙들려 다른 차에 태워지고 있었다.
" 어쩔 거라 생각하냐? "
도희를 어떻게 할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을 뿐인데, 용케 알아듣고 남자가 되물어왔다.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묘하게 치켜올라간 입꼬리가 비웃는 것 같진 않은데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마치 이 상황에조차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처럼.
"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널 유일하게 봐버린 인간이야. 곱게 보내줄 수야 없지. "
" ......!!! "
" 너무 놀라지마. 죽이진 않을 거니까. 대신에 비밀이 새나가지 않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겠지. "
" ......? "
" 혀를 잘라내 버리는 게 쉬울 거야. 글도 쓰지 못하게 오른 손을 잘라내고, 아, 혹시 왼손잡이인지도 모르니 왼손도 잘라내야지. 또 만약을 위해 눈도 없애버리는 게 좋겠지. "
" !!!!! "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가 저지를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져 버리고 말았다. 마치 그 동안 나를 괴롭혔던 건 아이들의 소꿉장난이었던 것처럼, 본색을 드러낸 남자는 과연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나 싶을 만큼 오싹하리 만치 싸늘하고 건조한 어조로, 무감동하게 말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듯 광기로 가득한 남자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람 하나는 눈 깜짝 않고 죽일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남자는 정말 그럴 것이다. 저 감정 없는 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잠이 들어버린 것인지, 뭔가 몸이 들썩이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그러자 울었던 것인지 눈 안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뭔가 지독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꿈속에서의 여운이 아직도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는지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전혀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났다.
" ...네 애원의 연장선이냐? "
거짓말처럼 눈물이 딱 하고 멈췄다. 얼음이 쩍쩍 갈라질 정도로 싸늘한 남자의 어조에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서서히 시야 가득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빛이 어깨를 움찔하고 떨게 할 만큼 지독히도 차가웠다.
엘리베이터를 탄 것인지 위잉- 하는 기계 음 소리가 긴장으로 가득한 침묵을 깨주고 있었다. 깨닫고 보니 나는 남자에게 새색시처럼 고이 안겨져 옮겨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자 알 수 없는 조소가 날아왔다.
" 내, 내려 줘.... "
하고 기어 어가는 목소리로 말해보지만 보기 좋게 기각 당했다. 그럼에도 남자의 눈은 여전히 날 향한 채다.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은 건 확실한데 그 눈이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래서 그것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것만 같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먼저 눈길을 피해버렸다. 그것에 대해 남자는 말이 없었다.
차에 올라타자 마자 나는 도희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남자는 태연히 목숨만은 붙어있게 해주지, 하고 말했다.
그 음성이 평소 알던 우재혁이 아닌 것만 같아 일순 두려워지고 말았다. 마치 그 동안 알던 우재혁은 내 상상이 만들어낸 인물이었던 양, 그래도 무표정하긴 했지만 그나마 조금은 인간다웠던 우재혁은 온데간데 없고 생판 남인 듯한 우재혁이 그 자리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등에 소름이 돋아났다. 거기에 대고 떨리는 음성으로, 도희를 살려달라고 마치 앵무새처럼 그 말만을 반복하듯 읊조렸다. 뭔가 그럴듯한 말로 설득해야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입도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앉아있던 푹신한 시트에서 내려와 윙윙- 거리는 기계음이 들리는 딱딱한 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무릎 위로,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쥔 주먹 위로,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밑바닥만을 구른 인생,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었고 평생 감금되어 살아간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이 벌레같은 목숨,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해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이 더러운 생명이라도, 녀석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아무 망설임없이 내놓을 수 있다.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녀석은...도희는 내 인생에서의 유일한 친구였고 내 자신조차 쓰레기라 여겼던 나를 유일하게 인간 취급해준 녀석이었다. 그 녀석앞에서 만큼은 더러운 남창도, 쓰레기에 쓸모없는 인간도, 손가락질 받는 호모도 아닌, 단지 한 명의 인간일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이 뭔가를 잃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 같은 것때문에 뭔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상처 입어서도 아파서도 안 된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안 된다.
녀석이 지은 죄라고는, 나 같은 것은 만난 것뿐인데 그로인해 벌을 받게 해선 안 된다. 받으려면 내가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 내가 죽을게. 그럼 되잖아. "
" ....... "
"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질게. 내가 사라지면 그 녀석은 아무것도 안 본 게 되잖아. 증거따윈 없어지는 거잖아. "
" ....... "
" 그러니 그 녀석, 살려줘. 제발...네 뜻대로 뭐든 다 할테니까, 그 녀석만은 살려줘.... "
" ....... "
무릎까지 꿇고 자존심이란 감정은 다 내다버리고 비참하게 애원하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우재혁은 늘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 정작 말해야 할 순간, 입을 다물고 침묵해 버린다.
나는 애가 타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내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꼴사나울지 그건 나중 문제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내 친구, 유일하게 나를 인간으로 인정해준 그 녀석을 살리고 싶었다. 어떡하든 녀석만은 구해내고 싶었다.
그만해, 하고 우재혁이 명령했다. 나는 거짓말처럼 애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야사이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에서도 감정을 읽기가 힘들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턱을 타고 그의 바지 위로 뚝뚝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기묘한 침묵 속에 유난히 그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말이 없고 나는 그의 말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 ...너를 위해서는 애원도 하지 않더니...그 녀석이 그렇게 소중하냐? "
그러다가 까무룩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 순간 어쩐지 남자가 그렇게 말한 것도 같은데, 깨어났을땐 꿈인지 생시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띠잉-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곧이어 스르르 하고 문이 열렸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마음을 돌려놔야만 했다. 문득 그런 생각에 나를 안고 있는 남자의 셔츠를 구겨지던 말던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그저 남자의 걸음을 저지하려는 얄팍한 수단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저지른 행위에 나조차도 깜짝 놀랐다.
다행히 남자의 걸음을 멈추게하는 데엔 성공했다. 그래도 곧 떨어질지도 모를 불호령이 두려워, 말하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 재, 재혁아.... "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은 무기질의 눈동자가 일순 내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가느다란 섬광같은 빛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혹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눈깜짝 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닌 것만은, 딱히 증거는 없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우재혁이 반응했다. 대체 무엇에 반응한 것일까? 이름을 불러서? 이름이라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렀었다. 그때마다 내가 눈치챌 만큼 녀석이 반응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욱이 아까의 내 목소리가 남자의 마음을 동요시킬 만큼 섹시하거나 관능적이었다고도 볼 수 없다.
마치 다정한 연인을 부르듯 재혁아, 하고 부르면 뭔가 감격이라도 한 듯한 얼굴로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있다. 마치 더 불러달라고 무언중에 조르는 듯 해서 왜 그래? 하고 물으면서 나도 모르게 우재혁, 하고 덧붙이면 왠지 실망한 건지 심통이 난 건지 모를 듯한 표정으로 됐어, 하고 퉁명스레 말했었다.
지금에와서 왜 그런 기억이 떠오른 건지, 그리고 지금과 그때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혹 그래도 어쩌면 조금은 연관이 있는 건가 싶어 설마하는 심정으로 나직히 "재혁아." 하고 불러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몰래 혀를 쯧 하고 찼다.
" 젠장! "
하고 그가 으르릉 거리듯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았다. 나를 안은 채로 자동식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번호가 자꾸 틀리는 모양이었다. 혹시 이 녀석 내가 비밀번호라도 볼까싶어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잔뜩 이를 가는 목소리로 보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무리 한 등치빨하는 천하의 우재혁이라도 남자인 나를 안고 허리를 반쯤 숙인 자세로 번호를 누르는 것은 꽤나 힘에 벅찼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자꾸만 번호를 잘 못 누르고 있지.
그 증거로 얼마나 힘든지 얼굴까지 시뻘개져 있었다. 게다가 프라이드 강한 녀석이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인게 창피한지 연신 젠장이나 씨팔하고, 어쩐지 우재혁의 이미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욕지거리들을 내뱉고 있었다.
이거 내려달라고 말해야 겠지, 하고 생각하며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는데 철컥 소리를 내며 드디어 문이 열렸다. 얼마나 가슴을 조리고 애간장을 태웠는지 문이 열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다 날 정도였다.
그렇게 무거우면 내려놓던가 하지, 괜히 고집 부리기는...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이를 뿌드득 하고 갈며 차마 입에 올리기에도 민망한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인상을 팍 하고 쓰는 바람에, 혹시 내 마음 속의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 욕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의 얼굴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지만 화낼 때의 우재혁이 이제껏 내가 보아온 우재혁의 모습 중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재혁을 본 것은 학교에서 잠깐 스쳐지나 갈 때나 강의실에서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모습을 멀찍이서 본 것밖에는 없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진짜 우재혁의 모습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 대해 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지 못하기에 불현듯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재혁은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우재혁의 과거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듣고 싶다고, 어제처럼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 우재혁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재혁이 말을 꺼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던 나에겐 놀랄 만큼 커다란 변화였지만, 왜 알고 싶은 지를 따지고 싶은 마음보다 알고 싶다는 유혹이 강했다.
알고 싶다. 너에 대해 속속들이 전부 다 알고 싶다. 이유는 없었다.
씻어, 하고 욕실 앞에 내려놓으며 그가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굉장히 피곤한 얼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눈을 감았다. 그 모습까지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욕실로 들어왔다.
차라리 그때처럼 실컷 패고 억지로 덮치고 유린해 버리지, 그럼 이렇게 이상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을 테고 그의 눈치를 보며 어색해 하지도 않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면서, 만약 그랬더라면 그를 미워하기도 훨씬 쉬웠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씻고 나오자, 우재혁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는데도 그가 눈을 뜨지 않아서 잠이 든 건가,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무 방비한 모습의 우재혁은 처음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다.
언제나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칼이 지저분하다 싶을 만큼 제멋대로 이마와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조심스레 허리를 구부려 코끝을 갖다대자 남성특유의 재취와 엷은 샴푸냄새, 그리고 땀 냄새가 섞여났다.
나도 모르게 들었던 손을 화들짝 놀라 내리다가 머뭇머뭇 다시 손을 들고 멈추길 반복했다. 자는데, 하고 생각하자 과감해 질 수 있었다.
천천히 손가락 끝을 남자의 머리칼에 가져가 댔다. 혹 금방이라도 눈을 떠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조리며 조심조심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느낌이 기분 좋을 정도로 부드럽고 가는 머리카락이다.
곧 남성특유의 훤한 이마가 드러났다. 잘 다듬어진 새까만 눈썹도 눈앞에 드러났다. 그 아래 꼭 감긴 두 눈이 보인다. 유독 긴 속눈썹이 시선을 끈다. 남자 주제에, 하고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참지 못하고 그 끝에 가만히 손을 가져가 대 본다.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살짝 닿고서는 불에라도 데인 듯 놀라서 금새 손을 떼버린다. 남자의 눈이 금방이라도 떠져서 나를 이상한 놈 바라보듯 할까봐 조바심이 나서다.
그래도 시선은 여전히 남자의 얼굴에 고정된 채다. 매끈한 콧날이 시원스레 뻗어있다. 수술한 것 같은 조각 같은 콧날에 문득 질투가 솟구친다. 돈이 많으니 몰래 수술을 했을 지도 몰라, 하는 짓꿎은 생각이 든다.
만지고 싶다, 하고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내저으며 그저 이 안에 실리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 뿐이야, 하고 애써 자신에게 변명했다.
애를 태우듯 살짝 닿고만 떨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용기를 내서 옆으로 비틀듯이 눌러봤다. 쉽게 휘어져 버리는 콧날에 쳇, 하고 혀를 찼다. 역시 실리콘은 들어있지 않은 건가, 하고 괜스레 투덜거려 본다.
문득 내리려던 손이 허공에 멈춘다. 나도 모르게 남자의 입술에 가만히 가져가 대 본다.
말 그대로 살짝만 닿았다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떼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머쓱해져 손을 등뒤로 감춰버렸다.
괜히 얼굴도 붉어져 버렸다. 키스를 한 것도 아닌데, 그저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쑥스러워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붉은 입술의 유혹은 강했다. 남자 입술치곤 유난히 붉고 선이 뚜렷한 입술이다. 이런 입술에 약하다...하고 애써 자신을 변명했다.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흔들어 봤다. 미동조차 없다. 재혁아, 하고 부르며 조금 더 세게 흔들었다. 꽤나 깊이 잠든 모양인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로 인해 괜시리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깨어있을 때라면 죽었다 깨나도 하지 못할 짓을 과감히 해 본다.
처음은 살짝만 닿고 떨어졌다. 마치 만찬 전 에피타이저를 맛보듯, 아주 살짝만 맛보고 곧 입술을 떼어냈다.
조심스레 뺨을 손으로 쓸어본다. 피부가 약간 까칠해져 있다. 볼 살도 약간 빠진 것처럼 광대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눈 밑에 조금 엷어진 듯 보이는 다크서클도 보인다.
잘 해서 먹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논문준비가 힘들었던가, 하고 생각하자 괜히 분통이 터진다. 한약이라도 달여 먹일까, 하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우스워서 픽, 하고 웃었다. 뭐 하는 짓이냐, 박석영, 하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끝은 부드럽게 남자의 볼을 쓰다듬고 있다.
다시 붉은 꽃잎에 깃털 같은 키스를 몇 번이고 퍼부었다. 이런 내 자신이 변태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고 있는데 조금만 더 맛보자, 하고 생각해 버린다. 이젠 쑥스러움도 사라져 버렸다.
조금 더 과감하게 남자의 입술을 훔친다. 멋대로 핥아서 은근슬쩍 타액을 묻혀놓는다. 타액으로 젖어서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이 대단히 유혹적이다. 우재혁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쓰러뜨려서 먹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남자의 양 볼을 손으로 조심스레 누르자 꽉 다물어져 있던 남자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진다. 그 안으로 살짝 혀를 넣었다, 괜시리 민망해서 다시 빼냈다.
분명 거실 안엔 우재혁과 나 둘 뿐인데, 그래도 확인할 겸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역시 아무도 없다.
젠장, 얼굴이 벌개진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내비둬, 하는 답변이 날아왔다. 그래 내버려두자, 어차피 자고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걸.
그래도 만약 우재혁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게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지만 창피해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망설인 것은 아주 찰나였고, 곧 혀를 미끄러뜨리듯 집어넣었다. 먼저 혀끝에 단단한 치아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문지르듯이 혀로 핥아내며 천천히 안으로 전진시키자 말캉한 것이 혀끝에 닿았다. 금방이라도 그걸 입에 품고 싶은데 남자가 깰까봐 조심스러웠다.
젠장, 도둑키스는 처음인데...하고 왠지 낯뜨거워져 서로의 입이 맞댄 상태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남자는 듣지 못하는데, 하고 생각하자 생각이 멋대로 입을 통해 흘러나와 버렸다.
천천히 얼키는 살덩어리가 감미로웠다. 조바심이 날만큼 천천히 천장을 훑고 치아 사이사이를 훑어내고, 따뜻한 그것을 조르듯 슬쩍슬쩍 건드리며 가지고 놀았다. 뭔가 정말 변태라도 된 듯하다.
남자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조심스레 빨아들였다. 잠결에라도 반응을 해줄 줄 알았더니, 뭔가 내 테크닉에 문제가 있나, 하고 의구심이 들만큼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남자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바람에 멋대로 더 열을 내고 말았다. 키스하는 남자가 우재혁이라는 것도, 자고 있다는 것도 잠시 망각한 채, 열렬히 혼자 반응하며 키스에 몰두해 버렸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혀가 얼키면서 내는 질척이는 소리에 불현듯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새 눈까지 감고 키스에 매달렸던 모양이다.
얼마나 황급히 입술을 떼냈는지 그 반동으로 뒤로 발라당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우앗, 하는 내가 들어도 예쁘지 않은 비명이 튀어나오자 얼른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다행히 우재혁은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런, 하고 혀를 찼다. 박석영, 순식간에 망가지는 구나. 대체 뭐 하는 짓이냐?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내 보기에도 한심스럽다. 잠든 남자에게, 발정 난 암캐도 아니고, 대체 뭐 하는 짓인지...이래서 남자는 다 짐승이라고 하는 가 보다, 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그럼에도 미련이 남는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스르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넘어질 때 제대로 박아버린 건지 으읏, 하는 신음이 절로 나올 만큼 꽤나 욱씬거렸다.
"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벌받은 거다. "
하고 스스로에게 면박을 줘본다. 그래도 민망함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담배라도 한 대 태워야지, 하고 천천히 욕실 앞에 벗어두었던 옷가지들을 뒤척여봤다. 우재혁이 크리스마스라고 선심 쓰듯 사주었던, 척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양복이 볼품 없이 구겨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걸 세탁기에 넣어야 하나,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드라이 맡기는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 봤다. 생전 이런 고급양복을 입어봤어야지, 하며 주머니를 뒤지자 딱 한 대 남은 담배 갑이 손에 잡혔다.
돛대닷! 하고 혼자 쾌재를 부르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 한 모금 시원하게 빨아들였다. 싸한 연기가 목구멍을 자극하고 폐 안 깊숙이 퍼졌다가 다시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그리고 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점점 사라져갔다.
하루살이 인생보다 더 못한 인생이다, 하고 생각하다가 씁쓰레하게 웃었다.
생각하니 나와 똑같은 인생이다. 그나마 저 놈의 연기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보람된 일이라도 하지...제길, 난 뭐하고 있는 거냐? 쓰레기 취급당하는 게 싫어 바득바득 대학에 들어왔던 게 아니었던 가? 후에라도 만날 아버지 앞에 떳떳해 지기 위해 몸이라도 팔아서 등록금을 벌었던 게 아니었던 가? 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박석영?
대답하지도 못할 거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마음에 응어리진 자괴감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점점 퍼져나간다.
대학이라는 틀 안에 적응하지 못했던 건 나였다.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오니 더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아니, 누군가를, 사람이라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같은 게이끼리는 잘도 열렸던 마음이 대학이라는 곳에서, 양지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사는 그들을 보니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잔뜩 움츠려던 마음이, 열리긴 커녕 점점 음지에 숨고 싶어져 버렸다.
섞이지 못한 건 나였다.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기며, 꽁꽁 숨어서 자신을 가두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나였다.
이중생활를 했던 것은, 우재혁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겁에 질려 도망친 주제에, 도망칠 곳이 없어 바둥거리고 있었던 주제에, 우재혁이란 존재가 나타나 세상과 차단시켜 버리자 좋아라, 하고 여겼던 것은 나였다. 그 기회를 움켜잡았던 것은 나였다.
그렇게 끝까지 세상과 차단된, 이중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인간이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피가 흐르고 아픔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고, 그리고 외로움을 느낄 줄 아는,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망쳐 버렸다.
나도 인간이란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건 괴로운 일이란 걸 깨달아 버렸다.
미움 받으며 평생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두려워져 버렸다. 나에게도, 나란 인간에게도 사랑이 필요하다고 처음으로 실감하며 통탄했다.
평생 미움받으며 살 자신이 없었기에, 도망쳐 버렸다. 겁쟁이는 나였다.
다시 돌아오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솔직히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우재혁의 따스함에 조금은 기대고 싶어졌지는 모른다. 그 동안은 너무 지쳐 있었기에 잠시만이라도 나무 그늘에 차분히 몸을 뉘이고 쉬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우재혁의 어깨에 기대고, 우재혁이란 그들에 쉬었으면 하는, 바람을 잠시나마 가져 보았던 것이리라.
" 후우-. "
하고 한숨을 내쉬듯 연기를 토해내자 이미 담배는 필터만 남아 있었다. 이 곳에서 만큼은 아무 생각 않고 살아야지, 했는데 갑자기 감상적이 되어버린데에 대한 쑥스러움이 밀려와 감추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우재혁을 침실까지 옮기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테니 보일러나 빵빵하게 틀어놔주고 이불이나 두꺼운 걸로 덮어줘야지, 하고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소파에서 재웠다고 아침에 난리라도 피우는 게 아닐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우재혁을 깨워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쑥스럽다고....
침실로 들어서자 마자 일단 담배꽁초를 버리고, 혹 담배가 있을까 싶어 서랍장을 뒤졌다. 우재혁이 사다놓은 게 남아있을 텐데, 하고 뒤적거리니 역시 아직 개시도 하지 않은 담배가 하나 나왔다. 빙고! 하고 속으로 외치고 담배를 꼬나물었다.
반쯤 태우고 난 후에 어슬렁 어슬렁 벽장으로 다가가 제일 두꺼워 보이는 놈으로 꺼내들었다. 담배재가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청소는 내가 하고 있고 우재혁은 집안 일에 관한 한 일제 간섭은 하지 않으니까.
" 읏차-! "
하고 내 덩치만한 이불을 안아들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담배연기를 뻐끔거리며 입술로 빨아들이고 훅- 하고 코로 내뱉는 일련의 동작들을 하며 막 방을 나서고 있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거실 안에 분명 자고 있어야 할 남자가 여전히 소파에 반쯤 몸이 푹 파묻힌 그 자세 그대로, 약간 건방지다 싶을 만한 포즈로 앉아 태연히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마치 남의 집 불구경이라도 하듯 나른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던 반쯤 탄 담배가 자유낙하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런 제기랄, 하고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저건 필시 방금 눈을 뜬 게 분명하지?
하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아무나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그 순간 마치 나를 떠보기라도 하듯 한쪽 입꼬리만을 올리며 씨익 하고 웃는데, 뭔가 불길한 기운이 등줄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불길했다. 그것도 엄청!!!
이리 와, 하고 남자가 명령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은근슬쩍 눈길을 피한 채, 도망갈 곳도 없는 주제에 주춤주춤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에 혹시 화라도 난 게 아닌가 싶어 눈만 삐죽이 뜨고 보다가, 왠지 즐거워 보이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후다닥 눈길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남자가 깨어있었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이름까지 부르며 흔들어 깨웠었다. 자는 척하고 있지 않은 이상, 남자가 알리는 없었다. 물론 자는 척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깨어있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역시 그렇다는 건 홀로 키스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깨어났다는 결론뿐이다.
젠장! 지금이 딱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바로 그 심정이었다.
" 이리 오라니까. "
어쩐지 한결 부드러워진 남자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드니, 남자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여기 앉으라는 듯한 제스처를 해 보였다.
도피하듯 슬쩍 시선을 내리자, 입에서 떨어진 담배가 바닥에 나뒹군 채 여전히 뽀얀 연기를 뽑아내며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그걸 주워서 다시 태울까 말까 고민했다.
품 안 가득 껴안고 있던 이불 때문에 약간 우스꽝스런 자세가 되었지만 결국 거지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한 모금 빨면 달아져버릴 담배꽁초를 주워들었다.
이제 이불을 덮어줄 일도 없으니 그냥 거실 아무데나 내려놓으면 될 걸, 그 생각조차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담배꽁초를 손에 쥔 채 어쩐지 자랑스럽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남자의 두 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걸 왜 주워? 하고 눈으로 묻는 남자에게 괜히 머쓱해진 나는 "그, 그냥 아까워서...." 하고 안 해도 될 말까지 지껄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는 정말 딱 한 모금 빨고 나니 필터만 뎅그러니 남아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는 건데...하고 뒤늦게 후회를 하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 ....... "
" ....... "
뭔가 잔뜩 이죽거리는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던 나는 남자가 아무 말이 없자, 괜히 안도하며 이제부터 입 조심 하자, 하고 자신을 타이르고는 침묵하는 남자와 같이 덩달아 입을 꾹 앙 다물었다. 그리고 무슨 방패라도 되는 양 품에 안은 이불을 더 꼬옥 끌어안으며 남자가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자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남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비웃는 건가, 하고 순간 확 기분이 나빠지려는 데, 일순 추워서 저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많이 삐뚤어져 있었나 부다, 하고 혀를 차며 그에게 다가가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당겨 머리만 보이게 푹 덮어주었다.
" 원래 자다 깨면 더 추운 법이래. "
하고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거절할까 봐 뭔가 입을 열려던 남자의 말을 막으며, 미리 못을 박듯 말했다.
남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를 올려다보더니 다행히 거절할 생각은 없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며 대신 픽, 하고 웃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바란 것은 결단코 아니었지만 그 웃음에 왠지 비웃음이 실려있는 것 같아 순간 비윗장이 팍 하고 상했다.
그래도 한편으론, 내가 도망치기 전 상태와 다름없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분위기에 다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나는 남자에게 들키자 마자 그 자리에서 살인이라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것도 남자로선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이왕 죽을 거 도희를 살리고 죽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선 남자는 한 번 더 나를 놀래켰다. 분명 보는 눈이 많아 안에서, 아무도 안 보이는 데서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엉뚱하게도 내게 씻으라는 명령만 할 뿐이었다. 역시 실컷 안고나서 죽일 작정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죽기 직전까지 강간을 하고, 겨우 목숨만 붙어있을 정도로 만들어서 어느 다리 밑에라도 버려버릴 거라고, 아니면 사창가에라도 팔아버릴 거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욕실 문을 나섰는데, 남자는 어이없게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라니...하고 당황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상황에, 도희가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남자의 잘 생긴 얼굴에 유혹 받아 덜컹 키스해버린 내 자신이 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중엔 경멸스럽기 까지 했다.
나를 더 놀래킨 것은 자다 일어난 후의 남자의 태도였다. 지금의 우재혁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나를 발견하고 불 같이 화를 내며 도희를 가지고 협박했던 우재혁과 과연 동일인물이 맞나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금의 우재혁은 뭐랄까...화 난 사람이라기 보단, 따스한 봄 햇살에 낮잠 자다 금방 기지개를 펴고 일어난 한 마리의 나른한 고양이 같다는 느낌이랄까...아무튼 이미지가 그랬다.
" 앉아. "
도희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돌입해 버린 내가, 그의 앞에 꼿꼿이 서서 표정을 굳히고 있자니, 남자는 그런 것따윈 아랑곳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나른하고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명령했다.
뭐 하자는 짓일까, 하고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의 명령대로 그가 가리킨 옆자리에 주저주저하며 간신히 엉덩이만 걸쳐진 듯하게 앉았다.
" 석영아. "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암튼 지금 그의 기분이 그리 나빠보이진 않으니까 슬슬 도희의 얘기를 꺼내도 되겠지?
" 석영아? "
아니면 좀 더 지켜보는 게 나을까? 분위기가 좀 더 나아지면...에잇, 그러다가 그 사이 도희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럼 어쩌라구! 역시 지금 얘길 꺼내는 게 낫겠어.
하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친 그가 아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일순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놀라움과 당혹감이 약간 섞인 듯 하면서 뭔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인데, 마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픽, 하고 또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또 비웃는 건가 싶은 게 순간 기분이 확 하고 나빠진다.
아무리 제멋대로의 남자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남 비웃을 생각이 드냐? 내가 아무리 가소로워도 그렇지 상대의 기분도 좀 파악해 줘가면서 비웃으라구, 이 자식아!! 하고 면전에 대고 퍼부어주지 못하는 걸 못내 아쉬워하면서 소리 없이 이를 빠드득 하고 갈았다.
제기랄, 아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어떻게 제정신 갖고 이딴 자식한테 키스를 할 수 있겠어! 그래, 아깐 이 놈의 잘생긴 얼굴에 혹해서, 아니지, 그저 잠자는 얼굴이 좀 괜찮아 보여서...실수로, 그래 실수로 그런 것 뿐이야! 절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다구!!!
" 우재혁. "
하고 분노를 토해내던 생각과는 달리 하염없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문도희라는 커다란 약점이 잡혀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비굴해 질 수밖에 없다고 움츠려 들려는 자신을 애써 타일렀다.
" 재혁아. "
" ......? "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도 '재혁아' 하고 불러대는 바람에 말문이 탁 하고 막히고 말았다.
어이가 없었다. 이 놈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은 게,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닌 듯 싶었지만 이제서야 확실하게 맛이 가버린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정말 태연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이번엔 잘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 앞으로 그렇게 불러. "
" -? 응? "
" 앞으로 '재혁아' 라고 부르라구. "
" 뭐...뭐...? "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자, 놀라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러자 왜, 냐고 되묻는다.
세상에, 왜냐고? 그건 내가 할 말이지!! 하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연다.
" 싫으면 '재혁씨' 라고 부르던가. "
헉! 그건 더 싫다. 나는 열심히 도리질을 했다. 하마터면 미친 놈, 하고 소리칠 뻔했지만 꾹 참고 싫다는 제스츄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이도저도 다 안 먹히니까 방법을 바꾸어서 이름으로 나를 갈구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하여튼 잔머리 하나는 엄청 잘 돌아가는 놈이다, 하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쯧 하고 차고는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도 너무나 강렬해서 차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시선이.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쳐 주자, 남자는 뭔가 바라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정작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또 뭔 말을 하려고 자꾸 뜸을 들이나 싶어 불도 못 붙이고 기다리고 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듯하다. 어쩐지 한기가 느껴질 만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담배를 달라는 건가 싶어, 슬쩍 피 같은 내 담배를 내밀자 인상을 팍 하고 구긴다. 이게 아닌가?
그러고보니 우재혁이 담배 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담배를 못 피우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가 섹스 후 꼭 한 모금 직접 빨고 건네주는 우재혁을 떠올리자 그것은 아닌 것 같은데....
몸 엄청 챙기는 놈인가 보다, 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담배가 아니라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바로 눈앞의 남자다. 험악한 인상으로 보아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분위기였다.
제기랄, 아무래도 아까의 도둑 키스에 대해 알고 있으니 내 입으로 직접 불으라는 심보다.
이런 악랄한 자식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쪽팔려 죽겠는데 좀 모른 척 해주면 어디에 종기라도 나는지, 우재혁은 꼭 저런 식으로 나를 밑바닥까지 다 내 보이고, 수치란 수치는 다 까발려서 끝끝내 나를 괴롭히고 가지고 놀려는 것이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우재혁의 방식이다.
" 아우, 씨- 그걸 꼭 들어야 겠냐? 그냥 모른 척 해주면 안 돼? 안 그래도 민망해 죽겠는데.... "
하고 일단 뒤로 빼보려 하자 인상을 팍 하고 쓰며 무언중에 압박을 가해 온다. 안 불면 죽어!! 하고.
" 아, 그래! 다 불면 되잖아! 우이씨! 그래, 나 너 잘 때 도둑키스 했다. 것도 환장해서 덤벼들었다. 씹! 그냥 지나가면 어때서, 새끼, 안 그래도 민망해서 콱 죽어버리고 싶은데...시팔, 너, 너랑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데...꼭...그걸 꼭.... "
내 일생일대의 쪽팔린 고해성사였다. 비웃으려면 실컷 비웃어! 하고 분명 삶은 토마토처럼 벌개진 얼굴을 푹 수그리며 입술을 삐죽거린 채 속으로만 그의 욕을 백 만개쯤 씨부렁거리고 있는데, 예의 그 타이어 바람 빠지는 비웃음이 들려오지 않는다.
분명 이쯤에서 들릴 때가 됐는데...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건 비웃음이 아니라, 어쩐지 웃음기가 가득 담긴 그의 즐거워하는 목소리였다.
" 나 잘 때 키스했다라.... "
" ......? "
" 그것도 환장해서 덤벼들었단 말이지? "
" ......?!! "
" 근데 테크닉이 형편없었나 봐. 아무리 자고 있었다고 해도 어째 느낌이 하나도 안 올 수가 있냐. "
" !!! "
웃고 있는 남자의 눈이 분명 '바보'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뭐야? 젠장, 북 치고 장구 치며 나 혼자 쇼한 거란 말야? 그럼, 정작 묻고 싶었던 건 뭔데? 네가 뭔가 잔뜩 묻고 싶은 눈빛으로 바라보니까, 내 딴엔 제발 저려서...제길!
" 자고 있는데 키스를 하는지, 굿을 하는지, 내가 알 턱이 없잖아. "
" ......!!! "
" 그냥 이름 불러달라고 쳐다봤던 건데.... "
" !!!!! "
" 그렇게 다 불어버릴 줄은 몰랐지. "
마치 내 마음 속의 절규를 다 들은 양 남자가 술술술 잘도 대답해 준다. 내 약을 살살살 올리기라도 하듯 일부러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보란듯이 눈가를 일그러뜨린 채 한껏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다.
뭔가 반박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다는 것이 더 분해서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니, 남자가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한마디 더 덧붙인다.
" 내가 좀 잘 생기긴 했지만, 남자한테 덮쳐질 정도였던가? "
마치 혼잣말 같은 말. 그럼에도 나 들으라고 일부러 지껄인 것이 분명한 말. 그리고 키득키득 웃는데, 눈물이 핑 돌만큼 분하고 쪽팔려서 정말 성질 같아선 주먹이라도 꽂아주고 싶었다.
" ...벌이야. "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이만 부득부득 갈고 있자, 남자가 와락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또 무슨 말을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하고 생각하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 아까 상을 줄까 하고 불렀는데, 딴 생각한 벌이야. "
" 무슨...? "
하고 물으려는 순간, 얼결에 끌려가서 그의 단단한 가슴에 파묻히듯 안겨지고 말았다. 어느새 이불은 치워진 상태였다.
왼쪽 뺨에 그의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전해져 왔다. 귀가 심장 가까이에 있으니 그 소리는 한결 우렁차게 들려온다. 마치 우재혁의 가슴이 정말 그렇게 뛰고 있다는 듯, 아주 강렬한 울림이다.
괜시리 민망해져서 얼굴을 떼려고 하자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뒤통수를 잡은 채 꽉 하고 누른다. 그 덕에 조금 떼어진 뺨이 그의 뛰는 가슴 위로 다시 밀어붙여 졌다.
" ...숨 막혀. "
하고 호소하자, 그제야 손에 조금 힘을 푼다. 그렇다고 아예 뒤통수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방금 전 민망한 일이 있었고, 또 이렇게 민망한 자세로 그에게 새색시처럼 안겨져 있자니 절로 얼굴이 붉어진다. 어떡하든 남자의 품안에서 빠져나오려 애써보지만 다른 한 팔이 허리에 드리워져 꽉 하고 죄어오자 이젠 바둥거리는 것조차 힘들어져 버렸다.
" 야아, 우재.... "
혁, 하고 이름을 부르려고 하자 단번에 "이름 불러." 하고 재촉해 온다. 아, 그러니까 이름 부르려고 하는데 네가...하고 따지려는데, "싫으면 재혁씨라고 부르라고 했지?" 하고 말했다. 그제야 그가 재혁아, 라고 부르라고 시켰던 것이 떠올랐다.
" 우씨, 재혁아.... "
" 나 우씨재혁, 아니다. "
생퉁 맞게 그리 말하길래 속으로 쫌스런 자식, 하고 욕해주었다.
" 재혁아. "
하고 부르자 그제야 착실하게 대답해 오는 남자에게 순간 살인충동을 느끼며 애써 딱딱해지려는 목소리를 바로 하며 말했다.
" 이것 좀 치워주라. 진짜 숨 막혀. "
" 싫어. "
제길, 그럴 거면서 괜히 이름은 왜 부르라고 시켰냐?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진짜 '응' 하는 대답이 날아올까 봐 참았다. 이 자식은 그렇게 대답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 석영아. "
" 치, 뭐...? "
괜히 목소리가 삐딱하게 나간다. 그래놓고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 마음 조리고 있자니, 다행히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우리 이렇게 이름 부르자. "
라고 말했다. 난 또 뭐라고.
" 언제는 이름 안 불렀었나? "
" 난 성 붙여서 부르는 거 딱 질색이거든. "
" 흐음, 그래? "
이상한 녀석, 하고 생각하고 있자니 남자의 말이 이어진다. 독백 같은 목소리.
" 연인들끼린 성 빼고 불러야 더 다정해 보이잖아. "
" 그런가? 난 상관없던데. "
" 남들이 보기엔 성 붙여서 부르는 것보다 빼고 부르는 게 더 다정하게 보일 거 아냐. "
" 그건 그렇지. "
" 당사자들끼리 친밀감도 생기고. "
" ....... "
" 돈독해 보이잖아. "
" ....... "
" 나중에 정도 더 많이 쌓일 거야, 아마. "
" ....... "
대충 호응해 줘야 하는데, 대답할 수가 없다. 뭔가 반박할 수도 없다. 이상한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생각해 버린다.
" 재혁아. "
" 응. "
갑자기 불렀는데도 놀라지 않고 바로 대답이 날아온다.
" 너.... "
" ....... "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화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자꾸 목소리를 기어 들어가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아니야 그냥 들은 걸로 쳐, 라고 말했다간 한 대 맞겠지?
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 남자 예상외로 끈질기게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다. 뭔가 기대라도 하는 듯이. 이럴 땐 예의 상으로라도 말해줘야 하는 거겠지?
" ...혹시.... "
" ....... "
" ...낮술 했냐? "
갑자기 나를 획 밀쳐내며 황당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는 남자. 음, 그건 아닌가 보군, 확실히 술 냄새는 안 났으니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너 술 마시니까 은근히 말 많다, 라는 말은 하지않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풋, 하고 갑자기 우재혁이 웃는다. 나는 눈만 동그래져서 비웃지 않고 순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낮술 한 거 같애, 하고 말을 하려다 문득 남자의 웃음을 멈추게 할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 너 네 자신이 이상한 건 아냐? "
하고 남자가 말했다. 내 보기엔 니가 더 이상한데, 정작 본인은 나더러 이상하댄다.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자니 남자의 기다란 팔이 단번에 허리를 끌어안아 온다. 다시 남자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듯 폭 안겨져 버렸다. 숨막혀, 하고 주먹으로 등을 탕탕 두드려 봤지만 모른 척하며 가만히 껴안고만 있다.
젠장, 이러고 있으면 괜시리 연인사이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서 일부러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어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꽉 끌어안고 놔주질 않는다.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고.
정말 이상해, 하고 말하더니 너 같이 이상한 애는 정말 처음이야, 하고 또 욕 같은 말을 덧붙인다. 네, 이상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자니 우재혁이 먼저 도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잔뜩 들떴던 그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은 것이 느껴진다.
" 그 자식이 그렇게 소중하냐? "
" 응. "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망설일 것도 없다. 그러자 바로 질문이 날아든다.
" 네 목숨과 맞바꿔도 될 만큼? "
" 응...친구니까. "
아무리 밑바닥 인생인 나라도 친구 하나 쯤은 있다, 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대답 뒤에 약간 뜸을 들인 후 '친구니까' 를 덧붙였다. 소중하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이, 마치 너 같은 거한테도 친구란 있냐, 라고 들려서 괜시리 기분이 나빠지고 있는 중이였기 때문이다.
" 나, 그 자식 놔줄 생각 없다. "
" 뭐...? "
남자의 말에 순간 머릿속이 멍 해진다. 역시 본론은 저거였냐, 우재혁? 하고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이 입을 통해 나갈까 봐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본다.
방금 전까지 두근 거렸다는 게 거짓말처럼 서로 맞닿아있는 살갗에 소름이 끼쳐온다. 불쾌감으로 끈적거리는 남자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바둥거려 보지만 역시나 꿈쩍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우재혁보다 덩치가 작아도 나도 남자라 주먹에 온 힘을 실어서 사정봐주지 않고 등을 후려치면, 꽤나 아플만도 한데 그는 아픈 내색조차 않고 굳건히 말을 이어나간다.
" 그 자식을 놔주면 너는 또 도망갈 테니까. 너 아까도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도망갈 수 있었는데, 그 자식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던 거잖아. 그 자식만 묶어두고 있으면 너는 자연히 내 거가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더더욱 놔줄 수 없어. "
" 야아- 우재혁!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 듣게 좀 설명해 봐!! "
" 그 자식이 네 자물쇠가 되는 거야. 너만 얌전히 내게 잡혀 있으면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감시만 할 거야. 네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그 자식한테 가해가 가게끔 명령해 놓고 감시만 할 거야. 그러니 네가 다시한번 내게서 도망간다면 다치는 건 네가 아니라 그 자식이 되겠지. "
" ......!!! "
" 목숨보다 소중한 녀석을, 설마 나 몰라라 하진 않겠지? "
" !!!!! "
잊고 있었다. 이 자식은 악마보다 더 사악하고 악랄한 녀석이라는 것을. 웃고 있으면서도 뒤로는 칼을 가는 그런 녀석이라는 것을. 나는 바보같이 매번 잊어먹고, 그리고 매번 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 치사하다고, 비열하다고 생각해도 좋아. 평생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좋아.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걸 얻고 싶었다. 심지어 움직이지 않는 네 마음까지도 얻어보자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너무나 허황된 꿈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
"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젠장...! "
마치 변명같은 남자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그걸 생각해서 풀이할 여력이 없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머리가 입력시킨 것은 내가 도망가면 도희가 다친 다는 것뿐. 나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녀석이 대신 벌을 받게 된다는 것뿐. 그 사실뿐이었다.
새삼 깨달아 버린 진실에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독한 악마에게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올가미에 덜컹 붙잡혀버린 작은 짐승이 되버린 것이다. 처음엔 도망칠 곳을 없애버리더니, 이젠 도망칠 이유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사로잡은 걸로도 모자라 끝끝내 족쇄까지 완벽하게 채워버린다.
이런 남자에게서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두려움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스물스물 기어들어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 그래도 한 번쯤은 너를 믿어보고 싶었다. 너를 믿어보자고 생각했지. 그래서 눈이 오지 않아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믿고 싶어서 일부러 자리를 피해줬었다. 그런데 넌, 그새를 못 참고 바로 달아나 버리더군. "
젠장,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머릿속이 윙윙 거리기 시작했다.
" 배신한 건 너다. 난 그래도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면 기뻐서, 혼자 들떠서 좋아했었다. 모두 어리석은 짓이었어. 이젠 희망도 기대도 다 버렸으니 아무렇지 않게 너를 대할 수 있겠지. "
제기랄!! 알아듣게 좀 설명해!!!
" 방금 잠든 척 한것은 마지막 시험이었다. 넌 늘 내게 거짓말만 하니까, 오는 차 안에서 한 네 얘기도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믿어보자고 생각했지.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 또 거짓말을 한 거라 여겼다. 그런데...넌 뜻밖에도 내게 키스를 하더군. "
" !!! "
"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예상밖이라 조금 놀라기도 했고.... "
" ....... "
" 이렇게 다 설명해 주는 것은, 일종의 답례라고 생각해라. 예상밖의 일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들뜬 기분이 되었던 건 사실이니까. 내 기분에 동조해준 나름대로의 답례라고 생각하고, 듣고, 잊어버려도 좋다. "
언제나의 말투로 돌아온 우재혁은 마치 책을 읽어내려가 듯 사무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뭘 잊으라는 거지? 가슴 깊숙한 곳에 있던 이상한 감정들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와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멋대로 머릿속을 어지럽혀 놓는다.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단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어이없게도 나는 우재혁의 손바닥에서 그의 뜻대로 잘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걸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나는 우재혁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우리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같이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고, 가끔 대화라는 것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름대로 평온한 일상이었지만, 시간이란 것은 늘 제멋대로 빨리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가 취직을 하면서 텅 빈 방안에 홀로 있을 때가 많아 그렇게도 가지 않던 시간이, 학창시절에도 읽지 않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책이란 것은 마치 블랙홀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나를 빠져들게 했다. 내가 이렇게 지식에 굶주렸나 싶을만큼 교양서적에서 부터 소설, 시집은 물론이고 그의 전공서적까지 책이란 책은 가리지 않고 모두 보게 되었다.
더 이상 읽을 거리가 없다고 투덜대자 그 후로 일주일에 한번꼴로 그가 이런저런 종류의 책을 사들고 퇴근을 하곤 했다. 그가 취직을 하고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서재는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어버렸고 그가 사 준 책이 하나둘 늘어갈 수록 그 곳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횟수도 많아졌다. 하지만 깨어나보면 언제나 나는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이 곳에서 동거라는 명명아래 나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늦어도 그는 이 곳으로 퇴근을 했고, 늘 출근도 이 곳에서 했다. 그럼에도 그가 취직을 하자 얼마동안 섹스는커녕 그의 얼굴 보기조차 힘들어져 버렸다. 그래도 내 곁엔 책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여름에 들어서기 직전, 어느 날 그가 "그렇게 책이 좋으면 네가 직접 써보는 건 어때?" 하고 마치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흘러들으며 잊고 있었는데 며칠 후, 아무거나 써 봐, 하고 그가 또 다시 같은 말을 꺼내왔다. 무슨 소리냐고 묻자, 그냥 끄적거리는 수준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아무거라도 써보라고 우재혁답지 않게 끈질기게 그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왠지 나 같은 인간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줄곧 미루다가 가을로 들어설 즈음, 무슨 생각에서 인지 나는 단편 하나를 쓱쓱 써내려 갔다. 아마도 어느 일본 작가의 글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후기에 그저 '쓰고 싶어서 썼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글이 무진장 쓰고 싶어져 버렸고,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닷새만에 완성시켜 버리는 경이로운 기록을 갱신했다.
남한테 내보이기 창피한 내 처녀작을 그에게도 숨기고 있었는데, 컴퓨터 어딘가에서 용케도 찾아낸 그가 창피해서 싫다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읽어 보겠다고 주장했다. 나는 결국 끝까지 말리지 못하고 그가 거실 소파에서 두시간 가까이 앉아 내가 탈고한 글을 읽는 동안 어쩐지 나는 안절부절 했다.
어땠어? 하고 다 읽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속으로는 기대하지 말아야지, 기대한만큼 실망도 큰 법이야, 하고 자신을 타이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입에서 쓴소리보다 좋은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뭔가 그럴 듯한 비평을 해주길 바라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으음, 그럭저럭 되겠어. "
하고 그는 마치 혼잣말이라도 하듯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실망한 나를 본 척도 않고 원고뭉치를 들고 훌쩍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단한 말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년이나 넘게 살붙이고 산 인간에게서 저런 말이 나오니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쯤은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우재혁은 우재혁이었다. 그는 확실히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고 절대 바른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 우재혁이 맞았다. 그래도 그럴땐 빈말이라도 '좋아' 정도는 해주는 최소한의 성의쯤은 보였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내가 쓴 글이 '파란달' 이라는 출판사에서 '구름 뒤에 숨다'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나온 것은 그 뒤로 약 보름정도가 지난 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한 우재혁이 내민 봉투 속에 서너권의 책이 들어있었는데, 거기엔 내 이름하고 똑같은 사람이 쓴 책이 한 권 있었다. 이런 희한한 일도 있구나, 하고 읽기 시작하는데 제목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는데 내용은 어디서 많이 본 거였다.
놀라서 우재혁을 올려다보니 남자는 그거 네 책이야, 하고 이 대단한 사건을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해 주었다.
어떻게...? 하고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자, 아는 사람한테 부탁했어, 하고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 다음엔 좀 더 잘 써라. 이번에는 어떻게 출간은 되었지만 다음 번엔 어림도 없단 말이다. "
였다. 제목은 하도 구리구리해서 출판사에서 멋대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또 출간됐을 수도 있다는 거야? 하고 들떠서 묻자 작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니가 좀 더 잘 쓰면...하고 말했다.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남자가 지나가는 투로 "네 책 은근히 반응 좋다더라. 재판할 모양이야." 라고 말해주었다. 말은 무심한 척 해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이라도 하려는지 그가 자신의 서류가방에 내 책을 꼭꼭 챙기고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나름대로 서툰 인간이었다.
해가 바뀌기 전에 이번엔 장편으로 책 한 권을 더 냈다. 내 책을 담당하시는 분이 전화로 이곳저곳 고칠 곳을 지적해 주었는데, 생각보다 고칠 곳이 많아서 놀랐다. 맞춤법도 상당히 많이 틀려있어서 애매한 곳은 국어사전을 뒤져가면서 쓰곤 했기 때문에 이번 원고을 쓰는데 두 달이 넘게 들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을 들인만큼 꽤 정성스레 써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글 한편을 완성시키기 위해 시놉시스를 만들고 자료를 찾고 인터넷을 뒤지고 하는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 좋았고, 내 손가락을 통해 만들어낸 한 글자 한 글자가 하나의 문장을, 그리고 그 문장들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그 기간들이 흐르는 게 못내 아쉬울 만큼 즐거웠다.
그러고보면 남자의 권유로 쓰기 시작한 글이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는 꽤 만족하고 있었던 듯 했다.
담당하시는 분과 통화를 할 때면 우재혁은 늘 눈에 불을 켜고 날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내가 이상한 말을 내뱉을까 봐 감시하는 모양인지 통화하는 내내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늘 자신이 없을 때는 절대 통화따윈 하지 말라고 협박아닌 협박을 하며 신신당부를 하곤했다.
거기에 대고 뭐라 반박할 수도 없어 망연히, 궁금한 거 있을땐 어떻게 해? 하고 물으면 참았다가 자신이 퇴근하고 나면 물어보라는 것이다. 내가 그래도...하고 말을 꺼내려 하자 인상을 팍 하고 쓰는 바람에 그 말은 다시 목구멍으로 쏘옥 들어가고 말았다.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통화를 하다가도 30분이 넘어가면 돈도 잘 벌면서 그렇게 전화세가 아까운지 당장 끊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저 쪽에서 건거라 전화세 안 나가, 하고 말 해 봐도 소용이 없다. 기여코 끊게 하고는 했다는 수작이, 저녁을 먹기도 전에 옷부터 벗기려 했다.
뭘 할지 뻔했기에 싫다고 뒤로 빼도 듣는 척도 안 하고, 무조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 것을 움켜잡아 버린다. 윽, 하고 신음을 토해내는 사이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겨내고 그것을 홀랑 입에 담아 버리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내가 펠라에 약하다는 걸 알고 매번 그것으로 공격을 하는 남자였다.
나도 끝까지 반항하고 싶은데, 제멋대로 몸이 배신해 버리니 어쩔 수가 없다. 고스란히 그의 입에 사정을 하고, 곧 그의 성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나도 섹스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밝히는 편은 아니지만, 그와의 섹스는 부드럽고 충분히 쾌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하는 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뿐이라면 나도 매일밤이라도 대줄 수 있다.
문제는 한 번 시작하면 날이 샐 때까지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그의 체력에 있다. 그는 전혀 지치지 않는지 나는 정말 죽기 일보직전인데도 그는 끊임없이 박아대며, 매번 질리지도 않는지 전혀 대답해 주지도 않는 내게 다정하게 '석영아' 하고 부르고는 '좋아?' 하고 물어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 '좋아' 라고 대답했다가 완전히 흥분해 버린 남자로 인해 기절하는 사태에까지 치달아 버린 나는 그 뒤로 절대 그의 말에 동조해 주지 않는다. 안 그래도 그와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듯이 침대에서 지내야만 하는데, 그 날은 삼일만에 링겔를 맞으며 깨어나야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을 근육통으로 시달리며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는 늘 그 날 일을 떠올리며 치를 떨곤 했기 때문에,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무리 달콤해도 좋아, 하고 묻는 음성이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황홀하다 해도, 혹 실수로라도 그의 말에 동조해 주는 불상사는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 그 뒤를 끔찍할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아예 그에게 대놓고 그것에 대해 설명했지만, 남자는 분명히 들어놓고도 뭔 소리야? 하고 딴소리를 했다. 자제 좀 하라고 누구 죽일 일 있어, 하고 닦달이라도 할라 치면 대답은 알았어, 하고 해놓고, 당장 그 날밤 보복을 하듯 다른 날보다 더 심술 맞게 섹스를 하곤 하는 것이다.
그는 나를 달아오르게만 만들어놓고 정작 만져주지 않고 잔뜩 애를 태우며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럼 난 할 수 없이 애걸복걸하게 되고, 그는 그것에 다른 날보다 몇 배는 흥분해 버린 채 잔뜩 커다래진 불기둥을 거칠게 마구마구 쑤셔대 버린다. 이것은 완전 짐승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서 한 번의 섹스만으로도 나는 단번에 초죽음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그것이 한번이라면 그나마 나은데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삼일 밤낮을 내리 앓아 누울 정도로 심하게 당한 후로, 더 이상 그에게 섹스에 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게 되었다. 말했다시피 그는 악마였다.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경비실에서 이 곳의 출입을 막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은 이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문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누구세요, 하고 숨죽이며 묻자 아무 대답이 없다. 다시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이번엔 더 크게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문 열어, 하는 억누르는 듯 보이지만 약간 날이 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낯익은 음성.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써도 잊을 수 없는,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자신을 옭아매던 그 음성이, 서서히 나른할 정도의 평온을 조금씩 조금씩 깨뜨리고 있었다.
" 표정을 보아하니 날 잊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
내가 있다는 걸 꼭 알고 온 것처럼 그는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그저 어제 헤어졌다 만난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바로 당신인데, 아직도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를 악물고 버텨냈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렇게 태연히 지껄일 수 있는 거지, 당신은?
남자는 조용히 분노하고 있는 나를 지나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며,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 거실 안을 한바퀴 쭈욱 훑어보았다. 그리고 빈정거리듯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 비록 갇혀있어도 구색은 다 갖추었군. 꽤 살만한가 보지? "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 버릇은 여전했다. 특유의 빈정거리며 속을 뒤집어 놓는 말투도, 아랫사람 내려다보듯 시건방지고 깔보는 듯한 눈초리도, 15년이란 세월을 실감하게 해주는 눈가와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만 아니라면 남자는 그때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내 눈앞에 있었다.
치가 떨리도록 싫었던 얼굴이었다. 내 얼굴이 점점 그를 닮아간다는 사실만으로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었다.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칼은 꽂아주지 못하더라도 주먹이라도 실컷 날려줘야지, 하고 이 분이 풀릴 때까지 패주기라도 하자, 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래도 아버지라고,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오랫동안 갇혀있어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을 뿐, 굳이 이 남자가 아니더라도 우체부 아저씨였더라도 난 눈물을 흘렸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변명하며 얼른 눈물을 훔쳐냈다. 꼴사납게 울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다.
거실을 둘러보던 남자는 어느새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현관 앞에서, 그는 태연히 거실 안쪽에서, 마치 주객이 뒤바뀐 형상으로 우린 한동안 그렇게 마주보며 서 있었다.
" 차라도.... "
하고 먼저 눈길을 피하며 입을 연 건 나였다.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혼란스러웠던 나는 그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나를 찾아왔는지, 그를 보자마자 떠올렸어야 할 아주 당연한 의문조차도 품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곳은 우재혁 밖에 모르는 곳이었기에, 나는 그와 우재혁과의 관계에 의문을 품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달아나듯 급히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존재감에 숨이 막혔다. 조금이라도 그의 눈을 피해 숨을 몰아쉬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갑갑했고, 생각을 정리하긴 커녕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서 커피를 타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몇 번이고 컵을 떨어뜨릴 뻔하고 뜨거운 물을 엎지를 뻔했다.
" 여긴, 어쩐...일로...? "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 널 보러 왔지. 어떻게 지내는 지도 보고...그게 아비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냐. "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가 말했다. 15년 동안 나를 버려 두었던, 초등학교 2학년 짜리 아들과 몸이 약한 아내를 버리고 달아났던 남자의 입에서 태연히 그런 말이 나오자, 새삼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 어...어머니가 죽었어.... "
" 알고 있다. "
" 당신 때문에 죽었어!!! "
두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치자 그 반동으로 컵에 담겨져 있던 갈색 빛의 액체가 쏟아졌다. 액체는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져 카펫 위로 뚝뚝 하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자꾸만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커피를 쏟아낸 컵은 테이블 위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엎어져 있다. 마치 내 모습 같아, 더욱 분한 기분을 감출 길이 없다.
남자는 내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손님처럼 커피를 홀짝이고만 있다. 마치 이 속에 있는 내가 이방인인 듯한 기분이 든다.
별 볼일 없는 인스턴트 커피가 최고급커피라도 되는 듯, 향기를 맡고 음미하듯 한 모금을 마시고는 천천히 마시던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남자가 무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짜임새 있는 그 일련의 동작들에 일순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나올 듯 짜증이 치민다.
" 왜 나 때문이지? 난 그 여자보고 죽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말조차 꺼낸 기억이 없어. "
" 당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잖아!! "
" 불쌍한 여자였지만 가증스런 여자였다. 그 여자는 자신의 죄 값을 그런 식으로 치른 것 뿐이야. "
" 어머니를 모욕하지마! "
" 난 본래 욕심이 많은 인간이다. 여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내 포부에 차지 않는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바로 나다. "
"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거야? "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노동작부로 한 평생을 사시면서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사람에게 수치를 당해도 굽신거리기만 할 뿐 끽 소리 한 번 못내는 아버지를 보며 컸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비는 어머니를 보았다. "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귀를 막아버리고픈 충동을 느끼며 히스테릭하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 남자 앞에서만큼은 웬일인지 냉정을 찾을 수가 없다. 우재혁 앞에서는 그렇게도 싸늘했던 가슴이, 이 남자 앞에서는 사정없이 요동친다.
" 난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악착같이 공부했고 성공해야지 하고 이를 악물었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일 따위 양심에 꺼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이런 내가 왜 그런 별 볼일 없는 여자와 살았다고 생각하냐? "
기껏 찾아와서 했다는 말이 악랄한 거짓말 따위냐, 하고 애써 마음 속의 동요를 숨기며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태연히 비웃어주고 싶었다.
" 나를 속인 건 그 여자였다. 부잣집 외동딸인 것처럼 나를 꼬드겨서 떡 하니 애를 베고 나서야 내게 고백을 했다. 자신은 고아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자라고, 사랑해서 그랬다고...임신 8개월이 되고서야 울면서 다 털어 내놓더군. "
남자의 두 눈이 나를 직시했다. 얼마나 더 거짓으로 꾸며낼 작성인가, 하고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생각했다.
" 그런 여자 따위 뱃속에 있는 너만 아니었음 미련 없이 버렸을 거다. 10년만 같이 살자고 애원하더군. 그럼 더 이상 미련이 없을 거라고...그 뒤엔 내 뜻대로 널 돌려주고 자신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주겠다고...그렇게 애원했다. "
" ....... "
" 약속을 어긴 것은 그 여자였다. 처음부터 약속 따윈 지킬 생각이 없었고, 10년이란 세월에 묻혀 그럭저럭 살아갈 줄 알았던 거지. 훗, 우습게도 그 여자는 날 너무 얕봤던 거다. 너를 돌려달라고 하자 어리석은 그 여자는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난 그러라고 했다. 자식 따위 성공을 위해선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거라고 말했지. "
" 거짓말.... "
" 그 여자는 너만 있으면 나를 잡을 줄 알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멋대로 죽어버린 거다. 누가 더 손해를 봤다고 생각 하냐? 그 여자에게 속아 10년이란 세월을 낭비해 버린 건 바로 나인데, 언제까지 그 여자만 피해자인 척 감싸고 돌 거냐? "
" 거짓말이야!!! "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쳤다.
남자의 말이 하도 같잖지 않아서 비웃어 주려고 했는데...구라 까지마, 하고 비웃어줘야 하는데...일순 사고회로가 뚝 하고 끊기면서 더 이상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뭔가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막막해진 기분으로, 애써 터널을 빠져나왔는데도 다시 깜깜한 동굴 안에 갇힌 숨막히는 기분으로, 나는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날 증오해도 좋아. 널 버린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 동안 너를 잊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너의 증오만은 달게 받도록 하지. "
" 허튼 소리 마! 그렇다면 지금은 왜 찾아 온 거지? 뭐 하러 찾아온 거야? 새삼 핏줄이 그리워지기라도 하셨나? "
" 난 그렇게 감상적인 인간이 되지 못해서...떠올리기도 싫은 시덥잖은 과거를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게 충고를 하러 왔을 뿐이다. "
" 충고? 하! 충고라고? 감히 당신이? "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리자 목소리에도 엷게 떨림이 묻어났다. 거짓말하는 것은 저쪽인데, 왜 내 몸이 못 견디게 떨리는지 그 이유를 알지 조차 못한 채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 당신의 그 잘난 인생에 단 하나의 오점인 나더러, 세상엔 나오지 말고 영원히 이런 곳에나 처박힌 채 꽁꽁 숨어서 살라고 충고하러 오셨나? "
" ...그래. "
" 뭐...? "
" 널 여기에 가둔 것은 나니까. "
" ......!!! "
" 역시 재혁이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나 보군. 널 가둔 장본인이 친아버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고, 새삼 아버지에게 실망할 어린 아이가 아니라고 말해도, 녀석이 끝내 비밀로 하자고 졸라댔었지. 설마 이제껏 말하지 않고 있는 줄은 몰랐다. "
우재혁이...? 더욱 더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거짓말인데...거짓말인데...생각하면서도 나는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대로 내쫓으면 그만인데 나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이미 마음 한구석에선 그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마음 속에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미 뒤는 낭떠러지뿐인데.
" 생각 같아선 녀석의 뜻대로 평생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지만...이젠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어서 말이지. "
하고 그가 테이블 위로 내던지듯 올려놓은 것은 내가 쓴 책이었다.
" 어느 날 할 일없는 기자 하나가 내 뒤를 캐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 바로 5년 전이었지. 솔직히 매스컴 따위 그다지 두려울 바는 아니었다. 스포츠 신문 4면에 실린 미덥지 않은 기사 하나쯤 없애버리고,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매장시키는 것 따위 내겐 일도 아닌 거였으니까. "
무언가 미심쩍은 기운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그것은 남자의 말에 조금 씩 조금 씩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 문제는 재혁이가 그 신문을 보았다는 거다. "
이미 싹은 돋아나 버렸고, 나는 그걸 뽑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의 말은 독백처럼 계속해서 이어졌다.
" 똑똑한 녀석이라 어머니에게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먼저 와서 그러더군. 과거 따위 지금에 와서 꺼내놓고 이러쿵저러쿵 따져봐야 이미 해버린 결혼을 무를 수 없다는 걸 그 녀석은 알았던 거지. "
귀를 틀어막고 싶은데, 천천히 자라난 싹이 줄기를 뻗어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듣지 않을 수가 없다.
" 네 엄마가 날 속였듯이 나도 그녀를 속이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재혁이와 동갑인 아들이 있다고 했다면...어떻게 될지 너는 짐작도 못할 거다. 그녀는 좀 유별난 사람이라, 어쩌면 나를 죽일 지도 모르지. "
그만 해!!! 하고 소리치고 싶은데 점점 더 자라난 줄기는 어느새 내 온몸을 휘감고 입마저 동여매 버린다. 말 할 수조차 없다.
" 널 가둔 것은 말이다, 세상을 속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재혁이도 적극 동참해 주더구나. 지 엄마를 끔찍이 사랑하는 녀석이라 그녀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지. "
우재혁이란 줄기가 나를 휘감아 이젠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점점 내 숨통을 조이고, 기어코 내 숨을 끊어놓았던 것은, 다름이 아닌 우재혁 본인이었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차근차근 내게 복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 그럼 당신은...몸이 약한 내 어머니는 단칼에 잘라내 버린 주제에...우재혁의 어머니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친아들인 날 감금시킨 거란...그런 소리야? "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나는 어이없이 상처받아 버린다. 답을 알기에 그 질문은 지독한 울림으로 변하여 내 귓가를 맴돌며 몇 번이고 나를 괴롭히고,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피가 철철 흐르는 그 곳에 다시 꽂히고 아예 파헤쳐져 상처를 들쑤셔놓는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신이...당신이 인간이야...? "
뒤끝이 떨리는 게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목 너머로 뜨거운 불길 같은 게 확 하고 치민다. 너무 뜨거워서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은데 목구멍에 탁 걸린 그것은 뱉어지지도 않는다. 단단한 올가미가 되어 나를, 내 목을 짓누르고 있다. 이제까지의 우재혁처럼, 이 곳에 없는 데도 끈질기게 내 숨통을 조이고 있다.
"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바로 나다. "
한쪽 입꼬리만을 올리며 웃는 모습이, 나를 닮아서 더욱 소름이 끼친다. 아니, 내가 그를 닮았다는 게 맞겠지.
" 비열한 자식!!! "
독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가 처절한 비명소리처럼 거실 안에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상처받았는데, 온 몸이 찢겨질 듯한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다는- 아니 오히려 지극히 무심한 듯한 남자의 표정에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다.
" ...잌!!! "
대단히 악질적인 농담을 내뱉고 그 반응을 지켜보려는 듯 거만하게 앉아 대단히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마주친 남자의 동공은 조금의 놀람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럴수록 폐 속 깊숙한 곳이 타들어 가는 듯한 증오가 솟구쳐 오른다. 이대로 당장이라도 놈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살인충동이 인다. 이미 막가는 인생, 그래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내 앞을 가로막는 게 누구든 난 용서치 않아. 그나마 이 정도에서 일을 매듭지은 건 순전히 네가 내 아들이라서다. "
멱살을 잡혀서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차분하게 자신이 할 말만을 이어가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냉혹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과연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인가, 하고 의아해진다.
알싸한 것이 가슴어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도 나...조금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하고 자신에게 묻는다.
" 왜...왜...평생 숨겨도 될 일을 왜 지금에 와서...밝히는 거지? "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묻는 거냐? 얻는 것은 지독한 상처뿐인데, 또 어디를 다치고 싶어서 묻는 거냐? 나는 자조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바람을 가지고 그렇게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내 아버지잖아? 내가 조금쯤은 불쌍하지 않아? 이제껏 혼자 커온 게 기특하지도 않아? 내가 조금은 보고 싶었잖아. 그래서 찾아와 준거잖아. 지금이라도 찾아와 준거잖아... 독백은 공허하게 메아리 친다.
" 당신은 그 정도의 배려도 없나? 모른 척하고 넘어가도 될 일을 왜...왜 굳이...? "
대답하지 않는 남자를 향해 다시 못을 박듯 그렇게 물었다. 스스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질문이 될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상처가 있는 곳에 다시 상처를 내지는 않겠지, 하고 혼자 바래본다.
" 평생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문제는 이 책이다. 더 이상 드러내지 마라. 세상으로 나오지 마라. 지금은 겨우 이름 하나뿐이지만 이렇게 가다간 한도 끝도 없어져 버려. 내가 너까지 잘라내고 싶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멈춰라. "
" ...싫다면? "
" 말했을 텐데.... "
" 잘라낸다는 건...날 죽인다는 뜻...? "
" ....... "
이것은 도박이다, 하고 생각했다. 당신 같은 인간도 아버지라고, 새삼 만나보니 그 아버지라는 어감이 좋아서, 계속 물고늘어지는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게 될 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그나마 엷게나마 존재하는 호감을 잘라내기 위한 나름대로의 도박 같은 거라고, 내 자신에게 애써 변명해 본다.
" 말해 봐!!! "
다그치듯이 소리쳤다.
" ...그래. "
남자의 대답은 아주 당연했다. 이미 예상했던 것이기에 새삼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 그럼 지금 당장 죽여! 난 앞으로도 쭈욱 세상으로 나아갈 거니까, 그래서 당신 말대로는 죽어도 못하겠으니까, 당신이 직접 이 자리에서 내 목숨을 끊어달란 말이야!! "
마지막 도박.
천천히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죽이기 편하게 테이블 위에 몸을 뉘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렵지는 않은데 가슴이 쿵쾅쿵쾅 뛰며 방망이질을 해댄다. 찌릿- 하고 감전이라도 된 듯 가슴 한쪽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진다. 일순 목이 메어오고 전혀 아프지 않은데 눈가가 시큰거린다.
이미 결정 난 승패에 혹시, 하는 희망을 걸어본다.
나는 늘 내 입으로 말했다. 밑바닥 인생, 쓰레기 같은 존재, 손가락질 당하는 더러운 자식, 이라고 내 자신을 그렇게 지칭했다. 그럼 그네들은 예의로라도 아니라고 대답해준다. 속은 아닐지라도 겉으로 만이라도 그들은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사소한 그것에 안도하고 위로를 받았다. 내가 묻지 않으면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기에 나는 그렇게라도 물어서 거짓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것이 나, 박석영의 세상사는 방식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상처를 받아버리는 약하디 약한 인간, 그래서 남에게 조금이라도 밑보일까 봐 오히려 큰소리를 쳐버리는...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요령 없는 인간이 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죽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가장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죽을 용기조차 없는 지독한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뒤에서 큰소리나 치고, 죽는 게 두려워서 죽을 가치조차 없다고 떠벌리고 다니는...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겁한 겁쟁이였다, 나는.
" ...울지 마라. "
아득한 곳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뿌연 시야사이로 남자의 흐릿한 인영이 보인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자는 가만히 날 지켜볼 뿐이다. 손을 내밀어 내 목을 조르지도 않고, 나를 품에 안아 위로해 주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것이 남자의 방식이다.
나는 그것을 방금에야 깨달았다.
정말 '충고'를 하기 위해 온 것뿐이라면 직접 찾아오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자신을 보이기 전에 진작에 죽였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이지 않는 실체 속에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버린 것들이 사실은 진실이었다는 것.
마음에도 없는 말로 서로를 지독하게 상처 입혔다는 것.
누구나 겁쟁이일 수 있다는 것.
우재혁은 내게서 뭘 얻고 싶었던 것일까? 날 가두어 두면서까지 무엇을 그렇게 얻고 싶었던 것일까? 순간 나는 그것이 미치도록 알고 싶어졌다.
" 뭐 하는 짓이야?!! "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하마터면 잡고 있던 손을 놓칠 뻔했다. 그 소리에 이어 신발도 벗지 않고 거칠게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대뜸 두 사람을 향해 포효하듯 그렇게 소리쳤다. 두 사람 다 동시에 남자를 돌아보았다.
우재혁이었다.
뭔가에 대단히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그러잖아도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그리 선한 인상도 아닌 주제에, 두 눈에서 불을 뿜어낼 것처럼 눈에 힘을 팍 주고 노려보는 것이,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빠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등골을 섬뜩하게 할 만큼 거세게 귓속을 파고든다.
그런데도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알 길이 없다.
한참을 눈물만 뚝뚝 흘리며 울던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지금 나를 기우뚱한 자세로 부축하고 있는 남자를 불렀다. 아버지, 하고 부르니 눈에 뛰게 놀라는 남자가, 내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리며 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다말고 날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못마땅한 듯 인상을 팍 하고 구긴다.
뭐냐? 하고 무뚝뚝하게 묻는다. 우는 걸 보는 게 지겨우면 그냥 가버리면 될 것을 남자는 무료한 듯 식은 커피까지 마시면서도 자리를 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갑자기 그런 남자가 조금은 우스워져서 놀리고픈 생각에 아버지, 하고 불러봤다.
일으켜줘요, 하고 말하니 표정이 눈에 띄게 험상궂어진다.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아니면 혼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어린애냐, 하고 꾸짖는 듯한 표정이 차례대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못 일어나겠으니까 그렇지, 하고 앙탈을 부리 듯 말하자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꿔버린 나에게 상당히 놀란 눈치다. 그럼에도 그런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 자존심 상한지 일부러 쳇, 하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혀를 찬다. 그리고 천천히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모양새가 표정을 굳히면서도 그대로 일으켜줄 모양이다.
천천히 커다란 남자의 손이 내밀어졌다. 솥뚜껑 같은 모양의 나보다 훨씬 더 큰손이 어른의 손이라는 걸 실감나게 해준다. 두 손을 내밀자 덩달아 다른 손까지 내미는 남자의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우습다.
히죽, 하고 웃자 "겉은 날 닮았어도 속은 영락없이 그 여자를 닮았구나." 하고 남자가 투덜거렸다.
약간 화가 난 듯한 남자가 단숨에 나를 일으켜 세워버리는 바람에 머리가 핑 하고 돌 정도로 빈혈기가 일었다. 울었던 탓인지 손을 놓자마자 남자 쪽으로 기대듯 쓰러지며 민망한 자세로 남자의 가슴에 폭 안겨지고 말았다. 남자가 얼떨결에 나를 품에 안아들며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린다.
다행이 남자 둘이 안겨서 뒤로 넘어지는 볼썽사나운 자세는 면했지만, 지금 이 자세도 과히 남에게 보일만한 자세는 아니었다.
왠지 민망해져서 몸을 확 하고 떼어낸 게 화근이었는지, 몸이 뒤쪽으로 기우뚱하고 기울었다. 반동으로 넘어가려는 몸을 남자의 두 팔이 덮쳐오듯 내 허리를 안아 자신에게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덩달아 그를 붙들기 위해 내밀어진 손이 얼결에 그의 팔에 매달리는 형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우재혁이 들어 닥친 것이다.
재혁아,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기세 좋게 쿵쾅거리며 다가온 우재혁이 거센 힘으로, 내 허리를 두르고 있던 남자의 팔을 떼어냈다.
얼결에 남자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곧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내 팔을 우악스런 손으로 붙잡더니 휙- 하는 거친 바람이 불 정도로 기운차게 나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멋대로 끌려가 또 멋대로 우재혁의 가슴에 파묻히듯 폭 안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숨이 막혀올 정도로 내 허리와 어깨를 두 팔로 힘차게 끌어안아 왔다.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얼떨떨하고 있는 사이, 갑작스레 우재혁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뭔가 항의를 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자, 남자의 우악스런 손이 뒷덜미를 짓이기듯 꽉 하고 눌러온다. 덕분에 다시 우재혁의 단단한 가슴에 이마가 짓눌리며 얼굴이 파묻히고 말았다.
설마, 설마, 하고 속으로 절규하듯 소리쳤다. 저 남자가 있는데, 설마 여기서 일을 벌이겠어? 하고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 보지만 목덜미에 닿아있는 입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키스마크라도 새기려는 듯 과감히 덮쳐오기 시작했다.
" ......!!! "
새어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열심히 도리질을 하고, 주먹으로 우재혁의 등을 후려치고 발길질을 해보아도, 속수무책이었다. 기어코 목덜미에 이를 세우더니 알싸한 아픔과 함께 바알간 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우재혁의 입술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더 세게 나를 꽈악 끌어안는다.
마치 누군가에게 얘는 내 거니 건들지마, 하고 과시를 하는 행위 같다. 그것이 우재혁이 아니고 그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를 쳐주겠지만 현실은 동화처럼 달콤하지 않다.
나를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는 우재혁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질투에 미친, 그래서 남에게 빼앗길까 봐 보란듯이 키스마크를 새겨 넣고 자기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그저 나를 감금한 남자일 뿐이다.
그런 남자가...설마....
" 석영이는 내 거야. "
설마!!!!!
우재혁의 말에 나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다기 보다는 뭔가 굉장히 엇나간 기분이 들었다.
넘어지려는 나를 부축해 준 것은 저 남자였고, 저 남자는 내 아버지이자 우재혁의 아버지이며, 그 사실을 우재혁 또한 내가 알기 훨씬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우재혁이 만에 하나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세운다 쳐서, 남자가 나를 껴안고 있다고 오해한 우재혁이 질투해 버린 거라고,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남자 앞에서 태연히 행하고 내 거다 운운 한 거라면...그거야말로 내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것일 거다.
무엇보다 나에게 게이라는 사실을 들킨 것만으로 벌벌 떨던 우재혁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프라이드 강한 남자가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면서 까지 숨기고 싶었던 진실일 텐데, 이렇게 쉽게도 까발리지는 않겠지.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목에 뭔가 걸린 듯 석연치 않은 기운이 등줄기를 가르고 지나간다. 기껏 잘도 숨겨왔고, 또 평생 숨기고 싶은 것 치고 지금의 우재혁은 마치 나사 하나둘쯤 빠진 것처럼 너무도 쉽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고 있었다.
그것은 엄연한 커밍아웃이었다.
우재혁은 당당하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비록 「난 게이다」가 아닌 「석영이는 내 거다」란 추상적인 개념의 발언을 했다지만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것을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었다. 먼저 이유조차 묻지 않고 알겠다는 듯이 아직까지 침묵하는 것으로 보아 남자는 우재혁의 말을 알아듣고도 남아,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 나의 약점을 알고 싶어 했잖습니까. "
하고 여전히 내 허리와 어깨에 팔을 감은 채로 우재혁이 말했다.
이때만큼 그의 가슴에 파묻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적이 없었다.
솔직히 우재혁에게 안겨있는 모양새가 과히 좋아 보이진 않아 조금 민망함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저 남자와 마주보고 있는 것보다 이러는 쪽이 100만 배는 더 나은 거라고 애써 자신을 타일렀다.
" 이렇게 알게 되셨으니 좀 기쁜 표정을 지어보시죠. "
" 약점이란 게...석영이를 말하는 거냐? 성 정체성을 말하는 거냐? "
"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
" 알아서라...그렇다면 5년 전 내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던 이유도 내 마음대로 판단해도 되는 거겠지? "
" ....... "
" 난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는 효심 가득한 아들인 줄만 알았지. 처음부터 흑심이 있는 줄도 생각도 못했다. 그런 날 5년이나 속이다니...제법이야. "
" 과찬이십니다. 어차피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전 아버지의 약점을 알고도 모른 척 해드렸습니다. "
" 그래서 나도 모른 척 해달라...그런 소리냐? "
" 어차피 서로의 약점을 쥐고 하는 도박 아니었습니까? 피차 손해보는 짓은 마시죠. 아버지도 나도 둘 중 하나를 버리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사이 아닙니까. 무엇보다 우리 두 사람은 정말 피를 나눈 부자처럼 완전히 닮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5년 전에 내린 판단처럼 아버지가 옳은 쪽이 아닌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
" ....... "
" 아닌가요, 아.버.지? "
" ...훗, 서로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말자 이거냐? "
" 아버지와 전, 이미 5년 전에 같은 배를 탔으니까요. "
뭔가 굉장한 말들이 오고 가는 것 같은데, 과연 이것이 지구인의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우리 두 남자의 아킬레스건이란 말이지. "
우재혁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남자가 이윽고 내뱉은 마치 혼잣말 같은 말은 완전히 의미불명이라, 지금의 나는 마치 두 외계인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중얼거림이었는데 남자의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우재혁의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남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적절한 표현이시네요, 하고 더욱 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우재혁이 내뱉었다.
" 우둔한 우두머리보다 악랄한 우두머리 밑에 있는 백성이 더 살기는 편한 법이지. 날 이용해 먹은 건 괘씸하지만 인정해 줄 건 해줘야 겠지. 제법이야. 이제야 조금은 회사를 물려 줄 맛이 나는 군. "
하고 남자가 어쩐지 칭찬같이 않은 말을 했는데도 우재혁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목안 쪽으로 낮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나는 한 동안 멍 해 있었다. 아마 우재혁이 내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새긴 순간부터 난 패닉상태를 일으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재혁은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어떡하든 남자를 설득하긴 한 것 같았다. 우재혁의 감사합니다, 를 끝으로 더 이상의 반박도 없이 남자가 조용히 밖으로 나간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남자를 잡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남자의 진심을 조금 엿보았다는 것만으로 그를 쉽게 받아들일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어쨌든 남자가 어머니와 나를 버린 것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사실이었고, 15년이란 세월 속에 가슴 깊이 박혀있던 가시는 여간해선 뽑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남자와 나 사이엔 그 동안 비어버린 공간을 매꿀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고 서로를 충분히 알고 이해할 만한 대화가 필요했다. 용서는 그 나중 문제였다.
나는 조용히 우재혁의 팔을 떼어냈다.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가서 꽤나 기분이 좋은 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돌아서 바라본 우재혁은 아까의 즐거웠던 웃음이 마치 거짓말처럼 왠지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심술 난 어린아이의 뚱한 표정이라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 뭐야, 아버지를 용서하기라도 한 거야? "
" 뭔 소리야? "
우재혁의 퉁명스런 말투에 덩달아 딱딱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우재혁은 아까의 화났던 표정이 무색하리 만치 나의 강압적인 태도에 조금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 아니, 난 두 사람이 너무 다정하게 껴안고 있길래.... "
" 참, 그렇지. 대체 아까 그게 무슨 짓이야? 그 남자 앞에서 그렇게 날 물 먹이고 싶었어?! "
우재혁의 말을 얼른 잘라내며 나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옴짝달싹 못하게 밀어붙어서 눈을 부아리며 잔뜩 쏘아대며 말해주자, 우재혁은 그게 아니고...라면서 말 길을 흐렸다.
남자의 앞에선 그리도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게 하고 싶은 말이란 말은 다 쏟아내던 모습이 어쩐지 지금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우재혁은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확실히 꼬리를 내린 패잔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생경스러우면서도 새삼 깨달아버린다. 저것이 원래의 우재혁의 모습이었다는 걸. 게이라는 걸 들켜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짜 우재혁이었다는 걸.
" 5년 전부터 날 알고 있었어? "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러자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감춰보려는 듯 애써 얼굴에 미소를 그려 넣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어색하다. 천상 거짓말은 못 할 남자인 게 분명하다.
" 그럼 그때부터 날 지켜봤다는 거네? "
짓꿎게 물으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당황한 빛을 감추려는 듯 어지럽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 이 상황을 모면할 말을 찾고 있는 듯 얼굴에 복잡미묘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문득 우재혁의 홍시처럼 빨갛게 잘 익은 두 뺨을 보며, 스리슬쩍 숱이 많은 속눈썹 속에 감추어 버리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유난히 붉고 유난히 얇은 입술을 초조한 듯 혀로 쓰윽 핥아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유쾌한 상상을 해보았다.
드라마나 영화의 엔딩에 단골처럼 자주 등장하는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일런지 모르지만, 주인공이 나와 우재혁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더 기분 좋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어쩌면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유치한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온다. 우재혁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남이 들으면 분명 비웃을만한 상상을 하며, 그래도 싫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것에 조금 놀라워하면서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러면 우재혁과 나와의 이중생활은 해피엔딩인 건가?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로 끄집어 내 본다. 그가 놀랄 것을 예상하면서.
" 그거 아냐? 너 그러고 있으니까, 마치 5년 전부터 날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들켜버린 그런 표정이야. "
역시 예상대로 놀라는 표정이 가히 압권이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남자답게 표정도 솔직하다. 꽤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 그깟 농담에 정색하기는...그때부터 알아봤지만 농담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라니까. "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 해주자, 놀라 벌어진 그의 입이 천천히 일자로 다물어 지며 서서히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만으론 전혀 그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그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단정하고 곧은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만, 눈으로 보기에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생경하게 변해버린 그의 표정에 괜히 긴장해 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 그때...기억 나? 그 게이바에서 처음 만난 날.... "
하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보지만, 여전히 표정에 변화라곤 없는 그에게 이미 당황하기 시작한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이젠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사, 사실 그거 농담이었거든. 짓꿎은 장난 같은 거...네가 하도 당황하길래 장난삼아 말해 본 건데...나 진짜 네가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갈 줄은 몰랐지 뭐냐.... "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처럼 지껄이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다.
" 너 조금 재수 없는 타입이잖냐. 그래서 좀 골려줄까 하고...그랬던 건데...솔직히 그거 시켜놓고 나 무지 기분 더러웠다. 내 자신이 역겨웠다고나 할까.... "
" ....... "
" 읏, 그, 그치만 너만 당했다곤 생각하지마. 널 놀려먹은 덕분에 그 비를 다 맞고 그 다음 날부터 3일 내내 감기몸살로 앓아 누워서 꼼짝도 못했으니까...감기 약 좀 먹을까 하고 사러갔다 왔더니 네 놈한테 잡혀 쥐어터지질 않나...아휴, 하마터면 진짜 송장 치를뻔 했지 뭐냐. 이 몸이 워낙 건강체질이라 다행이 네가 살인자가 되는 것만은 면했......으헛!!! "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뻗어온 우재혁의 커다란 손이 낚아채듯 내 팔목을 잡아 획- 하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듣기에도 민망한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얼떨결에 끌려가서 남자의 품에 폭 안겨지고 말았다. 너무 세게 안아서 숨이 탁 하고 막혔다. 주먹으로 등을 탕탕 내리치자 그제야 숨통이 트일 정도로만 팔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너무 놀려서 화가 난 걸까, 하고 생각하며 곧 뭔가 제재를 가할 줄 알았던 남자는 그저 가만히 날 껴안고만 있다. 이건 또 다른 형태의 공격패턴인가, 하고 생각하자 일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이젠 남자의 행동이 너무 예측불허라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그를 이해하기엔 내 머리가 너무 딸리는 건가?
가만히 있자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냄새라도 맡는지 코끝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떼어내려는 요량은 아니었지만 등줄기가 짜릿해지는 느낌에 살짝 몸을 비틀었더니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나간 남자의 숨결이 이젠 귓가에 닿아있다. 오싹해지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더니, 짖꿋은 웃음이 되돌아온다.
화가 난 게 아닌가,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노라니 유혹하듯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나지막이 '하자' 하고 속삭인다. 의견을 묻기 전에 먼저 덮쳐오던 남자였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대답을 바랐던 건지 '응?' 하고 재촉해 온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일을 벌리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생각난 김에 '밥은?' 하고 물었지만 그가 밥 생각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물었다. 그러자 '하고 싶어' 하고 살짝 귓불을 깨물며 은근하게 속삭여 온다.
나는 달리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빙 돌려서 소파에선 싫다고 얘기했다. 나를 안은 채로 거실을 빠져나왔지만, 침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방 안 한복판에서 발가벗겨 졌다. 그리고 안달하며 조르는 듯한 키스를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부풀어 오른 우재혁의 아랫도리가 내 허벅지에 닿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재혁은 서두르지 않고 어쩐지 부서질 것 같은 키스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애가 탈 정도로 느릿하게 해 주었다.
서로 바짝 밀착된 몸이 조금이라도 떨어질까 두려운 어린 아이처럼 꽉 달라붙어서 조금도 틈을 주지 않는다.
키스를 하는 와 중에도 우재혁의 손끝은 나의 전신을 소중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 이 곳에 나를 끌고 와서 했던 짓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사죄라도 하려는 듯, 그의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절대 사과 따위는 하지 않는 우재혁만의 어설픈 표현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럴듯하게 겉을 포장하지만 사실은 약하기 그지없는 남자, 그럼에도 강한 척 포장하기 위해 저도 모르게 남을 상처 입혀버리는 남자, 상처 입히고 정작 자신이 더 상처 받아버리는 남자, 그리고 사과하지도 못하고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 이것이 내가 이 곳에 와서 겪은 우재혁의 참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우재혁이란 남자는,
가끔 그의 입술에 내가 먼저 키스를 해 주면 울 듯 말 듯한 설명하기 모호한 표정으로 활짝 웃어 보이는 남자다.
재혁아,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한 미소를 날려주는 남자다.
그리고 곧 그게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애써 퉁명스럽게 '이름 자꾸 부르지마, 달아져.' 하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다. 거기에 대고 '그럼 안 부를게.' 라고 말하면 금새 토라진 얼굴로 그 날 하루 동안은 나와 눈도 안 마주쳐 주는, 그런 어린애 같은 남자다.
내가 모른 척하고 재혁아, 하고 불려줘야만 화를 푸는 그런 남자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모습들이, 같이 살게 된지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문득문득 내 눈에 들어오곤 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만 할까. 우재혁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이제껏 사랑해, 는 커녕 좋아해, 따위의 그 비슷한 말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 남자의 애정표현이라...어쩐지 우스운 생각도 든다.
여느 때처럼 섹스가 끝나자 우재혁은 자신이 한 모금 태우고 난 담배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쥐며 그 동안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나는 우재혁에게 던졌다.
내 질문에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귓불까지 빨개진 남자는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결국 「왜 굳이 담배를 한 모금 태우고 내게 전해 주냐」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설마 간접키스 따위를 하기 위해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고 장난삼아 던진 말에 화들짝 놀라는 그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설마...그 보다 더 찐한 키스도 하는 사이에 겨우 그 까짓 걸로...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가 화를 내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 쳇, 네 것은 전부 내 것이나 다름없으니까...담배 따위에게 선수를 뺏길 수는 없잖아! "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고백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뿌연 연기 사이로 덩달아 붉어진 그의 얼굴이 보인다. 어쩐지 심장 한쪽이 간질거리는 야릇한 흥분이 휩쓸고 지나간다.
다 태운 담배를 그에게 건네주고, 다시 그가 한 모금 빨고 난 담배를 건네 받으며 슬쩍 그를 올려다봤더니, 연신 나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활처럼 휘어진 눈매가 근사하다. 부드러운 미소가 매달려 있는 입가도 나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런 남자가 뭔가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는지 연신 히죽거리며 웃고 있다.
" ...왜 웃냐? "
" 너 생각보다 많이 바보 같아서. "
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많이, 라니....
" 뭐얏-? "
" 많이 바보 같아서 다행이다. "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실실 웃으며 하는 대답이 실없기 그지없다. 뭔가 의미가 있는 말인가, 하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역시 알맹이 없는 소리일 뿐이다.
" 씹, 자꾸 욕할래? "
" 너 글 계속 써라. "
" ? "
뜬금 없이...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의 말이 이어진다.
" 세상이 널 못 보는 대신 네 글만이라도 보라고...그래서 네 본명으로 책도 출판해 준거다. "
" ....... "
뭐냐? 그것은 평생 나를 세상에 내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뜻? ...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라고 묻고 싶지만 '응' 하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역시 악마 같은 녀석, 하고 속으로 혀를 차며 공기 중에 회색 빛의 연기를 흘려보냈다. 서서히 퍼져나간 그것은 곧 산산이 흩어져 이내 공기 중에 모습을 감춰 버렸다.
우재혁과의 이중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순간 평생, 이라고 생각해 버린 내 자신에게 흠칫 놀라버리고 만다.
하지만 곧 설마, 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설마, 평생이라니, 말도 안 되지...하고 폐 안 깊숙이 들어찼던 매캐한 연기를 훅, 하고 내뱉으며 생각했다.
슬쩍 눈만 들어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여전히 이상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왜 자꾸 웃어?' 하고 묻자 이번엔 대답대신 가만히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팔베개를 해준다. 뭐야? 하고 인상을 팍 하고 쓰는데도 남자는 웃고만 있다. 그 웃음이 왠지 심장 한켠을 간질거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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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영, 하고 불렀더니 네가 돌아보았다. 며칠 학교에 나오지 않은 동안 아팠는지 그러잖아도 파리한 얼굴에 살이 쪼옥 빠져있었다. 척 보기에도 어딘가 많아 아픈 사람 같아 보였다.
수업이 끝나기도 전이었는데 어딘가를 급하게 가고 있었는지 날 향한 너의 표정이 못마땅함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학교에 나오지 않은 동안 아팠었냐는 질문을 하려다 너의 표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차마 질문이 목구멍으로 넘어오질 않는다.
"뭐야, 할 말 있어?" 하고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너의 얼굴에 적대감과도 같은 불쾌감이 어른거린다. 화가 난 걸까, 하고 나는 마음을 조린다. 누구의 앞에서도 머뭇거린 적이 없는 나인데, 유독 너의 앞에서만은 할 말을 잃고 굳어져 버린다.
"할 말 없으면 간다." 하고 네가 돌아선다. 가버리려 했다. 조금이라도 네 얼굴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얼결에 네 팔을 붙잡아 버리고 말았다.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네가 다시 나를 돌아본다. 그 새까만 동공 속에 오로지 나만이 비추고 있다.
" 엠, 엠티 갈 수 있어? "
오전에 누군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다.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 1박 2일로 가기로 했어, 하고 들었던 게 생각나 얼떨결에 그렇게 말해버렸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너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 주름에 손을 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낸다.
" ...너 과대냐? "
거절도 승낙도 아닌, 질문이 되돌아왔다. 아니, 라는 대답을 차마 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날 내버려두고 넌 그대로 돌아서서 걸어가 버린다.
그것이 너와 내가 처음으로 나누었던 대화였다. 넌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입학식 때 너를 처음 보았다. 같은 과라 할지라도 얼굴조차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성적도, 외모도, 그렇다고 옷차림이나 뒷배경이 그리 특출 난 녀석도 아니었지만, 은근슬쩍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무언가가 너에게는 있었다. 그런 너에게 나는 처음부터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생김새가 빼어나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평범한 게 분명한데도 왠지 말을 걸어보고 싶고 슬쩍 건들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게 했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 문득 신경이 쓰여 돌아보면 너는 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예상했듯이 넌 내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예상했는데도 나는 상처받아 버렸다.
너와 처음 말을 나누었던 그 날, 날 두고 걸어가 버리는 네 뒷모습을 나는 눈으로 좇고 있었다. 뒷모습이라도 새겨두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 네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 우재혁이랑 친하냐?" 하는 음성이 내게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말하면서 자연스레 네 어깨에 팔을 두르는 그였다.
그 모습을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넌 모를 것이다. 그 손을 잘라내 버리고 싶었던 마음과 한편으로 그런 그가 얼마나 부러웠는지를.
그리고 그의 질문에 "그게 누구냐?" 하고 되묻는 넌 그 날 내가 얼마나 지독한 상처를 입었는지도 모르겠지. 아마 평생 모르겠지.
학교에서 보지 못하는 널 다른 곳에서라도 보기 위해 찾아간 곳이 그 게이바였다. 그래서 놀랐었다. 그 곳에서 너와 마주쳤을 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네게 놀라고 또 한편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나를 싫어했다는 너의 말에 내 마음이 얼마나 갈가리 찢겼는지를-.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날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는 짖꿋은 말이나 내뱉는 너이지만...그래도 그것이 너이기에 난 기꺼이 네 가랑이 사이로 지나갈 수 있었다.
세상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너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지고 싶었다. 우재혁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십 년 후에, 혹은 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떠올려도 지워지지 않을 그런 존재로 영원히 너에게 기억되고 싶어서였다. 단지 그때의 바람은 그것뿐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학교에 내가 게이바에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니, 소문을 퍼뜨린 너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고 너를 감금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난 언제까지고 이 마음을 꽁꽁 숨긴 채 그저 네 곁을 빙빙 맴돌며 살아가고 있었겠지.
하고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너에게 조용히 고백을 했다.
너는 또 듣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대답해 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치 연인사이처럼 소리내어 네 이름을 불러본다.
" 석영아. "
그리고 마치 연인사이처럼, 몇 번째인지 모를 고백을 너에게 했다.
" 사랑해. "
이것이 나의 이중생활이다.
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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